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검은머리 고려군 생도들(2)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단 두 명이라도.
상혁은 나중에 천막 안에 들어온 두 명의 다른 지원자들에게도 비슷한 제의를 했다. 1차 시험 때 빠르게 탈락해 집으로 돌아갔기에 결과적으론 의미가 없었지만.
사실 둘로도 충분했다.
시험이 끝난 뒤, 문제지는 모두 소각된다고 한다. 어떻게 출제되는지 다른 사람들은 감을 잡기 어려웠다. 이는 시험을 직접 여러 번 보지 않은 이상 모두가 비슷했다.
나보는 감탄이 나올 만큼 대단히 뛰어난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경험해보았던 문제의 형식을 알려줘 상혁을 도와주기에도 충분했다.
유일하게 어려워한 것은 고려사, 즉 국사인데 그건 이민자 출신을 고려해본다면 어쩔 수 없었다.
반대로 이 과목에 대해선 상혁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국사는 일반시험에도 도움이 되지만 면접에서도 도움이 되었다.
체력검정 때는 상혁이 나보를 많이 도와주었다.
국제사관학교의 자랑 아닌 자랑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파주 내에서 두 대양을 한 번에 오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주 먼 옛날 고려가 니카라오 운하를 뚫기 전, 조정은 이곳에 야트막한 성벽(혹은 가도)을 지어 대동양과 태평양의 물자를 오고 가도록 해놓은 적이 있었다.
이제는 바로 옆에 역청도로가 깔려 있긴 했지만, 여전히 역사 유물의 흔적을 따라가면 양 대양을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60킬로미터의 길을 하루 만에 완전군장으로 급속행군하는 것이 체력 시험 중 가장 큰 관문이었다.
다목적 보병은 예나 지금이나 행군이 엄청나게 중요했다. 수레와 마차 대신 이제는 견인기와 승합차, 수송차 등이 생겨났지만 사람의 발만큼 험지극복능력이 출중한 이동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시대가 지나도 부대의 행군 거리는 늘어날지언정 줄어들지 않았다. 신발과 군장의 형식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짐의 양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일인이 짊어지고 가는 무게는 늘어났을 것이다.
창과 칼, 방패와 활 등에서 기관총과 탄약, 수류탄과 소총, 대검과 폭약 등을 짊어지고 가야 했으니까. 특히나 일선 장병들 한 명 한 명에게 상당한 장비를 보급해주는 고려군은 더했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고려에서는 현재 고려군 보병이 40킬로의 군장과 총을 멘 채로 하루에 40킬로미터 정도를 비전투손실을 최소화한 채로 전술행군으로 걸을 수 있게 훈련해놓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군 생활과 훈련에 적응된 고병들이 기준이었고, 지원자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몸 건강한 일반인에 불과했다.
입학시험을 준비하겠답시고 운동장 몇십 바퀴를 돌아본 경험이 있는 것과 완전군장 한 채로 급속행군을 하는 것은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이 길이가 딱히 불가능한 목표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40킬로미터보다 50킬로미터가 길이상 차이는 십 킬로에 불과하지만 체감상 두 배보다 더 힘들고, 50보다 60킬로미터가 서너 배는 더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파주는 기후 자체도 무더운 열대였다.
온대기후에서의 행군으로 인한 비전투손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가볍게 걷기만 해도 땀이 주룩주룩 나는데, 그 무거운 군장을 메고 가면 그야말로 사람이 생사를 오가는 환경이 되었다.
탈수가 오죽 문제가 되었으면 국제사관학교의 군의관들이 경구수액이라는 치료법을 개발하기까지 했을까. 이들은 물과 소금을 비롯한 여러 무기질, 당이나 탄수화물을 적절히 조합해 생도들의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경구수액이고 나발이고, 일단 죽을 만큼 힘든 것은 변함이 없었기에 생도들은 체력시험에서 도중에 무더기로 낙방하곤 했다.
나폴레오네도 이 같은 상황을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다.
이번엔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리라, 그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정신이 육신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안 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으악!”
불운하게도 나보는 땅에 난 작은 구덩이에 걸려 넘어졌다. 옛 성벽도로 옆에 난 역청도로는 대부분 포장이 되어 있었지만, 제아무리 가장 진보한 역청도로라도 열대기후에서는 관리가 참으로 어려워 손상된 구덩이 같은 것이 많았다. 물론 이래도 비포장 산길보다는 행군하기 편했다.
