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화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6)
창천궁.
“마음을 굳게 먹으시오, 황상.”
해군 정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어깨의 별 네 개의 계급장이, 가슴에 달린 쌍룡대훈장이 돋보였다.
세희는 손주 같은 황자가 행여 가족의 정에 대의를 그르칠까 두려워했다.
“종친회는 황상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할 것이오.”
“예, 고모님.”
걱정이 되어서 달려온 고모를 오히려 다독인 해안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황궁 복도를 걸었다. 어떤 방 앞엔 유난히 많은 근위대원이 서 있었다.
“상태는?”
“식사를 꼬박꼬박 합니다.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다는 것이 태의의 소견입니다.”
황제가 제자리로 돌아오며 직무에서 해제된 추밀원장이 직접 해완을 감시하고 있었다.
“짐이 형을 살리는 것이 옳소? 추밀원장.”
“국가적으로 볼 땐 아닙니다.”
추밀원장은 그렇게 확답했다.
“허나, 폐하. 가족으로서는 맞습니다. 또한 황실은 모든 가정의 모범이니, 어쩌면 국가적으로 볼 때도 옳을지 모릅니다.”
추밀원장은 대역죄인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숨기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그저 후회 없이 대명을 내리시면 되옵니다.”
해안은 두꺼운 방문을 열었다.
출가하여 따로 살기 전에 자신이 쓰던 방에 돌아온 해완은 서재의 책상에 기대어 바닥에 쓰러지듯 몸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두 손에 흉기는 없었다. 대신 그의 주변엔 엄청난 수량의 책들이 흐트러져 쌓여 있었다. 구하기 힘든 귀중한 책들도 많았다.
노기에 책장의 책들을 쏟아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주변으로 책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마치 연서궁 학자의 모습을 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하루 종일 저 서책들을 전부 다 본 것인가.
아니면 이전에 보았던 책들을 다시 꺼내어 본 것일까. 이 광기의 흔적으로도 당장 해완이 했던 일들을 알 수는 없었다.
해완의 성정이 탁하다 하나, 그가 무능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지식을 탐구하였지만 그 지식이 그릇된 방향으로 역류했을 뿐.
“물러나라.”
방안엔 책더미 외에는 딱히 다른 큰 위험 요소는 없었다. 이를 재차 확인한 근위대들이 군말없이 물러났다. 어차피 이곳은 창천궁이다. 뭘 할 수도 없는 공간이란 소리였다.
문이 닫혔다. 이야기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할 것이다.
짧은 시간의 침묵을 깨고, 해완이 입을 열었다. 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랬구나.”
“…….”
해완은 그 광경을 떠올렸다.
달이 밝은 밤, 창문을 깨고 등장한 직승기 탄 초인은 그동안 해완이 가져왔던 모든 생각과 의문을 송두리째 박살 내고야 말았다.
“…정말로 실존하시는구나. 내가 멍청한 것이었다. 나만 알지 못했던 것이었어.”
그리고 그는 잔혹할 정도의 진실을 마주한 뒤, 이렇게 무력하게 주저앉아 실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너무 늦게 알았다. 동생아. 너무 늦게 알았어.”
“…제가 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네가 죄송할 게 뭐냐. 내가 대역죄를 저질렀다. 이 우형이 네 자리를 탐냈다. 그래서는 아니 되었는데… 나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고작 나 같은 놈 때문에.”
정신이 돌아온 해완이 그렇게 말했다.
해안은 그 용서를 받아주고 싶었지만 형은 용서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난 굳이 반란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그 인간은 내가 없어도 그런 일을 저질렀을 놈이었으니까. 그분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길 원해서 이리 방관하신 것이었지? 그렇지? 본보기가 되길 원하셨던 거야.”
“…아마 그러셨을 것입니다.”
선제 시절부터 아버지가 이미 대비를 해 놓으셨다. 해안은 추밀원장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며 알 수 있었다.
