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65화 (565/653)

565화 사악한 동맹(2)

중소불가침조약, 양국의 외무장관 이름을 따서 벨라예―진 조약이라고 불리는 조약이 비밀리에 체결되었다.

― 소련은 중화제국의 투르판, 야르칸드, 티베트에 대한 영향을 인정한다.

― 중화제국은 대월 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승인하며, 천축(인도)에 대한 소비에트의 영향을 인정한다.

두 나라는 이제 직접 맞닿게 된 중앙아시아는 물론이고 동남아시아의 공산 봉기에 대해 입장이 첨예했다.

다만 두 절대 권력자의 뜻에, 이 첨예한 입장들 또한 협상이 가능했다.

벨라예프 소련 외무장관과 진효산 중화제국 외무총장은 이 핵심적인 이해관계를 정리해 나갔다.

시간은 꽤 오래 걸렸지만, 결국은 서로가 타협점에 도달했다.

이것이 평화를 위한 조약인지, 다른 무언가를 위한 조약인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네드 러드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중화주의는 태초부터 중국공산당을 싫어했다. 그 뒤에 있는 소비에트도 싫어했다.

습진균 총통이 중국공산당을 박멸하며 했던 온갖 종류의 역겨운 말들―유목 멘셰비키―은 러드도 똑똑히 기억했다.

하지만 그만큼 공산주의 세계에서도 그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공통점이 많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차이점을 더욱 극명하게 느꼈다. 중화주의는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겐 반동주의와 마찬가지였다. 순수성, 민족성 등의 중화주의적 가치관은 소비에트에서는 오히려 억누르고 억압받아야 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비에트와 중화제국이 지금 당장 피 터지며 싸울 이유는 희박했다.

서로 간의 수도 거리가 비교적 가까우면 모를까, 모스크바와 경사는 거의 지구 반대편에 위치했다.

그들 세력권의 접경지인 투르판은 먼지만 풍기는 땅이었다. 중화제국은 이쪽으로 도망친 몽골 잔당들을 원하고 있었는지 집착이 심했지만, 소비에트로서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그러한 땅이었다. 소비에트의 정당한 영역인 카자흐만 넘보지 않는다면.

당면한 지상과제를 보아도 그러했다.

소비에트는 최우선적 목표가 전 유럽의 공산화였다. 이는 소비에트의 존재 목적이자 의의였다. 반동적 유럽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인민 낙원을 만드는 것이 껑땅과 모렐리, 바뵈프로 이어져 내려오는 혁명가들의 최우선적 목표였다.

중화제국도 대중화공영권이라는 중화제국의 마땅한 생활권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대중화공영권에서 토번과 서역의 이서지역은 썩 관심이 없었다.

만약 두 열강의 핵심 목표 지역이 서로 동일했다면 이 조약은 말뿐인 조약이 되어 언제든지 파기할 그러한 휴짓조각이 될 위험성이 있겠지만, 그럴 위험성이 현저히 낮은 지금 두 국가가 손을 잡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런 논리 속, 그동안 사실상 두 제국의 전부처럼 보였던 이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취급당했다.

철저한 현실정치(Realpolitik).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이라 손꼽히는 두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정권을 잡은 절대지도자들은 오히려 이념이나 도덕적(으로 보이는) 관념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었다. 그만큼 실존하는 권력, 물질적 이득이 더욱 크다면.

그것이 독재자의 권리였다. 인민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을 현실주의나 실용주의라 보아야 하는지 혹은 이념에 대한 배신이라 보아야 하는지, 러드는 판단할 수 없었다.

러드의 충격은 관심받지 못했다. 두 국가의 지도자와 장관들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근래에 고려의 행동이 지나칩니다.”

“빌어먹을 황정주의자 놈들. 루테니아는 마땅한 소비에트의 땅이오.

그곳에 괴뢰국을 세운 것도 모자라 소비에트와 잉글랜드에 철과 석유, 고무를 팔지 못하게 하다니.”

“우리 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로부터 대만섬, 즉 주나라는 아국의 고유한 강역이었습니다. 주의 땅은 자그마한 섬이나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핵심적 지역이라 어떻게든 돌려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고려 제국은 이미 지나가 버린 대리 합병을 근거로 아국에도 귀국과 비슷한 수준의 무역 제재를 가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군대만 동원하지 않았을 뿐, 고려는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바뵈프 서기장과 벨랴예프 외무장관, 진 외무총장은 만찬장에서 그렇게 고려를 헐뜯었다. 두 나라는 자신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이 모두 고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조약을 어기고, 침략하고, 사람들을 죽여댄 것은 실로 가치 있는 일이었다. 반면 고려는 그들을 제재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국제사회가 그들에게 너무 불리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평등해지길 원했다. 평등 속에서 적화와 중화를 남몰래 꾀할 수 있도록. 그렇게 방심하길 원했다.

