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위태로운 시대(5)
정쟁.
사실상 인류가 동굴에서 갓 불을 피울 때부터 지금까지 역사와 사회 속에 존재해왔던 유구한 싸움이다.
하물며 인간이 아닌 짐승들도 무리 안에서 서열을 나누고, 그 서열의 최상층에 도전했다. 무리생활을 하는 유인원, 늑대, 고래들처럼.
그러니 이는 인간 본성의 이전에, 생물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고로, 상민도 다른 사회 주체들의 정치권력을 향한 암투를 막을 순 없었다. 신이 아님에야 무슨 수로?
물론 막을 순 없더라도 통제할 순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강력한 지도자와 그에 걸맞는 힘이 필요했다. 다른 이들의 소소한 불만 따위는 쉽게 짓뭉갤 만한 능력과 위엄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상민이 황제로, 가면 시중으로, 그리고 지금처럼 그 뒤로 더 물러나면서도 끝까지 권력을 완전히 놓지 못했던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간악한 누군가가 제국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휘두를 행동의 여파가 상당히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었다. 특히나 끝맺음이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에는 더더욱.
상민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다가올 대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마저도 오직 자신의 부재에 대한 대비책 중 하나였다.
정치권력에 대한 투쟁? 좋다. 필연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권력에 대한 유구한 투쟁의 방향이 정당하고 올바르며, 과열되지 않고 타협적이게 되길 원했다.
상대방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교과서로 배운 원역사 조선 말의 혼란스러운 붕당정치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을 대한민국의 수많은 혼란스러운 정쟁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고려 제국 정치인들의 인식 기저에 하나의 믿음이 깔리길 원했다.
애국의 방향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제국의 정치인들 대부분은 애국자라는 것을.
호경당처럼 중서성을 해산시키고, 시중을 대막리지로 바꾸어 모든 권력을 집중하겠다는 주장들이 어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보고 견제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사태 같은 경우도 생겨나는구나.’
상민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나 지금 이 사건은 상민이 허락한 제국 정치의 스펙트럼 안에서 존재하던 기존 제국의 정치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웠다.
‘극우나 극좌만큼이나 앵무새도 한심하지.’
공포를 역이용해 마녀사냥을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여전히 사회 일각에서는 비슷한 논리가 횡행하곤 했다.
이런 급격한 논리의 비약은 건전한 토론과 타협의 방법을 막음으로써 원활한 정치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매카시즘이 미국을 얼마나 후퇴시켰는지 생각해본다면, 그 목록으로 인해 잡아들일 수 있었던 극소수의 간첩도 딱히 이득은 아니었다.
대국이면, 대국의 정치를 하라 이거다. 좀팽이처럼 서로 이상한 트집 잡아서 싸우지 말고.
특히 상민은 개인적으로 화가 잔뜩 났다.
실상 지금껏 간첩들과 싸우는 자들은 정보총국 대외국과 대내국, 여의국이 주였는데, 첩보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는 정치인 나부랭이가 감히 그들의 공로를 가로채 생색을 내고 있는 것처럼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를 역으로 빨갱이로 몰아 죽일까?’
그는 이내 진정했다. 벌레 하나야 밟아 죽일 수 있지만, 그것을 대충 죽이면 더 큰 일이 발생할 것이 뻔했다. 정치인들이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은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호경당의 사례와 같았다.
그러니 이 일은 교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지금까지 해온 다른 일들처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려에는 옛 자신의 나라처럼 외세에 많은 것들을 의지하려는 기풍이 아예 없었다.
분단도 되어있지 않았다.
또한 이웃한 전범국 둘과 전범을 저지르는 중인, 그리고 언젠간 저지를 것이 뻔한 바로 옆나라들에게 딱히 가스라이팅을 당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는 역사를 가져온 나라였다. 하물며 건국 초의 몽골에 대한 원한조차 기어이 갚아버렸는데.
반대로 지금은 전 세계가 고려에 어느 정도로 의지하고자 했다. 친려파가 없는 나라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국가의 국력은 가장 중요했다.
반대급부로 모두 신경 끄고 우리끼리 잘살자는 고립주의가 크긴 했지만, 그들의 논리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상민은 권남도의 엄빨목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교당 문제니, 교당이 알아서 해야지.”
상민은 목록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외부 유출이 금지되어 있으니 저 쓰레기통은 새벽호 내 소각장으로 직행할 것이다.
