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19화 (519/653)

519화 식량위기

모든 이들이 다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던 시대였다.

대전쟁 이후, 잃어버렸던 가치를 갈망하던 이들은 새롭게 세워진 국제질서 주도의 긴 평화 아래에서 물질적 번영을 누렸다.

박람회 이후 황금기의 큰 파도는 사람들의 삶을 많이 바꿨다. 거리엔 음악가들이 즉흥연주를 했고, 마차를 대신한 자동차들이 서서히 돌아다녔다.

경치 좋은 해변에는 야유를 나온 관광객들이 많았고,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비싼 음식점에는 원판 축음기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는 ‘대중가요’라 불리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단방향 무선 전파수신기, 즉 무전기에 둘러앉아 음악을 듣거나 혹은 직접 경기장에 가지 않고도 자신의 축구 구단을 응원했다.

무전기란 말 그대로 무선 전파에 관한 기계였다.

무전기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다.

같은 무전기라도 수신기만 있는 단방향 무전기와 송수신기만 있는 양방향 무전기는 현격하게 달랐다.

수신기만 있는 무전기도 아직은 꽤 비싸고 거추장스럽게 컸다. 부잣집이나 손님을 끌어모으려는 가게, 찻집에서나 쓰고 일반 가정에 널리 보급된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서히 소형화된 무전 수신기가 늘어나고 있었다.

군에서는 큰 크기의 기계를 운용 가능한 선박이나 항구, 군 기지 등에서는 양방향 무전기를 진작부터 쓰고 있었다.

물론 함선에나 쓰일 법한 그 덩치 큰 양방향 송수신기가 개인이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양방향 무전기로 발전할 때까진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술 발전으로 볼 때 그것도 마냥 불가능하다고만 치부할 순 없었다.

이 현상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과학자들의 노고였다. 세상에 쓸모없는 기술은 없었다. 그들 덕분에 문명은 전쟁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정방향으로 성장했다.

과학자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제국은 국내외에서 학문을 위해 연서궁이나 대학, 연구소에 몰려드는 많은 과학자들을 가졌고, 그렇기에 가장 큰 진보를 이루어냈다.

기초학문부터 응용학문, 자동차와 비행기, 전화 같은 유선통신과 무전기와 같은 무선통신, 항생제와 주사기까지 대부분 ‘문명’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제국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의 교육기반과 학구열, 안정된 정치 상황 등을 미루어볼 때, 기술과 시장 ‘선도자’라는 명칭은 영원토록 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제국 밖의 과학자들도 그저 낙오된 처지는 아니었다.

고려 기술에 대한 추격은 맹렬했다.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군사적 추격만 하더라도 꽤 컸다.

복엽식 비행기는 이제 유럽에서도 많이 보였고 내연기관을 이용한 전차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불공급 전함도 표준화가 되었다.

조선과 백제, 도이치와 프랑스는 ‘빠른 추격자’였다.

조선의 원전급 전함은 동아시아 최대의 거함이었다. 해군에서 불명예스러운 취급을 당해 앞으로 절대 함선에 이름이 붙여질 리 없는 원균과는 달리, 원균의 동생 원전은 그의 공로대로 최고의 전함에 이름을 두었다.

다만 이윤신은 아니었다.

이름 붙이기야 자기 마음이지만, 상국 고려는 조선이 옛 고씨 고려부터 이어지는 장수들 이름을 쓰는 것을 썩 좋게 보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붙인다면, 주요 핵심 부품에 대해선 수출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이 자체적으로 선박의 추진기관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 질의 차이가 있어 몇 매듭이 차이 나곤 했다. 최고 전함에는 최고의 기술력이 필요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이윤신은 고려 사람이 아님에도 붙이지 못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일개 군사학교(연방사관학교)에서 펄펄 뛰었다.

그들은 이윤신조차도 자기네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년에 이윤신이 잠든 곳도 동래미의 현충원이었으니까 그들의 생각을 마냥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연방사관학교 출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조선은 그 압력에 굴복했다.

고려는 항공모함엔 지리적 함명을, 전함에는 형용사적 함명을, 순양함이나 파괴함에 인물적 함명을 붙이는 관례가 있어 그 이름이 붙여질지 말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나중의 일은 모르는 일이었다.

도이치는 전차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비행기도 그러했다. 프리드리히 대왕 아래 인문학과 자연과학 모두 성장한 도이치에겐 그럴 능력이 있었다.

프랑스 또한 그랑제콜 체계와 에꼴 폴리테크니크의 설립으로 바짝 추격했다.

잉글랜드 같은 곳도 그 행렬에 껴들었다. 잉글랜드인 로버트 풀턴의 자체추진식 풀턴 어뢰는 전 세계의 표준 어뢰가 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니 고려의 은밀한 군사기술 부서들은 ‘기술 속도 조절론’을 꺼내 들었다.

