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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78화 (578/653)

578화 시동

“정말 갈 거야?”

푸른 들판에 깔린 돗자리 위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가 자신의 옆에 누운 소년에게 그렇게 말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그 침묵이 무언의 긍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지금껏 같이 붙어 다닌 세월이 몇 년인가. 같은 동네, 그것도 바로 옆집에서 살아온 두 명의 동갑내기 코흘리개 꼬마들은 이제 상대방을 서로 이성으로 의식하는 나이까지 도달해 있었다.

“고등학교는 어쩌구?”

“다들 휴학하더라. 전시휴학.”

“그런 것도 있었어?”

“없었지. 근데 만들었대. 워낙 애들이 가겠다고 난리라….”

소녀는 상체를 반쯤 일으켜 소년을 바라보았다.

“설마 너도 다른 애들이 가자니까 가는 건 아니지? 걔네들이….”

“안 가면 날 겁쟁이라 놀리겠지.”

“덕철이, 명탁이, 그런 애들이지?”

소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남자들의 사회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소년이 그런 것에 휘둘려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는 것은 또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외면하는 건 겁쟁이일 뿐이라고.’

소녀는 갑자기 울먹거렸다.

“안 가면 안 돼?”

소년은 덥수룩한 머리를 긁었다. 그가 시중의 연설을 듣지 않았으면 모를까, 들었다면 그런 선택지는 사실상 고려할 수가 없었다. 피 끓는 이 기분은 내륙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해소될 것이 아니었다.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는 안전할 것이다. 이 소녀와 가정을 꾸리고는 다른 선조들이 그러했듯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후회할 것 같았다. 진정으로 올바른 일을 하지 못했고, 또한 시대가 요구하는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떨 것 같았다. 남들이 피 흘리며 횃불의 불을 수호할 때 자신은 편안한 침대에서 안락하게 잠을 자는 것은 비겁했다. 아직 어린 나이이건만, 소년은 이 기분을 충분히 짐작했다.

“갔다 올게.”

“…오는 거지?”

“응.”

“나중에 꼭 돌려줘야 해.”

소년은 소녀가 건네준 사진과 비늘용이 새겨진 종교 장신구를 받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소년이 다음 날 아침에 찾아간 병무청 임시지부는 이미 엄청난 수의 청년들로 인산인해가 되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이 산골짜기 고향에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실로 읍내 큰 매장 행사 때나 볼 법한 광경이 아닌가.

“여어. 박진수.”

소년, 진수의 친구 덕철이가 알은척을 했다.

“뭔데, 이게 다 줄이야?”

“그런가 봐.”

아직 영글지도 않은 소년들과 다르게 헌앙한 청년들이 군무부 병무청의 직원과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화를 내는 사람도 들렸고 짜증을 내는 사람도 들렸다.

― 아니 입대하겠다는데 뭘 그렇게 많은 걸 따져요!

― 조국이 부른다잖아요!

병무청 직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들을 다독였다. 겨우겨우 진정한 이들이 돌아가자, 진수와 덕철 같은 소년들도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음….”

신분증을 건네받은 병무청 직원이 또 고심했다.

“너희들은 너무 어려서 입대가 불가하단다.”

“하지만 고려 징병법은 16세부터 60세까지….”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주 옛날 법이라고. 물론 그 나이대의 남성이 전력화되는 것은 맞아. 하지만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단다.”

아까보다 한 세월은 늙어 보이는 병무청 직원이 옆에 붙어 있는 징병 관련 공문을 가리켰다.

“일단 첫째로, 즉각적 현역병으로 입대할 수 있는 나이는 스물에서 마흔까지야. 거기서도 대학생이나 부양할 가족이 있고 심각할 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면 후순위로 밀려나. 그런데 너희는 아직 십 대다. 고등학교를 끝마치고 와야 돼.”

우선순위 자원자는 이미 차고 넘쳤다.

시중의 연설 이후, 자원입대 희망률은 계산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치솟았다.

머리에 피가 솟구쳤는지 모두가 군대에 가고 싶어 했다.

자유국가에서 정당성을 품은 전쟁과 아닌 전쟁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만약 애매모호한 명분을 이유로 전쟁을 걸고, 심대한 피해를 입는다면 반전 여론이 머리를 쳐들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제국이라도 그러한 여론 앞에선 전쟁의 승리를 가늠치 못했다.

반면 정당성을 업은 전쟁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애국주의가 없을 수가 없었다.