군장이 군장이다 보니 넘어지면 발이 삘 확률도 높았다. 그리고 발이 삐면 행군하기 힘들었다. 나보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일 년 더?
사실 이런 불운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 누구에게 불평할 수도 없었다.
나보는 고통을 참으며 일어났다. 점수는 다른 시험에서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낙오하여 과락을 당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절뚝이는 것이 느려 보였다. 이러다 행군 대열에서 이탈하면 과락이다.
상혁은 이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삽이랑 침낭 줘. 아니, 군장틀 일단 벗어봐.”
상혁은 두 사람 몫의 군장을 앞뒤로 둘러멨다. 아무리 상혁이라도 절로 후들거리는 무게였지만, 그는 꿋꿋이 나아갔다. 나보는 옆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을 묵묵히 삼키며 단독군장을 한 채로 총을 들고 절뚝이며 이동했다.
교관들(지금은 시험 감독관을 겸했다)이 보면 한 소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교관들도 그들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우들끼리 도와주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기까지 했다. 전우애는 미덕이다. 게다가 본인의 손해를 감수하고 경쟁자를 도와주는 것은 보통의 배포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결국 나보는 상혁의 도움을 받아 겨우 낙오되지 않고 완주를 해냈다.
“헉… 헉… 해냈다!”
아무리 단독군장이라도 발이 팅팅 부은 상태에서 완주를 해낸 나보가 비명 섞인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는 쓰러지며 다리를 주물렀다.
“괜찮냐? 의무대부터 먼저 가자. 부축해 줄게.”
나보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상혁이 그의 뒤에서 군장 두 개를 내려놓고 있었다.
“…정말 고맙다.”
나보는 정말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장래가 달린 문제, 정말 평생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시에 나보는 기가 찬 얼굴을 했다.
“넌 대체 신체가 뭘로 이루어진 거야. 강철? 그렇게 군장을 두 개를 들고 와도 힘들지 않냐?”
상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깨에 붉은 군장 줄이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크게 무리가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예전에 우리 아버지랑 같이 마야주 니주크(칸쿤)에서 기주까지 수영한 적이 있었어. 그때보다는 힘들긴 하네.”
나보는 상혁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짓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절뚝이며 의무대로 향했다. 이미 의무대 앞에는 많은 환자가 줄을 서고 있었다. 낙오한 자들도, 나보처럼 끝까지 완주한 자들도 있었다.
표정으로 두 무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나보가 후자에 속하는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보는 대기의자 맨 뒤에 앉아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발바닥과 팅팅 부은 발목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난 말이다… 나중에 내 병사들한테는 정말 잘해 줄 거다.”
가혹한 행군 같은 것은 절대로 시키지 않을 거다.
나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상혁이 피식 웃었다.
그가 앞으로 해군이 될지, 육군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초심을 잘 지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3주간의 입학시험이 모두 종료되고, 마침내 결과가 발표되었다.
“붙었어, 붙었다고! 이 나폴레오네가 드디어 장교가 된다 이 말이야!”
당연히 둘 모두 통과였다. 어떤 시험에서도 자격 미달로 탈락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일부 시험에서는 평균을 훌쩍 넘어 고득점을 얻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나보는 기쁨에 겨워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마음고생이 내심 심했던 모양이다.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어머니의 분노하는 얼굴은 적어도 4년 정도 뒤에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덕이 크다.”
“너도. 고맙다.”
입학시험을 치르며 둘은 마치 둘도 없는 지기가 되었다.
형제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보는 키는 작으나 나이도 많았고 여러모로 고생했기에 꽤 성숙했다. 형 주세페를 대신해 나이 어린 동생들을 다루어본 경험도 많았다.
반면 상혁은 덩치는 산만 했지만 제대로 된 친우가 별로 없었고 또래와의 사회적 교류가 적었다.
둘이 형제마냥 친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안도의 분위기는 잠시,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빨리빨리 안 뛰어? 여기가 아직도 사회인 줄 알아!”
입학식 이후부터 그들은 지원생이 아니라 사관생도로서 본격적으로 부려 먹히기 시작했다.
“제대로 안 하나!”
“바로잡겠습니다!”
신입생들은 제식훈련을 시작으로 미친 듯이 구르기 시작했다.
입학식에 입을 정복 하나, 범용으로 쓸 군복 하나, 훈련복 두 벌이 주어졌는데, 훈련복 두 벌은 그야말로 누더기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신입생들은 보통 얼빠진 놈들이다. 그 사실은 신입생들도 인정했다.
