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91화 (591/653)

591화 괴물(2)(수정)

어느 날 깊은 밤, 아서 콜리 잉글랜드 인민무력부장은 모처럼 샬럿 러드를 만났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죠?”

최고 위원회는 거듭된 고려 특작대의 참수작전으로 런던 내의 여러 방공호에 흩어져 있었다. 적이 자국 수도 한복판에서 날뛰는데도 전혀 대응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겁에 질려 피하는 꼴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몇 명이 실종되거나 사살되기까지 했으니 이젠 다른 위원들의 신변도 보장할 수 없었다.

위원회의 실세이자 사실상 위원장 대리인 샬럿 러드도 방공호에 있었다. 병사들이 엄중하게 방공호를 지키고 있었다.

아서 콜리는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그도 위원회 소속이었고, 군사에 관해선 사실상 총책임자였기도 했으니까. 이 또한 그의 능력을 높이 산 네드 러드의 인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서 콜리는 네드 러드를 배신했다. 여러모로.

“설마… 다른 목적 때문에 날 찾아온 것은 아니겠죠? 우리 저번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날 밤의 내 행동은 실수였어요.”

“아닙니다.”

아서 콜리가 부정했다. 그날 밤을 후회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 당장은 다른 말을 전하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아서 콜리는 한숨을 내쉬며 샬럿을 바라보았다. 그를 잘 아는 장교들이나 병사들이 지금 그의 모습을 본다면 참으로 놀랄 것이다. 그는 샬럿을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평소 아서는 굉장히 무뚝뚝하고 엄격한 사내였다.

병사들에게 다정할 때도 있었지만, 분명히 사랑받는 상관은 아니었다. 사실 유능한 장군이라 함은, 부하들을 가차 없이 전쟁터로 내모는 냉혹함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다만 사적으로는 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장군은 겉보기와 달리 모범적이진 않았다. 그는 여러 여인과 관계를 가졌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는 부인과 문제가 있었다.

아내인 캐슬린 콜리는 에이레 명문가의 영애였기에 아서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할 리가 만무했다. 아서 콜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싸웠으니 처가가 그 짓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아내와의 사이도 멀어졌다.

캐슬린은 처음엔 친정보다는 남편을 선택했었다. 남편과 공화국의 사상을 어찌어찌 이해해 보려고도 했다.

다만 그녀마저도 에이레 침공 이후에는 남편을 보지도 않았다. 이념을 이유로 얼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이웃을 가차 없이 학살하는 잉글랜드 인민공화국의 광기를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서 콜리는 이혼하진 않았지만, 아내와 거의 별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위원회에서 자주 접하는 정치국장 동지에게 끌린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샬럿 러드는 누구보다 공화국의 이념에 충실했으며, 누구보다 혁명의 기수를 높게 치켜든 ‘공산주의의 성녀’였다. 그런 반유물론적이고 반동적인 표현을 붙일 순 없었더라도.

반면 샬럿 러드는 아서 콜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여전히 네드 러드였다.

공화국과 인민의 마음이 표상화된 것 같은 존재, 잉글랜드 공산주의의 모세.

어떠한 남자도 남편을 완벽히 대체할 순 없었다. 심지어 샬럿이 그에게 ‘배신’당한 지금도.

다른 사람이 있다면 국제공산주의의 대부인 바뵈프 정도일까.

하지만 바뵈프는 너무 멀리 있는 님이었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많이 교류한 적도 없었고. 사상에는 지극히 동조하지만 사랑한 적은 없었다.

아서 콜리도 자신이 네드 러드를 대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그 이상을 넘보진 않았다.

아무리 그가 떠오르는 잉글랜드의 국민적 영웅이라고 하나, 아직 그는 네드 러드의 명성을 이길 수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진 빚도 있었으니, 오히려 간통에 대해 속죄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저 그는 그동안 샬럿과 잉글랜드의 충실한 칼로 만족했다.

하지만 그런 아서 콜리조차 이제는 현실이 버거웠다. 칼날은 무뎌졌고 이제 잘 들지도 않았다. 당근과 감자 써는 것도 버거울지 몰랐다.

