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강화의 위기
개천 508년(CE 1783).
“강화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황자 전하!”
― 펑, 펑
사진기의 조명 소리가 폭죽 소리만큼 요란하게 터졌다.
해완은 여객선이 도쿄의 항구에 기항한 뒤부터 사람들이 심상치 않게 몰려있는 것을 보고 내심 짐작하곤 있었다.
하지만 밖에 나와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 이리 많이 나왔는지.’
현 강화 왕 덕천탁인, 도쿠가와 타쿠히토는 어머니의 오빠였다. 강화 왕은 해완의 돌아가신 어머니보다도 나이가 많으니, 그 또한 노령으로 잘 거동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대신 해완의 환영식에는 덕천탁인의 후계자인 덕천원심(도쿠가와 모토무네)이 나와 있었다.
해완과는 달리 명실공히 강화의 세자였다.
덕천원심은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 환영식을 열었다.
이 모든 인파가 자발적으로 모여든 군중인지 아닌지 해완은 확신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덕천원심이 이 상황을 의도한 것은 틀림없다 생각했다. 사람들은 한 손에는 제국 깃발, 다른 손에는 강화 깃발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색종이와 꽃가루도 흩날렸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대접받는다는 생각은 어떠한 문화에서 자란 사람이라도 기분이 몹시 좋기 마련이다.
“반갑습니다. 사촌.”
덕천원심도 직접 미리 준비한 꽃 목걸이를 건넸다. 해완은 잠시지간 그가 제국전 득점왕이라도 된 것만 같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꽃다발까지야…….”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이런 것이라도 해 드려야지요.”
“고맙소.”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는 미리 준비된 인력거에 나란히 탑승했다.
왕실의 근위대가 철통같이 호위했다.
길가에 모여있는 행인들의 줄은 끝이 없었다. 해완과 덕천원심은 인력거 위에서 서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물론 둘 모두 이런 일에 익숙한지라 인사를 해 주면서도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고모님의 얼굴은 아주 어릴 적에나 보았으니 가물가물합니다. 허나 그분의 따뜻한 온정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지요. 지금의 순간을 빌어 그분과 전하께 애도의 뜻을 표하니 받아주시겠습니까?”
덕천원심은 유려한 고려어로 말했다. 어떤 통역도 필요하지 않았다. 백제와는 달리 강화는 독자적인 글과 말이 있었지만 항상 그러하듯 상류층들은 제국어를 ‘문화어’라 부르며 즐겨 썼다. 하층민들과 언어적으로 동떨어지는 것도 꽤 보기 좋은 일이었으니까.
어찌나 그런 기풍이 심한지, 다시 강화어를 쓰자는 반발 섞인 운동이 유행하고 있는 찰나였다.
“고맙소이다.”
해완도 고마움을 느꼈다. 촌수는 가까운 사촌이지만, 지금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금 최고의 예우를 해주고 있었으니 근래 들어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속에 상처를 입은 해완은 도리어 이 머나먼 외가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궁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지요. 마음 같아선 도쿄를 둘러보고 싶으나, 오래 배 위에 있어서 그런지 피로합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인력거는 왕궁으로 향했다. 저 멀리 에도성이 자랑하는 천수각이 보였다.
― 크흠
해완은 문득 헛기침을 했다. 그도 역사를 많이 배웠기에, 지금 저 에도성이 아주 옛날에 있었던 고려―강화 전쟁에서 살아남은 도쿄의 유일한 성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북왜 왕이 기거하던 황거는 완전히 박살 났을 것이다. 고려군 소속으로 있던 덕천신강이 직접 상륙하여 에도성을 포위하는 덕에 에도성은 지금 그 후손의 거처가 된 셈이었다.
강화와 고려도 서로 많은 역사가 얽혀 있다. 고려사에서 강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작았지만, 반대로 강화사에서 고려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높았다. 강화의 역사를 바꾼 세 차례의 대사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사건이 고려와 관련되어 있었다. 각각 백제의 독립과 에도 대포격 사건이었다.
