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우리 시대의 평화
워싱턴은 정녕당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권 의원한테 정녕당에 좀 오시라 그래 주게.”
― 알겠습니다, 당하.
중서성 상임위원회도 끝났을 테니,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다. 워싱턴은 그 말을 마치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당하.”
문을 두어 번 두드린 뒤, 젊은 비서관이 들어왔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만, 버 장군을 만나보셔야 합니다.”
워싱턴이 이마를 쳤다.
“아 그렇지. 깜빡하고 있었네. 내 죄송스럽구만. 빨리 드시라 전해드리게.”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워싱턴도 자신의 기억력을 맹신하고 있진 않았다. 특별히 치매 증상은 없었지만,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정신건강에 대한 관리는 철저하게 해야 했다.
그래도 빠릿빠릿한 비서관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입헌군주국과 내각의 특성상, 시중 휘하의 비서실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황제와 추밀원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고려제국의 특성상도 그랬다.
다만 핵심적인 업무를 수행할 비서관(옛날엔 지사라 불렸다.)들은 편제되어 있었는데, 워싱턴은 그 와중에 정책기획과 연설을 담당하는 정약용이란 젊은이를 특히 아꼈다.
“그. 약용이 자네.”
“예. 당하.”
“연설문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고려에서 연설이란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의원내각제하에서는 대체로 여대야소의 형국이 많았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정에 성공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연정을 위해서라도, 또한 앞으로 정책을 해나갈 때도 다른 당의 의원들을 설득하고, 더 나아가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특히나 무전기의 시대가 되니 이런 연설의 중요성은 더더욱 커졌다.
시중의 말은 가감 없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국가정책이나 외교적 행동의 정당성도 설파할 수 있었다.
“…준비 중입니다.”
젊은 청년이 처음으로 난색을 보였다. 그가 준비 중인 연설문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시중도, 비서관도 잘 알았으니 워싱턴은 더이상 독촉하지 않았다.
저 친구는 연설문을 뽑아내는 속도는 늦었지만, 완성된 결과물은 대단히 흡족했으니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될 일이다.
게다가 아직은 연설문이 있어도 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하, 당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약용이 나가자 호탕한 호걸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워싱턴도 미소를 띠었다. 학교의 먼 후배이자 자신의 제자이며 현직 제국육군 참장인 애런 버는 저 멀리 개경에 간 뒤에 감감무소식이었다가 최근 다시 제국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선거에서 승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물어보진 않으시겠지만, 저도 당하를 뽑았지요.”
“고맙네. 자, 앉지.”
시중은 그에게 공적으로 하지 못할 질문들을 위해 정녕당에 오라고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새어 나가지 않아야 할 말들이 있었다.
“저녁은 드셨나?”
“아직 안 먹었습니다.”
“그럼 냉면 어떤가? 정녕당 숙수가 냉면을 정말 잘해. 심심하니 맛있네.”
“저녁으로 냉면요? 그건 좀….”
“만두라도 넉넉히 시켜주겠네.”
“그렇다면 사양 않겠습니다.”
워싱턴은 전화기를 다시 들어, 집무실에 음식을 시켰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김치만두 열 개를 두고,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했다.
“조선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네.”
“저보다는 강 사령관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애런은 자신의 전 상관인 개경사령관을 입에 담았다.
“강흠, 그 친구는 뭘 물어보면 항상 열심히 하겠다고 해. 나는 열심히 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야. 개경 주변은 제국도 아니라 뭘 할 수도 없잖는가. 나는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길 원해.”
애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감 없는 말이라면 그가 또 잘했다.
“말씀하십쇼.”
“…자네는 조선이 중화제8제국과 전쟁한다면 이길 수 있으리라 보나?”
워싱턴도 군인답게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덕분에 애런은 갑자기 사레가 들리는 듯 컥컥대었지만, 재빨리 냉면에 딸려 나온 육수를 마셔 속을 진정시킨 뒤 말을 골랐다.
격의 없는 그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발언하는 것의 무게감을 잘 알았다.
“당하께선 어떤 것을 궁금해하십니까?”
“유사시 아국의 지원을 받은 조선이 중화제국을 무력화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네.”
애런은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신중하게 대답을 했다.