그는 흐트러진 채로 넥타이를 풀었다.

그런 뒤, 익숙하게 찻장을 뒤져 브랜디 하나를 꺼내 따랐다. 샬럿도 별말 없이 술잔을 집어 들었다.

“우린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패배했습니다.”

명장의 입에서 그런 패배주의적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샬럿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아는 아서 콜리는 이런 말을 할 사내가 아니었다.

패배주의는 공산주의의 적이었다. 당원들은 항상 열성적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반동이나 사보타주로 낙인찍혔다. 그것을 잘 알 텐데, 샬럿이 소리쳤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주눅 들지 않고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리가 신념을 가진 채 싸우면 목표한 바를 이룰 거라고!”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던가, 아서 콜리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지금 아서 콜리는 현실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아직 서른일곱의 창창한 나이였지만, 근래의 스트레스로 인해 그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한 척을 침몰시키면 열 척이 옵니다.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이 옵니다. 백 개의 군수품을 공격해 박살 내면, 천 개의 군수품이 옵니다.”

심지어 이제는 전과마저도 일방적이었다. 그건 샬럿도 알고 있을 것이니 굳이 보고하진 않았다.

“우리는 지금 고려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이레와 싸우고 있지요.”

고려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전선에 병력을 밀어 넣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방되고 있는 스코틀랜드군과 에이레군, 네덜란드와 프랑스군 일부까지로 잉글랜드는 이미 한계였다.

“이 전쟁은 불가해함과의 싸움입니다. 적들은 우리의 상식 너머에 있습니다. 인민의 의지조차 그것을 상대하지 못합니다.”

싸우고 이겨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피로스의 승리라도 승리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예 피로스의 패배가 아니던가.

명장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래, 이번 전쟁은 유난히 이상했다.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여럿 벌어졌다.

지금의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의 총력전이었다.

잉글랜드와 소비에트, 중화제국과 대화는 진작부터 차근차근 전쟁을 준비했었다.

그 작전들은 굉장히 치밀했다. 최고위층의 주도로 국가를 전쟁을 대비한 체제로 만들어놓았으니, 그들이 초반에 엄청난 기세로 유럽과 동아시아를 위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자유국가는 그러지 못했다.

이들 나라에선 국가가 하는 일은 너무나 투명하게 민간에 공개되어 있었다.

그러니 다른 유럽국가들이 딱히 전쟁을 심각하게 준비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다.

고려는 예전에 장교단과 부사관단을 확충하긴 했지만, 그 정도가 전쟁 준비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높아져 가는 국제 긴장도에 대비한 일반적 조치였다고 봐도 될 터.

그러니 아서 콜리는 바뵈프의 책략이 현실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세계를 삼등분해 3극 체제를 구축하는 것. 잉글랜드에게는 굉장히 힘든 과업이 되겠지만, 어찌어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뚜껑을 딴 뒤 나온 결과물은 완전히 달랐다.

고려는 명백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중의 선전포고 전에도, 개성의 공격 전에도.

아니, 개성 공습조차 어쩌면 저들의 장구한 계획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의도적인 약점 노출일지도 몰랐다. 물론 멀쩡한 정신으로 츠루기 공습을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고려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잉글랜드의 모든 통신은 감청당하고 해독당하고 있었다.

지금도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오늘 아침엔 뭘 먹는지, 어디서 변을 보는지도 알 것이었다. 잉글랜드가 개발한 암호와 음어는 만드는 족족 파훼당하고 있었으니까.

중화야 더 구식이라 오히려 덜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잉글랜드도 이번 전쟁을 준비했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선 당연히 전쟁에 관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것이 중요했다. 적당한 무기가 적당히 있다면, 아서 콜리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후발주자들도 항상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애를 쓰며 타수의 기술을 훔치려 시도했다. 자발적 첩자들이 꽤 있었던 덕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

잉글랜드와 소비에트는 유럽의 기술력에 막연히 도태되지 않았으며, 자체적으로 인재를 뽑고 길렀다. 몇 가지 분야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잠수함 기술과 같은 것들은.