저 목록은 불쏘시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신, 한 가지는 확실히 전달하거라. 이번 일 잘 마무리 못 하면 신정책이니 뭐니 없다고. 지금까지 몇 년을 기다렸는데 다음 정권 때까지도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고.”
* * *
시중에 취임한 워싱턴의 주재로 정녕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현 시중직선제를 채택하고 있는 고려에서는 중서성 의원이 아닌 관료 상서들이 내각, 즉 상서성에 포진하여 있었다. 시중의 행정부 구성은 전문성을 최대로 추구하는 고려의 관습에 따랐다. 다만 2인자인 상서령은 시중 선거 때부터 함께한 당내에서 동반자적 관계의 정치인이 되었다.
취임을 한 지도 일 년이 넘었으니, 워싱턴도 이제는 국정운영에 좀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는 외무상서와 외무부 관리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으며 국제정세를 토론해 나갔다.
최근의 정치 동향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려인들이 자국 내에서 여러 사건들을 수습할 동안, 공산주의 세력은 굉장히 확고해졌다. 바뵈프 서기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고, 네드 러드의 잉글랜드 공산당도 잉글랜드 본토를 완전히 손에 쥐었다.
잉글랜드 왕가는 급박한 순간에 해외로 도피했다. 그들은 뉴펀들랜드로 도망쳐 훗날을 도모했지만, 그 훗날이 대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자연스럽게 알비온 연합은 해체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에이레는 아주 불안한 눈길로 자국 옆에 생겨난 공산국가를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처지가 된 셈이다.
그나마 에이레는 바다로 떨어져 있는 데다가 해군도 강하며, 고려의 최우방국이라 한시름은 덜었지만, 스코틀랜드는 그야말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곳의 사회 모순도 그리 좋지는 않았기에 공산 세력이 퍼져나갈 가능성도 농후했다.
“돌겠군. 대월 공산 봉기라. 중화제국은 어떤 반응인가?”
“자국 턱밑에 있는 나라니만큼 굉장히 예민합니다.”
“놈들이 또 이상한 헛짓거리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정보총국에서는 이를 빌미로 중화제국의 대리 침공 가능성을 굉장히 높게 보고 있습니다.”
“예방적 반공정책… 그렇게 씨부린다지? 그리고 우린 그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봐야 하고?”
대리국은 딱히 고려와 접점이 없었다.
내륙국이라 동맹은커녕 원활한 수교도 어려웠다. 하지만 워싱턴은 저렇게 중화제국의 확장적 행보가 이루어지는 것 자체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개입에도 국내정치가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이런 정치외교적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고려인 중 그 누구도 중화제국이 대리를 공격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서성과 중서성 예산처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동맹이었다면 행정부가 곧바로 움직이고 사후에 승인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런 문제는 초장부터 중서성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 정당 간의 관계상, 협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었다. 서로 만나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으르렁대는 것부터 시작할 테니까.
“권남도 이 친구, 대체 뭘 한 거야.”
시중의 입에서 정쟁에 대한 말이 나오자, 내각 구성원들은 모두 시선을 피했다. 워싱턴도 다시 주제로 돌아왔다.
“누산타라, 말레이, 싱가포라는?”
“누산타라는 그래도 양호합니다. 애초에 섬들 간의 결속력이 크게 없는 것이 이럴 때 득이 되었습니다. 뭉쳐서 단결해 무언가를 하기엔 그럴 역량 자체가 없다 사료됩니다. 말레이와 싱가포라 같은 무역 중심 국가들도 아직은 우리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습니다.”
돈이 오가는 나라들은 고려와 떨어지기 싫어한다. 이는 고려와 제일 멀리 있는 동남아시아도 그러했다. 동남아라고 전부 다 낙후한 것은 아니었고, 싱가포라와 같은 옛 유럽 식민지 도시들은 자유도시가 된 이후에는 제국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다행일세.”
워싱턴은 안경을 벗어 천으로 닦은 뒤 다시 쓰고는 물었다.
“안 그래도 꼰바웅 왕조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말이야.”
타웅우 왕조 몰락 이후, 버마의 땅에 새로 들어선 국가는 꼰바웅 왕조였다. 이 군사적으로 강성한 국가는 군사적으로는 대단한 능력을 타고난 신뷰신 왕의 지도 아래 광대한 영토정복전쟁을 벌였다. 특히 쇠약해진 이웃 아유타라의 영토를 침략해 서서히 잠식해 나가며 그 영역을 불렸다.
