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화 사악한 동맹
바뵈프의 세계혁명을 위해 태어난 대동 4계는 현존 공산정권의 우두머리인 소비에트와 그 동맹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네드 러드는 문득 주변을 살펴보았다.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속으로 바짝 긴장해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가 그들을 지원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비록 바뵈프 서기장의 제일목표가 세계혁명이라고 했더라도, 소비에트가 고려가 아닌 이상에야 지원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잉글랜드는 현시점 소비에트와 동등한(비슷한) 정치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 공산주의자들이 왕정을 뉴펀들랜드로 쫓아내며 그 잔해에서 얻어낸 기술과 공장들은 공산국가들 중 단연코 최고였다.
소비에트가 추구하는 중공업화의 대부분은 잉글랜드의 기술이 필요했다. 바뵈프는 잉글랜드 노동자들을 통해 그들의 기술력을 뽑아먹고 있었다.
애초에 네드 러드도 바뵈프의 지원을 통해 집권했으니 진 빚이 있었다.
“아, 러드 위원장.”
핏물이 배어 나오는 고기를 썰던 바뵈프가 문득 고개를 숙이며 친한 척 말을 걸었다.
“그, 쫓겨난 왕정 놈들은 어찌할 생각이시오.”
뉴펀들랜드로 쫓겨난 잉글랜드 왕가는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랭커스터라는 이름은 존속해왔지만, 이제는 그 이름도 유명무실했다.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왕정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결국 일개 덜떨어진 노동자에 불과한 네드 러드가 좌충우돌하면서도 혁명에 성공한 이유도 잉글랜드 내부의 거대한 모순과 왕정을 포함한 지도층의 무능함에 인민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현 잉글랜드 왕 헨리 11세는 딸이자 그의 후계자인 엘리자베스를 에이레의 왕자, 브라이언(즉위한다면 브라이언 3세가 되었다)과 결혼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에이레와 결합해서라도 랭커스터의 이름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되면 옛 알비온에 속했던 두 나라 간에 동군연합이 실시될 수 있었다.
뉴펀들랜드와 누아 에린이 합쳐진다면 그동안 호주를 양분하던 비효율적인 체제도 막을 내렸다. 뉴펀들랜드가 점유한 황무지 땅은 사람 살기에는 참 뭐 같았지만, 의외로 철광석과 석탄이 많이 나왔기에 누아 에린도 이를 군침 흘리고 있었다.
특히 본국과는 또 다른 뉴펀들랜드의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본국보다도 더욱 거대한 이 섬은 이미 잉글랜드와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조금씩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네드 러드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정말 식민지로 떠난 왕가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꿈이었다. 다른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결단하신다면 말씀해주시구려. 내 직접 유능한 사람들을 골라볼 테니.”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아직….”
네드 러드가 손을 저었다. 하지만 바뵈프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더욱 은근하게 권했다. 태도와 달리, 말에는 강압과 뼈가 있었다.
“아니오, 결단을 직접 내리셔야 하오.”
바뵈프가 다소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네드 러드에게 성이 났다기보단, 왕정 놈들에게 화가 난 듯해 보였다.
“그 인간들은 인민의 뜻과는 달리, 여전히 잉글랜드 본토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어떻게 해서든 그네들의 왕궁을 수복하려 들겠지. 이미 인민전당이 들어섰음에도!
왕정 놈들은 우리의 운동을 저지시키고, 다시 반동적 체제를 세우는 것이 목표일 터. 시간을 주지 마시구려.”
바뵈프는 아직은 그들이 동군연합을 이루지 않았기에, 에이레 수호감시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말로 그를 설득했다.
시간이 더 지난다면, 하늘눈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왕정복고운동에 개입할 수 있었다. 지금 하늘눈이 방관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강화와 함께 뒤통수를 친 잉글랜드의 지난 업보 때문일 터다.
네드 러드는 대답을 회피했다.
‘소심한 놈. 대체 어떻게 저 위치까지 올라갔는지.’
바뵈프가 네드 러드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하진 않았다. 모렐리 사후 험악한 정쟁을 통해 집권한 그는 냉혹하면서도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강철의 서기장이 되어 있었지만, 네드 러드는 그와 정반대였다. 그도 과격한 혁명운동을 통해 집권했다지만 여전히 소년같이 몽상가적이고 여렸다.
싸우고 싶지 않다.