후발주자들은 항상 선발주자보다 개발이 쉬웠다. 철새가 무리 지어 나는 모양에서도 선두의 새가 가장 많은 맞바람을 맞는 것처럼, 선구자들 뒤에 있는 추격자들은 훨씬 더 비행하기 쉬웠다. 그저 다른 이가 걸어간 전철을 밟아가면 되었을 뿐이니.

하지만 이번 전쟁은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아서 콜리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유럽 중 기술력이 가장 뛰어난 나라는 도이치였다. 그는 도이치와 잉글랜드의 군사 기술 격차가 거진 십 년은 난다고 파악했다. 하지만 십 년은 극복할 만했다. 전쟁 도중 적의 무기체계를 따라잡고 모방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었으니까.

허나 고려는 그 도이치 군대와도 거의 20년, 30년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전쟁 전의 고려 군대와 선전포고 이후의 고려 군대도 십 년 이상의 도약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기술 차이가 나면, 추격이 불가능했다.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개념이 너무 많았다.

너무나 인위적이었다.

‘한번에 그렇게 기술이 도약한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기술뿐만 아니라 자원도 마찬가지였다.

아대륙자원보호법을 일시 정지한 괴물의 기지개가 펼쳐지자 추축국의 정상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다. 부정, 의심, 그리고 지금 이렇게 절망스러운 모습까지.

추축국은 이토록 현저한 차이가 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전 남려에 상륙까지도 했던 해상 십자군의 추태보다도 더 안일하고 오만했다.

인민의 의지?

애초에 잉글랜드와 소비에트의 인민 의지가 고려 인민의 의지보다 더 드높던가? 그런 물음에도 아서 콜리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11군단과 14군단이 패배했습니다. 아군은 아주 얇게 적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과 같았다. 명장의 마지막 발악이었을 터.

하지만 아서 콜리는 이 기적의 촛불이 언제든지, 당장 내일이라도 꺼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민심까지 돌아서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이젠 웨일즈 전역이 위태롭습니다. 적은 언제든지 런던을 노릴 겁니다.”

보고서로 보고한 것들이니, 샬럿도 알 것이다. 그녀의 손이 두려움에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남편조차 그렇게 허무하게 보냈는데, 자신의 신변이라고 잘 지킬 수 있을까.

국경이 무너짐과 동시에 고려 괴물들이 런던에 떠돌아다녔다. 잉글랜드 군경은 그들을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 샬럿은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서의 생각대로 샬럿도 진작 마음이 꺾인 상태였다.

그녀가 단순히 네드 러드의 아내라는 신분으로 위원회의 핵심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열성당원이라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일개 노동자의 딸이었지만 상당히 영특했다.

샬럿은 남편의 내조를 위해 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잡무를 처리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당 내부의 일과 선전선동 그리고 대외첩보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특유의 꼼꼼함으로, 그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성과를 내기까지 했다.

그중 가장 제일로 꼽히는 것은 첩보였다.

잉글랜드는 유난히 고려와 연관성이 높았다.

이주민들이 특히나 많았다. 다른 모든 나라들과 같이 조국의 불합리함에 지친 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아무리 이민의 문턱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끝없는 인재욕을 갈구하는 고려가 재능 있는 사람의 이민을 막은 적은 건국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식인이나 기술자, 기타 중요한 정보를 소유한 자, 이런 사람들은 외인부대 등을 노려야 하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이민이 쉬웠다.

역대로 존 로크와 아이작 뉴턴, 데이비드 리카르도 등 실로 많은 인재들이 고려로 향했고 학계에 자리를 잡았다.

잉글랜드는 이를 이용했다. 첩보를 위해 아주 장구한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샬럿은 정치국장으로서 독자적인 첩보작전을 실행했다.

샬럿은 최근에 고려로 넘어간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접촉했다. 그 결과 총 네 명이 걸려들었다. 이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이 높았고, 공화국을 지지했었다.

