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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44화 (544/653)

544화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3)

“그래도 할아버님,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제가 형님과 대화를 나누어 볼 기회는 주시옵소서. 소손, 이렇게 부탁드리옵니다.”

해안은 다시 한번 청했다.

해청이 죽기 전에 한 부탁과 같았다.

“…….”

전 황제와 현 황제의 부탁을 받은 상민은 깊이 고뇌했다.

이런 약조를 하는 일은 사실 쉬운 일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생포된 황자와 대화를 하게 배려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안은 필사적으로 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설득을 하겠지. 그 정도야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인간적인 면이 이 아이를 보기 좋게 만들었다.

또한 차기 황제와의 관계를 위해서는 오히려 그러는 편이 자신에게도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찝찝했다.

솔직히 고백해보자면 상민은 해완이 싫었다.

해청이 처음엔 해완을 사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후 문제와 기본적인 의견 차이로 맏아들과 멀어졌다면, 상민은 아예 처음부터 줄곧 해완을 싫어했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물론 상민은 죄인이나 혹은 악인에 대해서는 냉혹할 정도의 판단을 하고 가차 없는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었지만, 저 아이는 조금 달랐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해완의 유년 시절에조차 상민은 그를 일방적으로 싫어했다는 것이었다.

그도 알았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상민은 언젠가 해완이 무슨 큰일을 꾸밀 것 같다고 느꼈다. 그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큰일을.

앞날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기에 그런 것일까.

장남 해완이 제위에 오른다면 미래는 불안하고 혼탁했다. 고려의 미래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미래까지.

먼 옛날, 고려에서 최초이자 아직까지 처음으로 폐위된 해제의 일화는 장난으로 여겨질 정도일 테다.

악의? 글쎄, 분명히 악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엔 악의보다도 겉으로 잘 포장된 선의가 더욱더 끔찍한 일을 만들곤 했다. 객관적으로 욕할 수 없다는 점에서 후자는 더욱 악질적이기도 했다.

상민은 해완이 가진 선의로 포장된 괴악한 신념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체를 그에게 알려주는 것을 주저했다. 때가 충분히 지났음에도.

해안의 말은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만약 해완이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입과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리해서, 마침내 그가 황태자가 되고, 지금 해청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다면?

그리고 그때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면?

옛날에 황제의 면전에다 꼬우면 내가 황조를 하나 더 개창해버린다고 위협 아닌 위협을 벌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가 후손과 골육상쟁을 벌이기 싫은 것은 당연했다. 정보총국 내부에서의 총질도,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근위여단들도, 황제 말 한마디에 움직일 함대들과 공군들도 그랬다.

패배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기껏 키워놓은 제국은 누더기가 되겠지. 아무도 원하는 바가 아닐 터였다.

어쩌면 해청도 자신의 속내를 어렴풋하게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상민이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는 스릴에 빠져있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필연적인 파멸을 받아들이는 바보는 아니었다.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작별인사 한마디 하고 가는 것은 괜찮겠지.’

그를 죽일지 살려서 어디 한적한 곳의 가옥에 평생 연금을 할지 아직 결정된 바는 모르나, 적어도 대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상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위에 앉지 못한 해완이 설령 사특한 야심을 품어 그릇된 일을 획책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뭔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와 황제가 아닌 자는 그 정도로 차이가 컸다.

“알겠소.”

* * *

― 찌르르

어둠이 내려앉은 태동산맥, 고즈넉한 고성의 별장은 풀벌레 소리만 요란했다.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대기오염이 꽤 심각해지는 제국 도심에서 맑은 하늘을 보기란 꽤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이곳 하늘에는 별무리가 쏟아지듯 반짝였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그저 자리에 앉아 가만히 화톳불을 바라보고 있자면 무언가 심신이 안정되고 치유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 타닥 타닥

중년의 남성도 그저 자리에 앉아 그렇게 하염없이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전하.”

하지만 불청객이 그의 평온을 깨트렸다.

해완은 약간 인상을 찡그리며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엊그제 이 고성에 도착해 하룻밤 머물고 있는 이 손님은, 자신처럼 밤잠을 잘 못 이루는지 밖에 어슬렁거리다 자신을 발견하고 찾아온 모양이다.

혹은 그저 이렇게 단둘이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거나.

그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후자가 더 설득력 있었다.

“제도로 상경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원호 당수가 다가와 물었다.

