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51화 (551/653)

551화 위태로운 시대(4)

[공포와 악의는 평화와 번영에 대한 우리의 열망, 그리고 선의를 결단코 위협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황제의 두 번째 연설은 무사히 끝났다.

호되게 경을 친 보안국과 근위대는 핏발이 벌게진 눈으로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1차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경호 병력이 있었지만, 군중과의 거리는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

“황상 폐하 만세!”

“고려 연방제국 만세!”

반대로 그런 황제의 모습에 1차보다도 훨씬 더 많은 군중이 운집해 열화와 같은 지지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은 젊은 황제의 패기와 불굴의 정신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 꺄악!

행사용 작은 제국기를 흔들던 소녀가 비명과 같은 감탄성을 내질렀다. 사람들은 혹시나 해서 뒤돌아봤다가, 그저 일상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폐하가 날 봐주셨어!

소리를 지른 소녀뿐만 아니라 주위의 소녀들도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해안의 잘생긴 외모도 큰 몫 거들었다.

황실 아이돌을 세워 지지율을 높이겠다는 상민의 생각은 나름대로 적중해 보였다. 내란과 암살미수에도 황실의 인기는 올랐을지언정 떨어지지 않았다.

연설이 끝나고 황제가 이동하자 상혁도 긴장의 끈을 겨우 풀었다.

그리고 신참 참위답게 알아서 뒷정리를 하는 그의 곁에 익숙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3년 전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아, 안 정위님.”

팔뚝에 북려 앙주 주방위군 부대표지를 단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혁은 경례를 붙였다.

기수로 따지면 두 기수 위라 진작부터 임관해 이제는 정위로 진급한 안장우도 소속된 부대가 부대인지라 황제의 암살 미수 이후에 경계를 늦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몇몇 주방위군 부대도 이미 연설장 주변을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상혁도 오랜만에 본 사람이 반가웠다.

사실 엄연히 다른 학교의 선배라 참 애매모호한 관계였긴 했다. 전훈 때는 그냥 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같이 싸우던 정이 무섭다고 지금 보니 반갑기도 했다.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던 2학년 전훈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그때 참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지.

안장우도 이 덩치 큰 청년을 인정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강한 사람을 동경하기 마련이었다. 상혁은 인간 자체가 강하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리고 그 꼬맹이 생도도 마찬가지였고. 그 녀석은 다른 방면으로 대단한 놈이었다.

“나폴레오네, 그놈은 잘 있나?”

“잘 있을 겁니다. 임관 이후엔 저도 잘 못 봤습니다.”

“뭐 그렇겠지. 졸업한 뒤에 많이들 쪼개지니까.”

“다음번 휴가 때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아시잖습니까.”

“그래, 참위 때는 다 힘들어.”

둘은 군 생활에 대한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상혁은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선배도 이 계급사회의 중간에 껴 큰 고충을 받고 있다는 것에 어색함을 느꼈다.

아무리 날고 기었던 사관생도들도 정작 임관하고 난 뒤에는 이렇게 얌전한 사회초년생이 되곤 했으니.

“그래도 전훈 우승자 기수들은 대우를 굉장히 많이 받는 편이야. 너도 그렇게 느끼지?”

상혁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국제사관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출한 우승 기수가 니네 기수 아니냐. 그리고 2연속으로 우승한 것도 처음이고.

니네 기수는 자대배치 때 선배들 사이에선 대단한 놈들이라고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장우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연방사관학교 238, 239기 후배들은 국제사관학교에게 2년 연속으로 패배했다. 제국사관학교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국제사관학교 47기는 안장우와 쉬셰, 베시에르, 모르티에 등이 포진해있는 자신들 기수만큼이나 대단했다.

“그러니까 사고 치지 말고 제대로 군 생활 해.”

장우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도 이 모범적인 청년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참군인의 표본 같은 상혁이 큰 사고를 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그 말이 상혁을 통해 나폴레오네에게까지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최근 여러 사건으로 고위 장교들 군보직이 텅텅 비었어. 처신만 잘하고 능력만 제대로 입증한다면 쾌속 승진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야.”

군납비리, 내란 사건, 암살미수. 연이은 채찍이 군부에 가해졌다. 별들과 고급장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무능력하거나 부패했던, 그리고 조국을 배신했던 장교들은 모두 그 대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정직한 장교들은 승진의 기회를 얻었다. 갓 임관한 젊은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군데의 자리가 공석이 되면 결국 누군가 메꿔 들어가기 마련이다. 안장우도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정위가 되었으니.

기수를 따지는 것도 사관학교에서 끝이었다.

능력을 중시하는 고려군은 임관 이후엔 선후배 간의 구분을 거의 짓지 않았다. 이를 위해 일부러 세 학교의 장교들을 뒤섞었다.

