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28화 (528/653)

528화 준동(2)

바뵈프와 마레샬은 사적으로 꽤 친했다.

모렐리 전 위원장과 바뵈프의 아버지의 특수한 사이를 고려해 봐도, 여전히 바뵈프는 소련의 정계에 들어가기 위해 끈이 필요했었다.

마레샬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지였으며, 선배였고 친한 형과도 같았다. 마레샬은 바뵈프를 후원해주고 이끌어주었으며, 모렐리가 그를 서기장으로 임명할 수 있게끔 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과거 그토록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며 혁명에 대한 열띤 논의를 한 것과는 달리 이제는 조그마한 차이점 하나하나가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뒤파이의 실각 이후, 마레샬과 바뵈프는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러시아 땅을 먼저 개발하고, 내실을 다져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지. 민생을 챙기지 않는 이상, 혁명의 완수는 불가능하다.”

마레샬주의는 혁명 이후 피폐해진 소련 경제를 민생을 챙기는 경공업 위주로 우선 발전시키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러시아 땅에 둥지를 튼 소련이 먼저 안정화되지 않으면 혁명전파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의 주요 골자였다. 아무리 이 땅의 경제가 박살 난 것이 당연하다 하더라도, 지금 인민들은 희망을 원했다. 소련이 들어선 이유도 결국 제정 러시아에서 보지 못했던 희망을 보여준 것 때문이 아니던가.

마레샬의 주장은 이 땅에 살아가는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일단 빵을 먹고 생각해보자는 논리였으니 주린 배를 쥐고 있는 입장에선 가장 솔깃할 것이다.

“루테니아, 다음은 어딥니까? 북캅카스? 고려는 이 루스 땅의 힘을 빼놓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보시지요. 시베리아는 절반 이상 옥저의 품으로 넘어가 있지 않습니까? 이미 소리 없는 전쟁은 시작한 상황입니다. 자본주의의 위기로 고려가 흔들리는 지금 이때에 많은 동맹을 만들지 못하면 세계혁명은 좌초될 겁니다.”

반면 바뵈프주의는 달랐다.

바뵈프는 현시점 소비에트가 더 성장하기 위해선 세력을 과시하기 쉬운, 혹은 적을 위협하기 쉬운 중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을 이루고, 동시에 다른 나라의 공산주의 정치조직에 활발하게 혁명을 전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소비에트는 이미 ‘봉건주의적 전제군주국’인 고려로부터 너무 심하게 견제를 받아 고립된 처지였다. 또한 소비에트 이전까지는 그들의 이간질로 지금껏 온건파들의 파벌이 갈려 배신당했던 이력도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또 가두어진다면 세계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고려가 흔들리는 이때, 적극적으로 혁명수출을 해야만 했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핵심 인원들, 즉 외부에서 온 혁명가들의 입장을 잘 대변했다. 이들은 러시아만으로 절대 무언가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현재의 소비에트 연방이 과거의 러시아만큼 거대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연방은 제정 러시아 시절 영토에 비해 절반 이하로 쪼그라든 상황이었다.

이 상황 속에서 적어도 서유럽 중 일부는 혁명을 완수시켜야 했다. 그리고 소련은 오히려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런 뒤, 필수적인 공업화를 이루어내야만 했다.

제정 러시아 시절, 세계 제2위의 대국을 자처했던 러시아는 이미 옛말이었다. 지금은 기술력도 뭐도 낙후된 지 오래였다. 대전 이후 고려와 서유럽, 동아시아가 엄청난 발전을 이룩할 때, 이 차가운 러시아 땅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프랑스, 도이치, 잉글랜드, 이탈리아 같은 열강들에게 혁명을 전파하여 공산국가를 세우는 것이 옳았다.

소비에트 연방은 그들에게서 기술을 수입해야지만 낙후된 기술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현대화된 제철, 공장, 정유시설 등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했다.

마레샬의 방법대로라면 대체 언제 기술을 그만큼 끌어올린단 말인가? 물론 마레샬도 필수적인 국가들은 혁명전선에 동참하도록 만들 생각이겠지만,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심지어 마레샬의 논리, 민생 문제도 중공업을 통한 농업의 기계화, 집산화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바뵈프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짧은 정쟁은 결국 무력 다툼으로 진입하고야 말았다.

