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준동
이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가장 상황이 이상해진 곳은 강화와 잉글랜드였다.
두 나라는 모두 고려의 약점을 노려 태환에 성공해 많은 금을 얻었다.
이건 굉장히 큰 이득이었다. 금의 보유고가 넉넉해지자 경기는 꽤 안정화되었다.
하지만 그 금이 고려와 척을 질 만큼 대단히 많은 양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전통적 원 금태환본위제 체제 아래에선 잉글랜드의 파운드와 강화의 엔도 고정이 되어 있었다.
아렌다호논 체제로 결속이 끊어지자 엔과 파운드는 독자생존을 해야 했다. 금의 넉넉한 보유고는 그것을 한층 수월하게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부패한 그들의 정부 관료 중 일부가 들어온 금을 훔친 것은 큰 문제까진 아니었다. 두 나라가 통화교환협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그들이 고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후, 원의 위상은 추락하는 듯싶다가도 다시금 천천히 올라왔다.
원―석유대금결제체제가 자리 잡히자, 강화와 잉글랜드의 관리들은 아뿔싸 하며 머리를 쳤다.
금은 확보했는데, 고려 원은 없는 상황이다.
물론 그들도 강대국이었으니, 자국 화폐에 대한 최소한의 신용도는 있었다.
하지만 석유를 사기 위해선 그들은 원으로의 환전을 한 번 더 거쳐야 했다.
당연히 그 비용이 추가된 것이다.
고려 경제가 흔들린다 해도 원의 국제결제통화적 의미는 변동환율제하에서도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고려의 금 보유고도 다시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의 금광이 사실상 누구 것인지를 잠시 망각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원―석유대금결제체제가 자리를 잡히자 원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단단히 화가 난 고려에 의해 통화교환협정에서 제외된 강화와 잉글랜드는 졸지에 자신들의 선택으로 만성적 외환위기와 헤어나올 수 없는 고유가 시대를 맞이하게 된 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 행위의 대가는 금괴 몇 톤보다 훨씬 더 비쌌다. 원―석유대금결제체제가 부서지지 않는 이상은.
두 나라 모두 변명거리는 있었다.
잉글랜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잉글랜드 공산당의 발호를 억누르기 위해 즉각적인 해결책이 필요했었다. 대기근은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을 엄청나게 증가시켰고, 잉글랜드 특유의 계급화된 사회구조와 빈부격차는 그것을 더더욱 가속했다.
강화도 마찬가지였다. 해남파를 와해시켰지만 통제파와 황도파가 여전히 나뉘어서 대립하고 있는 상황 속에 터진 화산과 대기근은 아무리 덕천씨라 하더라도 자국 이권을 먼저 챙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안 그러면 덕천원심이 먼저 방구석으로 쫓겨나고 송평융맹이 쇼군이 되게 생겼는데, 뭘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이 고려를 배반한 대가로 치르게 될 것은 그것뿐만이 아닐 터였다.
* * *
반면 의외의 이득을 보는 곳도 있었다.
소련은 이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나라 중 하나였다.
이념에 의해 탄생한 국가의 장점이라고 해야 하는지, 그동안 소련은 위원장 모렐리와 여러 혁명가의 인도 아래 빠르게 성장했다.
소련은 일단 루테니아와 적대하지 않겠다는 노선을 택했다. 당장 루테니아와 그 뒷배에 있는 도이치, 불가리아, 그리고 고려와 싸운다면 필패였다. 심지어 소련 고위급 지도자인 빅토르 뒤파이가 직접 창양에 와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 척박한 러시아에 들이닥친 엄청난 식량난은 소련에게도 큰 고통을 주었다. 루테니아 때문에 더더욱 그 고통의 정도가 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은 나름대로 버티는 것에 성공했다.
어차피 박살 난 경제는 소련 이전에 러시아 땅의 전통과 같았다. 매일매일이 불행한 지옥인데 그 지옥의 온도가 조금 더 뜨거워진다 하더라도 별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지옥이라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이상에는.
이미 대전쟁과 연이은 내전, 혁명으로 황폐화된 덕에 인구가 많이 감소했기에 인구압이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여전히 드니프로강 동쪽 흑토지대는 소련의 차지였던 것도 있었다. 북캅카스(시스코카서스) 등도 나름대로 괜찮은 곡창지대였다.