“조선이 중화제국을 공격한다면 승리할 확률이 낮습니다만, 반대로 중화제국이 조선을 공격할 때는 조선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정치인들이나 군사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말로는, 조선은 충분히 중화제8제국을 이길 수 있다 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감정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직접 개경에서 복무했던 애런을 따로 불러 현지 사정을 캐내려 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애런은 군사 전문가들과는 조금 판이한 대답을 내놓았다.
애런 버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조선군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장병 개개인의 역량도 뛰어나고 일부 부대는 고려군과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지요. 장비도 아국과 규격이 호환되는 것을 주로 하니, 우리와 합동 작전을 하기도 쉽습니다.
해군은 굉장히 강력해, 만약 우리의 태평양함대가 황해에서 작전을 수행한다면 충분한 화력지원 및 근접경호를 수행할 역량이 있습니다.”
“그렇지.”
“허나, 조선군의 단점 또한 명백합니다.”
애런은 고심하는 척하면서 냉면을 서둘러 입에 넣었다. 불어 터지기 전에 한 가닥의 면발이라도 더 넣어야 했다. 이제부터 할 말은 길었다.
“조선군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요.”
애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시다시피 조선은 꽤 오랫동안 문치의 기풍이 깊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지.”
유학의 영향인지, 혹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독특한 관습인지.
무장 출신인 김상민이 삼별초를 이끌고 고려를 세운 것처럼, 무장 출신인 이성계가 가별초를 이끌고 조선을 세웠다.
하지만 두 나라의 이후 행보는 완전히 달랐다. 고려는 여전히 숭무정신을 지키고 있었지만, 북진하여 심양을 정벌하고,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고, 명과의 전쟁을 한 번 치르며 나름대로 군사적인 경험을 쌓아왔던 조선은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자 그 교훈들을 많이 잊어버렸다.
조선의 군대야 지금도 여전히 강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군대를 고려만큼이나 지원하고 응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부정할 것이다.
군대는 강력하고 많은 무기에 의해 좌지우지되긴 했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자들은 여전히 인간에 불과했다.
“국가 권력은 대놓고 군인을 무시하지요. 그 옛날 이윤신 도원수가 괜히 북려로 오셨겠습니까? 그때와 달라진 것도 사실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무관과 장병을 업신여기는 풍조도 사회에 만연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굉장히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으음….”
“조선의 징병제는 그 많은 국가적 예비군 체계를 갖추는 것에 일약하지만, 또한 군제의 문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말로만 평등한 국가라 하면서, 가진 대감집 자제들은 병역을 이행하지 않고 못 가진 자들만 군대에 나아가 최전선에서 홀대받으며 복무하니, 저들이 싸울 맛이 나겠습니까?”
“…괜히 외인부대에 조선인들이 몰리는 것이 아니겠군.”
“예. 외인부대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녹봉도 두둑하고 또한 대우가 좋으며 고려인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당연한 일인 셈입니다.”
워싱턴은 착잡했다. 대전쟁을 겪고 강력하고 위엄찬 군대를 가지고 있는 도이치가 프리드리히 2세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딱딱하고 보수적이며 계급사회적이라 내부 극단주의자들의 발호에 진통을 겪고 있다면, 조선은 비교적 온화하고 평화로웠고 극단적 이념에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대신 군대가 약해진 모양이다.
최고의 전력을 가진 두 우방국이 이러니,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겠는가?
워싱턴은 진지하게 이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은 나라 자체는 잘사는데, 나라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애런이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이어나갔다.
“아국이 군납비리로 한번 경을 친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조선도 그걸 보고 부랴부랴 군내 비리를 수사했는데, 잡힌 건수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제가 개경에 처박혀 그동안 곁에서 슬쩍 본 것만 해도 몇 개가 넘는데.”
워싱턴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안 되지.”
고려에 사는 사람들은 잘 자각하지 못했지만, 고려는 이 시대에서 유난히 깔끔을 떠는 사람과 같았다.
누군가, 혹은 황실은 모든 사회적 분야에서 고려가 ‘청결’하길 원했다. 이 국가 건전성과 도덕의식에 대한 집착은 편집증적일 정도였다.
내부의 자정작용도 활발하고, 큰 문제가 생긴다 싶으면 시기적절하게 통제 가능한 범위의 사고가 일어나, 수습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쌓기도 하고. 대체 이런 나라가 어떻게 있단 말인가? 주님이 돕지 않는 이상에야.