마레샬의 지지층은 폭넓었다. 아무리 그래도 2인자로서 10년은 더 많은 정치적 경험이 있었던 마레샬이 아직 젊은 바뵈프보다야 세력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관료들, 체카들, 운동가들이 그를 지지했다.

바뵈프는 일개 서기장이었다. 지금 이 연방의 체제에서 서기장은 딱히 실권도, 뭣도 없었다.

하지만 바뵈프는 이런 다툼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을 가지고 있었다. 군부라는.

쿠투조프의 딸과 결혼하여 군부와 강하게 동맹을 맺은 바뵈프는 마레샬을 지지하는 관료계급의 정치적 암수를 유구한 프랑스인들의 전통, 즉 쿠데타로 맞받아쳤다.

싸움은 빠르게 끝이 났다.

그동안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돌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러시아인들은 바뵈프의 말을 잘 들었다.

옛 프랑스 귀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문화의 불모지에 소위 프랑스식 혁명 문화를 강제로 퍼트리던 혁명가들 과는 달리, 바뵈프는 러시아 말을 쓰고 러시아 여자와 결혼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따르고 있었으니 훨씬 더 따르기 쉬웠다.

또한 군사적 차이도 있었다. 마레샬이 수적 우위를 가졌지만, 바뵈프는 질적 우위를 점했다.

또한 지휘관 쿠투조프도 굉장히 훌륭한 전략적 식견을 가진 장군이었으니, 마레샬 일파들이 수적 우위를 가졌음에도 허둥대는 것을 놓치지 않고 과감히 포석을 전진시켰다.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가자 몰래 준비해두었던 복엽기들과 비행정들―거의 한참 전의 세계대전에서나 쓰던―이 모스크바의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것을 본 마레샬 파벌의 군대들은 이미 상황이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지레 항복하기도 했다.

바뵈프는 마레샬의 파벌을 전부 다 학살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을 정치범수용소, 즉 굴라크로 보냄으로써 정쟁을 종결시켰다.

모렐리 시절부터 만들어진 굴라크(ГУЛаг)라는 시설은 국가보안국 교정노동수용소를 의미했다. 이 시설은 소련이 설립된 이후, 옛 러시아의 시베리아 노역소 등을 본받아 만든 범죄자 수용소였다.

시베리아의 절반이 옥저의 손에 떨어졌어도 여전히 영토는 넓었고 노역소는 많았다. 소비에트로서도 여전히 광대한 영토를 계속 개발할 인력이 필요했던 처지였다.

그렇기에 굴라크는 소련 사회에서도 필요악이 되었다.

굴라크에 수용된 사람들은 범죄자도 있었지만, 모렐리에 반대했던 옛 귀족 세력들과 소비에트의 다른 구성원들, 볼셰비키들 같은 정치범들도 있었다.

바뵈프의 시기에는 심지어 집권 멘셰비키들도 들어가기 시작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굴라크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지게 해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마레샬은 살려둘 수 없었다.

경쟁자 숙청은 새로운 소련의 전통과 같았다.

마레샬이 뒤파이를 조용히 숙청했다 하더라도, 이를 완전히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바뵈프도 그 경우에서 보고 배웠다. 지도자는 냉철해야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마레샬이 문득 회한 섞인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뒤파이를 보내버린 자신이 결국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씁쓸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바뵈프는 최후의 순간에 그동안 많은 것을 가르쳤던 동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잘 가십시오. 그곳에서는 좋은 삶을 누리시길.”

껑땅과 모렐리를 거쳐 정립된 유물론적 사고방식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바뵈프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마레샬이 병사의 소총탄을 맞고 허무하게 쓰러졌다.

결국 그가 소련의 실권을 잡았다.

마레샬의 죽음으로 비로소 소련의 실권을 쥐게 되었지만, 정작 바뵈프는 다소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순수한 열의를 가진 혁명동지들은 이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본래 맹렬한 비타협적 혁명주의자들은 너와 나의 다름을 강조했다.

군주와 신민을 구분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구분했다.

부르주아지들에게 회유된 온건파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했다.

