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화 우리는 왜 싸우는가
고려제국 특수작전사령부
제3특수작전대대 제1직접타격분견대
존재 자체가 극비지만 속칭 ‘하나셋하나(131)’ 부대로 불리는 부대의 회의가 열렸다.
― 모두 자리에 있나?
“그렇습니다.”
― 좋아, 합상혁 대위. 자리에 앉아 보게.
백동수 특수전사령관이 직접 유선으로 작전 개요를 읊었다.
― 제군들은 아직 정녕당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입장이 나오지 않는 것을 의아해할 것이다. 그렇지?
합상혁이 단단하게 대답했다.
“의아해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 그건 알아. 하지만 그대들의 사기 문제도 연관되어 있으니 진실된 내막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렇다.
백동수 사령관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 시중께선 선전포고 전에 중화제국의 위협이 확실하게 제거되길 원한다. 상상도 못 할 수준의 민간 피해가 발생했다.
그건 부인한다고 해서 부인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개성뿐만 아니라 평양, 한양, 청주, 충주, 나주, 심지어 저 동래까지 위험하다. 중화제국은 조선 국민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 은행 강도마냥.
“…….”
― 제국은 그들의 목숨을 버릴 수 없다. 설령 조선 정부가 그리한다고 해도 그럴 수 없다. 알아듣겠나?
“알겠습니다.”
모두가 단단하게 대답했다.
― 그러니 그대들이 지금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지급한 작전서들을 보도록.
작전개요서가 그들 앞에 인쇄되어 분배되었다.
― 그대들이 대외국 요원을 구해준 덕에, 적의 주요 시설에 대한 정보를 확보했다.
청도항 배후의 효주시에 대규모 폭격기 공장이 있다.
그대들의 임무는 그곳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방공호 내부에 있는 시설을 폭파하고, 중요 정보를 확보한다.
그 뒤, 나머지 건물에 대한 정확한 좌표를 전송한다면 그대들을 지원하는 탐라전단이 정밀한 포격을 실시한다.
“그냥 냅다 포격하고 들어간 다음 마무리하면 안 됩니까? 어딘지는 대충 알잖습니까.”
― 핵심 시설은 방공호 안에 있다. 의미가 없어.
또 그런 마구잡이식 포격은 민간의 피해가 클 것이다. 불허한다. 이번 일이 선전포고 전에 이루어지는 비밀 작전이라는 것을 유념하도록.
선전포고? 애초에 선전포고 없이 저들이 먼저 미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게다가 민간의 피해는 무슨, 지금 저 새끼들이 개성시민들을 저렇게 죽였는데, 민간의 피해? 군인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루밀 키치파닐계 장교 한 명이 항명했다. 보통 부위가 장군에게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생사고락을 넘나드는 제3특수작전대대 특유의 자유로운, 실력 중심의 분위기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지금 개성에 학살극이 벌어졌는데 우리는 맘대로 싸우지도 못합니까?”
그 옆에서 오하이오 출신의 부교 하나가 말을 거들었다.
“빌어먹을 규율, 빌어먹을 국제법….”
“포타타! 테쿰셰!”
합상혁이 동료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성량이 쩌렁쩌렁하여 호랑이와 같았다.
“저놈들이랑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거냐? 그게 제국군인으로서의 자세냐!”
상혁의 기세에 강력한 군인인 둘마저도 찔끔 고개를 숙였다.
백동수 사령관이 거들었다.
― 그래, 우리는 저놈들이 아니다.
민간에 대한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여라. 이 작전은 보복 공격이지만, 중화제국이 미친 짓거리를 곧바로 할 수 없도록 하는 정밀한 타격을 하는 것이다. 알아들었나? 일을 크고 요란하게 벌일수록 너희들만 빠져나오기 힘들어져.
“알겠습니다.”
― 이 통신이 끝난 뒤 지금 대기 중인 2함대 탐라전단과 합류하라. 많은 지원은 바랄 수 없다. 아무리 허접하다지만 적의 해군은 건재하다. 기습 이후 곧바로 작전에 투입된 탐라전단이 그들을 공격하면서 그대들을 지원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이 밖의 자세한 사항은 현지 작전 지휘관에게 일임한다. 이상.
“장비 챙겨.”
끊어진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던 상혁의 말에 대원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기밀작전이니 지금부터 호출명으로 부르도록. 아까 정한 거 바꾸고 싶으면 지금 말해.”
미주 출신의 능글능글한 부교 하나가 씩 웃었다.
“청소기, 변동 없습니다.”
