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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85화 (585/653)

585화 서부전선 이상있다.

중화가 저지른 3월 25일의 공습 이후.

소비에트 연방도 그 막대한 군을 준비해 움직였다.

바뵈프의 소비에트 연방은 습진균보다도 더욱더 많은 침략 준비를 해놓았던 국가였다.

습진균이 국가개발8개년 계획으로 허겁지겁 산업기반을 마련했던 것과 달리, 소비에트는 그래도 중화보다는 훨씬 더 뛰어난 산업적 역량을 축적한 상태였다. 중공업은 더더욱 그랬다.

그런 산업역량을 밑바탕으로 잉글랜드의 기술을 제휴받으니, 소비에트가 가진 자신감의 원천은 그리 허황되진 않았다. 애시당초 그래도 제정 러시아 시절 세계를 주름잡아봤던 기억이 있는데, 중화라는 근본 없는 나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지 모른다.

더군다나 아무리 고려가 소비에트 연방을 싫어한다고 해도 제정 러시아보다는 소비에트 연방이 체제적으로는 훨씬 더 정교하고 합리적이었다.

대동주의의 아류에 불과했지만 공산주의는 그래도 중화주의와는 달리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현혹될 만한 여지가 있는 사상이었다.

노동자들은 고려를 좋아했다. 하지만 어쭙잖게 아는 인텔리일수록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공허한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지식인들은 오히려 반강제적 개혁 덕에 서서히 살기 좋아지는 서유럽(정확히 하자면 타수 구성국)의 좋은 나라에서 꿈도 희망도 없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향했고, 소련의 지식과 붉은 군대의 능력 축적에 도움을 주곤 했다.

그나마 인적 사항으로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한 중화의 화교, 화인 이용보다는 완전한 남의 나라 사람들을 자의로 움직이는 소련이 훨씬 더 음흉하고 치명적인 방법으로 내부에 총질을 가할 수 있었다.

중화가 완전히 고려와 척을 지고, 2함대에게 치명타를 입혔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소련도 자신들이 빨리 행동해야 큰 이득을 볼 때임을 알아차리고 붉은 군대를 서진시켰다.

5월과 6월, 조선이 신의주에서 힘겹게 중화군을 막아내고 있을 무렵, 소비에트 연방은 구 리보니아, 즉 발트 3국을 모두 집어삼킨 상태였다. 강대국 바로 옆의 약소국이란 항상 그런 운명이었다.

1차대전에서 폴란드를 말아먹은(말아먹을 뻔한) 아우구스트 2세의 사후, 폴란드는 폴란드―도이치 봉신 관계를 해소하고 셰임에 의해 독자적인 왕을 선출했다.

도이치로서는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폴란드도 엄연히 타수의 구성원이었다. 내정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이런 개념은 사실 저 구름 낀 하늘을 노니는 1위를 제외한 열강들을 위한 도덕적 개념이었다.

일어나진 않겠지만, 만약 후계 문제를 걸고넘어져 도이치,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따위로 시끄럽게 군다면 애시당초 전 세계의 모든 왕정은 창양 해씨에 의해 이리저리 주물럭거리는 처지가 될 터였다.

물론 지금도 반쯤 그렇게 되곤 했지만, 그 정도가 더 노골적으로 될 터, 각국 왕들은 그네들의 왕조를 위해서라도 알아서 주제를 파악해야 했다.

허나, 폴란드에 갑자기 명군이 등장해 세상을 뒤바꾸는 개혁을 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일단, 폴란드의 셰임이라는 것이 남아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옛 러시아 점령기에 반쯤 와해된 셰임은, 1차대전이 조약국의 승리로 끝나자 다시 스멀스멀 머리를 들었다.

셰임은 낙후된 동유럽의 귀족회의는 여전히 국민적 여론을 결집하는 의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셰임의 구성원들, 즉 슐라흐타들은 이제 마그나트(대귀족)들이 사라지자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황금의 자유(Złota Wolność)라 불리는 평등성을 추구했지만, 동시에 비슐라흐타, 즉 평민과 상인 등은 철저히 배제했다. 개천 6세기에 들어가는 시점까지도.