고려는 아유타라와 말레이반도 영유권 문제로 몇 가지 마찰을 빚어, 한동안 꼰바웅 왕조의 득세를 묵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꼰바웅 왕조가 득세한 이후에는 오히려 옛날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는 처지였다. 고려는 원래부터 민족 구성에 따라 국경선을 확약하길 원하는 나라였고, 자신은 몰라도 남들이 싸우면 한바탕 훈계하길 좋아하는 나라였다.
더군다나 현 꼰바웅 왕조와 군부가 지금 중화제국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된 이상, 그 훈계의 강도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으로 뛰어난 신뷰신 왕은 죽을 때까지 고려와 대적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놓은 상태였지만, 그의 후임 왕 민신구는 꼰바웅이 아유타야의 끄룽텝(방콕)을 공격하는 것을 고려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에 자존심이 굉장히 구겨진 상태였다.
그들은 중화제국에게 모종의 지원을 받고 대리의 뒤를 칠 예정이었다.
그 모종의 지원은 아마 아유타야나 라오스 공격에 대한 지원이 될 것이라고, 고려의 정보부는 그렇게 예측하고 있었다.
“대리는 저항조차 못 하겠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양면전선이 열린 이상, 안 그래도 약소국은 금방 저 두 세력하에 복속될 것이다. 중화제국은 나름대로 굉장히 강력해지고 있는 국가였고, 꼰바웅 왕조의 버마도 동남아시아 내에서는 최고로 강대한 국가였으니.
허나 워싱턴은 다른 것보다도 이런 국가들의 행동이 한두 번 누적되어 마침내 사람들이 국제적 침략과 전쟁에 둔감해질까 그것이 두려웠다.
“길어야 2주입니다. 그것도 길이 험하고 날씨가 궂어서 그렇게 예상합니다만… 지리와 환경에 익숙한 버마군이나 내전에 익숙해진 중화제국군이라면 충분히 빠르게 복속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옥저 이 친구들은 그런 결정을 해?”
재무상서가 한숨을 쉬며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다른 상서들도 이마를 짚었다.
“…모든 것이 돈 문제 아닙니까?”
근래에 아주 파격적인 거래가 성사되었다.
옥저가 중화제국에게 영토를 매매한 것.
무역에 대부분 의존하는 옥저의 경제 사정이 경제침체로 인해 개박살 난 상황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영토를 팔아버린 것은 고려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록 옥저령 몽골에 한하는 영토라도 할지라도.
그나마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고 있던 재무상서가 설명을 곁들였다.
“몽골 땅은 구리와 석탄을 제외하면 그렇게 많은 자원이 나진 않습니다. 게다가 그 몽골계 부락들이 광산을 설치하려는 옥저 당국에 굉장히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옥저 내에서 매번 들리는 소리였지요. 그렇기에 중화제국이 옥저 광산기업들에게 이전과 완전히 동일한 수준의 채굴권을 보장해주고 대신 ‘관리’해주겠다고 한 것은 옥저에겐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제안이었을 겁니다.”
말이 비협조적이지, 몽골 사람들도 민족주의 시대에 자신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전 세계에서 악의 축과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는 자들이라도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옥저가 그를 용인할 리도 만무했다.
옥저로서는 독립을 시켜줄 바에, 아예 중화제국에게 몽골 부락민들의 땅을 팔아넘기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적어도 채굴권을 비롯해 여러 대가를 즉시 받지 않는가? 또한 어차피 옥저는 널리고 널린 것이 영토인데, 그 정도 떼 준다고 영토가 급격하게 줄어들지도 않았다.
대체 그들이 관리를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옥저인들은 그런 것까지 관심 가지진 않았다.
예맥한계는 중화제국을 딱히 경계하지 않았다. 딱히 놀라운 소리도 아니었다. 그들이 경계했던 것은 중국공산당이었고, 그것을 박살 낸 중화제국엔 오히려 약간의 호감까지도 있었다. 봉명관을 맞대고 있어 항상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조선마저도 그랬으니 말을 다 한 셈이었다.
실제로 호경당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고려제국도 그러했을 것이다.
습진균 총통이 주장한 연설의 논리 중, 몇 개는 공감 가는 것도 있었다. 그 번지르르한 연설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린 자들은 직접 손원호 당수의 추태를 경험해 본 자들뿐이었다.
“자, 그럼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당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