“언제든지 진압하실 수 있으셨겠지. 내가 별장에 있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철저하게 이용된 것이다. 참으로 잔혹하신 분이구나. 참으로 무정하신 분이다. 그래, 그러셔야지. 그러실 수밖에 없지. 암, 그렇고말고.”
해완은 울었다. 그리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래, 나만 바보였구나. 우스꽝스럽다. 실로 자괴감이 드는구나.”
해안이 어떻게 저 심정을 알까. 그는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 황궁에 온 쿠쿨칸 총대주교가 기억이 난다. 그가 말했지. 신은 우리의 옆에 항상 계신다고. 그 말은 정말로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 말이었구나.”
해완의 상태는 조금 이상했다. 절망에 빠져 몸부림치리라 생각했던 그는, 오히려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기대, 열망, 환희. 저것이 반정에 실패한 역적이 가질 감정인가? 다른 이들이 보면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해완은 그동안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는 약물의 힘을 빌렸을 때를 포함하더라도 이토록 생각이 명료한 적이 없었다고 느꼈다.
이상한 느낌의 환희가 그의 혈관 속에 맴돌고 있었다. 이는 오히려 빙독의 약효보다도 더욱 강했다. 자신이 틀렸음이 증명당했지만, 오히려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자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은 옳았다.
“이미 우리는 건국부터 지금까지 적법한 지도자 아래에서 있었던 게다. 구세주니, 초월자니 하는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존재가 항상 있었으니.”
이제는 역사책만 읽어 봐도 그분의 자취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난 그날 밤 이후 내내 고민했다. 왜 내가 그 사실을 몰랐을까. 왜 알려주시지 않으셨을까. 분노하고 슬퍼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상관없어.”
해완은 손바닥으로 고개를 감쌌다.
“이 꼴을 봐라. 자격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이미 그분께서는 내가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아셨겠지. 이런 역적의 상을 가진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토록 전능하신 분이니까. 그토록 성스럽고 존엄하신 분이니까. 그분이 너를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안아.”
해완의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그는 무언가에 취한 듯했다.
“네가 말한 직후, 나는 다시 살펴보았다. 내가 책에서 얻은 모든 지식을 다시금 재조립했다. 내가 이해한 구절들과 정치적, 철학적 개념들을 다시금 보았다. 나는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았고, 그분의 자취를 다시 탐구했다.”
“……?”
“그리고 나는 마침내 그분의 복심에 닿았다.”
상민의 존재를 알아차린 뒤, 궁에 연금되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해완은 상민의 속내를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해안은 터무니없게 들리는 형의 말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몰골로 저런 소리를 하니 신뢰가 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작 해완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이 눈동자를 휘감고 있었다.
군사 반란을 꾀하기 전, 해완은 확신이 없었다.
자신도, 원호도 초월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걸 알았으니, 마지막에 약의 힘을 빌어서야 자신감을 채워 넣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끝까지 회의감을 품었을 것이다.
반면 지금 이 수준의 확신은 해완이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해완은 이 강렬한 확신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를 밧줄 삼아 진리의 파도를 헤쳐나갔다.
그 어떤 자도 이 같은 사고의 흐름은 불가능했다.
오직 반쯤 미쳐있는 해완만이 가능했다.
해완은 비록 우스꽝스러운 초월자 참칭자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꿈꾸었기에 오히려 가장 이상적인 초월자의 마음을 아주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말았다.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지금의 행동들, 행하셨던 이전의 행동들을 모두 미루어보면 그 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분은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다.”
“대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이별! 이별이라고. 모르겠니? 태조께서 그간 하신 행동들은 전부 자신이 이 제국을 떠나갈 때를 대비하고 계시는 것이다.”
해완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 말에 해안도 얼어붙었다.
“그분의 모든 이상은 결국 자신이 없어도 이 제국이 항구적으로 번영하는 체제를 만드시는 것이야. 체제를 설계하고 도입하고, 문명을 쌓고, 법을 제정하며, 역사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만드시는 이면엔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체계 자체만으로 최고의 이상적인 국가를 만드는 그분의 지고한 노력이 닿아 있다.