우리들끼리 공산낙원을 만들어 오순도순 살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 허나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에겐 오로지 두 길뿐이다. 모두를 적화하거나, 파멸하거나. 바뵈프는 이를 확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네드 러드는 쓸 만한 놈이었다. 일단 그는 특유의 순수한 성품으로 인해 부하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바뵈프의 스승, 모렐리와 비슷했다.
다만 모렐리가 딸을 유산시킬 정도로 철저하고 냉혹한 공산주의적 신념을 가졌기에 부하들로부터 경외받았던 것과 달리, 네드 러드는 인간적이고 따스한 성품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 그 차이일 터.
바뵈프는 러드에게 조금 더 크레믈에 머무르길 권했다. 다른 사람들이 귀국할 때에도.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었다.
소련의 붉은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객원.
소비에트가 자본주의적 상징인 객원을 운용한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모스크바에 관용으로 쓰이는 객원 두엇쯤은 있었다.
4계의 회동에 참석한 귀빈들도 지금 네드 러드가 머무는 곳에 머물렀다. 여전히 잉글랜드 위원장을 위해 소비에트 군 병력이 철통같이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화려한 객실에서 네드 러드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트가운을 입은, 여전히 아름다운 샬럿이 그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뭘 고민하고 있어요?”
아내의 따뜻한 살 내음이 풍겼다. 러드는 아주 잠시간 평온을 찾았다. 금방 사라질 것이 분명하지만.
“…그냥.”
샬럿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직도 간질간질해, 러드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고민하지 말아요. 그저 결단하고, 행동하면 돼요. 지금껏 당신이 잘 해낸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와 조국, 그리고 당에겐 좋은 길만 있을 테니까.”
허나 오늘은 무슨 일인지 네드 러드가 좋은 말로 대답하지 못했다.
평상시라면 분명히 샬럿 앞에서는 그러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본심인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행동인지는 몰라도.
그는 머뭇거리다 말을 토해냈다.
“이게 맞는 걸까?”
“뭐가요?”
반문하는 샬럿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하고 자애로웠지만, 희미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아주, 아주 희미한 분노까지도.
“…아니야.”
그러니 러드는 입을 다물었다.
러드는 왕정의 손아귀에서 잉글랜드를 해방시켰다. 잉글랜드인들(잉글랜드의 하류층들)은 확실히 예전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귀족과 부도덕한 대농장주, 기업가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던 과거와는 달리 배급제를 통해 굶어 죽지는 않았고, 살아갈 방편 정도는 생겨났다.
이 정도면 족했다. 네드 러드가 이것 이상으로 무엇을 꿈꾼 적은 없었다. 그저 자신과 동료 노동자들이 더 나은 삶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는 높은 객원 건물에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소비에트의 인민들은 런던의 인민들보다 훨씬 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건 마치, 마치 예전 왕정 시절 잉글랜드인들과 비슷했다.
다른 것이라면 소비에트는 서기장의 명령에 거창한 대의를 높이 치켜들어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 것일 뿐.
‘그리고 그것이 류리크 시절의 차르들과 대체 뭐가 다른가?’
일자무식이었던 네드 러드도 위원장이 된 지금은 어느 정도 사회와 체제를 보는 눈이 많이 성장했다. 그러니 그 또한 냉엄한 현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이 정말로 민생 개선을 위한다면, 중공업 발전보다는 경공업 발전을 우선시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모두를 조화롭게 추구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소비에트의 경제는 오직 하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중공업 중심으로.
그리고 그 중공업이 상징하는 것은, 기계화 농업이나 그런 것들이 아닌 단 하나였다.
[전쟁.]
전쟁을 위한 경제.
이것은 민생과 완벽히 괴리되어 있었다. 인민들은 빵과 고기를 원하지, 먹지도 못할 전차를 원하는 것이 아닐 텐데.
세계혁명, 말이 좋다.
허나 누구를 위해?
전 소련 위원장 모렐리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못한 자본주의 국가는 결국 제국주의에 의해 침략당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지금 제국주의가 있는가?
대전 이후 고려는 막대한 권위와 권리(다른 나라의 채권), 그리고 도덕을 통해 대부분의 식민지를 해방시켰고, 해방시키지 않았던 식민지들조차 국민투표를 실시해 그들의 주권을 스스로 정하도록 했다.
식민지라는 단어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으며, 오히려 고종대제 해청이 말한 민족자결주의가 떠올랐다.
