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전생전훈
“어쭈, 안 구르지?”
“죄송합니다!”
한 차례 얼차려 이후, 눈 뭉치가 되어버린 일학년 생도들은 일단 나디르 콜리 동상에 경례를 붙였다.
이는 다른 학교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사항이라, 제국과 연방사관학교 생도들도 이곳에 올 때마다 나디르의 동상에 경례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나디르가 그들의 선배는 아니지만, 저명한 군사교육자로서 제국에 본분을 다하며 이런 훈련장과 체계를 만들었기에 반쯤 존경과 원망을 담아 경례를 하게 된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 왜 이런 곳을 만들어서.”
선배들의 적나라한 욕설이 들렸다.
훈련장의 분위기는 날카로웠다.
나디르 콜리 육군훈련장은 북려 니타시난에 위치해 있었기에 겨울엔 혹한의 추위가 살을 저며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느끼는 여러 감정이 섞인 분위기가 잔뜩 당겨진 활시위마냥 팽팽했다.
2학년들도 이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3, 4학년들의 분위기가 그만큼 긴장되고 경색되었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둔 4학년생들은 자신들이 지도하는 전훈이자, 생도 시절의 마지막 전훈이 처참한 성적으로 끝나길 원하지 않고 있었고, 3학년들은 그동안 하급 참여자에 불과했던 자신들이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전훈이 되었기에 긴장하고 있었다.
겨울방학(북려 기준) 훈련은 1학년들이 참여하지 않는 여름방학 훈련보다 그 규모와 중요성이 더욱 컸다. 4학년들에게는 이제 이 성적이 임관 이후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게 될 것을 감안해 보면 더더욱 그랬다.
경쟁자들도 임관 이후의 경쟁자들로 동일했다. 더군다나 모교는 단 한 번도 다른 학교를 이긴 적이 없다. 선배와 졸업생, 재학생들의 간절한 소망을 얻은 그들은 다짐하고 다짐했다.
이번 기회에는 꼭 체면치레는 해야 겠다고
2학년들은 아까 눈밭에서 1학년들을 굴릴 때와는 다르게 조심스러워졌다. 그들은 얼른 정위치했다. 3학년들이 날 서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3학년 생도들의 지시를 받은 2학년 인솔자 두 명이 얼른 다가왔다.
“따라와.”
그들은 멀뚱거리는 1학년들을 이끌고 무기고로 갔다.
훈련장 내에서는 생도들을 가르치는 교관과 조교가 따로 없었다.
모든 학교의 일들은 소속 생도들이 알아서 해야 했다. 잡무들은 2학년들이 3학년의 지도를 받아서 했고, 핵심적인 일들은 4학년의 지시에 3학년들이 움직였다. 아주 중요한 일들은 4학년들이 먼저 해놓았기도 했다.
장교들은 근처에 있긴 했지만, 감시역이자 채점관으로 사방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사사건건 간섭하던 훈육장교들도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켰다.
일학년들은 사실 할 것이 없다. 그저 머릿수만 채우고 일반 보병으로서의 지휘에 잘 따르면 되었다. 그동안 받았던 기초전투훈련 때와 같이.
“다행인 건, 우리 학교가 육군은 머릿수 하나는 많다는 거지.”
소식통 황정태에게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온 2학년 인솔자 생도 박희준이 그렇게 입을 열었다.
평소 정태가 알고 지내던 사람인 듯했다.
눈밭에서 사악하게 학년들을 굴리던 다른 2학년들과 다르게, 그는 비교적 온유하고 착해 보였다.
당근과 채찍의 전술일지도 몰랐지만, 일단 차분히 설명해주는 것이 고학년들에게도 좋을 것이었다. 일학년들이 최대한 빠르게 적응해야 걸리적거리지 않을 터였다.
“해공군 애들은 그만큼 인원수가 딸려 고생할 거지만, 뭐 어쩌겠어. 지금 우리가 걔네 사정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자 이거 받아라.”