이들은 모두 고려 최고의 대학 중 하나라는 청해대학에 교수로서, 학생으로서 적을 두게 되었다. 샬럿은 이들을 청해대학 4인조라 불렀다.

그 사람들의 노력과 잉글랜드의 은밀한 지원으로, 4인조는 고려의 최상류층 사회에 녹아들었다. 그들은 많은 정보를 잉글랜드에게 전달했다. 잉글랜드는 그것을 이용했고 정보를 수집해 나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무의미한 짓으로 밝혀졌다.

그들이 준 정보는 모두 교묘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여러 중요 자료들은 잉글랜드, 그리고 소비에트의 오판을 유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고려를 과소평가했고, 의미 없는 기술과 정보들에 현혹되었다.

결과적으로 네 명 중 네 명 모두가 변절자로 확인되었다. 이중간첩이 된 셈. 이런 경우의 수를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토록 당과 당의 사상에 충성심 높았던 이들이 고려에 가더니 그렇게 쉽게 전부 변절하다니.

문득 샬럿이 실소했다. 그녀의 남편조차도 변절하는 마당에 생판 남을 믿었던가?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결단코 애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는 중화제국과 별개로 행동해야 했습니다.”

아서 콜리는 뒷말을 삼켰다. 중화 제국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와도 별개의 노선을 걸어야 했다.

샬럿은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이제는 서서히 차가운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 당신도 도망갈 건가요?”

샬럿의 중얼거림에 아서 콜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인민의 영웅이었고, 그렇게 죽기를 원했다. 공화국을 위한 헌신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설령 공화국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운명이라도.

“생존하십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면 아서 콜리는 샬럿이 살아남길 원했다. 소비에트로 도망가거나 고려에 투항하는 한이 있더라도.

바다가 막힌 지금 소련으로 도망이 가능한지도, 설령 투항한다 하여 살 수는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해야 기회라도 잡아볼 수 있는 법이다. 기어코 소비에트를 꽃피운 껑땅처럼.

아무리 전범이라도, 전향한 네드 러드의 아내다. 고려가 관대한 처분을 내릴 수도 있었다. 아서 콜리는 다른 최고 위원들이 그녀의 죄까지 나누어 받길 원했다.

“중화의 속담엔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다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려마저도 언젠가 저번 경제위기처럼 필연적으로 휘청거릴 때가 있을 것이고, 씨앗이 있다면 사상은 다시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그날을 위해서 우리의 옛 스승들이 그랬듯 살아남아 유지를 계속 전달하는 것이 옳습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요.”

모든 나라와 모든 사회는 부패와 불합리가 누적되어 갔고, 그 모순으로 인해 허물어졌다. 대침체 때 고려도 그럴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당대의 혁명가 모두가 그렇게 중얼거렸더라도 결국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서는 굳이 그 사실은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샬럿은 침묵을 지켰다.

아서는 다른 말을 하진 않은 채, 회동을 끝내고 군 내의 집무실로 돌아갔었다.

* * *

그날 새벽, 샬럿은 아서 콜리가 부대에 떨어진 적의 야간폭격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간 공습은 아서 콜리의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샬럿도 그때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렸다. 다른 최고 위원들이 잠수함을 통해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 소비에트 연방의 군항 무르만스크로 도주하는 경로를 짜고 있을 때, 그녀는 탈출 경로를 생각하지 않았다.

“저깄습니다!”

“잡아!”

그리고 그녀는 허무하게 붙잡혔다. 변절자가 그녀의 위치를 제보했다. 사방이 다 변절자들이었다. 물이 차오르는 잉글랜드란 배엔 더 이상 선장에게 충성을 바치며 바가지를 퍼 올릴 선원들이 없었다. 가뜩이나 그 선장이 온갖 폭정과 학정을 했으면 더더욱.

샬럿은 런던의 유서 깊은 정치범 수용소, 런던탑에 잠시 가두어졌다.

다른 최고 위원들도 보였다. 그들은 서로 의사소통하지 못하게 띄엄띄엄 배치되었다. 나머지 잔챙이들이 도주에 성공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최고위원회와 정부 조직의 와해로 잉글랜드는 대화에 이어 두 번째로 추축국에서 이탈했다.