그다음에는 올바른 사상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했다.

그렇게 계속 ‘특정한 적’을 지정하고 분노를 이끌어내어 혁명을 시작해 완수하는 것이 그들의 본질이었다.

그러한 비타협주의자들이 마침내 나라를 세웠을 때, 다시금 평온하고 안온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다시금 내부에서 ‘혁명의 적’을 지정하고,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강조하여 죽이고 내 뜻을 관철하는 일련의 과정이 지겹도록 반복되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다름에 대한 관용 없는 사회의 결말은 오직 하나로 귀결되기 마련.

피도 눈물도 없는 강력한 지도자. 시대의 사명을 기꺼이 짊어져 마침내 영구한 혁명을 이룩할 위대한 지도자 동지 아래 그 뜻을 받들어 나아가는 것. 오직 그뿐이었다.

소련은 지하조직이나 작은 공산주의 단체, 정당 수준이 아니었다.

이 단체는 이미 국가로 진화했다. 그렇기에 이 국가에 필요한 것은 순수하고 열정 넘치는 혁명가가 아니라 냉철한 지도자였다. 강력한 지도력으로 모든 이를 휘어잡아 소련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준비하도록 하는.

그렇기에 그는 그 자신이 마땅히 시대의 부름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후회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라쿠스가 아니라 술라이며 카이사르다. 나는 연방을 위해서 모든 독재관의 임무를 짊어지겠노라’

연방의 항구적인 존속과, 위대한 영구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이 끝난 1791년,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는 자신의 필명 중 하나였던 그라쿠스를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바뵈프는 자신 스스로의 운명을 카이사르에 빗대긴 했지만, 봉건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그 이름을 감히 쓸 순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명 하나를 만들어냈다.

스탈린(Ста́лин).

러시아어로 강철의, 강철의 의지를 가진 사내라는 뜻이었다.

* * *

바뵈프는 소비에트 평의회의 모든 권력을 서기장의 직위에 돌렸다. 사실상 모렐리가 앉았던 위원장이 된 셈이었다.

그는 나머지 반대파들에 대한 숙청과 숙군을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건설자인 모렐리도 볼셰비키 등의 숙청이라면 뒤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사상하의 자신에게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견을 제시하는 자들은 살려두어 그 여론을 들었는데 바뵈프는 굉장히 완고한 인물이라 반대 여론도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 소비에트 연방은 잡음 없이 하나 되어 나아갈 차례였다.

바뵈프가 정권을 잡게 되자, 소비에트 연방은 내부 단속과 동시에 외부 공산 세력에 대한 후원을 계속 이어갔다.

바뵈프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혁명 전파를 후원했다.

비록 독일과 몇몇 나라들은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나 정부의 회유책으로 적화가 될 확률이 낮았지만, 여전히 카스티야와 아라곤, 발칸의 여러 나라들은 공산주의 조직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충분히 파고들 여지가 있었다.

또한 중앙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아무리 세계대전 이후 조약국에 의해 러시아에서 갈라져 나왔더라도, 여전히 소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 중 하나였다. 이곳을 적화시키지 못한다면, 소비에트의 체면이 구겨지는 일일 터였다.

이 많은 나라들 중 바뵈프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는 준수한 산업 열강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 나오는 질 좋은 철과 석탄으로 많은 산업 능력을 쌓았고, 서유럽 열강 중 한 손에 꼽히는 국가가 되어 있었다.

비록 지금은 경제침체를 겪고, 또한 고려에 의해 통화교환협정에서 제외되면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 상황은 소비에트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호재였다.

‘우린 이곳을 무조건 적화시켜야 한다. 중공업 발전을 위한 기반 기술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바뵈프는 금세 얼굴을 구겼다.

아무리 봐도 그가 후원하는 잉글랜드 노동당의 지도자는 굉장히 미심쩍었다. 능력이나, 행동거지, 사상이 전부 다.

* * *

잉글랜드 레스터 근방의 마을 앤스티(Anstey) 출신의 에드워드 루들램(Edward Ludlam), 애칭으로 네드 러드(Ned Ludd)라 불리는 직공은 바뵈프처럼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다.

