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25화 (525/653)

525화 구안회의

구안회의.

상민이 21세기의 전 세계 엘리트들의 비밀 모임, 빌더버그 회의를 빗대어 말한 이 회의는 현 광명회 회원 50명, 그리고 광명회의 회원은 아니지만 어쩌면 회원들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는 열한 명의 관찰자까지 총 61명의 참석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관찰자에는 해청과 번왕들, 술탄, 대에미르, 카롬테, 쿠쿨칸 총대주교 및 제국교 총대주교 등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불참한 몇 명은 연로하거나 건강이 좋지 못해 항해가 불가능한 자들뿐이었다.

여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비밀, 즉 ‘신비로운 손’을 아는 자들, 혹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유석규와 같이 그 존재를 알게 될 가능성이 높은 자들이었다.

신비로운 손은 보이는 손이었다. 상민 정도의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자가 일을 그렇게 은밀하게 처리할 순 없었다. 거대한 고래가 요동치면 작은 만은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상민도 심청이를 자주 보고 있으니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손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대단히 빼어난 수준의 경제적 지위, 혹은 능력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것이 기본 전제조건이었다.

혈통은 크게 상관없었다. 절반 이상의 구성원들이 상민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그 자격을 얻었다.

다만 회의 원로들은 신입을 들일 때, 정재계의 기본적인 영향력은 물론이고 인망, 성품까지 모두 고려했다.

견충비같이 거대한 부를 쌓은 자들이라도 인망의 요구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었다.

당연한 소리였다.

광명회는 애초에 상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애초에 재계의 일원인 그들은 금력을 좇을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하지만 필멸자의 부는 불멸자를 따라잡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고려 제국이라는 기틀을 세운 당사자이자, 지금까지 암약하고 있었던 수호룡이라면 더더욱.

회주가 가진 부는 광명회의 모든 구성원을 능가했고, 회주가 가진 정치력과 영향력, 첩보력과 종교적 광신력 등은 더더욱 그랬다. 그의 힘을 구성하는 것 각기 하나하나가 재계의 영향력보다 작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광명회는 열한 명의 사도들이 용 밑에서 얼마나 얌전한지 잘 알고 있지만, 만약 사도들이 주인의 명에 따라 사냥개로 돌변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놈들일지도 대충 알고 있었다.

쿠쿨칸교와 제국교는 어떠한가. 그들은 시대가 급변하는 개천 6세기경에도 회주의 말 한마디에 언제든지 성전을 선포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상민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고려 제국 자체도 그러했다. 여전히 정권은 금권 위에 있었다.

적극적으로 자정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제고 떨어질지 모르는 불벼락을 그냥 멍하니 앉아 기다리고 있는 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주의 자리를 비워두고 수하를 자처했다. 아주 현명한 처사였다.

상민의 눈치를 본다는 본래의 목적을 제외하면 광명회는 한 가지 이념을 표면적으로 내밀고 있었다.

‘단극주의(unipolarity)의 지향’

단극주의는 기본적으로 전 세계의 경제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는 것이 좋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박지원의 패권안정론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현실주의적 관점으로 볼 때, 하나의 건전한 국민국가가 지배적인 패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 국제적 체제가 안정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패권안정론을 이행할 당사자는 고려밖에 없었다.

물론 고려는 민족적 의미에서의 국민국가는 아니었지만, 범고려주의로 인한 새로운 비전통적 민족개념을 도입한 나라였기에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었다.

고려는 부정할 수 없는 패권국이었다.

일단 지정학적 상황에서 굉장히 안정적인 나라였다. 남북려와 남극, 빙주 영토는 어떤 나라와도 접해있지 않았다. 본토를 제외한 영토들도 대부분 섬이었고, 다른 나라와 접한 영역은 개성을 비롯한 특수한 지역뿐이었다. 이 같은 안정성은 국가 자체의 신뢰도를 부여하며, 다른 나라와의 불필요한 마찰 자체가 적어지는 효과를 낳았다.

국방의 강력함은 말해 무엇하랴. 태평양과 대동양이라는 천혜의 자연 국경선을 방어할 해군과 공군 전력은 단연코 압도적이었다.

고려는 설령 세계 전부와 전면전을 상정한다 하더라도 적들이 고려의 본토에 상륙하지 못하게 저지해낼 수 있었다.