거의 일 년을 버틴 셈이다. 잉글랜드치고는 상당한 분전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말로도 공화국의 멸망을 수식할 순 없었다.

샬럿은 수많은 반바뵈프주의자들의 핏물이 스며든 감방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다.

문득 맞은편 감방의 사람이 말을 걸었다.

“이봐요, 당신!”

이 층은 여성 수감실 구역이었기 때문에 맞은편에 갇힌 사람도 여자였다. 스무 살 남짓. 한창 열정적일 때였다.

“당신, 샬럿 총정치국장 맞죠? 샬럿 러드?”

어조는 날카로울 정도로 뾰족했다.

샬럿은 저 처녀를 알지 못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샬럿은 잉글랜드의 최고위 간부였고 저 여자는 앤, 마리, 뭐가 되었든 아무개다. 샬럿은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려 했다.

반면 저 처녀는 샬럿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잉글랜드 공화국 휘하에서 런던탑은 아무 어중이떠중이나 수감하지 않았다.

주로 정치범들, 그중에서도 중요한 인물들이 왔다. 이곳엔 잡범이 없었다.

“하하, 당신도 여기에 갇히게 되다니. 결국, 그랬어.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고!”

처녀는 박장대소했다. 깔깔대며 자지러지듯 웃었다.

아무래도 샬럿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혹은 샬럿이 저 여자를 이곳에 가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난 내일모레 나갈 거야. 당신이 여기에 날 가두었지만, 이제는 반대로 되었네. 기분이 어때?”

여자는 몹시 신나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타수군 해방자들은 수감자 재심사를 통해 샬럿에 반발하다 수감된 정치범들을 석방할 예정이었다. 반대로 샬럿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어찌 꼴좋지 아니할까.

“위대하신 샬럿 러드 님, 대답이 없네? 그렇다면 잉글랜드의 창녀라 불러줄까?”

샬럿은 그만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어디서 감히 그런 말을! 내가 잉글랜드 인민들을 위해 얼마나 싸워왔는데?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

샬럿이 몸을 바르르 떨며 격노했다. 그녀는 쇠창살을 꽉 쥐고 최대한 맞은편의 처녀에게 그녀의 분노를 잘 전달했다.

문득 샬럿의 눈에 처녀의 어깨에 있는 한 표식이 들어왔다.

잉글랜드 공산당 소속 혁명가들의 상징이었다. 낫과 망치, 톱니바퀴의 조합이다.

지금의 당의 상징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랐다.

저 표식은 혁명가들에겐 필수품과 같았다.

즉 맞은편의 이 여자애도 혁명운동가였다. 그랬으니 지금 이 감옥에 수감된 것일 테고.

그리고 그 사실이 샬럿을 더 분노케 했다.

어린 날의 샬럿을 보는 것과 같았다. 아버지를 막 잃고선 네드 러드와 함께 공산당을 만들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때의 자신을.

“보아하니 너는 왕정 시대를 잘 겪지도 않은 어린애구나. 어디서 감히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분노가 차츰 더 차올랐다.

“오히려 고마워했어야지. 감사했어야지! 너희들의 조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어해 냈어야지!”

그녀는 감옥이 떠나가라 외쳤다. 속에 담긴 응어리들을 모두 해방하듯.

“너희들은 그저 우리가 행한 혁명의 과실을 따 먹기만 한 세대야. 그 무엇도 진정으로 투쟁해본 적 없으면서 그저 불평불만만 내뱉길 원하는 철부지 어린애들!

너. 말해 봐. 혁명의 선배들이, 어른들이 추구한 미래의 이상향을 몰라서 그래? 모두가 평등한 이상향. 우리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토마스 무어, 정여립과 톰마소 캄파넬라가 제시한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했어. 모두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평등한 이상향을!”

샬럿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고마워해야 해. 우리가 인도했던 모든 사상의 발자취. 그것들이 있으니 앞으로 희망도 있을 것이라고.”