심지어 여전히 왕권을 제약했다. 폴란드는 절대군주정조차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귀족주의 선거군주제하에서 레슈친스키 가문의 스타니스와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특출나게 유능하진 않았지만 꽤 열심히 폴란드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긴 했다. 개혁안이 번번이 셰임에 의해 좌절되었긴 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현왕 포니아토프스키 가문의 스타니스와프 2세 또한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했다. 그는 민스크의 스타로스타(주지사)였었기에 증가하는 소비에트의 위협에 맞서 현대적 사관학교를 세우고 예비군 체제를 가다듬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전통적으로 폴란드인과 루스인의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루테니아와의 친교를 위해 애를 썼다.

그는 그가 가장 아끼는 조카를 루테니아의 4왕녀와 결혼시켰다.

루테니아의 올가 차리차의 남편이 해대헌 크림 대공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국혼 한 번에 친루테니아―친고려 외교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었다.

이후 그는 올가 차리차와 논의해 대소비에트 방어선을 구축했다. 많은 재물이 들었지만 타수에서 공식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할 만했었다.

민스크에서 시작되어 키이우를 거쳐 자포리자강으로 내려가는 방어선은, 소련의 공세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구축되었다. 그래야만 할 것이었다.

이후 그는 이 요새선을 빌뉴스나 리가까지 연장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아무래도 발트 3국 수준으로는 이런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일 순 없는 노릇이었지만 안타까운 일이었다.

허나 스타니스와프 2세는 고려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에게 엄청난 미움을 샀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그의 사촌 엘즈비에타 차르토리스키와 결혼했는데 그 사이에서 결격사유가 없는 멀쩡한 자식을 보진 못했다.

게다가 갖은 개혁 시도로 셰임 내 사조직(파밀리아) 거물인 장인 아우구스트 차르토리스키와의 사이도 지극히 나빠진 덕에 결국 이혼하게 되었는데, 이혼 후에는 정치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셰임의 실세인 장인은 87세가 되어 늙어 죽을 때까지 폴란드 왕인 자신의 사위를 지극히 괴롭혔다.

장인이 죽고 비로소 무언가를 해보려 해도, 이미 스타니스와프 2세 또한 늙고 볼품없어진 이후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의 폴란드 침공이 현실화되자 폴란드가 멀쩡할 리가 만무했다.

“아주 조선이랑 폴란드가 쌍으로 난리를 피우는군!”

고려의 정녕당에서 워싱턴의 짜증 섞인 말이 나온 것도 그런 배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의 비유와는 다르게 폴란드는 조선보다도 더 열악했다.

두 나라 모두 눈 뜨고는 못 볼 정치적 갈등이 있긴 했지만, 애초에 조선은 상비군체제와 군체제가 완비된 나라였다. 국내총생산을 비교하기도 좀 많이 미안했다. 중화가 워낙 미친놈들이라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잔인한 전쟁을 치른 까닭에 정신없이 휘둘렸을지는 몰라도, 반대로 정신만 차리면 되었다. 실제로 조선은 외인부대와 개성 주둔군의 도움 정도로 중화의 공세를 종말점으로 몰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유능한 장군참모 나폴레오네의 존재를 차치하고서라도.

반면 폴란드는 이번에도 1차대전과 같이 국토가 박살 나고 있었다.

전쟁 초반, 스타니스와프 2세가 구축한 방어선은 그래도 제 몫을 해냈다.

소비에트 연방은 민스크와 그 아래 방면의 요새선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사실상 평원과 삼림, 늪지가 전부인 이 평야 지대에서 이런 인공적 요새선은 돌파하기 참으로 힘든 구조물이었다.

하지만 소비에트는 리투아니아를 점령하는 즉시, 민스크 방어선을 북쪽으로 우회했다.

이는 리가까지 요새선 연장을 시도했었던 스타니스와프 2세도 충분히 알고 있었던 터라, 그쪽 방면에 군대를 더 증강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 귀족들 특유의 애국심 결여와 보신주의적 성향 덕에 폴란드군은 너무 빠르게 와해되었다. 여전히 폴란드 장교진은 귀족 출신이 대다수였고 이들은 제대로 싸우지조차 못했다. 물론 예전과 달리 투항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제정 러시아였다면 투항했겠지만 소비에트인 이상 귀족들은 전부 처형당할 예정일 테니까.