이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일반적 사회에서 탈사회화의 과정이 필요했고, 반대로 군대라는 사회에서의 재사회화 과정이 필요했다.
욕설과 고함이 오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나마 아주 옛날에 있었다는 구타는 대부분 사라진 상태였다.
전열보병의 시기, 전열에서 병사를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극도의 규율을 유지해야 했고, 모든 문화권을 떠나 폭력이 가장 흔한 수단으로 쓰였다.
다만 시대가 변하고 사단과 연대 단위뿐만 아니라 중대와 소대 단위의 전술적 중요성도 증가하자 이 같은 폐습은 악습이 되었던 터였다.
여전히 얼차려는 많았지만 사실 얼차려 없이 군기를 불어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긴 했다.
그래도 뭐 잘못할 때마다 산을 오가게 하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생도들은 눈물을 삼켰다.
나보는 폭언에도 시달렸다.
“네놈은 아직 고려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이냐? 관심 있는 건 오직 계집질이랑 비빔국수뿐인 놈들? 대전쟁 때도 이탈리아 놈들은 창고에 총탄 대신 오직 토마토 양념만 가득 쌓아 놨다지. 네놈도 영락없는 그 핏줄이냐? 코르시카 촌놈?”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굼떠! 빨리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네 놈의 투실투실한 엉덩이를 차 버리기 전에 빨리 일어나!”
나보는 이를 악물었다. 고려 사회에도 여전히 지역, 출신 차별은 존재했다.
특히나 고려인 출신이 아니라 이민자 출신은 더더욱.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것을 뚫고 올라가야 했다. 모든 사회가 동화처럼 아름답길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시대가 바뀌길 기도하는 것은 나보의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군대는 그 특수한 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민자에게 출신 국가 대신 새로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자꾸 확인하고 강요해야 했다.
훈육하는 교관도 생도들의 배경을 알았다. 훗날 장교가 될 생도들의 배경검사는 보안상 일부는 필수적이기도 했다.
물론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니라 대략적으로만 파악했다.
짬이 있다 보니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긴 했지만.
많은 교관이 대체 이 배경 불확실한 애가 어떻게 바늘구멍과 같은 이민에 성공해 대단한 추천서를 들고 사관학교에 왔는지 의아해했다.
보통 이민자들은 기술자나 학문 같은 성취를 이룬 자들이 가족을 끌고 오거나, 혹은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외인부대로 복무를 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전자는 굳이 군인이 되지도 않았다. 고려는 군인 후보생을 외부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다.
나보를 담당하는 교관, 메투알락은 후자에 속했다.
그는 외인부대의 보병 출신으로, 이제는 정교(진)의 계급을 달고 있는 훈련부사관이 되었다.
사관학교의 교관들 중에서는 교수사관이나 훈육장교 같은 장교도, 그와 같은 훈련부사관도 있었다. 대체로 저학년 시절의 병기본훈련이나 전투훈련의 경우에는 훈련부사관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메투알락은 훈련부사관이 되기 전, 동아프리카의 분쟁지대에서 숱한 생사고락을 넘고 온 사람이었다.
세계가 평화롭더라도, 외인부대가 필요한 곳은 항상 많았다.
그리고 그는 오랜 복무 끝에 고려 국적을 얻었다. 자랑스러운 성취였다.
하지만 이런 성취가, 누구에게는 너무 쉬운 결과물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메투알락은 이 어린 이탈리아 놈이 굉장히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이민을 오고, 장교 생도가 되어 앞으로 고려군의 중추가 되려 하는 것을 보기 좋아할 리가 없었다. 불안하기도 했다.
물론 심증뿐이라면 어떻게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메투알락도 자부심 있는 전사였으니 정도를 알았다.
정말로 합리적으로 입학을 했다면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메투알락은 나보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구 정령 때문이었다.
나보의 합격 소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구 정령은 마침내 그가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합격했으니 이제 되었다는 생각으로 사관학교 내의 지인들에게 그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것도 사실 그의 책무였다.
구 정령이 받은 임무는 비밀명단에 있는 이런 어린 천재를 모으고 잘 키워내는 것이었다.
사익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
구 정령이 무슨 인연이 있어 나폴레오네를 굳이 이탈리아에서 데려와 키웠겠는가. 다 위에서 명을 받아서 한 것이다.