샬럿도 아서 콜리의 유언을 받아들였다. 미래를 위해 희생하자. 잉글랜드 공산당이 새로 살아나게. 그러니 샬럿은 마지막 관대함을 이 어린 혁명가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똑바로 정신 차리고 살아. 네 선배들의 희생을 잊어버리지 마.”

하지만 샬럿의 말에도 불구하고 맞은편의 처녀는 오히려 걸쭉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년.”

적나라한 욕설들이 시작되었다. 어찌나 창의적이었는지, 샬럿의 머리가 핑핑 돌 정도였다.

“그래, 당신 말대로 당신네들을 존경했었지. 존경? 존경을 넘어 아예 혁명의 선배들이라고 우상시했지. 모든 동지들이 당의 활동에 열정적이었어. 등에 건초를 지고 불에 뛰어들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정도로.”

한동안 욕설을 내뱉던 처녀가 자신의 어깨에 있는 문신을 지워내고 싶은지 거세게 문질렀다.

“하지만 틀린 생각이었지. 당신은 나에게서 내 모든 것들을 앗아갔어. 내 가족 모두를.”

처녀의 눈은 샬럿 못지않게 이글거렸다.

“위대한 공화국에선 다른 의견은 용납되지 않았어. 당신이 조금씩 그 더러운 발을 위원회에서 확장하고, 바뵈프주의자들이 많아지면서는 더더욱! 당신들이 걸어간 길만이 옳고, 다른 길은 모두 반동이라고 했어. 변절자, 수정주의자! 같은 혁명가들, 같은 동지인데 그저 조금의 의견이 차이가 난다고 잡아 가두었지. 죽이고, 매달고! 대단하신 샬럿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샬럿이 멍하니 처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 오빠는 그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을 뿐이야. 그저 술집에서 오빠의 그 바보같이 순수한 아나키스트 친구들과 열띤 토론을 했을 뿐이야. 하지만 당신네 공안들은 그걸 빌미로 오빠와 오빠 친구들을 모조리 끌고 갔지.

어찌나 잔혹하게 고문했는지 시신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어. 샬럿 러드. 만족해?”

― 캬아악, 퉤

입이 헐었는지 처녀가 걸쭉하게 핏물 섞인 가래침을 뱉었다. 그 침은 복도를 지나 맞은편 감방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복도에서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샬럿은 마치 그 핏물 섞인 가래침이 자신의 얼굴에 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통치하는 시절의 공화국은 관용적인 사상을 용납하지 않았어. 하물며 저 꼴통 왕정들도 토론과 언론의 자유를 말하는 시대인데 우리나라는 아니었어.

이곳에서 당신들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똑같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길 원했지. 모두가 위원회의 말을 받들길 원했지.”

유일하게 달랐던 것은 위원장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위원장은 없었다.

“순수한 척하지 마. 왕정을 무너뜨린 샬럿 러드 씨.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 잉글랜드의 붉은 여왕, 미치광이 여왕! 네가 이제는 왕정 그 자체야. 무너뜨렸다고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샬럿이 자기 신분에 걸맞게 호통을 치며 분노를 쏟아냈다면, 처녀는 모든 몸을 분노에 덜덜 떨며 감정을 내뱉었다.

하지만 호통에 익숙해진 샬럿보다도, 처녀의 덜덜 떨리는 말끝이 더욱 날카롭고 예리했다.

“당신을 봐. 당신에게 순수한 혁명 따위는 이제 없어. 너는 혁명을 이용한 것뿐이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권력자가 되기 위해 대동운동, 공산운동이라는 거창한 이념을 내세운 거야. 그렇게 사람들을 현혹해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가차 없이 버렸지. 당신의 남편까지도. 역겨운 사람.”

처녀는 서늘하게 비웃었다. 더 이상의 욕은 필요가 없었다.

― 거기 조용히 안 하나!

감옥 복도의 계단을 열고 병사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아예 혀를 잘라내 주겠다. 이 빨갱이 새끼들.”