그런 고로 나중에 격차가 벌어진다면 계급이 높은 후배가 자신에게 명령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체로 선배가 더 높은 계급을 가지긴 했지만, 이상점(아웃라이어)는 있기 마련이다. 안장우나 나폴레오네, 상혁과 같은 이들은 충분히 이상점이 될 확률이 높았다.

나중에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지 않기 위해선 모두가 최대한 노력해야 했다. 능력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 우리의 시대에 분명히 큰 전쟁이 벌어질 거야.

안장우는 옛날 쉬셰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때가 온다면 다시 한번 싸워보자고, 이번에는 같은 편으로 말이야.’

장우는 상혁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몸조심하라고. 애국충정의 상징이 된 섬광방패를 든 고려대장.”

상혁은 행여 누가 이 소리를 듣지 않았는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뒷정리를 시작했다.

* * *

“무사히 잘 끝났다. 다행이다.”

해안의 곁에 있던 상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러범이 뭘 노렸든 간에 이번 사건은 오히려 황실에 득이 되었다. 사람의 진가는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나왔고, 해안은 그 자질을 증명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럼 할아버님, 다시 뵈올 때까지 성체 만강하시옵소서.”

“그래.”

황제의 수행원과 근위대는 하루빨리 황제가 궁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이해는 갔다. 아직도 저들은 밤마다 해안이 권총탄에 맞아 붕어하는 악몽으로 잠을 설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삶도 피폐해질 것이었고.

상민은 떠나가는 황제를 바라보다 이윽고 뒤처리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 암살미수범은 워낙 사태가 중하다 보니까 일단 제도로 송환되어 재판받을 것이었다. 그 후에 사형을 선고받든지 할 테지.

하지만 갓 잡힌 싱싱한 간첩들의 뒤처리는 자신이 해야 했다.

이미 심문을 통해 그들로부터 꽤 많은 정보를 추출해 낼 수 있었지만, 추출한 정보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것과 일부 중요한 방첩 및 첩보전 작전의 결정 등은 상민이 직접 해야 했다.

정보국을 세계 최초로 설립하고, 그 정보국 중 단연코 최고의 조직인 곳을 오백 년 동안 다루어본 자다.

상민의 날카로운 눈은 아무리 훈련을 엄하게 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진실을 헤집어 꺼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수집한 자료를 교차검증한 뒤, 올바른 정보를 확인한 상민이 기지개를 켰다.

“아직 잡히지 않은 간첩들이 생각보다 많아. 언론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 손을 데려고 한 흔적이 있군. 특히나 군 방산에 관해선 애를 써서 기술을 빼가려고 난리를 피운 모양이야.”

미인계부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정보와 기술을 빼내려 작업질을 한 흔적이 보였다. 정보국들이 호경당을 집중적으로 견제하는 사이 벌어진 일일 터다.

다만 방첩력에 의해 큰 성과는 거두진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루테니아 사람으로 위장하여 유학생 시절부터 지금껏 잠복해 있었단 말이지? 꽤 정성을 들였군.”

“소비에트 연방이 전차 기술 확보에는 정말로 사활을 거는 모양입니다.”

바뵈프 서기장 치하의 소련에서 중공업과 기계화는 당의 가장 큰 지상과제였다.

이는 군사적 분야에서도 적용되었다.

엔카베데를 비롯한 소비에트 간첩들은 ‘차세대 전차’개발 사업에 아주 큰 관심이 많았다.

미래의 전장에서 기갑이 엄청난 전력이 되리라는 것은 소련 놈들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참호를 제외하면 내달릴 벌판이 많은 유럽의 특성상, 전차들은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이기도 했다.

또한 전차는 기술과 산업력을 과시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자국 인민들에게 허황된 애국심과 이념, 몽상을 불어넣는 것에도 탁월한 효능을 지녔다.

하지만, 기술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만드는가.

옛 러시아제국의 기술력이 그래도 좀 내려왔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자본가들은 공산혁명에 질려 루테니아나 다른 나라로 떠났다. 당의 교육을 받은 인재들은 이제 성장하는 찰나였으니 기술단절은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잉글랜드의 공산화 덕에 발등의 불을 끄긴 했지만, 잉글랜드는 의외로 전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식민지도 딱히 없고, 바다에 처박혀 있는 섬나라가 전차보다는 전함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소련은 전차강국들, 도이치나 고려 같은 곳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기술을 빼 오고 싶어 했다.

될 턱이 있겠는가. 고려는 기술집착증에 걸린 나라였고, 도이치도 하늘눈 덕에 고려의 방첩력을 나누어 받는 나라였다.

지금 이렇게 몸을 비틀어봤자 기술을 빼 오기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사도가 물었다.