호레이쇼 넬슨도 그렇게 키워냈었다.
구 정령은 나폴레오네도 어디 다친 곳 없이 성한 몸으로 무사히 졸업하길 원했다.
그러나 나보를 담당하고 있던 메투알락은 이 말을 건너 건너로 듣게 되자 큰 오해를 하고야 말았다.
‘대체 뭐지? 공정한 정예 장교 육성의 산실이라는 사관학교도 이제는 타락한 건가?’
그와 같은 자긍심 있는 군인은 인맥과 혈연, 지연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메투알락은 자연스럽게 나폴레오네가 입시에서 부정적인 청탁을 받았는지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나폴레오네와 상혁이 한 줌의 부정 없이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함께 다니는 놈도 어딘가 수상한 놈이고.’
하지만 일개 훈련부사관이 정식으로 사관학교에 합격한 생도들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쫓아낼 순 없는 노릇. 그는 차라리 매사에 아주 엄격하고 깐깐한 기준을 적용시켜 제풀에 그만두게 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나보가 그의 은인인 구 정령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면 오해를 풀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보는 그러지 않았다. 원인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힘들다고 그에게 연락하는 것은 전혀 사내답지가 못했다.
대신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 이것도 못 하나! 함께하는 동기들에게 짐만 되고 싶은가? 포기하면 편하다. 그냥 집에 돌아가!
― 할 수 있습니다!
떨어뜨리려는 자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의 대결은 이내 학교에서도 유명해졌다.
* * *
“우리 학교가 원래 훈련 강도가 엄청 높다고 해.”
저녁 식사시간은 빡빡한 하루 일과 속에서도 가뭄의 단비 같은 휴식시간이었다.
교관들도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을 잘 아는 듯했다.
초창기에는 먹을 때도 휴식군기니 식사군기니 뭐니 괴롭혔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이런 것들도 조금씩 풀어주는 모양이다.
운 좋게도 나보와 상혁은 여단급 규모의 생도대 내에서 같은 생도대대, 같은 생도중대에 속했다.
소대는 다르지만 식사 시간에는 충분히 만날 수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 말을 꺼낸 황정태는 상혁의 방짝이었다.
사관학교에서는 이인 일조로 방을 공유하도록 했다. 방짝이 되면 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태는 굉장히 착하고 둥글둥글해 모난 구석이 없었기에 상혁과도 잘 어울렸다.
가끔 조상에 대한 불필요할 정도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것 빼고는. 이래 봬도 성씨는 무려 태조 시절부터 내려오던 오준오표 중 일원인 황사의의 후손이랬다.
― 그래? 대단하네.
그때 나보가 순수하게 감탄했던 기억이 났다.
몰락한 부유층 이민자 출신인 그는 명문가에 대한 동경 비스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혁은 절친한 벗에게도 자신의 집안을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그냥 듣기만 했다.
“이게 다 경쟁의식 때문이야. 제국사관학교랑 연방사관학교는 숭무감이랑 자제감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가 깊거든. 근데 우리 학교는 그런 거 없잖아. 그러니까 생도를 빡세게 굴려서 좋은 장교들을 뽑아내고 싶은 야욕이 있나 봐.”
“젠장, 그렇구만.”
생도를 먼지 나게 굴리는 것과 좋은 장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상관관계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학교의 높으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태의 말을 듣던 주변의 다른 생도들도 탄식을 터트렸다.
반면 상혁은 시큰둥했다.
“그 대머리가 나보를 괴롭히는 이유는 그런 생산적인 이유가 아니다. 그냥 그 인간이 쪼잔하고 멍청해서 그렇지. 남자답지도 않은 놈이라서야.”
상혁은 친구가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메투알락 교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좋은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나랏님 없는 곳에선 나랏님 욕도 가능한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아무리 호랑이 같은 교관이라도 뒷자리에선 학생들에겐 잘근잘근 씹히는 처지였다.
그때 식탁 한편에서 굵은 반박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자는 너만큼이나 강한 마나를 보유하고 있다.”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청년은 루밀 키치파닐의 탕아타 훼누아(마오리) 출신 후보생이었다.
이름은 포타타우테 훼로훼로, 친우들은 그를 줄여서 포타타라 불렀다.
마야 핏줄 반, 탕아타 훼누아 핏줄 반이 섞인 그는 독실한 쿠쿨칸교 신도였고, 쿠쿨칸교에 의해 재해석된 탕아타 훼누아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좀 과할 정도로.