포타타, 상혁의 동기가 단단하게 대답했다. 아까 말다툼이 있었지만, 그들 사이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동기를 존경하고 있었다.
“귀신, 변동 없음.”
“도끼, 변동 없음.”
“지네, 변동 없음.”
상혁의 호출명은 ‘대가’(Price)였다. 아버지와의 만남 이후 정한 것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어코 이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무슨 호출명이 그러냐는 말도 있었지만, 애초에 청소기나 지네나 대가나 그게 그거 아닌가.
“에이, 씨팔 거길 또 가야 한다니. 난 진짜 가기 싫은데.”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얼굴에 붓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대외국 요원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갈 거잖소. 빼놓고 가면 삐질 거면서.”
“그렇지, 그건 화나지.”
“그럼 형씨도 짐 챙기쇼.”
상혁은 그들을 둘러보다 갑자기 씩 웃었다. 이 얼마나 믿을 만한 놈들인가.
“가자.”
* * *
“이건, 이건 미친 짓이야.”
네드 러드가 손을 떨었다.
― 위원장께서 프랑스와 에이레를 막아준다면….
막을 수 있을지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바뵈프 서기장!”
네드 러드가 목소릴 높였다.
“대체, 대체 지금 당신은 뭘 하고 있는 거요? 중화제국의 미친 행동을 비난하기는커녕 축전을 보내고 군대를 움직이다니. 고려가 지금 분노하는 것을 모르겠소?”
― 잘 말했소.
그 미친 짓은 우리가 한 미친 짓이 아니지. 중화제국이 저지른 짓이오. 축전 정도야 얼마든지 보낼 수 있소. 우리의 과오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리면 되오. 고려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동유럽을 적화하는 것. 지금이 유일한 기회요.
이념? 이상? 집어치우시오. 냉혹하게 현실을 바라보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낙원은 도래하지 않소.
바뵈프의 말이 건조하게 울렸다.
― 고려는 중화를 상대할 것이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리보니아와 폴란드, 루테니아쯤은 희생하는 것을 묵인하겠지.
“타수의 유대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
― 그 타수는 이베리아에서 나약함을 증명했소. 수많은 이해관계로 얽힌 국가들의 집합체는 필연적으로 목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지. 더군다나 그 자유 민주주의란… 당신이 보기에도 참으로 한심하지 않았소이까?
바뵈프가 나직하게 비웃었다.
― 한 명의 서기장과 한 명의 위원장이 다스리는 나라에 비해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오. 나는 그대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소.
전화는 끊겼다. 실로 무례하게.
네드 러드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어 한바탕 욕설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진 못했다.
저 전화는 당분간 못 쓸 것이다. 전쟁이 시작된다면, 겨우 깔아둔 전화선도 잘릴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잉글랜드는 사방이 고립된다. 이베리아 인민전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섬나라의 특성상 잉글랜드는 북쪽에 접한 스코틀랜드와 서쪽의 에이레, 남쪽의 프랑스, 동쪽의 네덜란드, 스웨덴 등에게 포위되는 셈이다.
서기장은 잉글랜드를 제물 삼아 소련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네드 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광기의 순간에서 자신은, 잉글랜드는 빠져나가야 했다. 너무 늦지 않게.
“고려 대사를 불러주게.”
그는 측근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하지만, 측근이 명을 받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의 집무실에 들이쳤다.
“누구냐!”
아니, 이렇게 수월하게 위원장의 집무실에 들어올 수 있다고? 네드 러드는 순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총기를 든 사람들 뒤에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인영을 바라본 네드 러드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부정에서 분노, 그리고 절망, 후회, 의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샬럿이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명령을 내렸다.
“잉글랜드 인민 공화국 최고 위원회에선 지금 이 순간부터 위원장의 병세를 대리해 내가 임시 권한을 발동합니다. 몸이 성치 않은 위원장을 처소 안으로 잘 모시세요.”
“…당신.”
“어서!”
병사들이 네드 러드를 부축했다. 아니, 끌어내렸다. 네드 러드는 장군들을 부르고 싶었다. 아서 콜리, 아서 콜리는 어디 있지?
하지만 그는 지금 장군들조차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조차 그를 배신하는 마당에, 대체 누구를 믿겠는가.
― 쿵
처소에 도착한 네드 러드의 무릎이 체념한 듯 꿇려졌다.
몸의 힘을 다 뺀 사람을 끌고 가긴 힘든 나머지 병사들이 애를 쓰다, 그래도 존경하는 위원장에게 결례를 끼치긴 힘들었는지 샬럿을 바라보았다.
“다 나가봐요.”