하다못해 첫 번째 사건, 여몽연합군의 상륙도 해씨 고려가 대원정이 아니라 제주도쯤에서 항거했으면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강화 대중들이 그를 보는 시선엔 딱히 적대감은 없었다. 고려만큼 교육을 받지 못해서인지, 혹은 너무 과거의 일이라 이제는 별 상관이 없게 된 것인지. 아니면 힘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해완은 적대감 대신 희미한 불안감을 보았다. 저 멀리 그의 행렬을 관찰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를 보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조금 달랐다. 일반적인 대중은 이제 대부분 머리를 잘라 편하게 다녔는데 저들은 촌마게인지 뭔지 하는 독특하고 웃기는 변발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내 방문이 무언가 중요한 영향을 끼칠 모양이다.’
해완은 그때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 * *
이후 해완은 노령의 외삼촌, 덕천탁인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덕천탁인은 여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명복을 기원했다. 노인도 머지않아 이승을 떠나게 될 운명인지, 그의 눈에도 생기가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렸다.
덕천탁인은 해완이 강화에서 얼마든지 마음껏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원심도 해완의 편의를 배려했다.
맛있는 음식과 술, 미녀가 매일 대접되었다.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누각 위 경치 좋은 곳에서 정복자처럼 대접받는 것은 강렬한 쾌락이었다. 황자는 고려에서 이렇게 할 수 없었다. 쾌락을 즐기기에는 황실 구성원의 책무가 엄중했고, 또한 가풍이 엄격했다. 특히나 황태자가 될 야망을 가지고 있는 자는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이제는 괜찮았다. 그까짓 것,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관광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해완은 본격적으로 도쿄를 관광하기 시작했다. 강화는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굳이 친정이라는 관계가 없어도 한 번쯤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덕천원심은 첫 주 동안 그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는 많은 인파 앞에서 고려 일황자와의 돈독한 사이를 매번 강조했다. 해완도 이를 느꼈지만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
물론 덕천원심은 해완의 추가적인 요구에는 살짝 당혹스러워했다.
“지방 관광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이왕 온 김에 여러 곳을 다녀보고 싶소이다.”
“…되도록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해완은 도쿄 관광이 끝난 이후엔 저 백제와의 접경지인 교토와 오사카, 그리고 나고야 등의 지방도 둘러보기로 했다. 비와호와 후지산 등의 명소도 가볼 생각이 있었다.
덕천원심은 공무가 바빠 첫 주를 제외하곤 어울리지 못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가신, 송평융맹(마쓰다이라 타카타케)를 보내 해완을 시종하도록 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로 덕천 종가가 송평 종가였기에 두 가문은 몹시 가까웠다. 모시기 부족한 신분은 아니었다.
주군으로부터 단단히 부탁받은 송평융맹은 되도록 안전한 길로 해완을 안내했다.
웬만하면 호위가 편한 철도를 이용하는 경로를 택했다. 강화도 엄연한 열강이라 철도가 충분히 많이 깔려 있었다.
다만 해완은 내심 이 머나먼 강화 땅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어 했다.
그가 살아온 고려에서의 호위는 정말 철저했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 된 민간의 삶을 느껴볼 겨를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가능할지 몰랐다. 물론 송평융맹의 협조가 필요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고려의 정보부에서 호위차 파견 나온 자들을 물리는 일뿐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힘들었지만.
해완은 강화 관광을 시작하며 많이 친해진 송평융맹에게 부탁했다.
송평융맹은 곤혹스러워했지만, 결국 비와호를 구경하는 일정 후 그나마 치안이 좋은 교토 근방의 오쓰정(大津町)에서 자유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비와호 관광은 증기 유람선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여몽연합군과 왜의 격전지였고, 옛 백제와 강화군이 격돌한 흔적도 남아 있었기에 역사적 명소라 불릴 만했다. 해완도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누렸다.
하지만 해완이 유람선에서 내리고 오쓰정의 식당으로 가는 찰나에 마침내 사건이 벌어졌다.
“네놈이 해완이냐!”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답을 구하려는 말은 아니었다. 나노리 같은 이상한 관습일지도 몰랐다. 해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에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사타구니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 허리를 굽혔다. 다음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 닌자가 있다(忍者がいます)!
― 뭣들 하는가!