이런 추격자들에게 너무 많이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만약 또 다른 대전쟁이 필연적이고 그 전쟁이 이전의 어떠한 전쟁보다도 그 규모가 압도적으로 클 것이라면, 그 전쟁에서 확실히 이기기 위해서는 기술적 유리함을 항상 선점하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비군사적 부문에서의 진보는 계속 꾸준히 이루어졌다.

비고려계 과학자 중 가장 큰 업적을 꼽아 보라 한다면, 단연코 프랑스 과학자, 라부아지에의 업적을 꼽을 수 있었다.

부르주아지 계층으로 2공화국에서 핵심적인 일을 맡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풍부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라부아지에는 어릴 적부터 화학을 비롯한 과학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고려 비유학파였음에도 일생일대의 엄청난 업적을 성취했다.

흔히 말하는 ‘라부아지에 법’을 발견한 것이다.

비동도 기준 400도에서 500도 정도의 고온에서 200기압 정도의 고압을 가하여 공기 중의 질소를 취소(臭素, 암모니아)로 만드는 그의 방법은, 인간이 기존의 전통적 방법 외에도 화학적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로 인해 라부아지에는 영광은 물론이고 거대한 돈방석에 앉았다.

그는 프랑스 특허청에 특허를 등록했고 라부아지에 비료 회사를 세웠다.

그는 유럽 최고의 부자 중 하나로 발돋움했고, 라부아지에 회사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고려와 프랑스는 물론이고 저 동아시아의 조선과 백제, 옥저 등지에도 회사가 설립되어 있었다.

비료의 개발은 항생제의 개발이라는 진보와 함께 폭발적 인구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세계 인구는 개천 6세기가 되자, 무시무시할 정도로 인구수가 불어났다.

전통적인 땅의 인구부양력은 한계가 있었다.

인구수가 어느 순간부터 정체하는 것도 당연했다.

고려의 김광철이라 하는 학자는 세계 인구가 적당한 선, 즉 전후 한 30억 정도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소리도 했었다.

김광철은 세계의 후생 발전은 산술급수(등차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반해, 세계의 인구는 기하급수(등비급수)적으로 증가하여 결국엔 파국이 도래할 것이라 주장했다. 실제로 인구수는 전형적인 지수함수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사실 그의 주장도 반은 맞았다. 이대로 가면 사람은 땅이 먹여 살리는 것 이상으로 너무 많아질 것이다.

그 거대한 고려조차도 땅과 음식, 물이 부족할 경우가 빈번하게 생겼다. 북려대평원은 자꾸 건조해졌다. 둑을 짓는대도 애초에 비가 잘 내리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천수답으로 모내기를 한다는 것은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고려는 지금까지 가장 높은 인구성장률을 꾸준하게 기록한 나라였으니 더 이상 땅이 남아돈다는 말은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화학 비료 덕에 기존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던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면서 김광철의 주장은 반박되었다. 후생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고려의 인구는 계속 성장했다.

보통 사회가 성장하고 인구가 많아지면 인구성장률은 정체를 보였다. 교육열과 인구는 대체로 반비례했다. 사람들이 높은 교육을 받고 삶의 질을 따지게 될수록, 아이를 여섯 일곱씩 낳는 전통적인 다가구 가정은 많이 사라지고 두셋만 낳아 기르는 풍습이 자리 잡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책 없이 출산을 하는 경우는 종교적 문제거나 혹은 전후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사람들이 그에 대한 반발적 심리로 출산을 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먹거리가 해결되고, 유아를 비롯한 사망률이 획기적으로 감소하자 인구는 다시 늘었다. 대전쟁의 여파일지 몰랐다.

* * *

하지만 여전히 지구는 식량 위기에서 마냥 자유롭지는 않았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많은 곡식들을 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러나 사람도 그만큼 늘어났고 비료도 공짜는 아니었다.

또한 농업은 오히려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산업력을 요구했으니, 비료 이전에 기계화나 농사기술, 하다못해 제철 등의 진보가 충분히 준비되었어야 했다.

무엇보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비료고 뭐고 장사 없었다.

냉해와 우박 등의 일은 농사를 짓는 인간으로선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해야 하는 불가항력적 폭력이었다.

그동안 지구의 기온은 조금씩 올라갔다. 빠른 산업화 덕에 석탄과 석유의 소모도 증가했다.

소빙기는 이제 끝물이었다. 하지만 소빙기의 마지막 발악 아닌 발악이 남아있었다.

국제식량위기는 개천 508년(CE 1783)부터 시작되었다. 첫 주자는 강화의 화산 분출이었다.

오쓰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아오모리현에 있던 이와키 화산이 분화했다.

강화에서 화산이 분화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일도, 몹시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이곳은 환태평양 조산대, 즉 화산과 지진의 땅이었다.