그들은 2학년 선배가 건네주는 소총을 들었다.
“사격훈련 때 받았던 제식소총 홍강 500이랑은 다르지?”
“예 그렇습니다.”
“특수하게 만든 훈련용 소총이야. 실총 대신 고무탄이 들어간다. 재질도 재질이지만 탄환 끝이 뭉툭한 덕에 정말로 지근거리에서 맞지 않는 이상 신체에 상해를 입히진 못해. 그래도 화약무기니까 주의해라. 맞으면 진짜 아파.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교전 상황이 아닐 때 무기로 함부로 장난쳤다간 군사재판이야. 실총이 박히고 싶지 않거들랑 알아서 똑바로 행동해. 총탄은 나중에 줄 거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입학한 지 시간이 좀 흘렀다고, 일학년 생도들도 이제는 완전히 신병티는 벗어던진 상태였다.
사실 여름 훈련 때는 일학년 생도들이 준비가 안 되었기에 소집하지 않았던 것이 컸다. 이제는 모두가 남에게 함부로 총구를 겨누지 않고 총기를 안전하게 쥐는 법을 알았다.
받은 장비에는 자잘한 안전장구도 있었다.
소총탄을 이런 안전장구들로 막을 순 없었다.
철모도 사실 정확히 직격하는 총탄을 막는 용도가 아니라 유탄이나 파편을 막는 용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무탄은 막아낼 수 있었다. 훈련용으로 만든 총탄이라 하더라도, 직사로 사람에게 발포할 때 충격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훈련을 현실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나디르 콜리의 무자비한 주장에 따라, 전술훈련에서 생도들은 이런 총탄들을 직접 몸에 맞아야 했다.
중요 부위를 가리는 안전장구를 입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는 아주 진작부터 여러 가지 안전장구를 개발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전투용 철모를 전군에 도입한 것도 고려였고, 군장과 군화를 표준화한 것도 고려였다.
메리나의 거미줄을 이용해 세계 최초의 방탄복을 개발한 것도 고려였다. 이것은 그 유명한 연방사관학교의 영웅, 이윤신이 실전으로 유용성을 증명해냈다.
하지만 무기가 급속히 발전하자 방탄복의 지위는 다른 장구류보다 불안정해졌다. 고려의 군수업체들이 나름대로 비단과 면, 철판과 거미줄을 등을 이용해 끊임없이 방탄복을 개발하려 했던 시도들은 모두 도태되었다.
총알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뾰족하고 정교해졌으며, 화약도 강력해졌다.
이제는 예전의 귀물이었던 거미줄 방탄복도 소총탄을 막아낼 순 없었다.
물론 최근엔 강철보다 더 단단한 금속들을 이용하거나 겨우 개발단계인 고분자중합체를 어찌 이용해보자는 건의도 있었지만 요구사항을 전달받은 화학자들이 볼 때엔 기지도 못하는데 날자고 건의하는 꼴이었다.
그래도 그런 노력 중 몇 가지는 이런 모의전에서는 충분히 제 성능을 발휘했다.
“이건 보호장구류다. 고무탄을 막아내는 용도야.”
방어구들은 네 가지 정도였다.
갈비뼈와 중요 장기를 보호하는 흉갑(과트라체식이 아닌 보병식으로 전술적으로 만들어진), 남자의 소중한 곳을 보호하는 고간 보호대, 철모까지.
그 와중 특이하게도 하나의 방어구가 더 있었는데, 얼굴, 특히 눈부분을 가려주는 방탄가면이었다.
“나디르 콜리 대훈련장의 유명한 격언이 있지. [최대한 현실 같은 훈련을 추구한다]. 그 빌어먹을 늙은이 덕에 여기서 다친 사람은 헤아릴 수 없다. 눈을 잃은 선배도, 고환이 터진 선배도 있었지. 그러니까 니들은 고간보호대랑 방탄가면은 꼭 쓰고 다녀라. 나라가 보상금을 주지만, 잃어버린 고환과 눈알까지 돌려주지는 못해.”