― 예, 총정치국장님.
샬럿은 그들이 나갔는지 확인하더니, 이윽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네드 러드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미안해요, 내 사랑.”
네드 러드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샬럿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내가 힘없이 흔들거렸다.
“대체, 대체 왜 이런 짓을!”
“당의 결정이에요.”
그저 당의 결정일까, 아내는 남편 몰래 비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왜!”
“…바뵈프의 말이 옳으니까.”
샬럿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네드 러드는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그래, 진작 알고 있었지.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누구보다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던 아내. 그런 아내는 결코 설득당하지 않았다. 반대로 아내에게도 남편은 결코 설득당하지 않은 꼴통일 테지만.
“잉글랜드는 멸망할 것이오.”
러드는 담담히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상관없어요.”
하지만 샬럿이 그렇게 단언했다.
“소비에트가 세계를 적화할 수 있다면. 그래서 세계에서 왕정을 소멸할 수 있다면….”
“우리가 원하던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잖소… 우린 단지 모든 이들이 평등한, 더 나은 사회에서 살아가길 원한 것이 아니었소? 여보, 대답을 해 봐요. 해리는, 에이미는? 그 아이들은 어떻게 하라고?”
샬럿은 대답을 남겨두지 않은 채 떠났다.
* * *
“왜 당하의 답장이 이렇게 늦습니까!”
“에스토니아 국경에서 포성이 울리고 있습니다. 붉은 군대가 움직였어요!”
흉흉한 분위기의 제도, 정녕당에는 외국 대사들이 방문해 있었다.
이중 가장 젊어 혈기 넘치는 도이치 왕국의 대사 메테르니히가 안달 난 외침을 했다. 그 밖에도 백제 대사 평전강송 등이 침착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지만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듯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워싱턴은 아직 대사를 접견할 여유까진 없었다. 지금 정녕당엔 긴급 내각안전보장회의가 소집된 상황이다. 파주에서도 국제연합 이사국들의 긴급회동이 있었다.
그 모두가 시중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느라 저리 꾸물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중은 내각안전보장회의를 일시 휴회하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지지율 높던 워싱턴마저도 공습 다음 날의 침묵 때문인지 하염없이 원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정말 저 창밖의 시위가 폭동으로 비화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분위기는 끔찍하게 우중충했다. 사람들은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고려는 아직 26일이지만, 날짜변경선의 위치를 고려해보면 시간상으론 거의 이틀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작전 중인 부대로부터 확실한 보고가 들어와야 했다.
조선 정치인들이 그렇지 않았더라도, 고려의 정치인들은 조선 사람들의 안위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 위협이 제거되는 것이 확실한 이후, 행동에 나서야 했다.
“힘든 일이야….”
워싱턴은 창밖의 시위자들을 바라보았다.
― 중화에게 죽음을!
주전여론은 미친 듯이 뜨겁게 치솟았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개성 공습이라니.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 뒤, 당황스러움을 수습한 사람들에게 남는 감정은 오로지 피의 복수, 그것뿐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 그곳에 복무하고 있었다. 남편이 그곳에 있었다. 아내와 딸도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계셨을지도 모른다.
희생자들은 누구의 가족이기도 했다.
또한, 어떤 종교의 신도였기도 했다. 개성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종교 중 두 개의 성지이다. 그곳을 순례하던 사람들이 죽었다.
순교를 꺼리거나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나, 교단은 그에 대한 대가를 누군가 치르길 원했다. 이것은 성스러운 전쟁이다. 분노의 화염을 방해한다면, 오히려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녹이고 불태우리라.
“뜨겁게 달아오른 화염은 그만큼 빠르게 꺼진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여론이 지나친 감이 있었다.
경찰의 보고론 불과 하루가 지나지 않았건만 사람들이 마녀사냥을 시작한 경우가 있었다 한다.
화교와 화인이 아닌, 애먼 주나라 사람과 중화의 뿌리를 부정한 화예가 고통을 받는 경우도 생겼다.
심지어 분노한 사람들에게 가문의 예맥한적 계보를 입증하지 못하면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단다. 수많은 사람군상이 있고 경찰의 수가 많은 도시는 덜했지만, 시골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에 조선 출신 이민자들조차도 그들의 먼 조상이 삼국시대나 그 이전 고대 시대에 옛 지나의 땅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피로써 그런 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 무엇을 믿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의 이념은 분노에서 기원하지 않았다.
저들과는 다르게.
‘이제야,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황상 폐하.’
