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영웅들의 부대(2)
상혁은 부하들을 탈출시키고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직승기 조종사는 사망했다. 도끼와 청소기 그리고 자신만 남았다.
셋은 직승기에 폭약을 설치하곤 적들을 유인해 터트렸다. 직승기 기술 유출을 방지하는 겸 적들을 여럿 쓰러뜨린 뒤엔 윈저성 안으로 들어가 항전했다.
하지만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그 와중 테쿰셰가 상혁에게 물었다.
“지금쯤이면 모두 무사히 탈출했겠죠?”
“그래….”
그랬길 빌어야지. 상혁이 성벽에 엄폐한 채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당장 항복해라!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저놈들도 사방에 널린 동료의 시신들에 기가 질렸는지, 그렇게 권했다.
“붙잡으면 고문해서 정보를 뽑아낼 거면서.”
청소기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위원장을 뺏어간 만큼, 혹독한 대우가 예정되어 있었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다 받을 터.
“그럴 바엔 싸우다 깔끔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상혁이 탄을 점검했다.
실탄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상관은 없었다. 육사오탄이 떨어지면 적 총기를 가져다 쓰면 되었다. 대검을 뽑아 싸워도 된다. 방패도 있었고.
하지만 결국 스러지는 것은 그들이 될 것이다.
131 부대원들이 호랑이처럼 싸운다 하나, 호랑이조차도 기력이 다했을 때는 늑대와 승냥이에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아마 뒤로 돌고 있겠지.”
상혁이 흘깃 적들을 바라보았다. 성의 구조는 대충 파악하고 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잉글랜드 땅이었다. 저들이 더 잘 알 터다.
“대장, 그간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이었습니다.”
최후를 직감한 부하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 상황 속에서도 모두가 웃고 있었다. 상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야말로.”
적들이 전진했다.
셋도 단축형 홍강525를 쏘며 대응했다.
상혁의 예상대로 잉글랜드군은 윈저성의 구조를 이용해 다방면으로 침투했다. 상혁과 부하들은 독 안에 든 생쥐처럼 구석으로 몰렸고, 마침내 적의 숨소리를 지근거리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까지 다가왔다.
“죽어!”
테쿰셰가 그의 전투도끼(토마호크)를 꺼내 들어 근접전에 나섰다. 도끼 한 자루를 악귀처럼 휘두르니, 이 석성의 계단은 피로 물들었다. 과연 호출부호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 탕
하지만 그도 허벅지에 총알을 맞고는 휘청였다.
도와줘야 하지만, 청소기도, 상혁도 그럴 수 없었다. 총탄이 요란하게 날아들어 엄폐물을 때렸고, 탄도 이제는 다 떨어졌다.
권총을 집어 든 상혁이 순식간에 한 탄창을 다 비워내며 근거리를 정리했지만 이미 끝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상혁은 불안하지 않았다.
‘이게 내 삶의 끝이구나.’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다만 끝이 다가오니 갑자기 보고 싶은 사람이 여럿 떠올랐다.
개성의 구호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조선인 처자, 전쟁이 끝나면 개성에서 다시 한번 보기로 했었는데.
부모님의 생각도 났다.
그는 불효자였다. 어머니를 뵌 지도 거의 이 년이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런 군인이 있겠느냐마는.
‘아버지도 보고 싶구나.’
아버지는 비교적 최근에 보았지만, 큰 언쟁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때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자신의 생각과 주장은 지금도 바뀌진 않았다.
그 결의 때문에 이렇게 자신이 윈저성에서 최후를 맞게 된 셈이지만.
하지만 그때의 그 기억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것이라 생각하니, 아버지께 조금 더 부드러운 말을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감도 남았다. 부자 관계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총알이 날아들었다. 옆구리와 다리, 어깨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들었다. 강건한 육체를 가진 상혁마저도 바닥에 쓰러졌다.
시야는 흐릿해졌다.
상혁은 그 와중에 더듬거리며 전투주머니 속의 권총 탄창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장전하려 할 때 누군가 그의 손을 밟아 저지했다.
잉글랜드 병사였다.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소총의 총구를 상혁의 얼굴에 대고 겨누었다.
총구에서 불이 번쩍인다면, 그는 죽을 것이다.
― 쾅
그때, 성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났다.
총소리와 폭탄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벽이 터진 것이 뭐 대수일까.
하지만 이런 견고한 성의 벽을 단번에 터트리려면 수류탄 같은 어중간한 폭탄이 아니라 복합폭약을 써야 했다.
그리고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잉글랜드가 터트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폭발음과 동시에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비산하는 돌가루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막탄을 썼는지 특유의 냄새가 났다.
상혁은 자신을 겨눈 잉글랜드 병사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쏠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온몸의 힘이 빠진 상태라 무언가 제대로 된 반항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차릴 수도 없었다.
― 으아악
단지 그가 느낀 것은, 자신을 밟고 서 있던 잉글랜드 병사가 갑자기 힘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
곧이어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스럽게도 테쿰셰의 것도, 청소기의 것도 아니었다.