모두가 으스스 떨었다.
“자, 모두 제자리 앉아. 이제 훈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줄 테니, 선배님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게 잘 알아들어라. 알았지? 질문은 말 끝나고 한꺼번에 몰아서 받겠다.”
박희준 선배의 말에, 사람들이 정자세로 앉았다.
전국생도전술훈련. 약칭 전생전훈, 혹은 전훈.
나디르 콜리라는 걸출한 인물이 고려에 귀순하며 구축한 전술훈련체계는 지금 거의 오십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고려의 독특한 군사훈련체계가 되었다.
이런 군사훈련체계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도들에게 전훈이 있듯, 각 부대도 편제마다 훈련이 있었다.
물론 이런 훈련들은 나디르 이전에도 존재했던 고려의 훈련체계였지만, 정말 어떠한 훈련계획이나 대본 없이 쌍방이 완벽하게 훈련장 내에서 자유기동을 하며 모의전을 치르는 것은 전생전훈이 처음이었다.
굳이 이럴 것까지 있느냐는 물음이 나오기도 했다. 평화의 시기, 군인은 홀대받는 직종이다. 군인에 대한 선망도가 높은 고려조차도 경제위기 땐 대전쟁 직후만큼이나 강도 높은 군 감축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군 감축 속에서도 생도들의 숫자는 딱히 줄어들진 않았다.
유사시 군대를 다시 일으켜야 할 때 일반 보병들의 숫자는 언제든지 뽑아낼 수 있지만, 고급 장교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고려는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또한 훈련이나 대우도 약해지지 않았다.
고급 장교가 정말로 고급 장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수준이 높아야 했다. 고급 장교는 그저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제대로 된 훈련만이 그들을 완성시켰다.
전생전훈은 어린 장교 지망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는 과정이었다. 첫 단추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생전훈은 시대와 전장 환경, 기술 등에 따라 발전했다.
그래도 설립자의 좌우명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지상전의 승리자가 되자는 전귀(戰鬼)의 말은 고려군에게 내리 패배했던 나디르가 샤 시절의 한을 애꿎은 후세대 고려군 생도들에게 풀게 되는 수단이었다.
전훈의 개념은 간단했다.
원래 사관학교의 생도들은 ‘여단’ 편제였다.
인원수는 일반 보병 여단보다는 조금 적었지만, 편제 구성은 동일했다. 여단 밑에는 연대 대신 대대가 있었고 대대는 다시 중대와 소대, 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런 전훈 때 한 사관학교가 아예 하나의 여단으로 기능하여 모의전을 치르게 되었다.
적도 마찬가지였다. 연방사관학교 생도여단과 제국사관학교 생도여단은 지금도 훈련장의 각기 다른 지점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전략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전장의 환경은 다양했다. 참호전도 있었고 시가전도 있었다. 어떤 때엔 해병마냥 상륙전도 있었다.
훈련대장 나디르 콜리는 시가전을 위해, 직접 도시 공학자들을 고용해 유럽과 동아시아식, 아랍식의 건축물들을 지어 그럴듯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한때는 세계를 호령할 뻔한 페르시아의 샤, 임금이었던 인물이다. 고려 황제가 그의 귀순을 기리기 위해 하사한 돈은 적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물 쓰듯 쓰다 보니 본신의 재산을 모두 쓰고 일국의 군주였던 사람이 군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다른 장병들 사이에서 껴 식사를 하는 꼴이 되는 바람에(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가 다시 자금을 주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그는 모의전과 전술훈련, 고려군 개발에 진심이었던 터라 그냥 국방비가 소액 올랐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모의전에서는 대체로 목표 거점의 사수, 혹은 공격 상황이 주어졌다. 혹은 점유가 아직 되지 않은 중립 목표를 누가 더 빠르게 차지하는지를 따져보는 경우도 있었다.