그럼에도 이 슐라흐타란 놈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급조된 폴란드 민병대조차도 목숨을 걸어가며 싸우는 와중에 폴란드 정규군은 아예 소비에트의 전차 물결에 전의를 상실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간 여러 번 개혁을 방해해왔던 셰임 덕에 여전히 폴란드는 군사기술적으로 낙후된 상태였다.

심지어 전장에서 검기병대―후사르―를 운용하고 있었던 때였으니.

아무리 소비에트의 다주포 다포탑 구식 전차 T25가 세간의 웃음거리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검기병대와 동일선상에 놓을 순 없었다.

“오, 주여. 제발 우리의 희생이 가치 있게 하소서.”

적의 진군을 일 초라도 늦추기 위해 폴란드 기병대가 비알리스토크 전투에서 소비에트의 침략자들에게 뛰어들며 장렬히 산화하는 광경은 실로 애처로우면서도 비극적인 모습이었다.

폴란드의 끔찍한 졸전으로 인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라들이 생겨났다.

루테니아는 당장 키이우가 위협받았다. 소비에트 연방은 민스크를 밀어냈고, 브레스트와 비알리스토크, 르부프를 점령하려 내려갔다. 바르샤바도 위험했다.

모렐리를 도와 소비에트를 창건한 원수 수보로프는 일흔이 넘는 노인이었지만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노인의 전략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시대가 바뀌고 전장의 환경이 바뀌는 상황임에도, 여전히 그는 그 명성대로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뵈프의 장인이자 원수인 미하일 (골레시니체프) 쿠투조프 또한 사위의 신임과 그간의 공적에 걸맞은 대단히 뛰어난 군재를 소유하고 있었다.

두 명장의 지휘하에 서부전선의 초창기, 소비에트는 전쟁을 벌일 때마다 승리했으며 가는 곳마다 붉은색의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이 걸렸다.

마침내 개전 6주 만에 바르샤바가 함락당하면서 폴란드는 사실상 무너졌고 베를린에 임시정부가 꾸려지고야 말았다.

3주 만에 도쿄가 함락당한 대화가 없었다면 실로 끔찍할 정도의 치욕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터였다. 여전히 타수에서는 기록적인 졸전이지만.

소비에트의 선전은 잉글랜드를 크게 고무시켰다.

건강상의 이유로 위원장이 요양에 들어간 이후, 잉글랜드 공산당 최고 위원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게 된 잉글랜드 인민공화국 또한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잉글랜드 통일 전쟁이란 기치를 걸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했다.

스코틀랜드에도 공산주의자 조직이 많았다. 내부분열과 항거할 수 없는 전력 차에 에든버러도 글래스고도 잉글랜드 인민공화국에 점령당했다.

6월이 되자 스코틀랜드 합병투표가 일어났고, 113퍼센트의 압도적인 찬성을 토대로 잉글랜드 공화국은 그레이트브리튼섬에 대한 온전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발등에 불 떨어진 에이레는 리머릭에 남아 끝까지 항거하겠다는 왕을 제외한 후계와 중요 인원들은 전부 누아 에린으로 대피시켰다.

에이레해(아일랜드해)에서는 격렬한 해전이 일어났다. 잉글랜드는 태평양을 넘보던 대화보다도 더 강력한 해군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잠수함의 운용 측면에선 훨씬 더 강했다.

왕정 시절 알비온 연합으로 같이 행동한 경험이 있었기에 에이레의 약점을 잘 알고 있던 잉글랜드는 맨섬에 공습을 걸어 해군전력을 갉아먹은 상태로 전쟁을 시작했다.

에이레 또한 잉글랜드의 약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레이트 브리튼과 에이레 본토와의 크기 차이는 현격했다. 적은 선택지가 많았고, 아군은 선택지가 적었다.

그토록 강력하던 에이레 해군도 치명타를 입기 일쑤였다.