그러니 고려는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방심하지 않고, 그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중화와 소비에트는 고려가 ‘세계 질서의 수호자’, ‘국제법의 집행관’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이상,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는 숙명을 깨달은 상태였다.

아직은 그들 사이에서 무언가 대단한 일을 벌이자고 말이 나온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그들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움직일 때, 서로 간의 양면 전선을 방지하고자 하는 이 모든 노력 자체가 또 다른 대전쟁을 의미했다.

반면, 저 빌어먹을 제국은 그들 모두와 상대해야 할 테니, 불가침조약은 단순한 불가침조약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네드 러드는 한참을 혼란 속에 있다가, 겨우 총장에게 몇 마디를 꺼냈다.

“대화도 이를 압니까?”

“대화는 우리의 뜻에 따를 겁니다.”

진효산이 거만하게 그렇게 말했다. 소비에트와 잉글랜드의 관계 이상으로 중화제국과 대화제국도 한쪽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침묵을 지킨 채로 객원에 돌아와 머리를 뉘었다. 도통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의 머리론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날이 되어 런던으로 떠나는 와중에도, 러드 위원장은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아내에게도.

* * *

중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자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비밀조약이라고 하더라도, 네드 러드도 알았고, 실무자들도 알았고, 그러므로 무시무시한 정보력을 지닌 고려도 알았다.

고려가 알면 하늘눈 조약국도 알았으며, 그렇게 된다면 사실상 전 세계가 아는 일이니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지역패권국의 동맹은 그만큼 불길했다.

마침 열린 국제연합의 회의장은 심히 어수선했다. 사람들이 휘적거리며 오갔고, 만나는 사람을 붙잡고 토론을 벌였다.

“미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개와 고양이가 손을 잡았으니, 저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일 것입니다. 적화와 흑화!”

상임이사국들과 대표이사국들이 목청껏 분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려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 중화와 소련이 힘을 합친다면 고려를 제외한 세계는 크나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물론 도이치와 프랑스는 서로 힘을 합친다면 소련과 잉글랜드를 이길 수 있고, 조선과 옥저, 백제도 자기들끼리 힘을 합친다면 중화와 대화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단 도―프 간에 힘을 합치는 것부터 난관이었으며 예맥한 3개국은 전쟁에 있어 도덕적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 악마의 군대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고려의 국제연합 대사는 주변의 상황을 지켜볼 여력도 없어 보였다. 그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물론 외무상서나 시중이 결정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외교관으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완전히 오해했다.’

고려의 패착은 고려가 이들에게 가진 상식적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의 정치인들은 소련과 중화제국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주장처럼 이념에 충실하다고 보았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이 뱉은 말에 귀속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것이 정치니까.

소비에트와 중화제국은 왕정과 달랐으니까.

허나 민주적인 사회에서 투표로 선출된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모든 독재국가의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마땅한 권리가 있었다. 이는 옛 절대 왕정과 동일했다.

차이점이라면 그들은 멍청한 루이 13세보다 훨씬 유능했으며 뒤집은 말을 정당화시킬 충분한 정치력이 존재한다는 것일 터.

‘어떻게 해야 하지? 시중께선 아직 특명을 내리시지도 않았다. 마음이 복잡하시겠지. 이를 어쩐다.’

고려 대사는 계속 생각을 이어나갔다.

‘허나 저들은 대체 뭘 원하는가? 아국을 이렇게 자극해 대체 뭘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

아무리 제국이 대전쟁 당시의 병력을 유지하지 않고 있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국력이 저들을 압도한다. 국내총생산도, 인구도 그렇게 가리키고 있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 근거가 어디에 있기에 이러한 행태를 부린단 말인가?’

대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국내총생산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경제학적 지표에 불과했다. 아직까진 고려에서나 자주 쓰이는 개념이기도 했다. 특히나 폐쇄적, 그리고 국가적 경제 체제를 갖춘 소련과 중화제국의 경제지표는 확실히 알 수도 없었다. 정확한 경제지표는 자유로운 개방경제하에서나 유의미했다.