수비의 유리함을 고려해 공격과 방어를 조정하기도 했다. 공격자에게는 소위 말하는 ‘목숨표’가 주어져 일정 수준의 손실을 입으면 패퇴하기도 했다.
원래 전쟁에서 목숨표는 하나였고 죽으면 끝이었지만 일반 장병들을 생도들의 훈련에 동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정된 인적 자원을 최대한 쓰며 전장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불쌍한 저학년들은 자주 죽었다 일어나서 다시 돌격해야 했다.
“알았지? 일이 학년들은 그냥 보병이라고 생각하면 돼. 지휘나 포병계통, 전차 운용은 고학년들이 하니까.”
전장의 백미는 포병이다.
지금까지 전생전훈에서 가장 강력한 군종을 뽑아보자면 역시나 포병이었다. 모든 사관학교가 같은 문의 대포가 주어지기에 누가 더 대포를 잘 사용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곤 했다. 참호전 구도가 벌어지긴 했지만 훈련은 훈련이니만큼 한 달 내내 참호전을 벌이지는 않으니까 언젠가는 고개를 들고 약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대포는 소총과는 달리 연습탄이라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연습탄이라고 해도, 대포를 정통으로 맞으면 그냥 즉사였다. 대신 아예 탄두 없이 장약으로 공포탄만 발포했는데, 참관하는 포병장교 출신의 감독관들이 생도들의 포각을 대략적으로 계산하여 착탄지점을 알려주었고, 맞은편의 감독관들이 그것을 받고 전달해주는 체계로 이어졌다.
생도들은 몰라도 감독관들은 무전 송수신기를 쓸 수 있었다.
그 순간에 어떤 엄폐가 없었다면, 해당 부대는 자동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차는 안 알려주십니까?”
“그건….”
사실 2학년 생도들도 전차전을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어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에 대대적으로 노후된 옛날 훈련용 전차를 신형으로 바꾼 덕에 더 그랬다. 지금 4학년 기갑병과 생도들이 머리를 쥐어뜯는 것도 이 덕일 것이다. 희준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전차전은 전차끼리 일단 붙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전차가 보병에게 다가오면 그냥 사망 처리되는 거지. 너희들도 우리 다음으로 그걸 배울 거다.”
그는 박수를 두어 번 쳐 주의를 환기했다.
“어차피 너희들도 여기 오기 전에 훈련계획서랑 선배전달문을 읽어봤을 거 아냐? 거기에 대체로 다 수록되어 있어. 그리고 일학년은 그냥 구르고 깨지면서 배우는 거다. 너희들 스스로가 뭐 하려고 하지 마. 알았지?”
어차피 저학년 때는 고학년들과 달리 전훈의 결과가 딱히 기록되지 않았다. 몸은 고생하겠지만 마음 편히 훈련받으라는 말에 일학년들은 두려움 반 기대감 반으로 소총을 쥐고 훈련에 참가했다.
* * *
그리고 훈련해본 결과, 실제로 일학년생들의 임무는 아주 단순하고 단조로웠다.
“으으 추워…!”
야트막한 언덕 하나에 자리 잡은 나보의 부대는 낮에 지표면이 살짝 녹을 땐 겨우겨우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야 했고, 밤에는 그 속에 들어가 하루 종일 있어야 했다.
저학년들에게 지금 이 훈련은 혹한기 훈련과 같았다. 동계전투복과 모포, 담요가 지급되었지만, 뼛속까지 들어오는 한기를 막을 순 없었다.
게다가 은엄폐를 유지하기 위해 불을 피울 수도 없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감독관이 귀신같이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훈련장의 터줏대감인 전갈대대는 이 넓은 여단급 훈련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1학년들은 땅속에서 최대한 웅크린 채 덜덜 떨면서 특정한 지점을 감시해야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상혁이처럼 시가전에 배치되어야 했는데.”
추위는 비슷하겠지만, 몸이 얼어붙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대기하는 것과 그나마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것 중에선 후자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조금 힘들더라도.