또한 지배적인 경제와 압도적인 기술력의 우위도 있었다. 고려 정부가 가진 비밀기술도 있었고, 기술선도국이 가진 비밀기술도 있었다. 더군다나 인재를 자체적으로 뽑아내고, 남의 인재들은 오히려 빨아들이는 체제에서는 그 기술우위가 절대 추월당할 것 같지도 않았다.

기본적인 자격 이외의 사항들도 있었다.

패권국은 다른 나라들을 이끌 의사와 능력이 필요했다. 고려는 세계대전 이전 고립주의를 천명한 적이 있었다. 그땐 패권안정론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능력은 있더라도, 그럴 의사가 없었으니까.

또한 패권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제공해줄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선 도덕적 이념과 가치관은 물론이고 우상향하는 강력한 경제력과 기술적 우위를 점해야 했다.

즉, 광명회는 고려가 유일한 패권국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정된 입헌군주제하에서의 자유시장경제체제, 지금 이 시대에서 기업활동을 하기에는 최고의 조건이다.

반면 그들은 이 체제를 부수려는 자들을 우려 섞인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그들과는 완전히 상극인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공산당부터 어딘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중화민국과 강화까지. 그리고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는 여러 나라도.

이 이념은 관찰자들도 공유했다.

이곳에 아랍 연방과 이라크의 지도자가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꽤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팀의 후계자나 상민과 아이샤의 아들 만수르는 그들 국가가 과거처럼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관대한 국가의 편에 서는 것이 좋았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신앙도 신앙이었지만.

두 정상의 욕망은 단순했다. 이라크와 아련의 정치적 중요성이 예맥한 삼국, 혹은 에이레와 네덜란드 같은 유럽 최중요 국가들과 비등해지는 것. 국력을 조금 더 기른다면 나중에는 그들과 같이 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 * *

“내 듣기로는, 너희들이 제법 준비를 열심히 했다 하더구나.”

문이 닫히고, 상민은 운을 떼었다. 모든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그 태도에 오직 석규만이 살짝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단에 오른 자나,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그 말을 듣는 자나, 신입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누구 한 명에게도 말한 적이 없건만, 눈치는 채고 있었다는 소리일 터.”

해청에게는 넌지시 이야기한 적이 있긴 했다지만 상민은 광명회의 편의를 봐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이들은 경제 분야에서 각기 최고를 칭하는 이들이다. 자산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신비로운 손을 아는 것 자체만으로 이득을 볼 때가 있기 마련이다. 광명회의 사람들은 무언가 조금 불길한 일이 다가오는 것을 인지하고는 사세의 과확장을 줄이고 현금을 많이 비축했었다.

물론 경제 침체가 이 정도일지 예상한 사람은 소수라 대부분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사세가 몰락할 만한 치명타를 입은 자들은 별로 없었다.

“현명한 선택이다. 건전한 경영을 위해 노력한 기업들은 마땅한 투자를 받을 자격이 있지.”

상민은 자금 수혈을 논했다. 몇몇 기업인들의 얼굴엔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상민으로서도 손해는 아니었다. 밑바닥에서 투자하는 셈이니, 훗날 아주 큰 이윤으로 되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시장 전체에 대한 지원은 없을 것이다.”

이 연이은 침체는 상민의 의지 하나로 곧바로 강보합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아니, 심지어 다시 반등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냉해의 효과는 이제 서서히 떨어져 갔다. 긴급식량지원을 받은 각국은 파멸적 사달이 난 몇 개국을 제외하고는 서서히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역시나 화학비료의 힘은 대단했다.

그러니 지금 문제는 고려의 거품이 걷히고 있는 상황 그 자체였다.

시장 상승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사라졌고, 자괴감과 비관이 대세를 이루었다.

상민은 그가 가진 거대한 영향력과 자금으로 이 비관과 탄식을 다시 환희와 환호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거품을 키우는 미친 짓이었으니까. 콘드라티예프 파동을 거슬러 올라갈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시장은 파동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몇십 년간 주야장천 오르는 것은 비정상적이었다. 오르더라도 나중에 기술 혁신 등으로 자연스럽게 올라야 했다.

역으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니, 2차 경제위기는 필연적이었다. 상민은 냉해로 인한 충격에다가 두 번째 충격을 더하면 장기적 경제 침체로 들어설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대마불사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상민은 천명했다.