연기 속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상혁조차도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연기 사이에서 총성이 들리고 섬광이 번쩍였다.
잉글랜드 병사들이 사방으로 미친 듯이 총을 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쏘는 것 같기도 했다. 상혁이 눈먼 총알에 당하지 않게 엄폐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의 발악이 무색하게, 그들은 무참하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초… 총알이 통하지 않아!”
“저 괴물이 우릴 다 죽일 거라고!”
잉글랜드 병사들은 저항 의지가 박살 난 채 혼비백산해 밖으로 나가려 아우성쳤다. 하지만 이곳은 실내였다. 그들은 상혁과 동료들을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이제는 역으로 그들이 궁지로 몰린 상태였다.
대학살이 일어날 동안 상혁은 자신의 위로 쓰러진 잉글랜드 병사의 시신을 힘겹게 치웠다. 대구경 탄환을 맞았는지 머리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핏물이 간헐적으로 상처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웬만한 광경을 다 본 그조차 진저리 칠 정도였다.
상혁은 권총을 챙겨 마저 장전했다.
그는 무언가를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문득 내려다보니 아까 총알을 맞은 다리가 보였다. 운도 좋게 동맥을 피한 모양이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진 않았다. 상혁이 쓴웃음을 짓다가 그제서야 고통이 몰려오는지 이를 깨물며 돌벽에 기대듯 쓰러졌다.
어느새 사방은 조용해져 있었다.
죽어가는 신음 소리만 간간이 들렸을 뿐.
상혁의 맞은편, 엎어져 있던 잉글랜드 병사가 고개만 들어 주변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상혁과 눈이 마주쳤다.
병사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상혁이 재빠르게 장전한 권총으로 그의 미간을 쏘았다. 적은 즉사했지만, 그의 품속에 있던 수류탄이 또르르 힘없이 상혁의 앞에 굴러왔다.
상혁은 반응하지도 못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수류탄을 까다니. 저놈의 순발력도 대단했다. 다리가 정상이었다면 뇌관이 터지기 전에 숨거나 집어서 어딘가로 던졌겠지만, 지금 그의 다리는 사실상 아작이 나 있는 상태였다.
― 저벅 저벅
그 순간, 누군가가 상혁에게 다가왔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아버지!”
그의 얼굴을 바라본 상혁이 비명을 질렀다. 자기의 죽음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자식이 아버지가 자신의 눈앞에서 돌아가시길 원하겠는가?
허나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안전바늘이 뽑힌 수류탄을 가만히 쥐었다.
― 쾅
‘맙소사, 대체….’
주먹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팔의 위팔두갈래근과 어깨의 삼각근이 충격을 흡수하듯 출렁이듯 움직였다. 손아귀는 여전히 견고했다.
상민은 무덤덤하게 바스러진 쇳조각들을 손에서 털어냈다.
경악한 아들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그는 자식의 다리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는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도 가지고 온 작은 주사기는 멀쩡했다. 그는 약을 아들에게 주사했다.
상혁은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을 하실 리가 없었다. 그저 그는 멍한 얼굴로 아버지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좀 자거라. 일어나서 이야기하자.”
엄습하는 고통에 상혁이 기절했다. 다리와 옆구리가 뒤틀리는 고통은 아무리 고려 대장이라고 해도 맨정신으로 감당할 고통이 아니었다.
상민은 기절한 아들의 다리 상처에서 총탄이 빠져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세포들이 놀랄 만큼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자신의 혈액 속에서 추출한 혈청은 유전자적 일치성이 높은 아들의 몸에는 잘 맞는 모양이었다.
다행이구나. 그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상민은 아들의 다른 동료 두 명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둘 모두 살아 있었다. 한 명은 의식도, 육체도 비교적 멀쩡했다.
“오, 주님.”
테쿰셰가 무릎을 꿇었다. 군복의 목에 걸린 쿠쿨칸교의 상징이 반짝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감격의 눈물일까. 사도가 되기 전의 아이들도 대부분 저랬기에 익숙지 않은 광경은 아닐 테다.
“이리 와서 저 아이를 들어라. 여기를 빠져나가야겠다.”
* * *
상혁이 깨어났다.
몸은 상쾌했다. 푹 잔 것마냥 활력이 돋았다.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 타닥 타닥
고즈넉한 전원의 농가에 네 명의 사람이 숨어있었다.
벽난로에 집어넣은 목재가 타는 소리가 편안했다.
“이제 괜찮은 겁니까?”
상혁이 쉰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벽난로긴 하지만 불빛이 새어 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은폐 시에는 등화관제를 철저히 해야 하는데.
정작 아버지는 태연자약하게 쇠꼬챙이로 불을 헤집으며 대답했다.
“저들은 우리가 남쪽으로 내려가리라 생각했겠지. 흔적을 그쪽으로 내 놓았으니. 하지만 여긴 왓퍼드다. 좀 북쪽이야. 여기로 오진 않을 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상혁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흉터가 있었지만 상처는 그새 아물었다.