또한 강력한 배급제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큰 효능을 발휘했다.
지옥도 다 같이 개고생하는 평등한 지옥이면 그나마 버틸 만하다.
혁명 정신이 살아있는 초창기의 멀쩡히 잘 돌아가는 공산주의의 체제는 의외로 식량 기근을 굉장히 잘 대처할 수 있게 했다. 소비에트는 현재 영토적으로는 비할 바가 안 되는 잉글랜드보다도 부유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잉글랜드처럼 극심한 빈부격차와 계층분화가 있진 않았다.
모렐리는 성격상으론 단점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었지만, 혁명적으로는 상당히 순수했다. 아니 심지어 잔혹하기까지 했다.
그는 스스로 삼시세끼를 검소하게 먹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그러한 식습관을 강요했다. 심지어 모렐리의 딸은 임신했음에도 식량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유산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가족에게 잔혹하게 대한 탓에 그의 행동은 소련 지도층의 모범이 되었다.
위원장의 딸마저 그랬으니, 부패와 사치란 있을 수 없었다. 모두가 다른 이들을 위해 아끼고 절약했다. 빵 한 쪽, 감자 한 알을 나누어 먹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기근을 어찌어찌 버틴 소련은 값진 선물을 얻었다.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자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났다. 가까이는 중앙아시아의 여러 신생국들부터 멀리는 저 멀리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 등까지. 이 지구에서 공산주이라는 이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큰 정치적 파트너로 예상되었던 중국공산당의 연이은 패배와 몰락은 다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모렐리와 기윤이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계속 갈등했던 것을 보면, 크레믈이 전 세계 공산주의의 명명백백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어쩌면 더 이로울지도 모를 터였다.
중화민국은 지루한 내전에서 마침내 승기를 잡아갔다.
식량난은 중화민국에도 들이닥쳤지만, 순과 중국공산당에게도 공평하게 철퇴를 내렸다.
그래도 수입로를 열어두고 있는 중화민국은 식량을 외부로부터 사들일 수 있었다.
반면 중국공산당은 아무런 대책 없이 군량이 바닥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기윤은 소비에트 연방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먼 거리를 뚫고 소련이 어떻게 화북까지 올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옥저가 시베리아의 중간까지 확보한 이상, 서로 간의 거리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물론 식량처럼 부피가 큰 것이 아니라, 엄선된 인원으로 부피가 작은 자금을 들고 가 지원을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 국경을 넘어야 한다지만 시베리아의 국경은 거의 관리가 되지 않아 마적 떼들이 자유롭게 넘나들곤 했다. 소규모의 인원은 충분히 이동 가능했다.
하지만 모렐리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모렐리는 기윤을 내심 싫어했고, 기윤도 모렐리를 싫어했다. 서신을 교환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알게 된 이후부터 더더욱 그랬다.
모렐리와 기윤은 같은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고 있지만 그 실체는 달랐다.
나름대로 순수했던 혁명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태어나, 수많은 역경을 통해 건설된 소비에트 연방이 인종에 대한 표면적 차별을 허락할 리 없었다.
물론 그들 지휘부가 다소 프랑스 출신이 많아 프랑스계 혁명가들을 우대하고, 또한 우랄 너머의 황인, 유목민 출신들에 대한 처우가 알게 모르게 박하다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소비에트 연방 안에서 같은 대의에 따르는 동지들은 모두 평등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조금 달랐다.
중원은 한동안 외세에게 엄청나게 시달렸다. 명 멸망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대전 이후 고려에 의해 전 세계의 식민지가 해체되면서 이런 현상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중원의 민심은 외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특히나 유럽인들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다.
기윤은 이런 외세에 대한 적대적인 민심을 거스르지 않았다. 당연히 중국공산당은 인민들의 평등함을 주장하면서도, ‘중국인’, 혹은 ‘동아시아인’에 대한 우월성을 남겨두었다.
이건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뭣도 아닌 이념이었다. 기윤의 자를 따서 효람주의라 해야 할까. 모렐리는 중국공산당의 이념을 경계했고, 그들의 노선에 회의감을 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저기 저 멀리 있는 동남아시아나 다른 곳들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이 내우외환을 맞자, 중화민국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황전겸 대총통은 광서공산당을 완전히 격멸했고 하북공산당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순은 여전히 사천의 산세에 의지해 틀어박혀 있는 처지였다.