네덜란드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마침내 뜸 들이던 프랑스까지 에이레를 지원하기 시작하자 겨우 에이레는 해군전력을 가다듬고 본토항공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또한 이베리아 인민전선도 크레믈과 함께 움직였다. 잉글랜드보다도 더욱 바뵈프주의적이었던 이베리아 인민전선은 정말로 그들의 이름처럼 이베리아를 모두 적화한다는 야심 찬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

포르투갈이 그 상대였다. 전통적으로 고려와 관계가 껄끄러운 나라였지만 리스보아 지진 이후엔 타수 중에서도 손꼽히는 친고려국가로 거듭난 포르투갈은 대참사를 겪은 뒤 사회제도를 일신하여 카스티야나 아라곤처럼 적화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피치 못하게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베리아 인민전선과 포르투갈 왕국 간의 ‘이베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하지만 문명사회의 비문명사회에 대한 반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북대동양 조약기구의 소속국은 해당 국가의 권역에서 발생하는 회원국 중 하나 이상에 대한 무력공격이 회원국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북대동양조약기구 헌장 제5조는 이미 발동되었다.

고려의 선전포고는 중화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이미 리보니아에 발을 디민 순간부터, 고려는 소련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니 타수 회원국 또한 전면적으로 전쟁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약국에 대한 침략행위에 모든 대응 수단을 행사할 의무가 있었다.

도이치 군대가 움직였다.

빌어먹을 폴스카 놈들! 이번 대전쟁에도 옆 이웃의 땅을 구해주기 위해 전장에 투입된 도이치인들이 욕을 내뱉었다.

그런 욕설을 하는 사람들 중엔 융커 출신 장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어쩐지 셰임의 슐라흐타들과 도이치 융커들이 다소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융커들은 슐라흐타들보다 군사적으로는 훨씬 더 뛰어났고 애국심도 있었지만, 사실 둘 모두 나라 말아먹기에 특화된 봉건 계급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프리드리히 2세 대왕과 테레지아의 치세에 융커 특유의 막장스러움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기에 융커들은 이제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덕분에 프로이센 특유의 군사정예화는 많이 희석된 상황이었지만, 통제 불가능한 군국주의를 일소한 대가치곤 꽤 저렴했다.

개성 사태 이후 상황을 주시하던 도이치는 크라쿠프와 비드고슈치, 단치히로 연결되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소비에트는 방어선 돌파를 위해 전차를 가지고 내려왔지만, 도이치의 기갑군이 그에 맞대응하기 위해 출격했다.

프랑스도 군대를 페르피냥에 집결시키고 피레네산맥을 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프랑스는 이베리아의 상황을 두고 보지 못했다. 바로 밑에 소비에트의 차녀(장녀는 잉글랜드라 여겨졌다)가 생겨난 이상, 옛 프랑스 코뮌의 망령들이 들끓을 것이 분명했다.

뭐니 뭐니 해도 프랑스는 혁명의 땅이었다. 모렐리의 공산사회주의를 배신한 사민주의자 메이블리조차도 프랑스 여론이 지랄 맞게 까다롭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도 우디네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발칸, 즉 일리리아가 위험했다. 바뵈프의 마수는 이곳저곳에 뻗어 있었다. 베오그라드를 기점으로 세르비아 공산당이, 자그레브를 기점으로 크로아티아 공산당이 활개 치고 있었다. 헝가리에도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의 공산주의 운동이 벌어져 흉흉했다.

크로아티아는 다소 무능한 왕이었던 루카 스베토슬라비치 이후 세계 경제 위기에 휘말려 내부 경제가 완전히 박살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공산주의가 활개치기엔 너무 쉬웠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무너진 뒤 조약국에 의해 세워진 세르비아는 혈통적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후손 두 명이 정권 다툼을 벌였다. 이 내전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모든 국민이 왕정이라면 학을 떼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모렐리가 발칸에 공산주의의 씨앗을 뿌렸고, 바뵈프 시절에 이를 수확했다.

바뵈프는 발칸의 공산 세력을 묶어 일리리아 인민공화국, 혹은 헝가리까지 적화에 성공한다면 ‘도나우 연방’이라는 새로운 공산국가를 건설하려 시도했다.

발칸의 복잡한 민족성과 타수 첩보부의 훼방으로 인해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미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전쟁이 시작된 시점엔 마땅한 대안이 없었는지 이곳의 공산 세력들은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야 민족주의적 한계를 넘어 연방의 건설을 위해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이곳의 혼란한 상황은 비교적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알바니아와 보스니아, 크라인 등에 큰 위협이 되었다. 후방의 이탈리아와 불가리아, 그리스 등에게도.

바야흐로 전 세계에서 총성과 포성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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