그는 11사도로 하여금 자신의 재화를 꺼내도록 했지만, 그것들은 건전한 기반을 가진 기업에 대한 투자와 상업은행의 대량예금인출사태를 막는 용도로 쓰일 것이다. 경기를 뒤바꾸어놓겠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앞으로 더 고통받는다는 소리, 청천벽력 같은 말일 터였다.

상민은 그 말을 끝내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그는 약간의 원망과 비슷한 반응을 예상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아무도 상민의 이런 말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불만을 표하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상민은 이내 깨달았다. 이들은 천지 분간을 못 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과확장을 자제하고 다가올 고난에 대비해 놓았으니, 오히려 고난의 시기가 온 지금은 이 같은 상민의 말을 바라고 있었을 거라고.

몇몇은 오히려 위기를 기회 삼을 수도 있었다. 그것까진 간섭할 이윤 없었다.

“난 시장 활동을 왜곡할 생각은 없다. 이후의 일들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거라. 다만, 모든 일들은 법에 저촉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할 것이다.”

상민은 반독점법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또 준비된 너희들은 기존 수준의 고용을 유지해주었으면 좋겠다. 만약 이에 대해 자금이 필요하다면, 내가 검토한 뒤 투자를 해 주겠노라.”

상민은 말을 끝마쳤다. 더 할 말이 없었다. 덕담이니 뭐니 해 줄 말도 딱히 없었다. 좋은 말을 해 주면 기고만장해질 것 같았고, 나쁜 말을 해 주면 우울함을 퍼트릴 것 같았다. 이 경계선을 타는 것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연단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갑자기 불현듯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상민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광명회 회원들은 이젠 숫제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미친놈들인가.’

마치 현 예술의 전당 지배인이자 수석 음악가인 모차르트의 연주라도 직접 들은 모양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모차르트가 저 멀리 모임의 제일 뒷줄에 멀쩡히 서 있는 것을 보아 할 때, 저들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상민은 진지하게 이 모임의 조건을 의심했다. 이거 다 순 멍청이들이거나 어디 좀 아픈 것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광명회는 지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동안 회주가 존재하지 않았던 비정상적인 모임을 지속해온 그들은 마침내 회주가 직접 나서서 이곳에서 경제적 안건을 입에 담자 그것만으로 감격으로 자지러질 정도의 환희를 느꼈다.

보라, 결국 이렇게 회주께서는 광명회를 인정하셨다. 그리고 그 감투를 받아들이셨다.

끝까지 광명회의 회주 자리를 공석인 채로 남겨두다 연로해 죽은 옛 부회주가 만약 이 소식을 들었다면 감격해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상민의 ‘경제적 사생아’들이 마침내 적자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여의국이나 제국교, 쿠쿨칸교 등을 부러워했었다. 저들은 그들만큼 경계를 사지 않았고, 그의 품으로 받아들여졌었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그들이 정도를 지키기만 한다면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다른 기업과 달리 과욕을 부리지 않고, 적당히 이윤을 추구하면서 정도를 지키면 된다.

박수뿐이랴? 그들은 끝나고 아예 연회를 열 예정이었다. 지금 침체된 경기 분위기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발포 포도주를 따서 흩뿌려댈 예정이었다.

연설이 끝나고 상민이 회의 구성원들과 한 차례씩 대화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모차르트가 회의장 한편에 있는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가극 마술피리, 아니 만파식적에 수록된 대표적인 곡, 앙주 여왕의 아리아였다.

만파식적은 정체불명의 괴인(제국 수호룡)과 그의 연인들에 관한 전설을 각색하여 극곡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사실상 상민 개인을 위한 주제곡이자, 용비어천가 수준의 낯 뜨거운 곡이 분명했다. 저 대본의 초안은 루크레치아가 업보 깊은 그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모차르트는 그 초안을 가지고 앙주 여왕의 아리아 등 여러 곡을 작곡해 불멸의 가극을 만들어냈다. 누가 독촉한 것도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그랬다. 실로 끔찍한 일이다.

자신이 직접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예당의 지배인으로 임명한 주제에 상민은 진저리를 쳤다.

[작가의 말]

해청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제가 도표를 작성할 시기에 몰년을 적어놓는 바람에… 도표는 추후 한 번 더 수정될 예정입니다.

발포 포도주 = 스파클링 와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