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과거의 잔재(2)
바투뭉케, 혹은 다얀 칸으로 불리는 몽골의 대칸이 있었다.
이제는 오로지 역사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인물, 허나 역사 속에서도 그의 이름은 그리 작지 않았다. 고려에서도 그를 꽤 비중 있게 다루었으니 정규교육을 충실히 배운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보고 단번에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치세 초반은 찬란했다.
바투뭉케는 한창 강력해지는(혹은 적어도 겉보기엔 그렇게 보이는) 명을 박살 냈다.
친정을 하던 명의 황제는 포로로 잡혔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당했다.
유목민들이 한창 득세한 뒤 중원을 정복하면 그대로 중원은 이민족 황조가 들어서곤 했다. 습진균의 말도 아주 일부는 맞았다. 한족은 신음할 것이고, 몽골인들은 대원대몽골국의 영광스러운 치세를 또 한 번 펼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은 작은 관문이라고 생각했던 조선을 치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조선의 의병과 영명한 군주 덕에 북원의 공세는 멈추었다.
멈추었다 뿐일까, 갑자기 바다에서 정체불명의 무리가 다가와 옛 구원(舊怨)을 떠들며 대칸의 목을 잘라버리기까지 했다.
위대한 대칸이 그렇게 허무하게 간 순간, 북원과 같은 유목인 황조의 몰락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사회는 걸출하고 야심만만한 지도자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바투뭉케의 빈자리는 바르수볼라드니, 보디 알릭이니 하는 후계자들도 온전히 채울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들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쩌면 몽골을 비롯한 동아시아 북방의 유목민들은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당대의 문명은 그나마 ‘상식적으로’ 굴러가는 상황이었고, 아직 말을 타며 화살을 쏘는 자들의 시대가 온전히 저물었다고 평가하지 못했다.
허나 거대한 체제와 체계, 압도적인 문명을 건설한 당대 최강국에게 애시당초 그런 원한을 산 것 자체가 그들의 업보이자 원죄였다.
고려인들은 대칸을 죽이고 그 목을 제사상에 바친 것도 모자라, 황조를 와해시켰다.
한때 전 세계를 호령했던 위대한 부족과 민족은, 이제는 그저 양과 염소, 말의 우유를 짜며 돌아다니는 거렁뱅이들로 전락했다. 몽골인들은 심심하면 고려의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옥저와 고려 못지않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던 러시아에게 토벌당했다.
그들은 마치 역병과 같이 취급당했으며,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무언가를 만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몽골의 서쪽에서 그들과 비슷한 혈통을 가진 준가르의 마지막 발악 아닌 발악이 있었지만, 그 또한 허무하게 스러졌다. 그들은 미치광이 차르에게 철저하게 도륙당하며 루스인들에게 저지른 업보를 청산당했다.
바다와 화약의 시대가 도래함과 동시에, 유목민의 시대는 이미 사라진 것이다.
보르지긴의 오복(성씨, 부족명)을 이은 ‘엔케바토르’가 살아온 삶도 그러했다.
선대로부터 보르지긴의 혈통, 황금씨족의 직계를 물려받고 그 이름을 쓰고 있더라도 엔케바토르가 대단히 화려하고 존귀한 삶을 살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칸이었다. 하지만 그게 별거인가. 그저 직접 젖을 짜지 않고, 누군가의 간단한 시중을 받는다는 것, 그게 한때 황금씨족이었던 자가 가진 존귀함의 전부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보르지긴이고 나발이고, 몰락해버린 원의 잔재 속에서 유목민들은 다시금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독자생존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들이 사는 초원이 절대 풍요롭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약탈경제 없는 유목민이란 대단히 서글픈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라면,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엔케바토르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들의 선조가 이 구대륙에 불러일으킨 공포와 끔찍한 참상을 생각해본다면, 그 업보는 너무 당연하게 돌아온 것이다.