너는 한참 전에 그분의 실존성을 알았음에도 지금 그것을 보지 못하느냐?”
“그건 당연히….”
“당연한 것이 아니야. 너는 오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해. 일반 사람들이라면 그 억겁의 세월 속에서 미쳐갈 수밖에 없지.
그러니 그분을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다. 완전무결한 제국. 자신이 영원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떠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순간 이후에도 끊임없이 특이점을 넘어 진보할 그런 제국 말이다. 정작 너희들, 우리들은 그분의 존재로 인한 혜택을 누려왔음에도 그것을 모르는구나.”
제국을 지탱하는 존재.
사실을 아는 모두는 오히려 그 사실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종교계도, 정계도, 재계도.
하지만 정작 그 존재는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이 제국에 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이 해완의 말이었다.
이상할 것도 없다. 그것은 맨 초창기, 태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바다로 떠난 이야기의 맥락과 같았다. 그때에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
다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닐 터.
더 이상 바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태조의 새벽호가 떠날 곳은 바다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모든 일이 끝난 뒤, 대체 어디로 가실까? 곤여의 밖으로? 저 드넓은 우주로?
해안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어깨에 무엇이 매달려 있는지 몰랐다.
그 끔찍한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몰랐다. 그저 아버지가 짊어진 짐을 당연시하며 그 그늘 아래에서 복락을 누릴 뿐.
그의 무릎이 꺾여가고, 그의 의지가 풍화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오히려 반항을 꾀한 탕아가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구부러진 용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결말은 오로지 자신의 부재 속에서 완성된다. 안아. 그분께선 이걸 당연히 여기고 계시는 것이야.”
해완은 비틀거리며 해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해안의 멱살을 잡았다. 해안은 자신의 형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멱살을 잡은 해완에겐 격렬한 분노도, 뭣도 없었다. 그저 아주 간절한 표정만이 자리했다.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가 누구라 생각하느냐?
호경당의 손 당수는 애초에 버러지 같은 놈이니,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
허나 정말로 진지하게 누구라 생각하느냐? 교당의 워싱턴? 경당의 해밀턴? 귀당의 전가 놈?
아니지. 아니야. 국민들이 원하는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국민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결국 그가 필멸자여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전부 국민의 뜻에 합치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괴롭고 슬프며 위험한 일을 혼자 도맡아 하셨겠지? 그렇지? 그렇기에 이 제국이 이렇게 발전한 것 아니냐?”
해안은 부정할 수 없었다.
“너는 결단해야 한다.”
해완의 얼굴은 조금씩 더 이상해져 갔다.
마치 예언을 하는 것처럼 일그러진 상태였다.
마약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무언가 현재의 시간 너머의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해안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게….’
“때가 올 것이다.”
저 시선, 마치 그분이 종종 보여주시는 모습과 닮았다.
“용은 승천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국은 더 이상 그분의 그림자 속에서 번영하지 못하리라.”
불길한, 불경한 말을 하는 해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문득 그의 뇌리엔 제국교 대주교가 한 말이 떠올랐다.
― 헤러시, 이단! 신성모독!
허나 사제여, 너도 그걸 원하지 않는가?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말이다.
해완이 웃어 보였다.
“그러니 너, 새로운 황제여, 나의 형제여. 용을 붙잡아라. 승천을 막아라.
신민을 위해.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국에는 초월자가, 용이 필요하다. 그것이 태묘에 잠든 모든 분이 원하시는 것일 테다. 국민들도 그럴 것이다.”
해완은 갑자기 쓰러졌다. 입에서는 거품이 나왔다.
해안은 경악하며 밖의 근위대와 태의를 불렀다.
하지만 입 안에 몰래 숨겨놓은 독을 먹은 그의 형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각했다.
그는 반역의 상을 타고났다. 누가 부정하랴.
허나 모든 반역자는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마련. 그 또한 한 치의 의심이 없었으니.
“내… 내 말을 기억하거라. 도… 동생아.”
고려제국 만세.
해완이 그 나직한 읊조림을 끝으로 고개를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