경제적 위기도 중화민국에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오히려 약간은 도움 되는 면이 있기도 했다. 중화민국은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 거의 수출을 하는 형편이 아니었다.
반면 그들의 아주 미미한 산업은 약간의 성장 기회를 맞이했는데, 다른 나라 기업 입장에서는 이 혼란한 시기에도 다른 나라들보다 확연히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도 자체적으로 큰 시장을 가진 중원에 눈독을 안 들일 수가 없었다. 중원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소비에트 연방의 창설자.
불굴의 의지를 가진 혁명가.
마침내 가장 위대한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소련의 경외하는 지도자 동지.
모렐리는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의사들도 그의 건강을 호전시키지 못했다.
그는 껑땅 아래에서 겪었던 오랜 지하 생활과 혁명 생활로 얻은 지병들을 인생 내내 달고 다녔다.
더군다나 결국은 혁명에 성공했다지만 추운 러시아의 기후는 프랑스 출신이었던 모렐리에게 썩 좋지는 않았다.
모렐리도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는지, 세 사람에게 뒤를 맡기고자 했다.
물론 군권은 여전히 그가 신임하는 장군, 위대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에게 있었다. 하지만 수보로프는 딱히 이념적으로 대단히 뛰어나거나 권력에 욕심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렐리 또한 수보로프의 출신이 비록 몰락했다지만 옛 러시아 귀족임을 알면서도 그를 유용하게 잘 썼던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념 지도자는 크게 세 명으로 갈렸다.
그들은 나이 순서대로 빅토르 뒤파이, 실벵 마레샬, 프랑수아노엘 바뵈프였다.
세 명 모두 프랑스계, 파리 코뮌 출신이었다. 바뵈프는 엄밀히 말하자면 파리 코뮌 출신 혁명가의 자식이었지만 비슷했다.
모렐리는 이 세 명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세 명은 각기 장단점이 있었다. 모렐리는 고려가 흔들리는 이때, 소비에트 연방이 어떤 노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공산주의 세상의 흥망이 달려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후계자를 선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모렐리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세상을 뜨고야 말았다.
위원장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어떠한 혁명가도 그처럼 평온한 얼굴을 한 채로 죽은 적이 없었다. 모렐리는 나름대로 복된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닐까, 다른 동지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평온한 위원장의 죽음과는 달리, 세 명의 후계자는 정해지지 않은 연방의 수장 지위를 놓고 각기 치열하게 싸워나가야 했다.
차기 정권을 쥐기 위해선, 더 나아가서 본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선 위원장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이념의 이상향이라는 소련도 권력다툼은 다른 나라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험하면 훨씬 더 험했다.
반동이니, 수구니 하는 죄를 엄한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워 법이 아닌 선동으로 죄를 심판하는 경우도 흔했다.
소련―러시아―의 현 상황이 많이 발전했다 하나 어떤 면에선 여전히 중세시대나 다름없고, 공산주의적 광기가 어떤 면에선 기독교적 광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마녀사냥이 공공연하게 열리는 셈이었다.
세 지도자는 모두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노선이 약간은 달랐다. 예전이라면 그 차이 정도야 극복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소련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중차대한 순간이었다. 작은 차이도 나중엔 큰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소리였다.
요셉 알렉산드르 빅토르 뒤파이는 ‘온건한’ 공산주의자였다.
파리 코뮌 사태 이후 공산주의에 온건함이라는 것은 사실상 사장되었던 것을 보면, 의외의 표현이었다.
물론 빅토르 뒤파이도 천성 공산주의자라, 소련에서 혁명을 성공시킨 뒤에 다른 나라에도 혁명을 전파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겼다. 하지만 그는 현시대에서 고려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파리 지식인 계층이었던 그는 부족함 없이 자랐으며, 부르주아식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려가 가진 힘을, 경제력을, 군사력을 잘 알았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이 내실을 다지기 전까지는 고려와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아양까지 떨어야 할 정도로.