결국 수백 년의 세월 끝에 정의가 승리했으며, 악인인 그들은 마땅한 단죄를 받은 것이었다. 속죄는 불가피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가혹해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몽골은 한창 기세가 팽창할 때의 옥저에게 병합당했다.
의외로 그 시절은 그리 나쁘진 않았다.
복수의 시간이 흐른 뒤, 예맥한계 국가들은 딱히 몽골에 관심이 없었다.
과거사 문제도 해결되었다. 피해자가 먼지 나게 가해자를 두들겨 빈사 상태로 만들었으니 어쩌면 후련함까지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때 당시엔 살기 괜찮았다.
옥저는 나름대로 그들이 연명할 수 있게 교역을 허락했고, 그들의 핵심 모피산업을 위해 몽골 사냥꾼들의 손을 빌리기도 했다.
자국에 편입될 운명이라 생각한 이상, 과거의 불필요한 매듭은 잘라 내 버리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다만, 옥저의 내란, 즉 오기의 난 때는 몽골 부락들이 모두 긴장했다. 옥저 민족주의자들의 만행은 몽골인들도 느끼고 있었고, 그 여파가 부족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시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오기의 난은 빠르게 종결되었고, 옥저의 극성 민족주의도 자정작용이 되어 많이 사라졌다.
허나 그 이후 오로지 돈의 논리가 몽골을 지배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가 오며 끝없는 침체가 옥저를 비롯한 국가에 닥치자 오히려 인심은 옛날보다도 각박해졌고 흉흉해졌다.
사방에서 마적 떼가 다시 먼지를 내며 돌아다녔고, 범죄자들이 초원과 수림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몽골인들도 큰 고통을 받았다. 몽골인 범죄자들도 많아졌고, 선량하게 살아가던 부락이 다음 날 아침 시체 더미로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청년이었던 엔케바토르는 무언가 해야 했다.
엔케바토르는 몽골 독립국을 꿈꾸었다. 몽골인들의 나라를 세워, 어떻게든 그들의 문제를 그들이 풀어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는 당시 자신을 지배하던 옥저의 왕궁에 가, 어떻게든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다. 옥저도 마적과 여러 가지 범죄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을 것이다. 일정 부분의 이득을 공유한다면, 어쩌면 몽골의 독립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엔케바토르는 그 일정 부분의 이득을 옥저에 주는 것이 사실상 몽골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을 다시금 체감한 채로 터덜터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 광산 기업들의 입김이 있었는지, 옥저에서는 상당히 많은 광물을 세금의 형식으로 중앙에 납부하길 원했다. 구리와 석탄,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광물에 대해.
허나 몽골이 그 광물을 제련하는 기술이 자체적으로 있겠는가. 당연히 없었다.
그것은 즉, 옥저 기업들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몽골이 독립국이 된 이상, 옥저는 고려가 제시해놓은 세계 표준보다는 훨씬 더 열악한 노동 환경을 몽골에게 반쯤 강요할 것이고, 몽골은 말이 독립국이지 경제적 주권을 빼앗긴 채 다시금 속령으로 전락할 것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몽골이 옥저의 허락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한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투쟁을 시작했다.
엔케바토르는 부족민들의 마땅한 권리를 위해 저항했다. 옥저도 이를 좌시하지 않아, 진압 병력을 보내 그들을 두들겨 팼으며 엔케바토르를 세 번 체포했다. 아무리 칸이 나름대로 존중을 받았다곤 하나, 거듭하여 체포될수록 형량이 길어졌다.
엔케바토르는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솔빈 인근에 있는 감옥에서 오랫동안 복역해야 했다.
절망스러운 상황, 하지만 그 속에 길은 있었으니.
엔케바토르는 솔빈의 감옥에서 한 의문의 사내를 만날 수 있었다.
옥저의 최고 등급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든 그 의문의 고려인은, 엔케바토르와 대면한 자리에서 고려 황제의 서신을 건네주었다.