아래층에 있었던 타수군 병사가 올라와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에이레 사람이었나 보다. 그 덕분에 샬럿과 처녀는 입을 다물었다. 처녀는 굳이 수감자 재심사를 놔두고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퍼붓기도 했고.

샬럿도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갈라지고 부르튼 손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었다.

샬럿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 * *

맨체스터의 경관들이 집에 쳐들어왔을 때 샬럿의 아버지는 부상당한 네드 러드와 딸, 아내를 모두 숨기고 혼자 그들을 마주했다.

경관들은 폭동사건의 주동자를 재판까지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샬럿의 아비를 두들겨 팼다.

샬럿과 네드가 돌아올 시점엔, 아버지는 이미 숨이 거의 다해 가고 있었다. 신체에서 멀쩡한 부분이 없었고, 핏물을 왈칵 왈칵 토해내고 있었다.

[샬럿, 내 딸….]

아버지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절명한 아버지의 시신을 앞에 두고 샬럿이 무슨 생각을 했는진 오로지 네드만 알 것이었다.

샬럿은 네드를 절실히 사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워했다. 특히 그가 아버지와 만난 것을.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의미가 있게 만들어야 했다. 뒤로 물러나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네드와 만나기 전에도 그녀는 공산주의자였다. 단지 용기가 없었을 뿐.

그래서 그녀보다 훨씬 더 용기 있는, 운도 따라주는 네드 러드를 통해 아버지의 복수와 그녀의 이상 모두를 잡고자 했다.

혁명의 초기엔, 그녀도 더할 나위 없이 순수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맞은편의 처녀는 재심사를 받은 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샬럿은 그녀가 있었던 감방을 바라보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그 감방에는 샬럿,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 날의 자신이. 그저 우두커니 서서 이곳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재판일이 결정되었다.

잉글랜드가 정리된 모양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한 행동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된 셈이었다.

다시 이곳은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 되겠지.

재판 전날, 마침내 샬럿은 남편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평범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부부는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그녀가 자초한 탓이다.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마음은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네드는 창살을 붙잡고 있는 샬럿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샬럿은 뿌리쳤다. 행동에는 힘이 없었다.

“샬럿.”

간만에 듣는 남편의 목소리에 무언가 말하려던 샬럿은 결국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네드가 옆에 있는 타수군 간수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습니까?”

“음….”

다행스럽게도 오늘 런던탑 감시병은 네덜란드인이었다. 그가 침음성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드가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내의 몰골은 미친 여자와 같았다.

아름다웠던 과거의 모습은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샬럿의 머리는 산발이었고, 손톱은 다 갈라져 핏물이 보였다.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더러웠다.

끔찍했다.

그녀의 겉모습이?

아니었다. 네드 러드는 샬럿이 어떤 모습을 하건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가 이가 다 뽑힌 늙은 할머니가 되었어도 영원히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모습이 끔찍했다. 그는 여전히 윈저성의 병사들이 자신에게 총구를 돌린 것을 기억했다. 그때 느낀 충격과 배신감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드는 먼저 입을 열었다.

“해리와 에이미는… 잘 있어.”

“……그래요. 다행이에요.”

말라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흐느낌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네드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비록 괴물이 되어버렸더라도, 샬럿은 여전히 두 아이의 엄마였다.

“공화국도 살아남을 거야.”

물론 공화국의 미래엔 그와 그녀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

위원장으로서 네드 러드는 무한한 책임감을 느꼈으니 선거에 나가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었다. 사실 이제 정치와 권력에는 학을 떼기도 했고.

두 명의 윌리엄이라면 자신 대신 공화국을 훨씬 더 잘 이끌 사람들이었다.

“전범재판이라도 변호인이 있을 거야. 어쩌면 사형까지는 구형되지 않도록 내가 해볼게. 제발 재판장에 가서 이상한 소리만 하지 말아줘.”

하지만 샬럿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지 말아요. 내가 죽어야 공화국이 살아요. 그들의 분노가 나에게 향하게 두세요. 내가 잘못된 것이지, 우리의 이념이 잘못된 것이 아니니까.”