“그는 많은 고난을 넘어온 사람이다. 피 냄새가 짙다. 네가 근력에서 우위를 점할지언정 그는 노련함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직 넌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마야나 탕아타 훼누아 전통의 뭔가가 있는지 전사와 강자를 잘 구분했다.
“아니, 내가 왜 교관이랑 싸워. 깡패도 아니고.”
자존심 상하는 말은 둘째 치고, 상혁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 너는 혈기와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더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너의 마나는 더 성장할 것이고, 네 허물도 한 겹 더 벗겨져 고결함에 가까워질 테다.”
하지만 포타타는 계속 진지한 말을 늘어놓았다. 상혁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마나란 잘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탕아타 훼누아 문화권에서의 정기(正氣)와 같은 개념이었다. 예전에 이들은 다른 전사의 정기를 흡수하기 위해 식인을 했다지만, 그보다 더 잔혹한 마야인들에게 쿠쿨칸교로 강제로 개종당한 이후엔 악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포타타는 독특한 놈이다. 수도승 같은 분위기가 풍기기도 했고, 전사 같은 분위기가 풍기기도 했다. 카롬테 직속 휘하의 전사가 현지 전사의 딸과 결혼해 두 문화의 정수가 융합된 실로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시원한 루밀 키치파닐에서 왔지만 혈통의 덕인지 이 무더운 파남의 기후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이 자식 또 이러네. 아 알았어. 알았다고.”
동기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상혁은 괜스레 국에 들어있는 두부를 헤집었다.
“어쨌든 나보. 너도 인내해라. 꽉 막힌 동굴처럼 보이는 곳도 언젠가 햇살이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그래, 고맙다.”
딱히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동기의 위로 같은 말에 나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 중대 동기들 내에서의 분위기는 좋았다. 인종차별도 없었다. 고려는 원체 거대했고, 국제사관학교는 제국과 동맹국 온갖 곳에서 지원자들이 몰려오니 더더욱 그랬다.
“아 맞다.”
갑자기 소식통 황정태가 갑자기 무언가 기억난 듯 손뼉을 쳤다.
“일학년이 벌써부터 이야기할 건 아니지만, 이학년이 되면 우리들도 학교 대항전에 참가할 수 있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승하면, 선배들이랑 주지사가 엄청 후원을 많이 해주나 봐.
만약 축구나 정구 경기, 전술 대결에서 제사랑 연사를 모두 이기면 장학금은 물론이고 선배들에게 눈도장도 단단히 찍어놓을 수 있을 거다.
듣기로는 진급도 잘 풀린다더라. 특히 전술 대결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정식으로 성적에 반영도 되고.”
모두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밖의 사회는 장기적 경제침체다. 장학금은 단번에 그들을 효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가장 큰 동기였다. 정태와 같은 이들은 장학금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것에는 관심이 많았다.
“우리 학교가 지금 설립 이후부터 매년 꼴등인 건 알고 하는 말이지?”
누군가가 눈치 없이 초를 쳤다. 동기들의 어깨가 다시 내려갔다.
하지만 갑자기 나보가 꼬치꼬치 황정태에게 물었다. 담당 교관에게 찍힌 이상, 아무리 증명하려 해도 성적이 나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는 만회할 기회를 찾고 싶었다.
“전술 대결이 대체 뭔데?”
정구에는 익숙하지 않았고, 축구도 잘 몰랐다.
축구에 죽고 살고 하는 고려인들에게 축구로 싸우겠다고 하는 것은 제아무리 적응이 끝났더라도 이탈리아인 출신의 이민자에게는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아예 빗장수비를 하고 두들겨 맞는 것을 가정하고 전술을 짜지 않는 이상엔 처참하게 패배하고 끝날 것이다.
하지만 전술대결은 굉장히 흥미가 동했다.
“음… 이건 이학년 때 선택하는 군종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모의전을 치러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교에게 승점을 주는 거야. 우리 기수도 결국 나중에 임관하면 저기 연방사관학교나 제국사관학교 애들이랑 경쟁하게 되니까, 이런 승점은 그때 적용이 되는 거지.”
“좀 더 자세히 말해줘.”
“일단 육군은 북려 대훈련장에서 모의전을 치러. 해군은 바다에서 하고, 공군도 전투기를 통해 뭘 한다고 들었어. 우리 학교는 공군이 없지만…….”
정태의 설명을 듣는 나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