분노한 시민들의 단결은 중화주의나 공산주의 이상으로 국가의 많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것이 초창기 혁명 프랑스가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여준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민간의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낸 정부는 그렇게 해줄 수가 없었다.

선전포고 직후 고려는 대군 육성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옛 대전쟁에서 그러하듯 일반 병역체계에서 전시 징병제로 바꾼다는 의미였다.

군무부의 첫 목표는, 대략 오백만 명이 넘는 병력 확충이었다. 사단의 개수로는 거의 삼백 사단 정도였다. 지원자들의 숫자는 그 목표가 충분하고도 넘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교관 인력을 미리 확충해 놓아도,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단번에 육성하니 현실적 제약이 곳곳에 있었다.

신체적 역량을 향상시키고 병기본전투나 기본 전술을 익힐 수 있게 체계적인 훈련계획을 짜야만 장병 생존률이 높아진다.

고려는 적어도 100일의 훈련을 이수해야 자신들의 청년을 전쟁에 보낼 수 있게끔 계획해 놓았다. 그 정도가 적정선이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런 훈련기간 동안 훈련장으로 쓸 부지, 개인장구류, 기타 여러 가지 것들도 아직은 전시생산체제가 완벽히 잡히지 않았다.

단번에 많이 징병한다고 다 군인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계획한 이상으로 징병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몇 단계에 걸쳐 서서히 대군을 끌어올리는 편이 좋았다. 백일교육을 받은 병력을 배출하면, 다시금 훈련병들을 채워놓고 배출하는 식으로.

“그… 그러면 저흰 어떻게 되는 건가요?”

“뭘 어떻게 돼. 집에 가서 발이나 씻고 잠이나 자렴. 이 전쟁이 몇 년이 걸릴진 모르겠지만, 여튼 하루 이틀 만에 끝나지 않는다면 너희들에게도 기회는 있겠지.”

진수는 이 사실을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워싱턴은 연설 이후 그의 약속에 따라 거국전시내각을 꾸렸다. 세 당이 모두 그의 내각에 참여했다. 덕분에 내각회의는 굉장히 불편하고 까다로운 자리가 되긴 했지만, 한번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사안들은 의회에서 빠르게 통과되었다. 이런 것들이 장점이긴 했다.

“어디까지나 전시라서 가능한 일인 겁니다. 국가의 통제는 대부분 시장을 망가뜨리는 것을 알고 계십쇼.”

토지수용법이 가결되었다.

토지수용법에 따라, 국가안보를 위해 국가는 개인에게서 토지를 감정평가에 따른 보상액을 주고 강제로 구입할 수 있었다. 훈련용 토지나 기타 군용 토지 등이 이렇게 마련되었다.

전시설비전환법에 의해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군수공장이 빠르게 지어지고 있었지만, 곧바로 무에서 유로 만들진 못했다. 그 전엔 군용으로 쓰일 수 있는 공장 설비들을 국가가 구입하거나 임대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군용 물자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가구회사는 군용 목제 부품들을, 고급 의류 회사는 특수요원 복장이나 장교, 장군 복장들을, 식기 회사는 군용 수통이나 반합 등을.

고려인들은 규격화, 표준화를 좋아했다. 그렇기에 공장마다 상당한 수준의 표준화 작업이 되어 있었기에, 물품의 생산 유연성은 압도적이었다. 보통의 다른 국가 공장들이라면 이거 생산하다 저거 생산하진 못했다. 아주 심각하게 골치 아픈 일들이 있었다.

심지어 단위계도 뒤죽박죽이고 통일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고려가 국제단위계를 타수에 거의 반쯤 강요한 것도 모두 그러한 고충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전쟁국채법에 의해 국채가 판매되기도 했다. 재정 상태가 아주 양호한 고려도 병기를 찍어내기 시작하고 수백만 대군을 일으킬 준비를 하자 자금이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민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황실이 나서서 많은 수의 전쟁국채를 구입했다. 음지의 어떤 큰손도 어마어마한 수의 전쟁국채를 구입했다.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 전쟁국채를 사니 비로소 시중의 공약이 현실로 다가올 기반이 마련되었다. 조선소는 전함 건조에 이미 착수했고 종동사는 무시무시한 물량의 전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부익사와 충천사 등의 전투기 공장들도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그 밖에도 전시근로법이니 하는 기타 법안들이 준비되었다. 당장은 아니고 상황을 봐 가며 쓸 것들이지만, 고려가 이 전쟁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법안들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고려의 노여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 세계의 국가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 유명한 악법마저도 일시정지되었다.