해청, 그 위대한 황제의 이름.
당금 천하에 그 휘를 모르는 자가 있겠는가.
뇌전병을 앓지만, 오히려 그 병은 황제의 명민하고 대단한 두뇌의 부작용이라.
또한 그의 자애로움은 만물, 만국의 군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세계의 대칸인 그가 보낸 서신을 받고 읽어본 엔케바토르는 그 순간 눈이 개안함을 느꼈다.
황제의 서신에서조차 존엄을 담은 광채가 번쩍였다.
본래 엔케바토르는 아주 당연하게도 고려가 몽골에 악감정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의 파멸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왕씨의 혈통이 존재하는 당금 황실은 더더욱.
그랬으니 신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으며 어마어마한 너비의 태평양을 건너 기어코 북원과 전쟁을 하러 온 것이었고, 이자윤을 통해 맨땅에 옥저라는 나라를 세워 끝까지 그들을 괴롭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범인의 착각일 뿐이었다.
오로지 옹졸한 자가 아득히 먼 방향을 바라보는 거인의 시야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해청은 먼 과거의 일에 족쇄처럼 얽매이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미래를 바라보았다. 고려의 미래만을 보는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를 포함한 이 곤여의 미래, 인간의 미래를 염려하는 대칸이었다.
그런 시야가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는, 겨우 일개 부족의 칸 따위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가치관이 사적 영역, 민족적 영역을 초월해야만 비로소 다다르는 경지일 터다. 황제는 그들의 태조신으로부터 가호를 받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희망을 찾은 엔케바토르는 저항자에서 모범수가 되어 하루빨리 복역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한다면 제도로 갈 수 있을 것이고 마침내 그곳에서 대칸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 * *
갑작스럽게 찾아온 희망은 갑작스럽게 떠났다.
그의 복역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황제가 붕어했다.
엔케바토르는 그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감옥 속에서 얻은 희망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훨씬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침체에 시달리던 옥저가 몽골령을 중화제8제국에 매각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
처음 엔케바토르를 포함한 몽골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아차리진 못했다. 심지어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듯, 옥저의 지배를 그리워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중화제국은 고려의 입김이 닿지 않는 나라였다. 고려를 상국으로 받드는 옥저가 여러 가지 인권적 측면에서 상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은 아무 눈치도 보지 않았다. 심지어 자국민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중화의 총통과 중화주의 그 자체를 위해 굴러가는 나라였다.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정책의 모든 목적이 그러했다. 다른 의미로 도덕을 초월한 나라였던 것이다.
이들이 옥저와 어떤 조건을 거래했는지 자세히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엔케바토르는 대략적으로 그가 독립을 요구할 때 옥저 조정으로부터 제시받은 안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옥저는 단지 이 땅에서 나는 원자재가 제대로 옥저에 흘러들어온다면 골치 아프고 비루한 땅을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팔아넘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엔케바토르와 같은 저항 세력들이 있으니 더더욱.
그리고 중화제국은 그 불가능할 것 같은 조건을 흔쾌히 수락했을 터다.
대체 어떻게 그 물량을 맞춰줄 것인가? 엔케바토르는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진.
중화제국령 몽골이 된 이후, 몽골엔 수많은 ‘게토’들이 생겨났다. 불타버린 비운의 공화국은 악마화되어 바닷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후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나 보다.
게르식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단어 발음만 비슷한 게토 생활은 굉장히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강제적 수용 절차에 많은 몽골인들이 저항했다. 엔케바토르도 마찬가지였다. 무력 투쟁을 불사하며 총탄을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중화인들이 몽골인들을 제압할 만반의 준비를 다 했던 것과 달리, 아직도 몽골의 화력은 총기 몇 자루 정도가 다였다.
어린애 팔목 비틀 듯 몽골의 저항을 진압한 중화제국은 넓은 땅에 있는 수많은 부락들에게 총과 대포를 겨누고 그들을 한곳으로 몰아넣었다.