“그래야지요. 내 아버진데.”

해완은 집게를 들어 불을 뒤적였다.

무심한 그의 말에, 손 당수는 약간 애가 타는 모양이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전하,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동안 호경당의 손 당수는 많은 일을 벌였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지닌 그는 벌써 신생 정당을 네 번째 주요 정당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는 대단한 업적이며, 그는 충분히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손 당수는 무언가 더 큰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훨씬 더 야심만만했다. 그러니 이렇게 해완을 책동해 움직이길 원하고 있을 터다.

구체적으로 그가 꾸미고 있는 것들이 뭔지는 아직 모른다. 해완이 확실한 의사를 표명하기 전까지, 최대한의 비밀을 지킬 요량인 모양이다.

하지만 해완은 손원호 당수가 그에게 원하는 일을 알았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어야, 손 당수는 고려의 핵심 권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런 사내는 무릇 절대권력을 꿈꾸기 마련이지.’

정치인으로서 권력욕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해완은 코웃음을 쳤다.

고려의 시중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하지만 행정부 수장으로서의 지위는 차치하고서라도 고려의 실제적인 권력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무릇 한 국가의 실제적인 권력이라 함은 국방과 군대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여전히 고려의 황제는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군림했다.

물론 고려 시중도 그 권한을 위임받아 전시에 군 통수권자가 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위임’으로, 박탈이 가능한 권한 중 하나였다.

설령 그런 일이 잘 벌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중의 군사적 권리는 명백히 제약 가능했다.

손원호 당수도 잘 알 것이다.

그가 완전무결하게 고려의 정치 지도자가 되는 일은 힘든 일이라고.

호경당은 다른 주요 세 정당과 어느 부분에서는 많이 닮아 있었지만, 닮은 것만큼이나 세 정당과 모두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작금의 혼란한 정치구조로 볼 때, 어느 한 정당이 인기를 독식하는 구조는 나오기 힘들었다. 현재는 네 정당이 고루고루 비슷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니 필히 연정을 통해 내각을 구성해야 할 텐데, 호경당은 세 정당 모두에게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경당과 교당이라는 양대 정당이 대립하는 가운데, 귀당은 보수적 측면에서 교당과 연정을 이룬 적이 몇 번 있었으나, 반대로 세계 대전 때는 오히려 경당과 교당이 개입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일시지간 서로 손을 잡고 연정을 펼친 적이 있었다.

호경당은 극우파였지만 그나마 가까운 중도우파, 혹은 우파인 교당이나 귀당과 썩 잘 어울리지 못했다. 사유재산에 대한 확실한 보호를 천명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두 정당이 호경당의 극우대중주의에 의거한 초강력 정부를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애초에 중도좌파인 경당은 호경당과 숙적이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러니 호경당은 근래 인기가 급상승했더라도 중서성 내에서 과반이 되지 못했다.

손 당수의 호경당이 정말로 완전무결한 여당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수밖에 없었다.

황실의 인기에 기대는 것, 그뿐이다.

‘혹은 적어도 황실이 표면적인 중립을 지키는 정도는 해주어야지. 노인네처럼 하지 말고.’

아버지 해청은 호경당을 굉장히 싫어했다.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킨다고 말을 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들을 몇 번 물을 먹인 적이 있었다. 이념 차이일 터, 자신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그러니 손 당수도 당연히 해청을 싫어할 것이다.

현재 스무 살 중반의 젊고 건강한 그의 동생이 제위에 오른다면 아주 오랫동안 집권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군주들은 이제 상당히 장수하곤 했다. 그리고 애초에 해씨 황가는 시대를 고려해보면 다른 왕실보다 유난히 장수하는 가계로 유명했다. 제국교는 태조로부터 보우하는 신성한 피가 흐르고 있으니 당연하다는 말을 했지만, 믿겨지지는 않았다.

해안의 성정은 해청과 비슷하다 하니 손원호는 해안이 제위에 오르기 전에 도박수를 던져야만 하는 처지였다.

“전하,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이 나라에는 훌륭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넘어선 자, 초월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당수.”

“그렇습니다.”

그는 철학 서적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집과 담장을 제공하고, 논과 밭에서 식량을 얻어 풍족하게 먹고, 또한 약을 개발하여 건강을 증진할 수 있음에도 사람은 여전히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워한다. 사람은 오로지 압도적인 힘을 원하는 것이다.”

“…….”