지금의 황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워싱턴은 해청의 늙은 등을 떠올렸다. 선제께서 해밀턴과 하신 일. 그것이 무슨 목적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늙은 칸의 함벽여츤까진 예상하지 않으셨겠지만, 고종대제께서는 고려가 분노조차도 극복하길 원하셨던 것일 터다.
자랑스러운 옛 서벌(북원 원정)이 그들의 역사에 흠결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고려와 지금의 고려는 다르다.
고려는 이제 더 이상 어떤 민족이 소유한 특정한 국가의 의미를 뛰어넘어 있었다.
고종께선 그 사실을 아셨다.
그러니 그의 시대에, 마침내 제국은 모든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워싱턴의 뒤에서 시중의 말씀을 곱씹어보았다.
그동안 모신 세월이 얼마인데 시중이 전쟁을 반대할까 의문을 가졌겠는가. 오히려 워싱턴은 한참 전부터 중화의 위험성을 설파했으면 설파하고 다녔지, 안온한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그렇게 말했다.
시중은 고려인들이 분노라는 감정에 잠식되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잔잔한 불이 오히려 오래가지. 그리고 그러한 불꽃이 더욱 도움이 된다. 화염은 보기가 좋으나 써먹지 못해. 모든 것을 태워버리니까.
허나 횃불은… 횃불은 다르다. 그것은 암흑을 몰아낸다. 야만을 몰아내고, 야생동물을 몰아낸다.
횃불이야말로 문명을 구축하고, 세계만방에 질서를 세우는 성화(聖火)다. 정 비서관, 그걸 알겠는가?”
“이치에 닿은 말이니 지금부터 명심하겠습니다.”
워싱턴의 노안이 약용에게 가 닿았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말이다. 자네에게 부탁했던 것이 있었지.
계속 시간이 뒤처지는 것을 보고 솔직히 반쯤 잊어버리기도 했었다. 연임조차 확실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분명히 자네보고 연설문을 하나 써달라고 했었네. 개전 선언문을.”
“……그러셨습니다.”
“나는 그걸 받아보아야겠어. 내일 아침까지.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네.”
워싱턴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내 밑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 부디 그랬길 비네. 그리고 자네의 연설문에서 그런 것들을 느끼길 원해.
그대의 만년필은 세계 최고야. 난 그걸 확신해. 어디 세계에게 보여주게. 우리의 분노, 저들의 행패를 빼라는 말이 아니야.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의, 제국의 정당성을, 우리가 왜 싸우는지를 담아주게.”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약용은 잠시 그 말을 음미했다. 그리곤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숙여 보이며 빠져나갔다.
워싱턴은 약용을 보내고 바뵈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마냥, 서기장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바뵈프는 태연자약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귀국이 입은 피해에 유감을 표하는 바요.
“그만두시오.”
워싱턴은 피곤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귀국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 줄 알면서 그렇게 행동하다니. 지금 이후로 북대동양 조약기구를 시험하려 들지 마시오.”
―내정간섭이오.
“타국의 영토는 침략하려 들면서 그대들의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 빌어먹게도 이기적인 외교로군.”
―중화제국을 막으면서 우릴 신경 쓸 여력은 없을 텐데.
워싱턴은 그로선 드물게 노여움을 토했다.
“여력? 그대가 제국의 여력을 논하는가!”
바뵈프는 침묵했다.
“이 고려―러시아 직통 회선은 러시아 최후의 차리차 시절, 더 이상의 전쟁을 바라지 않았던 나탈리아에 의해 깔렸소. 부디 그녀의 마음 중 일 할이라도 헤아리길 바라오.”
―끝까지 우릴 기만하는군. 봉건주의의 상징을 입에 담지 말라. 소비에트 연방은 루테니아의 일을 망각하지 않는다. 그곳은 적법한 우리의 땅이니, 너희들이 물러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명분과 의지는 견고하며, 양보는 그대들의 몫이 될 것이다.
“우리는 타수의 땅 한 치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행운을 빌지.
* * *
속이 타들어 갔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지 못했기에, 워싱턴은 억지로나마 아주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누군가 그런 그를 흔들어 깨웠다.
“당하! 당하! 소식이 왔습니다. 작전 성공입니다.”
군무상서 박용찬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제서야 워싱턴이 빠르게 안전보장회의로 튀어 나갔다. 마찬가지로 하염없이 대기하던 내각의 구성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행동하면 되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가 온 것이다. 그토록 바라왔던.
“기자들은?”
“이미 의사당에 집결해 있습니다.”
“좋아.”
정약용이 다가왔다. 워싱턴은 그가 건넨 연설문을 받아 들었다.
“수고했네, 가면서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