그로 인해 잠시지간 평화가 구축되었다. 사람들은 총부리를 겨누는 대신, 자신들의 토지를 일구고 산업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 질서하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어쩌면 자본주의, 자유주의와 공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고려는 독특한 국가였다. 누구보다 보수적인 것처럼 보이는 황제국이면서도, 노동자 인권은 누구보다 좋았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아침에는 김치볶음밥을 먹고 출근한 뒤, 오전 노동 이후 점심으로 겹빵이나 냉면, 국밥을 먹고, 차 한잔 걸친 뒤에 오후 노동을 하고, 적어도 일곱 시엔 퇴근하여 집에 가 저녁을 먹고 애들과 공을 찼다.
아무리 잉글랜드와 소비에트에 사회주의 낙원이 도래했다고 해도, 노동자들이 저 지경까지 대우받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고려도 명암이 있었다. 아주 안 좋은 기업가들이 있었고, 악랄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허나 자유로운 언론과 시민의식은 그들의 자정작용을 이끌었다. 상호존중, 미덕, 도덕과 같은 구태의연해 보이는 것들이 왜 인류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미덕이라 불리는지 그들은 직접 증명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도 고려는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최소로 했다. 물론, 자유무역을 통한 시장경제체제를 강권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긴 했지만, 그것은 고려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가성 요구였다. 잉글랜드와 소비에트가 지금처럼 폐쇄적 경제를 유지한다면, 고려는 그들이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둘 나라였다. 두 대양에 둘러싸여 있는 패권국은 국내 여론 때문이라도 괜한 시비를 트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이 자신들을 좋지 않게 보는 이유는, 자신들이 먼저 주변국들을 선제적으로 위협하여 고려가 주도하는 세계 평화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일 터였다.
고려는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 질서와 국제법에 누가 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
‘우리들만 얌전히 지낸다면, 어쩌면 혁명 이후의 항구적 평화도 가능할지도 몰라. 세계혁명을 포기하더라도 일국사회주의는 여전히 가능해.’
하지만 네드 러드는 차마 이 말을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내와 단둘이 있는 곳에서조차.
그녀의 아버지는 왕정의 하수인들에게 맞아 죽었다. 샬럿이 아무리 자상하고 아름답고 지적이며 현명하다 하더라도, 반혁명적이고 반동적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냉혈한지는 러드도 익히 아는 바였다. 그녀는 열렬한 바뵈프주의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
그러니 그는 물음을 속으로 삼켰다.
‘바뵈프 서기장. 당신은 고려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그것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고려가 침체를 맞아 골골대는 순간부터, 분명히 그는 이를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기회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자신으로 하여금 스코틀랜드와 에이레, 그리고 뉴펀들랜드와 누아 에린을 모두 노리게 책동하는 것일 테다.
자신은 루테니아와 리보니아, 폴란드를 노리면서.
단계적으로 조금씩 영향력을 넓히고 한 땅 한 땅씩 공산화시켜 나간다면 언젠가 고려의 패권을 꺾어버릴 수 있다고.
허나 이게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해. 당신은 나와 달리 처음부터 엘리트였으니 똑똑하고 유능하지. 그러니 모르는 것이 아니잖아.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기에.’
샬럿이 그의 품을 파고드는 순간에조차, 네드 러드의 눈은 불안감으로 일렁였다.
* * *
그리고 네드 러드의 의문은 이틀 뒤에 풀렸다.
마치 준비했다는 듯, 4계의 회동이 끝나자마자 동쪽에서 온 귀빈이 크레믈에 도착했다.
바뵈프 서기장이 직접 나가 마주하진 않았다.
온 사람은 소련의 외무장관에 해당하는 외무총장이었을 뿐이니, 벨라예프 외무장관이 그를 맞이했다.
물론 접견 도중, 귀빈은 크레믈에 있는 두 공산주의 지도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이 모시는 대총통의 명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인사하시지요. 이쪽은 러드 위원장. 위대한 잉글랜드 인민공화국의 위원장이시오.”
한참 귀빈과 악수하며 웃던 바뵈프가 문득 러드에게 말했다. 그 모습이 이전과는 달라도 한참 달라 적응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외무총장 진효산이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중화제8제국 외무총장 진효산을 대면하는 앞에서, 네드 러드는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한 두 나라는, 마침내 그들 최후의 적을 두고 아주 잠시간 손을 내밀어 붙잡기로 한 것이었다.
러드는 불가침조약으로 서로의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그들의 역사적인 협정에서, 오히려 아주 강렬한 포성의 소리를 들었다.
시곗바늘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