“당신, 끝까지……!”

네드가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순교자가 되고 싶은 거야? 그것도 늦었어.”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모두가 마녀가 죽었다고 환호할 것이다. 순교자가 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샬럿은 이상한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여왕이 되었으니 마땅히 인민들이 내 목을 치게 해야죠.”

이것 또한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여정일 것이다.

공산주의에는 피가 필요했다. 그녀는 마땅히 자신의 피를 바칠 것이었다. 가치가 없는 피라도 조금은 반면교사로서 도움이 될 것이다.

샬럿의 미소는 마침내 순수해졌다.

네드는 그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순수한 미소만큼은 예전 자신이 반했던 그것과 닮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아내는 이제 과거의 아내가 아니었다. 용기와 희망을 주던 샬럿은 사라졌다.

이념은 미치광이들의 마약이다. 진저리가 났다.

“그거 알아? 당신은 정말 최악의 사람이야.”

샬럿 또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녀가 주저앉은 네드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안해요, 네드. 아이들을 부탁해요.”

* * *

샬럿 러드는 타수의 국가들이 참여한 런던 국제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네드 러드는 아내를 변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의 국선 변호사가 적극적으로 그녀를 변호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저지른 죄가 너무 넓고 깊었다.

“마녀에게 죽음을!”

방청객 누군가 외쳤다. 우습게도 옛날 샬럿이 반동들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 죽이시오, 반동은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말을 했었지. 샬럿은 씁쓸하게 웃었다.

목에 밧줄이 감기고 복면이 씌워지기 전, 샬럿은 하염없이 남편을 바라보았다.

네드 러드 역시 아내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렇게 잉글랜드의 붉은 여왕은 처형되었다.

이제는 사형이 오락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럼에도 샬럿 러드의 교수형은 많은 참관자들이 참석했다.

그중엔 상민도, 상혁도 있었다. 상혁이 아버지의 악취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해치웠나 싶을 때 제대로 봐야지. 안 그러면 살아나거든.”

매사에 꼼꼼한 상민은 확인 사살도 철저히 하는 성격이었다. 상혁조차도 가끔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놀라곤 했다.

“근데 따지고 보면 잉글랜드 공화국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권이 바뀌더라도요.”

상혁이 그렇게 말했다. 아들은 지금도 딱히 대단한 반공주의자는 아니었다. 개성 참극을 본 이후에 반중화주의자가 되었을진 몰라도.

하지만 지금의 대전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적 사람에겐 어떤 이념들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세부 사항을 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저 참전한 모두를 증오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을 뿐.

적과 칼날을 맞대는 군인들 중에서 성격이 가장 온유한 축에 속하는 상혁조차 중화와 빨갱이들을 그냥 싫어했다.

“완전히 다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반면 상민은 담담히 말했다. 그는 러드주의자와 바뵈프주의자들 간의 차이를 알았다. 모렐리주의자나 메이블리주의자와의 차이도 알았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상민은 잉글랜드를 작고 귀여운 붉은 사육동물로 만들 예정이었다.

붉은 씨앗은 자라고 자란다. 그걸 부인할 순 없었다.

다만 그는 통제된 구역에서 잡초들이 자라길 원했다. 괜히 비옥한 그의 정원에서 자라면, 집주인만 귀찮아지지 않던가.

이들이 바라는 낙원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나중까지 살아있는 붉은 국가가 필요했다. 잉글랜드는 실험실이 될 운명이었다.

마치 공격성이 거세된 북한처럼.

물론 이번에는 스코틀랜드에 많은 지원을 해 다시는 남괴가 북침하지 못하게 만들 예정이지만.

침묵을 지키던 상혁이 이번엔 훨씬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중화도 그런 기회를 받을 겁니까?”

아들은 약간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절제된 물음 속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상민이 상혁을 달랬다.

“아니. 그들은 스스로 파멸할 것이다.”

이런 기회조차 없겠지.

공포스러울 정도의 섬뜩함을 담은 상민의 눈동자가 동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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