워싱턴은 자기가 시중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맞습니다. 그래도 군의 사기적 측면에서 조선군은 썩 양호하지가 않단 것이 소장의 의견입니다.”
“…조선이 이 정도면, 백제와 옥저는 더욱 그렇지?”
“연합훈련 때 본 바가 다지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백제는 강화와 맞붙어 있는 처지라 실전경험과 기세가 예리하나 어차피 수의 한계가 존재합니다. 또한 옥저는… 몽골까지 팔았지요. 오기의 난 이후에 군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지 않겠습니까?”
애런의 말에 워싱턴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자네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자네는 중화제국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들리네.”
“그놈들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자그마치 몇십 년간 내전을 치른 놈들입니다. 또 애는 얼마나 싸지르는지 인구가 줄 법도 한데, 오히려 늘어나더군요.”
“습 총통이 계획생육정책을 실시하니까.”
“예. 완전히 미친놈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강력한 국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놈들이죠. 나라의 부강함이라는 마약에 취해 있다고 봐도 됩니다. 실제로도 그 뭐 빙독인가 하는 것들을 쓰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빙독이라는 말에 워싱턴이 콧김을 뿜었다. 이미 끝난 사건이라 더 이상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그는 전 1황자 해완의 경우도 알고 있었다. 빙독은 고려제국과 여러모로 인연이 좋지 않은 약물이다. 반면 중화제국은 빙독의 엄청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오직 각성 목적의 용도로 이것을 남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중화제국군의 군대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마약의 부작용으로 일찍 죽더라도, 전장에서 활약하다 죽으면 국가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
[귀댁의 장정은 중화 건아의 용맹을 보여주었소!]
집에는 이딴 편지 한 장이 달랑 도착하겠지만, 뭐 어떤가. 애는 또 낳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약물 하니, 또 다른 것들이 줄줄이 생각이 들었다.
겨자 기체와 같은 독소 공격. 이것에 어떻게 대항하는가.
아직 중화제국은 자신들의 내전에서밖에 그 무기를 쓰지 않았다. 다가오는 대리와의 전쟁에서 그 무기를 꺼낼지, 혹은 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개발한 무기는 언제고 다시 쓸 수 있었다. 특히나 그 무기의 위력이 대단히 위력적이고, 비대칭적이라면 더더욱.
군사 전문가들과 참모들은 방독면의 생산을 늘리고 부대마다 제독(除毒)을 담당하는 부대를 편성하자고 했지만, 그건 군사적 방책에서의 대응이고 정치인으로서는 저런 비인도적인 무기가 애초부터 전쟁에서 쓰이지 않게 해야 했다.
하지만 이 속칭 인도주의적 문제를 강요하기도 어려웠다.
중화제국이 쓰는 독소는 일반적인 화학 공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적 독소거나 혹은 너무 만들기 쉬워 제재의 가능성도 미약했다. 요컨대, 칼을 만들지 말라고 제철소를 제재하는 꼴이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물론 그들이 고려와 그 동맹국들에게 독소 공격을 가한다면, 고려와 동맹국들도 그와 동일하게 갚아줄 명분이 생기는 셈이지만 세계 패권국이 저 몹쓸 중화제국과 똑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족쇄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족쇄를 믿고, 더욱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다면….’
중화제국과 공산당의 광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른다.
그들이 갑자기 제정신을 차리고 다 함께 동요를 부르며 온 세상이 평화롭게 되도록 같이 어울리며 살아가자고 주장할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모두가 파멸의 고함을 지르며 문명을 끝내기 위해 달려갈 수도 있는 노릇이기도 했다.
워싱턴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해놓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순방을 좀 가봐야겠군. 하늘눈 국가들은 전부 다.”
“가시면 분명히 찌르레기와 스라소니를 수출해달라고 성화를 부릴 겁니다.”
당연히 동물들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아닐 터. 워싱턴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냉면을 다 먹은 애런 버가 물러났다.
“식사 잘 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당하.”
“나중에 또 봐요.”
버 장군이 뒤로 물러나자, 마침내 권남도의 지긋지긋한 얼굴이 불쑥 집무실을 비집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