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전생전훈(4)
하지만 나보의 패기와는 별개로 이 세상에 엄연히 불가능한 것은 존재했다.
사람 하나가 멋있는 말을 해도 안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특히나 그 사람이 사단장도, 군단장도, 군 원수도 아니라 일개 생도라면 더더욱.
애석하게도 나보의 중대는 전황을 뒤집을 수 없었다.
그와 동기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차에 달려들어 두 대를 파괴하긴 했지만 여전히 적은 조아킴 뮈라 하는 걸출한 생도에 의해 운용되는 전차 두 대가 있었다.
국제사관학교 측에서도 한 대의 전차가 살아남아 도망갔지만, 이내 피격당해 파괴판정을 받고야 말았다.
나보와 그 중대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귀환해 목숨표를 쥘 때까지 적은 방돔을 점령하고 다시 전선을 공고히 다지게 된 것이다.
이미 한 번 크게 당했으니 다시 적 보병의 기습적인 공격을 허락해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사실상의 전세를 판가름할 평원에서의 전면적인 전차전은 압도적인 연방사관학교의 승리가 되었다.
베시에르와 쉬셰, 안장우, 김소권 등의 활약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결과적으로 나보는 전장의 국면을 바꾸어 놓는 데엔 성공했지만, 본류를 완전히 비틀어 승기를 쥐는 것엔 실패한 것이다.
본진으로 귀환해 목숨표를 제출하고 다시 재배치를 기다리던 나보는 패배 소식을 듣고 땅을 쳤다.
지금 치러진 전생전훈의 결과가 무엇이 되었든 저학년들에겐 어차피 패배로 기록될 사항이 아니었다.
하지만 패배는 언제나 분하다. 특히나 이런 실전 비스무리한 모의전에서의 패배는 더더욱.
“왜 그러고 있어?”
비슷한 시기에 귀환해 있던 상혁이 분통해하는 나보의 모습에 물었다.
“멍청이 같은 놈들이 지휘권을 잡고 있으니까 답답해 죽겠다.”
상혁은 나보의 무지막지한 승부욕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작은 체구에 꺼지지 않는 불길이라도 있는지, 나보는 사관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길 원했다. 특히나 어떤 대회가 열리면 무조건 일등을 하길 바랬다. 차라리 참여하지 않았으면 않았지, 일단 하기로 한 것에는 모조리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면 질색하게 되는 것이다.
“뭐하러 성을 내. 어차피 우리는 저학년이라 그냥 훈련에 참여하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되잖아. 나중에 고학년이 되면 그때 가서 해도 뭘 하라고.”
상혁이 팔에 붕대를 둘둘 감으며 말하자, 나보는 흠칫 놀랐다.
“…뭐냐, 다쳤어? 괜찮냐?”
“별거 아니야.”
상혁은 씩 웃었다.
“너가 얼만큼 재미봤는지는 몰라도 나도 재미 좀 봤거든. 이건 그 훈장이지, 하하.”
나보는 상혁의 옆에 놓인 커다랗고 거대한 철덩어리를 보았다.
“저게 뭐야? 방패?”
외견은 딱 방패였다. 누가 봐도 방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보는 헷갈려했다. 현대전에서 방패가 쓸모가 있는가? 열병기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방패란 물건은 오로지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끔 시대적 흐름은 다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맞아. 시가전과 건물 속 난전에서 쓸모 있지. 겉보기에는 무거워보이지만 새로운 금속이 쓰였대.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무겁진 않아.”
호기심에 나보는 방패를 들어보았다. 안 무겁긴 무슨. 나보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나보도 충분히 들고 돌아다닐 수 있었으니, 그보다 힘이 좋은 상혁은 이걸 가지고 뜀박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걸 들고 다니면서 총알을 막는다고? 그게 가능해?”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십 년은 더 지난 대전쟁 이후, 그동안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은 대체로 중원에서 국공내전의 형태로 일어났다. 하지만 낙후된 그들의 특수성을 미루어 볼 때, 무언가를 크게 배운 전훈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여전히 지금 이 시대에는 참호전이 가장 쓸모있는 전술이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난공불락이라 여겨질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기본적인 전술이라는 셈이었다.
전차가 참호를 극복하기 위해 태어나고, 하늘에서는 진보한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야포는 더더욱 정밀해지고 화력이 강해졌다 하더라도, 결국 보병이 땅을 파고 들어가서 전선을 구축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본질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사람은 연약했다.