손 당수는 마치 달래듯 해완에게 입을 열었다.

“기존의 가치는 전부 낡았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초월자가 있어야 합니다. 낡은 것들이 허물어진 공터에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새로운 선악을 구분해야 합니다.

기존의 많은 저항들, 많은 흉계들, 많은 고통들을 이겨낼 수 있는 초월자가 필요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지도자만이 우리 국민들을 영광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작 이 말을 한 철학사의 거두이자, 비합리주의 사상가 김수헌이 살아 있으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그가 자신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 없이, 오로지 표면적인 말만으로 사상을 짜깁기하는 지금의 이 정치가를 대체 어떻게 바라볼지, 문득 해완은 궁금해졌다.

장담컨대, 황태자인 그가 오히려 정치인인 손 당수보다 더 많은 철학 서적을 읽었을 것이다.

다만 해완은 가르치듯 말을 하는 손 당수를 꾸짖기보다는 그저 눈을 감고 되뇌었다.

그래, 사실은 해완도 이 말에 동의했다.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는 오로지 지금 이 손 당수가 전부였다.

해완은 입헌군주정 하의 민주주의에도 한계가 있다 느꼈다.

정치인들을 보라. 그들은 전부 낡아빠진 쓰레기들이었다.

구태며, 적폐이다.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이가 얼마나 있는가? 그들 모두는 우익과 좌익 구분 없이 자신과 해당 정당의 정권을 창출하는 데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대중을 선동해 선거기간 동안 승리를 쟁취하면 그다음부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모두 달랐다.

그 말인즉, 그들은 주인의식이 없었다. 고려의 정치인들은 고려 제국이 잘나건 못나건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그들이 다음 선거에서도 중서성에 한자리를 하길 원할 뿐이다.

비단 고려만 그럴까. 소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모든 나라의 정치인들은 전부 그러했다.

그들은 국가를 소유할 수 없기에,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도 부재한 것이다.

그들에게 국가는 돈과 권력을 주는 거대한 초원이었고, 측근과 지지자라는 양 떼를 풀어놓아 풀밭에서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곳일 뿐이다.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지지자들이 전부 초원의 바깥에서 배를 곯아가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책임의식이 없었으니 많은 거품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경기 침체를 유발할 때까지 그 누구도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을 터.

해완은 기억했다. 소수의 혜안 있는 지식인들이 불안한 미래를 언급할 때마다, 기존의 정치인들이 그들을 얼마나 비웃었는지.

오로지 주인인 아버지 해청만이 그 우려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수, 그 초월자가 당신이라는 이야기요?”

둘의 눈빛이 맞부딪혔다.

해완은 손 당수의 정치적 재능과 실력이 자신의 위에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기필코 해완의 아랫사람이 되어야 했다.

쌍용지손으로서 그는 이 무도한 작자가 제멋대로 행동하여 국가의 근본을 모두 바꾸어버리는 것을 용납하지는 못했다.

또한 그 역시도 정치인에 불과하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진정한 ‘주인’이라 칭할 수 없는 것이다. 고로, 이자 또한 다른 정치인들과 같이 진실로 신민들을 위하는 자는 아닐 터였다.

국가의 주인은 오직 하나였고, 둘이 될 순 없었다.

지금의 신경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손원호 당수는 침묵을 지켰다. 고요함 속에서 야욕과 현실이 충돌하는 것이 보였다.

짧은 침묵 이후, 손 당수는 고개를 숙였다.

“어찌 제가 신민의 인도자를 자청하겠습니까. 초월자는 오로지 제국의 황제 폐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당신의 충실한 종복으로 오직 인류의 광영을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해완도 알았다.

설령 이 말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도 시간이 없는 처지니 받아들이고 동행할 수밖에 없다고.

국상과 즉위식을 치르기 위해 돌아오는 현 황태자는 북려 니타시난에 있는 만큼, 굉장히 늦게 돌아올 것이다.

배를 타고 온다면 거의 한 달 정도는 더 걸려야 했으니 느낌상은 비행기를 타고 올 것 같기도 한데, 비행기를 타고 오더라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터. 그들은 그 시기를 틈타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무언가 해완은 불길했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그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안국인가.’

보안국과 근위여단. 앞길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고, 어쩌면 가장 큰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 그 여부는 오로지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었다.

해완은 칩거를 끝내고 마침내 고성의 별장에서 빠져나왔다.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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