“아대륙 자원보호법의 일시정지라… 왜요, 어떤 자원이 모자랍니까?”

“아닙니다, 폐하. 다만 외국에서 원료를 수입하는 물자들은 필연적으로 그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고, 여러 환경적 이유로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전시에서는 이런 소소한 사항들조차 전부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짐은 또 서아시아에서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근심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련(아랍 연방)과 이라크는 아국의 최중요 동맹국들입니다. 그들이 배신하는 일은 없으며, 원석유결제체제는 공고합니다.”

기름만 따지면 사실 서아시아의 동맹국들만 잘 확보하고 있으면 전쟁 때 필요한 석유는 끝났다. 굳이 고려에 있는 기름을 퍼먹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굳이 서아시아를 안 파먹어도 되었다. 고려는 택주의 최상급 원유를 비롯해, 전주에 있는 무시무시한 양의 중질유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자원보호법에 따른 엄격한 관리하에 고려석유 등의 회사가 찔끔찔끔 파먹는 중이었다.

석유를 제외한 다른 자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매장량은 거의 고갈되지 않았다. 애초에 대륙을 세 개나 집어삼킨 나라가 원료 부족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무언가 문제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악법 덕에 수많은 이상한 생각들이 일어난 것을 보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소비에트와 중화, 그리고 그전에 고려에게 도전했던 나라들의 공통점이라면, 소위 말하는 ‘려대륙’의 잠재성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그들도 려대륙의 땅이 넓은 것은 충분히 알았다. 땅이 비옥한 것도 알았다.

허나 여전히 자원의 보고로서의 대단함은 썩 신통치 않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상식적인 나라라면 한 치 앞의 이득만 추구해 자기네 땅을 파먹는 것이 마땅하기에 저딴 악법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저들은 고려가 저딴 악법을 핑계로 그들의 알량한 자원을 타개하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자원을 끌어다 쓰는 것이라 보고 있었다. 의도한 착각은 아닐 터였지만.

― 괜히 려대륙이 삼별초의 도주 이전까지 대단한 철기 문명이 없었겠는가? 아즈텍이나 마야, 타완틴수유 같은 문명이 철기까지 올라가지 못했던 것은 애초에 철광석 자체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지하자원이 궁핍한 나라다!

놀랍게도 중화의 선전에서 나온 말 중 하나였다.

중화는 진지하게 저 소리를 믿고 있었다. 위대한 중화가 피어난 대지에 자원이 풍부했던 것과 달리, 려대륙은 태초부터 한계가 있는 땅이라고 믿었다.

이젠 그 멍청한 생각도 바꾸어줄 순간이 왔다. 수백 년간 살아있던 악법의 일시정지를 통해.

고려는 지금 이 전쟁에선 아주 효율적으로 자원을 쓰길 원했다. 많은 효율성과 그에 따른 생산량을 통해 청년들의 희생을 줄이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시중에게 보고를 받은 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계속 밀어주고 있는 입장에서 들어줄 것 다 들어주는 것이 맞았다. 애초에 아대륙 자원보호법을 제정할 때도, 전시에서의 폐지는 당연히 가정한 것들 중 하나였다.

사실 아대륙 자원보호법이 대체 왜 아직까지도 있는지는 황제도 몰랐다.

그저 선조가 막연히 잘했으리라고 생각했기에 아직까지도 내버려 두고 있는 셈일 터다. 혹은 정치인들이 경제인들을 목줄 채워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환경단체의 반발 비스무리한 것들이 있었을지도.

무엇이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 세계대전이 났음에도 이 법을 철폐하지 않고 승전 때까지 ‘일시정지’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고려가 가진 자원에 대한 엄청난 고집과 탐욕을 알 수 있었다.

시중은 감사함을 표했다. 그들은 업무가 끝난 뒤에도 약간의 담소를 더 나누었다.

“외인부대를 이동시키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소.”

해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조선이 그렇게 흔들릴 줄이야. 만약 봉명관이 돌파당한다면, 다른 관문은 훨씬 더 수월하게 뚫릴 것이오.”

해안은 작계용 지도를 보았다. 쟁쟁한 동기와 후배들은 이제 뛰어난 장교가 되었지만, 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여러 생각들이 지도 위에서 수놓아졌다.

“조선 해군이 그나마 활약해주어 다행이지….”

하지만 해군이 뭍의 육군을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화학 병기와 쪽수로 밀어붙이는 중화제국군이라면 더더욱.