“목록에 이름을 올린 자들을 전부 잡아 올까요? 특히 군사 간첩은 빨리 조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항상 하는 말인데, 결국 군사력이란 산업력과 기술력이 모두 충족되어야 제 성능을 발휘한다. 위정자들은 그걸 잘 몰라. 기초적인 반석이 없이는 아무리 쇳덩이를 녹이고 붙이고 깎아봤자 제대로 된 명품이 나오지 못해.”

쇳덩이 대충 만들어 굴려본다고 그게 대단한 전차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동차처럼 전차에도 현가장치와 추진기관, 주행장치 등이 전부 다 중요했다. 내구성과 신뢰도, 여러 가지 사항들도 마찬가지였다. 장갑의 가공방식이나 접합방식부터 사소하지만 승무원 편의성에는 몹시 중요한 요소들까지. 해당 국가가 가진 기술의 총화가 전차와 전함 같은 병기들이었다.

“오히려 이놈들 빼고 다른 분야에 있는 간첩들부터 잡도록 하라.”

상민은 군사 분야 간첩들 목록을 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도는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저 섬뜩한 미소를 짓는 용안 뒤에 대체 무슨 성심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다 계획이 있으실 테다. 아마 풀려나 귀환한 엔카베데 요원처럼 역공작을 펼치시려는 의도시겠지.

사도의 짐작대로 상민은 곧바로 기술선도국 수장 최 안드로니코스를 호출했다.

그토록 유명한 고려대장이 들고 다니는 섬광방패의 제작자, 안드로니코스는 용께서 한 주문에 당혹해해야 했다.

“3호 전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새 전차 설계도를 만들어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놈들도 얼추 그 정도 기술력은 있다고 하더구나. 자, 여기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게 만들어 보게나.”

“그… 폐하. 예전에 한번 이런 전차를 올렸다가 제가 한 시간 동안 벽 보고 손 들고 있었던 것을 잊으셨는지요. 그 설계도도 곧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았나이까.”

“그러니까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민의 뜬금없는 명령을 받은 안드로니코스는 그러려니 체념하며 새벽호의 기술선도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옛날 정보들이 있는 서류함을 뒤져, 상민이 구겨서 던져놓은 설계도를 끄집어냈다. 개똥도 쓸 데가 있을 것이라고 이렇게 보관해놓은 것이 운이 좋았다.

그리고는 기술자들과 함께 이틀 밤낮으로 야근하여 새로운 전차를 뚝딱 만들어냈다.

나름대로 꽤 신경을 썼는지, 전차의 설계도 자체는 굉장히 잘 뽑혔다. 젊고 철없던 시절, 안드로니코스의 욕망이 한껏 담긴 전차의 설계도를 받은 상민도 이것을 정말 유포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할 정도였다.

“하나만 만들어 볼까?”

“안 됩니다. 일부러 교묘하게 좋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절대 무리입니다. 애초에 폐하께서 직접 다포탑―다주포 전차의 한계를 설파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알았다.”

상민은 입을 쩝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소하지만 몹시 즐거운 장난질을 마쳤을 무렵.

때마침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소식이 상민에게 도착했다.

“뭐라? 엄선된 빨갱이 명단?”

“예.”

상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종이를 낚아챘다.

“줘 보거라.”

엄선된 빨갱이 명단이라고? 그 빨갱이 명단은 자신의 손에 쥐여 있을 텐데?

상민은 그가 아는 간첩 정보와 목록 속의 정보를 찾아 대조해보았다.

그리곤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 ‘엄빨명’이 정말 쥐뿔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엄선되지도 않았고, 빨갱이도 아니고, 심지어 명단조차 날림으로 작성했구만.”

상민은 갑자기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가 봐도 의도적이다. 정쟁의 도구로 이번 일을 사용한다 이거지?”

“나름대로의 충정과 우국에 대한 감정을 교묘히 섞고는 있는데, 예, 경당의 지위를 마저 흔들어 이득을 보려는 술책인 듯합니다.”

정치인들이 일련의 이 사건들을 이용해먹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호경당 내란 사건은 극우파에 더이상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

거기까진 좋았다. 상민이 의도한 바였으니까. 추후의 사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중화주의나 대화주의(야마토주의)와 같은 파시즘에 호감을 가지는 자들이 제국 내엔 될 수 있으면 적어야 했다.

원호라는 허수아비는 제 몫을 다해주었다.

다만, 이번 고독한 늑대의 암살미수는 예상 밖에 있었던 터라 그 여파까지 완벽하게 고려하진 못했다.

호경당은 손원호의 세력이었지만, 일부는 우파, 즉 경당과 귀당에서 탈당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두 당도 조금 위축을 당했다. 어쩔 수 없었을 터다. 최근 경제위기로 인해 경당의 인기가 낮은 것이 그들로선 다행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중 일부가 이번 일을 확대하여 정쟁으로 써먹으려 하는 모양이다.

“권남도, 그놈이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상민은 매카시, 그 불길한 이름이 머리에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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