다만 총탄에 찢어진 바지, 바지에 묻은 피가 그 흔적을 나타내었다.
아까까지의 일이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상혁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많은 것을 보고 자랐다.
자신이 어릴 적에 보았던, 겪었던 행동들이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들이라는 것도 커가면서 인지했다.
다만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식이 많아질수록, 아버지 또한 다른 아버지들과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정을 그리 많이 주지 않으려는 태도,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 주변에서 아버지를 숭배하는 무리들. 그 모든 것들이 일반적인 가정과는 달랐다.
아버지는 너무나 위대했지만, 너무나 고독했다. 지금껏 살아있는 제국의 태조, 고려 대륙의 문명 창조자, 두 종교, 아니 세 종교의 예언자이자 선지자, 그리고 현신인.
이젠 그의 아들조차도 아버지의 신성성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다리와 아버지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대체 어떤 수를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는 것조차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상혁은 두렵고 외로웠다.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가 이런 기분일까.
현신인의 아들이면서도 도이치 왕가의 핏줄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허나 그는 결국 영웅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나르키소스적 자기애는 아니었다. 자신이 힘이 있으니, 그것을 토대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철부지 꼬마 시절부터 있었던 마음이 지금까지 올곧았다.
반대로 그는 아버지께 실망했었다. 지금까지 방관했으며, 앞으로도 방관하실 것 같아서 그랬다. 태만한 올림푸스의 신들처럼, 그저 뒤에서 팔짱이나 끼고 인간의 운명을 비웃으며 신선놀음을 하시는 것 같았다. 자신보다 훨씬,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신 아버지는 더욱 많은 것을 하실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수십만이 죽어 나가고 있다. 앞으로 수천만, 어쩌면 수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을지도 몰랐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그저 방관만 하는 까닭을 몰랐다.
정녕 당신께서 신이라는 존재면, 우리는 악신, 혹은 태만한 신의 종복들인가? 나는 그런 신의 자식인가? 상혁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의 감정은 자신도 심했었다. 상혁은 개성에서 뵌 아버지에게 자신의 감정을 퍼붓고 떠났다. 그리고는 밤에 잠이 들기 전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겨우 수십 년 살아온 아들내미가 어찌 수백 년 살아온 아버지의 생각을 전부 알까.
아버지는 자신 따위의 고민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이다.
“아니야, 네가 맞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 상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아버지가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불쾌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분 좋을 정도의 개운함이었다.
“방관했다. 유도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미리 근심하였기에. 실로 쓸모없는 짓이로다.”
그답지도 않았다. 어떠한 존재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미래를 보여준다? 그 미치광이의 놀음에 자신이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상민은 어느 순간부터 비겁한 흑막마냥 모든 것을 뒷방에 눌러앉아 해결하려는 전형적인 악당이 되어버린 자신을 반성했다.
자신이 아는 상민은 그런 자가 아니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 계속 전진해 나갔을 뿐.
더군다나 이제는 확신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사회는 충분히 성숙했다.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도. 그는 이미 자신의 꿈속에서 더 이상 그 끔찍한 광경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행동할 때였다. 그는 무신이었고 군인이었다. 원래의 본모습으로 돌아가야 했다.
“몸은 괜찮으냐?”
“네.”
자식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육신을 어떻게 치료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받아들였을 뿐.
상민이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조금만 더 쉬고 일어나자. 할 일이 많다.”
“무슨 일요?”
“잉글랜드를 무너뜨려야지.”
“우리 둘이요?”
“그래. 무섭니? 빠질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원한다면 네 어미한테 돌아가도 좋아.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당장 턱에 주먹을 날렸을 말이지만, 아버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럴 자격이 있었다.
“…하.”
부자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만약 이 부자 사이에 앙금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지금 이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이다.
하늘에서 자식을 구하려 떨어진 부모를 본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반대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심정은 또 어떨 것이고.
그들은 가족이었다. 아버지와의 유대는 항상 존재했었다. 상혁은 그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버지가 여전히 사랑이라는 인간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족했다. 그 자그마한 사실이 얼마나 무한한 안도감을 주는지.
“그런데 아버지.”
화기애애한 상황 속, 아들이 아빠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안 그러실 거죠?”
“뭐가 말이냐.”
상민이 불안감을 느끼며 대꾸했다. 이 특유의 서늘한 감각은 매번 정확했다.
“엄마랑 할머니한테 다 들었어요. 매번 이러실 때마다 어디서 이상한 인연을 만들어 내신다고. 이번에는 안 그러실 거죠? 자식 된 입장에선 적어도 어머니께서 살아계신 동안에는 새어머니를 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상민이 변명하듯 외치려 했다. 억울함에 성량이 커졌는지 상혁이 턱짓으로 자고 있는 동료들을 가리켰다. 상민이 목소리를 낮추어 아들에게 말했다.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너희 엄마는 내가 아니라 네 할머… 하, 아니다. 아니야. 실언을 했구나.”
상민이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을 달랬다.
“그래, 알았다. 약속하마.”
그제서야 아들의 얼굴이 펴지는 것을 바라보던 상민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