하지만 국가의 부유함은 굳이 수식과 도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딱 보면 알았다. 누군가 말을 탈 때, 누구는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는 것이 국가의 부유함이었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과장한다고 그렇게 인식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투력을 비롯한 국가의 강력함은 국가의 부유함에서 근원했다. 옛 냉병기나 유목민 시절에나 예외가 많았지, 화기의 시대에서는 이 철칙이 대부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더 큰 군대, 더 좋은 총, 더 많은 탄약을 쓰는 자들이 이기기 마련이다. 돈이 없으면 저 세 가지를 전부 충족하기 어려웠다.

‘물론 따서 갚으면 된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게 가능할까. 방어선과 요새선, 참호의 늪을 겪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게….’

대사는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식이 상식이 아닌 듯한 시대였다.

그는 문명과 문화가 개화하는 개천 6세기가 되어서도 이러한 야만적인 상황이 눈앞에 어른거린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지지부진한 회의는 결론이 딱히 나지 않았다.

무기 원조 및 연합국의 긴밀한 공조 대응. 원론적이고 또한 모호한 말들이다. 어느 수준까지 얼마나 지켜질지도 몰랐다. 이 와중에도 국가들은 자기가 직접 뭘 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루테니아와 폴란드 정도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라들 빼곤.

다만 모두가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대적 단극체제가 그렇지 않은 체제보다 훨씬 더 살기 좋았다는 것을.

그동안 국제연합의 구성원으로서, 고려의 단극체제하 독불장군적 모습을 알게 모르게 비판해오던 사람들조차, 막상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제국이 득세하는 순간이 오자 그저 하염없이 제도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의도했던 것처럼.

* * *

중화제8제국.

흔주(忻州, 신저우).

옛 대나라의 수도였으나, 지금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만리장성의 거점 중 하나인 연문관을 빼곤 딱히 볼 것 없는 낙후한 동네.

볼 것도, 먹을 것도 없는 북방인데다가 특히나 이 근방이 한동안 문화 파괴에 일삼던 중국공산당에게 귀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곳이 낙후한 이유는 자명했다.

최근들어 흔주의 외곽에 그 한적함과 어울리지 않는 큰 시설이 생겨났다. 대현(다이현)공공의학연구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의료기지 같은 이름답게, 기지 내부에는 크고 번듯한 병원 같은 건물이 있었다.

다만 환자가 탈출하지 못하게 쇠창살이 붙어 있는 작은 창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은 마치 수용소를 연상케 했다.

물론 수용소는 아니었다. 수용소는 보통 자원 생산지 바로 옆에 지어졌다.

흔주도 석탄으로 유명한 곳이라 수용소가 세워질 여건은 충족했지만, 정작 기지 주변엔 자원소가 없었기에 이곳은 이름대로 의료소라는 목적에 나름대로 충실한 곳일 터다.

― 부우웅

때마침 그 대현공공의학연구소의 정문 초소 앞에 몇 대의 차량이 다가왔다.

자랑스러운 중화제국의 자동차였다. 조선의 차를 역설계한 것이 틀림없었다.

고급 차라고 만든 것이 영락없이 낡고 투박하며 신뢰성 없었지만, 그럼에도 세계의 흐름에 따라잡으려는 중화제국의 여러 발버둥이 담겨 있었다.

“멈춰, 누구냐!”

이 한적한 곳에 누가 오겠느냐며 잠시 졸고 있던 초병들은 기겁하며 수하를 시작했다.

“중과원장이다.”

차 안에서 쥐 상의 중년인이 씩 웃어 보였다. 강퍅한 얼굴에 서린 삐뚜름한 표정엔 의외로 웃음이 머금어져 있었다.

이 인상을 누가 모르겠는가. 게다가 한두 번 들른 것도 아니니.

초병이 자세를 바로 했다.

중화과학원(中華科學院)은 중화제국이 설립한 최고 연구소로, 당규삼이 그 원장을 맡고 있었다. 대현공공의학연구소에겐 최고 지휘관이 온 것과 다름없었다.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십쇼!”

“고생들 하는구만.”

휴, 초병 하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치적 실권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대총통의 심복 중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자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좋지 못한 꼴을 볼 것이 분명했다.

당규삼의 차 뒤로 화물차가 줄줄이 들어갔다. 초병들은 그 화물에 담긴 것들이 무엇인지 대충은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내다 보면 자연스러워지기도 했다.

초병들은 대신 고개를 돌려 초소에 적혀 있는 문구를 바라보았다.

[중화제국의 번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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