저항하는 자는 죽었다.
충격적일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이게. 중화제국은 본보기 삼아 몇 개의 부족을 완전히 씨가 마를 정도로 살육했다.
거대한 독구름이 바람을 타고 이동했다. 그 독구름이 지나가자 수레바퀴보다 작은 어린아이조차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런 학살은 몽골인들에게도 처음 겪는 수준의 잔혹한 학살이었다.
저항하고자 하는 자들도 독기에 중독되어 처참하게 죽어간 자들을 보면, 공포에 질려 다른 나라로 도망치거나 험준한 알타이나 항가이산맥 등지로 숨거나 덜덜 떨며 자비를 구걸해야만 했다.
엔케바토르의 부족도 항가이산맥에 숨어들어야 했다. 엄청난 수의 부족민들이 굶어 죽었다. 산맥은 초원보다도 더 가혹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나라로 떠난 자들도 형편이 좋진 않을 것이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유목민들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비를 구걸한 자들은 가장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
붙잡힌 대다수의 부락들은 신설된 게토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그 게토 옆에는 노역소가 세워졌고 몽골인들에게서 노동력을 가혹하게 뽑아내기 시작했다.
습진균은 대단히 영리하고 똑똑한 자였다. 내전 시기, 자신부터 노역소에 있어 본 적이 있었기에 그는 노역소, 노동수용소 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화의 전권을 쥐고 있는 그는 노역소를 효율적으로 가다듬었다. 노역소에 근무하는 자들은 인권이 거세당한 채 하나의 부품과 도구가 되어버렸다.
습진균은 철저하게 분업화된 고려의 상률공정식 공장에 큰 영감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을 테다.
허나 상률공정이 증가된 이윤을 근무자들에게 나누어주거나 혹은 다른 복지를 베풂으로써 그 비인간적 공정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켰던 것과는 달리, 습진균은 굳이 몽골 노역인들의 불만을 해소시킬 이유를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훨씬 더 잔혹한 공포를 ‘면제’해 줌으로써 보답을 주었다.
노역소는 몇 단계가 있었다. 중화제국에 빨리 항복하거나 협력하는 1급 노역소는 그나마 대우가 좋았고, 저항을 한 자들이 있는 5급 노역소는 멀쩡한 사람이 금세 반병신이 되거나 죽기까지 하는 곳이었다.
또 불만을 가진 자는 밑으로 내려갔고, 동료나 같은 민족의 불만을 고발한 자는 위로 올라갔다. 습진균은 그들의 내부 분열을 꾀했고, 완장을 찬 몽골인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비도덕적이나, 철저하게 효율적이었다.
이렇게 구리와 석탄 등의 광산에 지어진 몽골노역소는 엄청난 양의 금속을 뽑아내어 옥저에게 약속한 분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잉여분은 중화제국에게 전달했다.
사실 몽골에 게토와 노역소 체계를 전격적으로 도입하기 전부터 이미 중화제국엔 이런 노역소들이 많았다.
불순한 정치범들, 빨갱이들, 우량한 한족이 아닌 자들을 국가에 봉사토록 하기 위한 시설들이 중화 전역에 깔려 있었다.
엔케바토르의 부족도 결국 중화제국에게 붙잡혔다. 아예 이 땅을 버리지 않는 이상 언젠간 이럴 운명이었다. 벗어나고 싶다면 떠나야 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유목민들은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홀연히 떠나진 못했다.
유목민들에게도 나름대로 이 땅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특히나 테무진의 유산을 받드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쿠릴타이가 열리지 않은 지 한참 되었더라도 카라코룸을 영영 버리고 떠나가라니.
그건 정말이지 힘든 선택이었을 터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선택을 내렸어야 했다.
