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11화 (511/653)

511화 선의 안배

상민은 자신의 예지에 나온 자를 찾아 헤맸다.

중원은 넓고 사람은 많아 그 대상을 특정하긴 어려웠다. 자신은 아주 짧은 이미지 같은 환상만 몇 차례 보았으니, 정확한 이름도, 신분도 알 수 없었다.

오직 몇 가지 생애의 편린만 언뜻언뜻 볼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결국 찾아냈다.

처음 예지를 본 뒤부터 벌써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현재 진균은 경사에서 대중정치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진균은 그의 출신성분상 도무지 어디서 구했는지 상민조차도 추측하기 힘든 재산을 바탕으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층민 출신이라는 점과, 항병 출신이라는 점은 별 장애물도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잘만 이용한다면 다른 자들에게 공감과 동질감을 선사할 수 있었다.

젊은 청년은 능력이 뛰어났고, 언변이 화려했다. 곧 그는 경사의 고위층 눈에 띄었을 것이다.

현 중화민국 대총통 황전겸은 자신이 종신 대총통이 되기 위한 밑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종신 대총통뿐만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 또한 장악하고 싶어 했다.

그는 중화민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중화민국은 중화민국이 아니게 될 터였다. 중화제국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실로 원세개가 따로 없었다.

상민은 많은 독재자들을 보았다. 황전겸도 분명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황전겸이 완전히 무능한 것은 아니었다.

내전을 질질 끌고 있긴 했지만 지금 순나라를 사실상 궁지로 몰아넣었으니, 나름대로의 업적도 있었다.

내전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황전겸은 큰 사업가답게 그의 머리와 인맥을 잘 굴려 전쟁특수를 이용해 류용 시절에 겨우 기초만 닦아놓았던 중공업을 조금이나마 발전시켰다.

하지만 아직 공산당의 위세가 꺾이지 않은 현시점에서 종신집권과 강화된 집권을 원하는 그의 정치적 선택은 최악의 수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가를 위한다기보다 자신을 위했다.

황전겸은 국익을 위해 사익을 포기하기엔 일신의 욕심이 너무 많았다. 또한 내무총장으로 있는 중화민국의 2인자 장광형과의 다툼이 표면화되며 조바심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황전겸은 국민당이 아닌 사람 중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전겸은 지나의 아버지인 류용이 목숨을 다 바쳐가며 세워놓은 중화민국의 껍데기를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쓸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핏줄이 선 전겸의 눈에 때마침 젊은 청년 두 명이 들어온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터였다.

황전겸은 습진균과 낭화신을 은밀히 후원하기 시작했다. 둘은 그들의 과거 행적에 대한 사면도 받았다. 그 대가로 둘 모두 황전겸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낭화신은 군부의 경력을 인정받아 황전겸의 허락하에 대총통 직속의 사병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구성원의 나이대가 높아져 소년이라는 명칭은 제외했지만 여전히 선봉대로 불렸다.

이 시기, 선봉대의 경례방식이 도입되었다. 다른 군대와의 구별을 위해 그들은 경례할 때 조금 더 손바닥을 위쪽으로 올려 머리 위에까지 위치시켰다. 이를 선봉대식 경례라 불렀다.

습진균은 황전겸을 지지하는 여론을 만들 목적으로 새로운 군소정당을 하나 창설했다.

중화민국은 집권여당인 국민당 이외에 여러 당이 있었다.

예전부터 류용의 국민당이 중화민국을 상징했기에 동의어처럼 취급당했지만, 국민당에도 당 안의 당이 여럿 있었었다.

이들은 중화민국의 설립 이후에 군소정당이 되었다. 지금도 정당 창설에 엄청난 장애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공산당은 진작에 위헌판결을 받아 명목상으로 해산된 상태였고, 이에 동조하는 정당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습진균의 작은 정당은 그렇지 않았다. 진균은 가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비슷한 맥락의 말들을 하면서도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정당의 이름은 굉장히 길었다.

민족사회주의 중화인민당(民族社會主義 中華人民黨).

약칭 중화당이었다.

* * *

지금 그 어린 소년, 어린 악마는 무방비했다.

자신의 손짓 한 번이면 죽었다. 요원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던지 혹은 정말 자신이 직접 가던지 상관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 아이가 커 가면서 몸집을 불려나간다면 나중엔 이렇게 손쉽게 처리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호위가 생길 것이고, 스스로도 조심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나중에 어떤 일들을 저지를지, 상민은 알고 있음에도 내버려 두었다.

나중의 교훈을 미리 얻기 위해서. 예견된 몰락을 피하기 위해서.

안토니아가 질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다른 이들이 그의 능력을 알았다면, 필히 물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진균을 죽이고, 나중에도 그런 파멸을 가져올 자들을 속속 처리한다면 괜찮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미래가 다가올수록 사람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그가 사람 같지 않은 능력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 계신다는 건 아니잖아요.”

마침내 책을 전부 집필해 유먹을 말리고 있던 안토니아가 그렇게 물었다.

“네? 뭐라도 하셔야지요.”

감정이 참 풍부한 사람이다. 그녀는 금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상혁이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갈 나이고 영아는 걸음마도 못 뗐다고요. 그런 애들이 전쟁을 겪어야 하나요?”

안토니아와 진균은 동년배였다.

그러니 그녀는 이 시대의 흐름을 쭉 목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상민과 안토니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하지만 그 일들은 그 아이들의 몫이야.”