저 멀리 중화민국에서 빠르게 권력의 핵심부로 나아가는 습진균처럼 타고난 능력과 뛰어난 연설력을 가진 마성의 사내도 아니었다.

강화에서 권력을 잡은 송평융맹처럼 대단히 교활하고 음흉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무식하고 단순한 노동자에 불과했다.

하루 벌고 하루 먹고 자는 삶이 전부였다. 찬란한 미래를 꿈꿀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모든 잉글랜드의 노동자들처럼.

성격상으로도 그는 흠결이 많았다.

일단 그는 굉장히 소심하고 둔하며 느리고 게을렀다.

물론 이 평가는 공장주와 작업반장의 표현을 빌렸으니 굉장히 편파적일수도 있겠지만, 그가 다른 노동자들에게서도 조롱을 받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사람 자체가 ‘모범적인 산업 일꾼’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자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었다.

공장에서 그 비싼 직조기를 두 개나 부숴먹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 그랬다.

직조기 파괴 사건이 일어난 뒤, 공장주는 네드 러드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하지만 이 노동자가 그럴 만한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는 정말 죽기 직전까지 몰매를 맞고 공장에서 쫓겨나 길거리에서 시름시름 죽어가다가 마침내 그를 가엽게 여긴 사람에 의해 구조되어 겨우 살아났다. 항생제의 발명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사망했을 것이었다.

본래라면 이 우둔한 네드 러드의 이름은 조롱조의 성격을 띠고 근처의 노동자들에게 번져나갔을 것이다.

― 멍청한 네드 러드 새끼, 그렇게 부순 것이 벌써 두 번째라지?

― 그 병신도 참 대단하다.

― 근데 그 병신이나 우리나 다를 것 하나 없잖아? 돈은 비슷하게 받고, 착취도 비슷하게 당하고.

― 그러게, 그러니까 우리도 병신이지.

잉글랜드 노동자들의 상황은 제각기 비슷비슷했다.

다른 노동자들이 멍청한 네드 러드를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산업화가 절정에 이른 지금, 사람의 가치는 기계의 가치보다 확연히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본격적인 계기는 고려에서 퍼져 나간 상률공정 덕이었다.

주항자동차에 입사한 직원인 한상률은 굉장히 똑똑하고 효율적인 사람이었다.

상률은 밑바닥부터 실무를 배워 올라갔다. 그는 매사에 열정적이었는데, 평소 공장의 체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관심이 많았다.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낸 그가 차근차근 승진하여 마침내 한 공장의 자동차 생산을 총괄하는 자리에 이르자, 상률은 자신의 이름을 딴 공정을 도입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모험은 가치가 있었다. 상률은 그가 맡은 공장의 자동차의 생산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근로자 바로 앞에 무한궤도를 통해 부품과 본체를 이동시키고 개별 근로자들의 공정을 세분화, 분업화, 전문화시킨 그의 공정은 대량생산을 위한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덕에 주항자동차는 다른 경쟁자들을 완벽히 누르고 세계 최고, 최대의 자동차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더 질 좋은 자동차를 공급해 고려에 자동차 열풍이 불게 된 것도 모두 상률 덕분이었다.

그뿐일까, 그는 자본주의의 낙관적인 미래상을 제시했다. 그는 숙련공들에게 다른 공장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를 해 주었고 그렇기에 과학적 관리주의로 인해 높아진 근무 강도에 대한 불만을 잠재웠다. 그의 공장에 근로하는 사람들은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보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이 거의 두 배는 더 많았으니 있던 불만도 사그라졌다.

결국 상률은 주항 사후, 주항자동차의 대표이사가 되었으며 지금도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가로 항상 꼽힐 만큼 저명한 인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상률주의’는 마치 진보된 문명과 동의어로 취급되었을 정도였고, 모든 공장이 주항자동차가 선보인 상률주의적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허나, 이 더없이 대단해보이는 상률 공정도 한계는 있었다. 이런 공장체제는 대량생산에 적합했고, 비쌌으며, 거금을 들여 한번 구축해놓으면 굉장히 비탄력적으로 운용되었다.

경제 침체의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었다. 경제를 낙관한 많은 공장이 무리해서 거금을 들여 대규모 공정(그것도 몹시 비탄력적인)을 도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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