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42화 (542/653)

542화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

“저 친구들은 하루 종일 저러고 있는 겁니까?”

나디르 콜리 대훈련장 본부에 들어서자, 한눈에 넓게 펼쳐진 연병장과 기타 차량들, 보급품들이 보였다.

이미 훈련이 많이 진행되는 와중이라 많은 물자가 소모되었다. 그렇게 확보된 넓은 공터에서 두 명의 생도들이 얼차려를 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려한 외모의 미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장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예, 얼차려를 받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언제까지?”

“국기내림식이 있을 때까지입니다.”

국기내림식은 일과 종료를 뜻했다. 고려에서는 아침에 국기올림식과 일과 종료인 오후 6시에 국기내림식을 했다.

훈련장엔 세 개의 깃발이 걸려있었다. 공공기관은 대체로 다섯 혹은 세 개의 깃발을 달았다.

가장 가운데엔 고려제국기, 즉 삼태극팔괘기가 걸려 있었다. 아주 상식적인 것으로, 단 한 개의 깃발, 황실 깃발을 제외한 어떠한 깃발도 사실상의 최상급기인 제국기의 위치를 변경할 수 없었다.

제국연방기 왼쪽에는 주들의 개수만큼 별들이 수놓아진 연방기가, 오른쪽에는 주나 공공기관의 깃발이 걸렸다. 이곳은 니타시난 주기 대신 원래 국군과 군무부의 상징인 닻과 별, 날개가 합쳐진 군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달랐다.

황태자가 이곳에 있으니, 제국기 자리에는 쌍룡 황실기가 달려 있었다. 이는 해안이 자신을 생도 대접해달라고 부탁한 것과는 무관했다. 법이 그렇게 규정되어 있었다. 황제, 황태자, 황후 단 세 명의 행차에 한해서는 황실기가 최상급기로 가운데에 걸렸다.

장교들이 해안의 눈치를 보다 되물었다.

“그만두게 할까요?”

“아니요, 원칙대로 하십시오.”

황태자 해안은 피곤함을 느꼈다. 그의 성정이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해안은 조숙하고 배려심 깊어 동기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생도 신분을 개의치 않았는데, 오히려 훈육 장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때면 골치가 아팠다. 방금도 자신에 의해 필수적인 징계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닌가.

그럴수록 원리원칙에 충실해야 했다. 사관학교를 다니셨던 자신의 조부도 그러셨을 것이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약간의 궁금증과 미안함이 있었는지, 해안은 추후 진행되는 훈련에 대한 여단장생도 회의가 끝나자 주변 사람들을 물리고 연병장으로 직접 내려왔다.

손목시계를 보니 마침 시간도 국기내림식 근처였다. 이 정도는 융통성을 발휘해도 될 것이다. 해안은 그들이 사열대 근처로 다가오자 말을 걸었다.

“그만. 군장 내려놓고 쉬어라.”

“헉, 헉, 씨팔.”

뮈라가 기다렸다는 듯 욕설을 내뱉으며 군장을 던지고 쓰러지듯 땅바닥에 누웠다. 너무 힘들었는지 옆에 온 사람이 뉘신지도 잘 못 본 모양이다. 나보도 그 옆에 쓰러졌다.

뮈라는 투덜거리며 수통을 집어 들어 물을 마시려 했으나, 물이 한 방울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보에게 말했다.

“야, 너 물 있냐?”

“저도 없습니다. 선배님이 제 꺼 아까 다 드셨잖습니까.”

그래도 둘은 같이 연병장을 돌면서 꽤 친해졌다.

나보의 잘못이야 명백했고, 뮈라의 잘못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굴 원망할 것이 없었다.

뮈라가 나보를 싫어할 이유는 그때 그 안전불감증적 과격한 전차 공격이 전부였는데, 사실 뮈라는 그런 또라이 같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자신부터 이미 그런 부류였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그때만 흥분해 멱살을 잡았지, 지금 와서는 오히려 이 본질적으로 비슷한(혹은 우위에 있는) 광기 어린 후배를 좋아했다.

“여기.”

둘의 대화를 해안은 자신이 차고 있는 단독군장에서 수통을 빼 그에게 건넸다. 비훈련시에도 단독군장의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이 그의 성정을 대변했다.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뮈라가 마지못해 감사의 표시를 했다.

하지만 수통을 받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돌려줄 때는 아까와 달리 무섭게 자지러졌다. 마침내 물통 주인의 얼굴을 본 그가 벌떡 일어나 경례했다.

해안이 그 경례를 받았다.

“그대는 작년에 나랑 이곳에서 본 적이 있지?”

“예, 그렇습니다. 전… 아니 선배님.”

“그때도 비슷하게 얼차려를 받았던 것 같은데. 매년 이러는 게 습관이 되었나 봐?”

“죄송합니다.”

아직도 무슨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보를 옆에 두고 해안과 뮈라가 말을 이어나갔다.