“그거 어차피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거잖아. 상혁이랑 포타타 같은 애들이야 애초에 특급전사들이라 선배들이 직접 뽑아서 배치한 거고.”
정태가 중얼거렸다. 그는 나뭇가지와 우의로 만들어놓은 구덩이 뚜껑을 당겨 한기가 들어오는 부분을 최소한으로 만들었다.
나보도 손을 후후 불며 몸을 더 웅크렸다. 기후가 온화한 코르시카에서, 온난한 남려로 넘어왔다가, 파주에서 생도가 된 그는 추위에 전혀 내성이 있지 않았다. 동장군이 찾아오는 겨울에 군사를 운용하는 것은 못 해먹을 짓이다. 그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 탕 타탕
저 멀리 어럼풋한 총소리가 들렸다. 나보는 뚜껑의 틈을 열었다. 쏟아지는 한기에 정태가 성질이 나 그에게 한 소리를 하려고 했지만 나보는 대신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몰라도 구덩이에서 엎드려 장교용 쌍안경으로 저 멀리 보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영천 방면에서 전투가 일어나나 봐.”
사람이 살지 않는 모형 마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 탕 타탕
연습총이라도 화약이 점화된다. 총소리와 불빛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벌써부터 영천이 뚫리면 안 되는데.”
나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머지 일학년 생도들이 자신이 인간인지 동태인지 모를 지경이 되어도, 그는 유심히 훈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전계획하에서, 영천은 근후방으로 분류된다. 지금 훈련 초반부터 저곳이 공세를 받는다는 것은 아군이 무언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망원경을 들어 아주 멀리 유럽풍의 도시, 비뇰을 바라보았다. 저곳은 반대로 평온했다. 본래라면 저곳 비뇰이 지금쯤 격전지가 되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라―3 부근의 너른 평원에서 전차전이 벌어질 거라고 예측했지. 하지만 우리 쪽 전차만 꾸물대고 있고, 적의 전차는 보이지도 않는다. 보였으면 폭음이 일어났을 거다.
애초에 전차는 대포가 아닌데 대체 왜 전차로 적의 공세를 저지해낸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전차는 망치고, 망치는 방패가 아니다. 오로지 적을 분쇄해야 하는 것일 텐데. 끊임없이 변수를 창출해 전장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아니, 좀 봤으면 닫아 봐. 추워 죽겠다니까.”
정태의 말은 또 씹혔다.
‘그래, 전차 전력의 일부를 비뇰로 가야 하는 보병대의 엄호를 맡으면서 그것을 미끼로 적의 전차대를 끌어들이면서 전투를 시작했어야 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 수세적으로 임했다. 살도 내주고 뼈도 내줄 차례구나. 핵심적인 패배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전선이 이렇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보급점수가 미친 듯이 내려가겠지.
비뇰을 이렇게 적에게 쉽게 넘겨주면 우린 영천이랑 무계만 점유하는 셈이고, 적은 비뇰과 비뇰 옆의 방돔, 그리고 다르가즈와 타브릭를 점유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아군은 훈련장 남서 귀퉁이로 고립되는 처지. 답답해 죽겠군.’
처음 이 훈련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선배들 사이에 내려앉은 패배감 비스름한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저번 기수도, 그 이전의 기수도, 국제사관학교 생도들에게는 숭무감과 자제감이라는 제국의 두 기둥 생도들의 역량은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은 모양이다. 이미 이들은 모의전 시작부터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보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것 중 하나였지만, 이번 선배들의 목표는 작년과 같이 무력하게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대체 어째서 장교라는 자가,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임한단 말인가? 그러고도 너희들이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의 장교들이냐고, 나보는 선배들에게 되묻고 싶었을 정도였다.
물론, 그도 상식이 있기에 그러진 않았다. 어차피 지금 옆에는 고학년들이 없었기도 했고.
“박 선배님?”
대신 나보는 그들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박희준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