초창기에는 다소 고려에 적대적으로 대했던 모렐리조차도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바뀐 것이 있는지, 뒤파이의 의견을 일부 수용했다. 친교의 목적으로 뒤파이는 몇 번 고려를 왕복했었고, 고려의 엄청난 경제력과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폐쇄적인 경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외부와의 적당한 무역과 적당한 기술교류가 소련의 힘을 더욱 증가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빅토르 뒤파이의 가장 큰 경쟁자인 실벵 마레샬, 그리고 실벵 마레샬의 친우이자 후배인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고려와의 통교가 국익에 썩 좋지 않다 생각했다. 그들의 가공할 첩보력이 안 그래도 아직 약한 체카의 기틀을 박살 낼 것으로 여겼고, 루테니아 사건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는 애초부터 소비에트 연방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거리를 두면서 고려가 휘청일 때를 노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고려가 휘청할 때라니, 그런 때가 대체 언제 온다는 말인가. 뒤파이는 답답함에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시대가 왔다.
경제침체로 고려가 흔들리자, 마레샬과 바뵈프는 마침내 자본주의의 끝이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인류의 사회진화과정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야말로 최종적인 사회구조로 남게 될 터였으니까.
1787년, 영향력을 잃어버린 뒤파이는 실각했고 그 자신도 행방을 감추었다. 누구는 그가 죽었다 말했고, 누구는 소련을 떠나 외국으로 망명했다 말했다. 진위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실벵 마레샬의 시대가 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레샬은 이제 바뵈프와 세력을 겨루어야 했다.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필명을 따서 ‘그라쿠스’ 바뵈프라 더 자주 불리는 이 젊은 청년은 아직 나이가 이십 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소련의 고위 지도자 중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인 클로드 바뵈프는 본래 파리 코뮌 소속 도 아니었고, 혁명가도 아닌 프랑스 장교에 불과했다. 그것도 빨갱이들을 직접 잡으러 온.
하지만 그는 이해관계가 어찌 복잡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모렐리를 몇 번 도와주었다.
심지어 목숨도 한 번 살려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클로드가 혁명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혁명에 무관심했다. 그는 혁명가들이 프랑스를 전부 떠나는 상황에서도 별 상관 없이 프랑스에서 그저 그런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나태한 태도로 인해 가세가 기울고 때마침 소련이 그를 초청하자 가족을 이끌고 소비에트 연방으로 떠났다.
자신이 자신의 이득을 노리고 도와준 꼬질꼬질한 혁명가들이 정말로 혁명에 성공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은혜를 갚는다니 실로 좋은 게 좋은 경우가 아닌가.
그는 이념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고 그저 이기적이고 소시민적 태도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평범하고 안락한 삶에 만족했다. 위원장의 목숨을 구한 그는 끝까지 꽤 괜찮은 삶을 영위했다.
그라쿠스 바뵈프는 아버지 클로드 바뵈프의 기회주의적이고 비혁명적인 태도를 비판하였지만, 아버지가 준 기회와 인연을 놓치지 않고 모렐리의 총애를 받으며 당내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물론 핵심 요직은 이미 당시 후계 구도를 양분하던 뒤파이와 마레샬 및 그 세력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다.
바뵈프가 얻어낸 중앙 직책인 ‘서기장’은 높은 자리라기보다는 그저 실무적인 일을 처리하는 직책일 뿐이었다. 위원장 모렐리가 회의를 통해 지침을 내리면, 그 행정처리를 하는.
하지만 바뵈프는 특출난 친화력을 무기로 그동안 정계에는 다소 소외되었던 비프랑스계 파벌에게 접근했다. 자신도 프랑스계긴 했지만, 이민 2세인 그는 프랑스어보다는 러시아어를 더 많이 썼다. 프랑스 출신 1세대 혁명가들이 프랑스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버리지 못해 크레믈에서도 프랑스어를 쓰고 있는 상황을 좋게 보지도 않았다.
바뵈프는 소비에트가 노동자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근간이 러시아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바뵈프는 그 어렵다는 수보로프와도 친밀해졌고, 수보로프에 이어 소련군 서열 두 번째인 쿠투조프와도 친분을 나누었다.
그렇기에 마레샬이 뒤파이를 제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정치력을 쏟아붓고, 마침내 그것이 성공할 때쯤이 되자 바뵈프 또한 나름대로의 기반을 마련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바뵈프와 마레샬은 또다시 소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