“좀 앉아서 쉬지. 다리 아플 텐데.”

“적당히 물건을 좀 빼놔서 괜찮…….”

뮈라는 넉살 좋게 웃어 보이다, 이윽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해안이 헛웃음을 흘리곤 화제를 돌렸다. 계속 이어나가면 학교도 다른 이 후배 놈에게 다시 얼차려를 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대는 이름이?”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라 합니다. 나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 기억해두지.”

― ♩♪♬

저 멀리 확성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음질이 좋지는 않지만, 분명히 국가였다.

본래 5세기까지도 제국법이나 헌장에는 국가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그동안 군대에서는 불후의 명곡인 제국행진곡―북원 정벌 때에도 쓰인―이나 척탄병의 신념 등을 자주 틀고 불렀는데, 이 곡들은 군이 아닌 민간 관공서가 쓰기엔 너무 과도하게 격앙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시대가 국민국가 시대로 들어선 만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곡은 분명히 필요했다.

현 고려의 국가는 대체로 두 개로 구분되었다.

관형파의 거장 채선도에 의해 만들어진 [태조는 제국을 보우하소서]라는 제목을 가진 곡과 근래에 모차르트에 의해 만들어진 [제국찬가]가 있었다.

어떤 누군가의 압력에 의해 요즘은 제국찬가가 좀 더 많이 불리는 경향이 있었다.

말을 멈추고 국기내림식 동안 게양대를 향해 경례하던 해안은 내림식이 끝나자 말을 이었다.

“부대로 귀환 안 하나?”

“앞으로 훈련 전부 열외입니다.”

뮈라가 가슴을 쳤다. 옆에 있던 나보도 굉장히 풀이 죽은 모양이다. 이 둘은 정말로 이 훈련을 즐기고 있었다.

실전과 같은 훈련일수록 힘들기는 더 힘들다. 참여자들은 훈련이 끝나면 체중이 훅훅 빠지곤 했다. 그래도 이들은 훈련을 받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무의미하게 연병장을 돌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 좋을 테지만.

“그럼 후배님 같은 전차전의 귀재를 훈련장에서 마주 볼 이유는 없다는 건데…….”

나야 좋지. 해안이 그렇게 말하여 웃어 보였다. 사실상의 칭찬이라 뮈라는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해안은 사열대 옆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그랬지?”

뮈라도 순순히 그 옆에 앉았다. 나보는 서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애들이 항상 소심해져서 그렇지요. 말귀도 제대로 알아먹지 않고.”

뮈라는 그렇게 단언했다. 그가 그냥 미치광이라서 목숨을 내놓는 행위 자체가 마음에 들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을 무릅쓰는 지휘관의 태도는 아군에게 더할 나위 없는 사기진작의 효과를 가져왔다.

나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조직행동론을 잘 배웠구만. 좀 이상한 방향으로 말이야.”

해안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이지. 두목은 위에서 명령하고 지도자는 앞서 이끄는 법이지.”

해안도 잘 알았다. 연방사관학교의 황금기 237기는 대단히 뛰어난 3학년 생도들이라는 것을. 사실상 이번 연도의 전훈을 결정짓는 전투는 제국사관학교와 연방사관학교의 모의전이 될 것이다.

제국사관학교도 무난하게 국제사관학교를 이기고 1승을 정립한 상태였다.

그나마 발악이라도 했다고 평가받는 1차전과는 달리, 국제사관학교는 얼차려를 받느라 열외된 나보 덕인지 상대가 바뀐 2차전에서는 어떠한 변수 없이 무난하게 패배했다.

어차피 매년 반복되는 일상, 결국 이 훈련은 역사가 오백 년에 달하는 사관학교와 이백 년이 넘는 사관학교의 싸움이었다.

아직 개교한 지 백 년도 채우지 못한 사관학교는 낄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해안은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감독관들이 본 이 생도들은 능력은 있지만, 어찌나 오만한지 코웃음이 나올 정도였댔다.

‘선택’받았다는 운명적 부름이라도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지도자는 아랫것들을 믿지 않고 있구나?”

가만히 앉아서 관찰해봐도, 해안은 이 당돌한 후배들의 성격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궁중에서 눈치 보며 자란 덕인지, 혹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사관학교에 들어온 덕에 이들보다 나이가 살짝 더 많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네가 진정으로 지도자라 불리기 위해서는 너는 부하를 믿어야 한다. 부하들을 성장시켜야 한다. 부하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부하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위험에 앞장서서 뛰어드는 것만으로 그것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야. 뮈라, 올해 여름훈련 때 너는 네 말을 듣지 않는다고 2학년 후배 몇 명을 폭행했었지? 그때도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잖아.”

“그건 가벼운 몸과 몸의 교훈…….”