이를 막기 위해선, 육지에서 직접 싸워 승리해야 했다. 조선은 지금 이 병력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선군의 군납비리 사건은 방독면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지만, 방독면만 해 먹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방독면‘까지’ 해 처먹은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해안은 워싱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려의 군납비리를 자정시킨 당사자가 바로 워싱턴이었다. 그로 인해 정계에 발을 담그기까지 했으니 워낙 유명한 일화였다.

고려조차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쩌면 일부 수뇌의 부패는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사회가 얼마나 자정작용이 가능하느냐에 따라 극복한 나라와 극복하지 못한 나라가 나뉠 것이었다.

반대로 중화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무시무시한 공포심으로 이를 해결했다.

횡령한 사람들을 처형하고, 그 직계 일가를 몰살시키는 방법은 연좌제가 폐지된 자유국가에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이긴 했지만, 겉으론 화끈해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강국이라도 나라의 수뇌부가 흔들린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워싱턴이 고심하다 타국의 정치를 입에 담았다. 해안도 침묵하기보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왕가가 결단을 내렸소. 짐은 보안국을 지원해주기로 했고.”

워싱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까지 희생될 사람들이 문제군요.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도이치는 사정이 좋다는 것이 다행이오.”

도이치와 조선은 꽤 비슷했다. 조선의 세도 가문들처럼, 이전까지 도이치도 융커들의 사회라고 표현해도 될 수준이었다.

그들도 부패가 심각했고, 상당한 수준의 꼴통이었기에 사회개혁을 번번이 막아냈다.

다만 프리드리히와 테레지아 부부의 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프리드리히야 해원이 인정한 대단한 군주였고, 문과 무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 테레지아도 만만치 않았다.

일평생 남편 외에도 다른 한 남자에 집착한 여인은, 그 남자가 설계한 제국을 처음부터 끝까지 닮게 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제도와 체계, 왕실의 모습, 모두 다.

그러니 테레지아는 누구보다도 개혁적이었으며, 누구보다도 관용적이었다. 그녀의 교육을 받은 빌헬름 1세와 손자 프리드리히 3세 또한 아주 훌륭한 치세를 이끌었다.

군주들에게 희망을 느낀 사람들은 굳이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문화나 언어 등의 이유로 조선의 인재들이 염증을 느끼면 고려로 이민 가는 것과는 역치부터 다르긴 하겠지만.

또 어떤 면에선 대전쟁의 여파가 큰 역할을 했다. 한 번 국토가 엄청난 수준의 전화에 휘몰렸으니, 융커들의 힘이 쭉 빠진 세월이 있었다. 이후 승전국으로서의 권위와 통일 대독일이라는 지위는 프리드리히 2세의 개혁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하지만 설령 그런 것들이 없었더라도, 문 말고 무를 지극히 숭상하는 융커들의 성격을 보았을 때 박살 난 정치나 경제와는 다르게, 적어도 조선과는 달리 전쟁 하나는 기깔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훗날의 파멸이 예정되어 있었더라도.

지금의 도이치는 프리드리히 2세의 개혁 덕에 전쟁기계적 프로이센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지만, 또 그 꼴통적인 면모도 소실되었기에 장단점 중에서도 장점이 큰 나라였다.

소비에트는 벌써 리보니아를 집어삼켰다. 폴란드는 소비에트를 막지 못했다. 그들의 방어선이 첫 계획대로 발트해 방면까지 연장되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여러 이유와 재정상의 한계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소비에트는 폴란드 요새선 우회를 시도하는 중이었고 그것은 아마 성공할 것이다.

폴란드는 대홍수 이후로 썩 믿음직스러운 나라가 아니었다. 옛 대전쟁에서 승전국 지위를 얻었지만, 그 후로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지도 못했다.

폴란드가 무너진다면 루테니아도 위기였다. 민족적으로 소비에트 연방과 동질성이 강한 탓에 수많은 첩자들이 뛰어노는 에덴동산과 같은 키이우는 허구한 날 루테니아의 정보부 오흐라나와 소련 정보부 엔카베데의 소리 없는 총성이 울려 퍼지는 도시였다.

루테니아가 무너지면 소련은 초기의 목적을 이루는 셈이다. 굳이 무리해서 나아갈 이유가 없었고 덫을 칠 것이었다. 저들이 동장군과 라스푸티차를 얕보고 진격해오길 기다리는 사냥꾼이 될 터였다.

고려는 조선이 정신을 차리길, 그리고 도이치가 제 몫을 해주길 원했다.

그들은 지금 당장 할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책임을 물기 위해, 도쿄에 또 한 번의 훈계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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