고려―백제―강화의 지질학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연구 모임에는 루밀 키치파닐과 네덜란드 파푸아, 누산타라 등이 참여한 상태였다.

물론 강화는 그런 쓸모없어 보이는 민간 연구기구 말고 환태협과 정보동맹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오쓰 사건으로 한동안 완전히 물 건너갔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행히도 이와키 화산이 분출한 아오모리현은 강화에서 가장 위도가 높은 곳, 즉 아이누와의 접경지였다. 때문에 화산이 당장 혼슈 본토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았다.

화산이 분출한 경우가 이것 하나였으면 버틸 만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강화에서 덕천원심이 텐메이란 연호를 쓰며 왕위에 오른 뒤, 이와키 화산 외에도 무려 세 개의 화산이 더 터졌다.

강화의 화산은 대자연이 왕 주제에 연호를 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두 개의 화산은 강화의 것이 아니었다.

개천 508년(1783년) 5월, 강화와는 한참 떨어진 아이슬란드의 그림스뵈튼(Grímsvötn) 화산이 분출을 시작했다.

이 분출은 거의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한 달이 지난 뒤인 6월에는 그림스뵈튼에서 남서쪽으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라키(Lakagigar, 라카기가르) 화산이 분출했다.

이 라키 대분출은 동시대에 분출한 화산 중에서도 그 규모가 전례 없이 컸다. 개천 325년에 분출해 고려의 악몽으로 남았던 후아이나푸티나와 비슷하다는 예측도 있었다.

분화한 위치가 위치인 고로, 당장 자세한 사항을 파악하긴 힘들었다. 고려의 지질학자들이 부랴부랴 그곳에 가려고 했지만, 일단 상황이 조금 진정되어야 가능했다. 그만큼 아이슬란드의 화산 분출은 격렬했다.

이런 상황 속, 강화에서 두 번째 화산이 분출했다. 군마현에 위치한 아사마산의 분출은 이와키산의 분출보다 더 크고 격렬해 ‘텐메이 대분화’라는 명칭까지 얻었다.

게다가 위치도 절묘하게 도쿄의 근처에 있었다. 군마현이 직접적인 화산쇄설류의 피해를 입었지만 도쿄도 화산재와 여러 가지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덕천원심은 즉위 극초창기부터 끔찍한 재앙을 수습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동안 화산 연구에 소홀히 하지 않았던 학계의 예상대로, 1783년에는 심각한 식량 위기가 일어났다.

특히나 네 화산이 몇 개월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분화한 북반구는 여지없이 그 영향을 받았다.

화산은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아황산 기체를 분출했다. 그중에 라카기가르는 후아이나푸티나처럼 엄청난 양의 아황산기체를 품고 있었다. 네 화산이 배출한 아황산기체는 인류가 배출한 기체(온실효과를 불러일으키는)의 수준을 단번에 뛰어넘어 대기권에서 태양 빛을 반사시키기 시작했다. 지구 냉각 효과, 학계는 이를 양산(陽傘)효과라 불렀다.

그러므로 개천 508년의 냉해 피해는 엄청났다.

북려 앙주와 화주에서도 이상기후가 발생해 보기 힘든 눈이 떨어졌으며, 농작물이 얼어 죽었다. 그동안 인류가 자랑하던 비료니 최신형 견인기니 하는 것들도 대자연을 극복하지 못했다. 농사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려도 그 지경인데 유럽과 동아시아 등 북반구의 국가들은 오죽했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고려는 남반구, 즉 남려의 곡식 소출량은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제국은 식량 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었다. 어차피 곡창과 곡식을 저장한 양도 인구수에 맞추어 증가했으니, 이런 피해가 몇 년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버틸 수 있었다. 비료 덕에 남려만으로도 제국 전체를 충분히 부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작가의 말]

ref. The Laki (Skaftár Fires) and Grímsvötn eruptions in 1783–1785

Thordarson & Self

Bulletin of Volcanology volume 55, pages233–263 (1993)

Angell JK, Korshover J (1985) Surface temperature changes following the six major volcanic episodes between 1780 and 1980. J Climate Appl Meteorol 24:937–951

Björnsson E (1783) Relation by one priest, who traveled in the summer 1783 to Southern Iceland from Múlasysla county through Skaftafellssysla county back and forth. In: Gunnlaugsson GA, Rafnsson S (eds) Skaftáreldar 1783–1784: Ritgerdir og heimildir. Mál og Menning, Reykjavík; 295–297 (In Icelandic)

라디오의 고려어는 무전기입니다. 사실 현대의 한국어에는 라디오와 무전기가 꽤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외국에는 아닙니다. 흔히 보이는 무전기(워키토키)도 Two-way radio라 부르니까요.

삽화

지금까지 고려 황조에 대한 정리본입니다.

다음에는 인구 도표가 올라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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