엔케바토르는 부족민들이 거칠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가장 큰 ‘카라코룸’ 수용소로 끌려갈 예정이었다. 위대한 제국의 옛 수도는 중화제국에 의해 수용소와 창녀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부족 남자들은 수용소에서 노역하다 죽을 운명이었고, 여자들은 창녀촌에서 병마에 시달리다 죽을 운명이었다.
엔케바토르의 직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칸 대접이라도 해 주어 안락한 독방을 주었던 옥저와는 달리, 중화제국은 오히려 그를 끔찍한 곳으로 내보냈다. 그의 가족이라고 해서 특혜를 받지 않았으니, 아들과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이 노인의 삶의 끝이었을 터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무역을 위해 조선과 옥저에 가 있었다가 여러 가지 사태로 소식이 끊겼던 맏아들 앙크바야르와 부족 청년들이 모피 대금을 전부 다 화기로 바꾸어 와 국경을 돌파했다.
그리고는 엔케바토르를 붙잡은 중화제국군을 공격함으로써 많은 부족민들을 구했다.
험한 꼴을 보기 직전이었던 엔케바토르와 부족들은 겨우겨우 기회를 얻었다.
“서쪽으로 도망가십시오. 초승달이 보이는 곳, 코란을 읽는 자들이 보일 때까지 도망가셔야 살아남습니다!”
앙크바야르는 아버지와 형제들, 조카들을 구한 뒤 최후의 저항을 이끌었다.
중화제국에게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최후의 대탈출을 위한 시간 끌기였다. 소수의 몽골인들은 그때 투르판과 야르칸드, 티베트, 옥저 북서쪽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앙크바야르는 처참하게 죽었다.
장남의 죽음을 전해 들은 엔케바토르는 서쪽으로 도망치라고 말을 해 놓은 부족과는 정반대의 방향, 동쪽으로 향했다.
옥저가 아닌 조선으로. 오로지 황제의 마지막 안배만을 믿고.
* * *
― 허억, 헉!
노인은 악몽에 일어났다. 땀이 흥건했다.
옆에서 엔케바토르를 돌보던 여인이 노인의 신음 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그녀는 익숙한 듯 물 한 잔을 드리고 수건을 들어 노인의 땀을 닦았다.
앙크바야르의 딸이자 엔케바토르의 손녀였다.
무역을 자주 하는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있던 그녀는 다행히 부족에 들이닥친 화를 피했지만 아버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란투야는 할아버지의 여정에 동참했다.
목숨을 건 여정에.
황금씨족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운 손녀딸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지만, 엔케바토르는 아버지를 비참하게 잃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투쟁을 하는 중이었다.
“미안하다, 아가.”
“저는 괜찮아요.”
오랜 수감생활과 근래의 중화제국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젊음도 가버린 지 오래였으니, 노인은 이미 초원의 선조들이 있는 땅에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긴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제 겨우 손에 무언가가 잡혔으니, 그는 동포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 속죄를 하기 위해서라도 제도에 가야만 했다.
더 이상 잠에 들지 못한 그는 낡은 오동나무 관을 쓰다듬었다. 노인 하나가 들어갈 만큼 큰 관은 몽골에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심지어 조선의 눈을 피해 안가에 숨어있을 때도 버리지 못했다.
실로 거추장스럽고 무거워 고려인들 또한 이 몽골 노인네가 대체 왜 이걸 굳이 비행기에 싣고 탐라까지 와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엔케바토르는 관을 쓰다듬었다. 선조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그는 작게 뇌까렸다. 자괴감일까, 이 모든 것을 계획한 당사자조차도 아직은 그 감정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허나 그럼에도 노인은 마지막 여정 동안 사력을 다해 관을 지킬 것이다. 제도에 갈 때까지.
그의 관이 민족의 목숨이었으니.
― 위이잉
바다에 이어 하늘을 지배하는 민족, 고려의 탐라 비행장에서.
엔케바토르는 초원의 별들께 거듭하여 용서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