해완은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 주변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흉수도 한두 명이 아니었고, 경호하는 인원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세상이 어느 때인데 권총을 내버려 두고 대체 뭘 하는지, 저들은 줄창 암기를 날리고 왜도를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침내 해완의 상처를 보던 송평융맹이 품의 권총을 뽑아 사격하자, 흉수들이 후다닥 물러났다.
“어찌할까요!”
“전부 추격해! 네놈들, 이가의 명예를 걸고 증거를 확보하라!”
송평융맹의 고함에, 덕천의 편으로 보이는 흑의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완은 그 모습을 뒤로하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해완은 교토의 궁성에 있었다. 근처에 사는 저명한 의원이란 의원들은 전부 다 불러왔는지, 여러 사람들이 그의 안위를 살피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조금만 더 요양하시면 털고 일어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세자 저하께서 직접 오시고 계십니다. 일단 저희도 저희가 가진 모든 항생제를 이용했습니다. 한유약품은 아니지만… 저하께서 직접 좋은 약을 가지고 오신다니 앞으로의 환후도 괜찮으실 겁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의사들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해완은 애써 상체를 들려 시도했다. 의사들이 그의 행동을 만류했다.
“보지 마십시오. 전하의 안위에…….”
하지만 해완은 기어코 보고야 말았다. 끔찍한 참상이 하반신에 있었다.
“어, 어디 갔는가, 어디로 갔는가! 말을 해 보거라! 내 것이 대체 어디로 갔는가!”
“……독 바른 슈리켄이 꽂히는 바람에 외과적인 처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완은 그 말을 한 의원의 멱살을 잡으려 버둥거렸지만, 주먹은 닿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난동을 부렸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한참을 버둥거린 그가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울음 섞인 말에 사내들이 숙연해졌다.
“이 일을 비밀로 하라. 알겠는가!”
* * *
고려의 황태자가 강화 시가현 시가군 오쓰정에서 습격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강화 정부는 미친 듯이 흉수를 찾아 나섰다.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흉수들의 정체는 낭사조(浪士組, 로시구미)라 좁혀지고 있었다.
이름대로 평소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이 불량배 무리들은 당대의 강화 제일의 권신, 전소의차(다누마 오키쓰구)가 형성한 해남파 휘하에 있었다.
전소의차의 해남파는 덕천원심의 왕도파와 함께 격렬한 권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현재 강화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세는 훨씬 더 컸다. 군부와 조정에서 거의 육 할에 달하는 무리가 해남파에 의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해남파의 기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해남도에서 파생했다.
도박과 마약, 유흥 등으로 몸집을 불린 야쿠자들은, 고려의 마약단절권고를 받은 강화 중앙조정의 탄압에 많이 몰락했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어쩌면 탄압하려는 자들도 그렇게 의욕이 넘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마약단속이 약간 사그라든 이후 그들은 전소의차가 내민 손을 잡고 그의 집권에 여러 자금과 힘을 보태며 활기를 찾았다. 그들의 사업도 조금씩 더 교묘하고 커졌으며 음지와 양지를 모두 넘나들기 시작했다.
전소의차가 관백, 즉 수상의 자리에 앉은 지금은 바야흐로 그들의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생이 야쿠자인 그들은 공공연하게 칼을 차고 돌아다녔다. 전소의차를 중용한 장본인인 덕천탁인은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옛 행동을 후회하고 그의 행패를 저지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이미 권신은 노왕의 손을 떠나있었다.
그리고 그 임무는 아들 덕천원심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덕천원심은 전소의차의 세력을 약간 줄이는 것엔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정계에서 완전히 우위를 점하진 못했다. 다행히도 현 고려 황제로부터 고려 황실의 자금지원을 받았기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 정도였다.
보다 더 많은 지원이 있었다면 몰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덕천원심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지금 이 기회는 덕천원심에 있어선 더없는 호재였다.
황자의 피습사건을 들은 고려는 격노했다. 해완이 사실상 태자가 되지 않을 운명이 되었다고 하나, 그는 여전히 고려의 황자였고, 종통이었다. 태평양함대가 출항을 준비했고, 탐라의 전투비행단이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이제 전소의차를 끝장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