그러니 전차와 전투기가 개발되었더라고 해도, 어차피 전차는 전차로 막고, 전투기도 전투기로 막아야 했다. 중세의 기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보병끼리 마주 부딪치는 전장의 환경은 여전히 많고 중요했다.
그리고 최근 보병전의 화두는 지근거리에서 기존의 소총보다 더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무기의 개발이었다.
이런 시대에 발맞추어 탄생한 무기가 두엇 있었으니, 첫째론 자동권총을 꼽을 수 있었다.
상혁은 베레타 9를 들고 있었다. 이것도 훈련용이라 총에는 노란색 표시가 되어 있었다.
워낙 유명한 고려의 총기(주로 권총) 제조사인 베레타는 그동안 많은 총기를 생산했지만, 그래도 ‘베레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권총은 그 유명한 베레타 5였다.
특수부대용 다혈권총인 베레타 5는 격발 시 약실 밀폐 구조로 소음기를 달았을 때 굉장히 우수한 차음효과를 누릴 수 있었고, 특유의 다혈식 구조로 인해 높은 신뢰성을 자랑해 많은 첩보기관에게 사랑받았다. 아직도 대부분의 요원들은 베레타 5를 쓰고 있었으니 말을 다한 셈이다.
반면 베레타 9는 그 성질이 좀 달랐다. 기존의 권총들이 채택한 다혈식 구조를 유의미하게 바꾼 이 권총은 사실상 최초의 제식화된 자동권총으로, 격발 시 차탄이 약실에 장전되는 과정을 자동으로 해줄 뿐만 아니라 탄창과 약실의 분리 등을 꾀한 권총이었다. 베레타 9의 권총탄들은 기존의 다혈포 약실이 아닌 손잡이 부분에 있는 탄창에 들어 있었다.
그동안 베레타 7, 8 같은 이중수행식 다혈권총도 나왔지만, 베레타 9는 다혈권총이 지배하던 권총의 흐름을 단번에 바꾸어 놓을 정도로 대단했다.
이후 홍강 권511과 같은 권총 등이 우후죽순처럼 개발된 사실이 이를 증명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또 다른 무기 제조사, 자우어는 아예 소구경 권총의 주무장화를 꾀했다.
어차피 권총은 부무장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입장, 주무기는 여전히 소총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권총은 매우 유용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면 짧은 총열 길이의 한계상 그 명중률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상대방 표정이 보일 때나 쓸 법하니 말을 다 한 셈이었다. 그러니 부무장의 신세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반면 주무장 소총은 장거리에서 아주 훌륭한 명중률을 자랑했지만, 무게가 무겁고 길이가 길어 거추장스러웠다. 착검한 채로 들고 뛰면 실로 고통스러운 짐덩어리인 것이다.
또한 대다수의 소총은 아직도 단발식이라 한 발 쏘고 다시 한 발을 장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기체작동식 반자동소총을 채택한 최근의 무기, 홍강 500식을 제외하면 전부 다 그랬다.
그러니 자우어사는 권총보다는 더 길고 명중률 높으며, 소총보다는 짧지만 연사가 편리한 기관단총을 개발하는데 사력을 기울였다.
자우어 기관총으로 독보적인 인지도를 쌓은 만큼, 그들은 대보병용 작은 기관총의 개발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태어난 기관단총, 자우어 단―505은 권총탄 수준의 총탄을 근거리에서 나름대로 정확하게 흩뿌릴 수 있는 끔찍한 위력을 보여주면서, 단번에 중근거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기관단총은 참호전뿐만 아니라, 시가전 등의 상황에서도 굉장히 유용했기에 고려군 내부에서는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군뿐만 아니라 경찰 특공대와 같은 곳에서도 선호하는 무기가 되었다.
베레타와 자우어의 활약에 홍강과 정윤 같은 기존의 소총 주력 회사들은 이제 기관단총과 소총의 단점을 모두 보완하고 장점은 흡수한 새로운 무기체계, 이름하여 ‘돌격소총’을 꿈꾸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많은 성과가 나타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근거리에서의 무기가 전통적인 소총에서 기관단총과 권총, 산탄총 등으로 다변화되는 시기에 방어장구류도 그만큼 많은 시도가 있었다.
대부분은 실패로 끝났지만, 몇 가지는 유의미한 진보가 있었는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의외로 방패였다.
개활지에서의 방패란 무의미했다.
기껏 금속쪼가리인 방패보다야 땅 파고 들어가 웅크리는 것이 더 안전하다.