“그래선 안 된다. 부하의 잘못은 상관의 잘못이야. 착오가 생긴 것은 네가 명령을 구체적으로 내리지 않았든, 무언가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왜 부하의 공은 오롯이 네 공인데 부하의 과는 네 과가 아닌 것이냐?”

조아킴 뮈라는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황태자의 눈은 따스해 보였지만 일견 엄했다.

“그런 와중에도 네 후배들은 너에게 매료되어 있더라.

그래, 네 스스로 앞장서 위험을 자처하는 그러한 매력은 굉장히 아름다워 홀리기 마련이지. 허나 네가 성장하지 않고, 네 부하들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결국 불구덩이로 섶을 지고 뛰어들어 가려는 그 행위는 언젠가 비극으로 끝날 거다. 필연적이지. 안 그렇겠니?”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엔 수많은 천재들이 있어.”

이 두 생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황태자는 확신했다. 제국 내에 시대의 재능이라 꼽히는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많다고.

“빛나기 위해선 혼자로는 역부족이다. 더 밝게 빛나기 위해서는 네 주변 사람들의 빛을 모아야 해. 영광은 홀로 독식할 때가 아니라 모두와 나눌 때 배가 된다.

영광을 찾는 것은 좋아. 하지만 영웅시는 자신이 쓰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지어주는 것이니. 뮈라, 너는 네 학교 선배의 일화를 알고 있지 않느냐?”

타국에서 건너와 제일의 장군 겸 제독이 된 자, 스스로 명예를 좇은 적은 없으나 후대의 추앙으로 국사무쌍(國士無雙)이 되었던 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업적에 가장 가혹했던 자가 이윤신 그 자신이었다. 조명전쟁과 바부얀 해전의 전훈은 놀라우리만큼 엄격하게 기록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역사가들에 의해 매번 재평가되는 존재였다.

그는 손을 내밀어 앉은 뮈라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대들이 안전사고로 허무하게 가는 것보다 앞으로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큰 부탁일까?”

그렇게 안하무인이던 뮈라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사실을 간파당하면 사람을 수치심을 느꼈다. 뮈라도 지금 그러했다. 해안은 그를 더 건드리진 않기로 했다.

다만 그는 나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보도 얼떨결에 황태자와 악수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 완전히 다른 학교 선배인 주제에, 나보는 졸지에 유순한 한 마리 양이 되어버렸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용감하고 재능있는 신입생, 그대도 말이야.”

인간적으로 볼 때, 저 사람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시기가 날 만큼 터무니없게 잘생겨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니었다. 자신도 잘생겼으니, 잘생긴 사람은 익숙했다. 다만 해안의 뒤에서 빛나는 절대적 인품의 후광이 탁월했다.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단연코 느끼지 못했던,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삶의 주군이라는 공백이 채워지는 느낌인가.

나보는 손을 꽉 쥐었다.

주군은 이내 등을 돌려 사라졌으나,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 * *

해안이 인정할 만큼 제국사관학교의 4학년들도 연방사관학교의 황금기수라는 237기를 상대로는 꽤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뮈라라는 걸출한 기갑병과 생도도 열외하고 얼차려를 받고 있었지만, 뮈라가 없어도 연방사관학교는 좋은 재능의 생도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력하게 당하는 것은 숭무감의 명예에 어긋난다. 4학년으로서도 3학년이 주축이 된 학교에 밀릴 수 없었다.

“정면 싸움은 힘들겠어. 주변을 흔들어 놓아 최대한 변수를 창출해 보자고.”

“걔네들이 한 것처럼?”

“그보다는 좀 더 세련되게. 그 일학년 생도가 허를 찌르는 건 좋았지만, 지원 없이 그렇게 들이대는 것은 일시적인 효험을 볼 뿐이다.”

제국사관학교는 건국 초창기부터 태조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만큼 유서가 깊고 그만큼 대단한 선배들을 배출한 곳이었다. 승리하려는 마음가짐은 누구보다 컸다.

해안을 보좌하는 이태석, 황용일, 송대광 등의 재능도 연방사관학교의 황금기수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모의전은 길어지기 시작했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이 혼란스러웠다. 훈련 도중 전차들이 퍼지기도 했으며, 동상과 질병으로 인해 열외하는 생도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인내심 싸움으로 들어가야 하는 단계가 될 지경, 이렇게 길어진다면 무승부 판정이 나거나, 혹은 감독관들이 객관적 상황을 검토해 약우세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다.

방학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들도 개학 또는 졸업이 예정되어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 한 비행기가 나디르 콜리 대훈련장에 도착했다.

― 위이이잉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동체가 훈련장 옆의 간이 비행장에 착륙했다.

비행기로 취급에 엄중을 요한다는 특급 기밀문서가 도착했다. 수신인은 해안이었다. 4학년 여단장 생도로서가 아니라 황태자로서 받는 편지였다.

해안이 받아든 편지에는 두 마디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가붕(駕崩)]

슬픔이 불시에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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