방패는 폭발과 충격에 그리 뛰어난 방호력을 제공해주지 않아 날아드는 유탄과 수류탄, 포탄에 취약했다. 게다가 적은 직선 방향에만 있지 않았고, 양옆에서 언제든지 사격이 가능했으니 넓은 전장에서 방패와 같은 것은 그저 자체적으로 기동력을 제한시키는 멍청한 행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적어도 시가전에서의 방패란 꽤 쓸모가 있었다. 특히나 기관단총과 권총의 상대라면 더더욱.
상혁이 받은 방탄방패는 최근 군무부 병기개발단에서 개발하고 있는 장구류 중 하나였다.
훈련에서 어떻게 쓰일지 알아보기 위해 전훈 때 지급한 모양이었다. 동일 무게 시 강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신금속 경은(티타늄) 합금이 들어간 방패는 제식 수준의 소총탄까지 방어할 수 있을 정도의 튼튼함을 자랑했다.
경은합금이 비행기 동체로 주목받는 반석합금(알루미늄―두랄루민)과 더불어 극악의 제련 난이도를 자랑하는 탓에 보편적인 대량생산은 무리였지만 소수의 정예 첨병에게 방탄방패를 쥐여 주고, 후방에서 그를 엄호하며 시가전을 제압하는 방식의 전술 운용은 상당히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되었다.
여전히 수류탄에는 취약했지만, 모든 것에 대비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수류탄은 공격자도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시대의 조악한 수류탄은 주워서 되던지는 경우도 흔했고 폭발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불발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다행인 것은 상혁의 말대로 방탄방패가 나름대로 가벼워 힘 좋은 사람들이 들고 뛰기에는 무리가 없다는 것일 터, 빠르게 피하거나 오히려 수류탄을 던지는 틈을 타 돌격하는 등 순발력 있는 대응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재미있는 생각이 났어.”
“뭔데.”
상혁은 한술 더 떴다. 직접 실전에서 운용해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발명가들보다 여러 가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특히나 상혁은 여타 상민의 다른 아들들처럼 상상력이 풍부했다. 도깨비 귀신마냥 척척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아버지(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기술선도국 공학자들)와 같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진기 섬광 조명이 있잖아. 그걸 방패에 몇 개 달아보면 어떨까. 진압한 다음 곧바로 터트려 적의 눈을 잠깐이나마 멀게 해버리는 거야.”
“…넌 정말 특이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구나. 대체 누가 섬광 조명을 방패에 달아줄 건데.”
“아는 사람들이 좀 있어. 되게 똑똑하고 쓸모있는 장인분들이지.”
전구 안에 반소가 잔뜩 들어찬 일회용 사진기 섬광 조명을 방패 앞에 달자는 괴팍한 주장을 하는 상혁의 말을 멍하니 듣던 나보는 갑자기 그를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나폴레오네!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
“당장 따라나와!”
전훈이 끝나자, 그때까지 줄곧 간섭 없이 지켜보던 장교들이 개입을 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했나!”
“죄송합니다!”
“이 일은 도무지 묵과할 수 없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들은 나보를 부른 뒤 크게 질책했다.
욕을 들어먹어도 싼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열보병의 시대가 끝난 이후, 고려는 임무형 지휘체계니 해서 지휘관의 자율성을 중시했다.
하지만 그것이 생도들 훈련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전술과 전략에 모두 익숙해져야 나중에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뛰지도 못하는 것들이 벌써부터 난다고 한다면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이었다. 어떤 단체에서도 처음 들어온 신입이 기존까지 회사가 해온 모든 것들을 전부다 무시하며 행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고려는 안전수칙에 대해서는 더더욱 엄격했다.
나보는 단체가 가진 최소한의 보수성을 업신여겼다.
만약 상황이 더 좋게 흘러가, 좋은 결과를 맞이했다면 어쩌면 선배 몇 명이 그를 옹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사관학교는 패배했고, 선배들은 모두 낙담한 채로 고된 훈련 끝에 몰려오는 피로감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 누구도 건방진 일학년 후배의 변론에 훈련이 끝나고 얻은 소중한 휴식 시간을 할애할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혼을 내면 혼을 냈을 터였다. 장교가 개입해서 그럴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나보는 다음 모의전에서 열외되었고, 즉석 군기교육을 받았다.
남들이 훈련을 할 때, 후방에 빠지는 것이었지만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낮에는 홀로 완전군장을 하고 지칠 때까지 연병장을 빙빙 돌고 밤에는 독방에 앉아 반성문을 쓰는 것은 그 아무도 원하지 않는 처벌 중 하나였다.
다행인 것은, 나폴레오네가 혼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차 뚜껑을 열고 다닌 조아킴 뮈라가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나폴레오네와 나란히 연병장을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