하지만 상민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안토니아를 달래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자신이 굽어살필 수는 없다.

상민은 손을 내밀었다. 눈물을 닦은 안토니아는 유먹이 말랐는지 확인하고는 완성된 책 한 권을 건네었다.

악의 탄생.

이 책을 집필하면서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렇게 많은 내용을 말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책은 꽤 두툼했다.

상민은 안토니아의 정갈한 글씨체와 그렇지 않은 책의 섬뜩한 내용―진균에 관한―을 보고는 가볍게 웃으며 책을 덮어 보관함에 넣었다. 이제 육지로 갈 때 자신의 금고에 넣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좋은 배라도 상민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만큼은 단단한 육지를 더 선호했다.

책에는 담기지 않았던 사실도 있었다. 안토니아에게까지 말 못 할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그녀에겐 여의국에게도 알려주지 못하는 것들을 말해주었으니, 정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사항일 터다.

일반적으로 그가 본 ‘미래’는 꽤 다양했다. 그가 하는 행동에 따라 결과가 바뀌었다. 가변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예지를 미세하게 조정하여 모든 변수를 확인할 순 없지만, 큰 변수의 제거 혹은 변화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가끔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능력도 시간제한이 있었다.

벌써부터 칠팔십 년 뒤의 일을 논하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긴 했지만, 개천 600년 무렵의 시간대부턴 상민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만 볼 수 있었다.

그때 가서 무언가 선택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의미일 터였다.

핵폭발이 일어난 시간대도 그 시간대였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의 이야기였다. 그땐 자신과 여의국이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자세한 이유는 몰랐다.

으레 그러하듯 그가 받는 예지는 무언가 몽환적이고 부정확했다. 상민은 자신의 죽음이나 끝을 정확하게 예지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두렵거나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누가 만약 자신에게 이러한 선물을 주었다면, 그 마음대로 뺏어갈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드디어 때가 오는 것일까, 상민은 조금은 기다려지기도 했다.

― 덜컥

상민과 안토니아가 있는 방이 어떠한 두드림 없이 열렸다.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수 있는 자는 지금 이 배에서 한 명뿐이었다.

배에서 태어난 꼬마 남자아이가 문고리를 잡고 낑낑거렸다.

새벽호 객실 문은 통로와 구역의 문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재질은 철이었기에 아이가 자기 힘으로 활짝 열고 다니기에는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안토니아가 기겁을 했다.

“상혁아! 문을 열기 전에 두드리라고 했잖니!”

지금이야 상관없다만, 나중에 혹시 조금 껄끄러울 때 들어오면 부모로서는 아주 난감할 수 있었다. 특히나 밤중에는 더더욱.

하지만 꼬마는 울상을 지었다. 아이가 버르장머리가 없이 커서 그런 건 아니었다.

“…들릴 만큼 두드리면 손이 아프단 말이에요!”

상민이 일어나 상혁의 손을 쓰다듬었다. 작은 체구에 입혀진 황립초등학교 교복이 딱 맞았다.

세월은 참 빠르구나. 자신은 살면서 수많은 아들딸들을 보았다. 갓난아기부터 노인으로 늙어 죽을때까지. 하지만 어쩌면 이 아이들과는 함께할 수 있겠다.

“그래, 그래. 괜찮다. 단단한 철문을 두드리면 손이 붓지.”

등 뒤에서 안토니아가 투덜거렸다.

“당신이 오냐오냐 하니까 사도들도 애 버릇을 자꾸 망치는 거예요.”

상민은 대답 대신 상혁의 팔 밑에 손을 넣어 들어올렸다.

“초등학교 가면 잘 지내야 한다. 알았지?”

“네.”

“네 이름이 뭐라고?”

“합상혁이요.”

“부모님은 뭘 하시고?”

“어머니는 합스부르크의 공주이시고, 아버지는 중견기업 사장이시죠.”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애가 이렇게 막힘없이 말할 정도면 3사도가 아주 심혈을 기울여 세뇌, 아니 외우게 했다는 것일 터다.

안토니아의 신분은 유학 도중 연애결혼을 했다치면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자신은 꽁꽁 싸매야 했다. 그래서 상혁은 모친의 성씨, 합스부르크에서 기원한 석정 합(合)씨라는 아주 독특한 성의 시조가 되었다.

“그래. 잘 했다.”

상민도 채비를 갖추었다. 안토니아가 놀라며 물었다.

“정말 직접 입학식에 가신다고요?”

“그래요. 왜?”

“아니… 그냥요.”

안토니아가 얼버무렸다.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괜찮아진 모양이다. 악의 탄생이고 나발이고 그녀에겐 가족이 먼저였다. 마음 한 구석에는 상민이 마냥 이 사태를 방기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을 것이다.

젊은 노인은 허허롭게 웃었다.

그래, 그가 완전히 모든 것을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안배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악이 탄생한다면, 그에 맞서는 사람들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는 단지 그 사람들을 규합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 *

제국사관학교, 즉 숭무감은 본래는 창양에 위치해 있다가 외곽으로 한 차례 이전했고, 이제는 외곽까지 가파르게 상승하는 제도의 부동산 가격에 결국 교하로까지 밀려나고야 말았다.

대체로 전통을 수호하는 고려였지만 온갖 차와 철도, 비행기가 오가는 탓에 소음공해에 대한 주민들 원성은 막을 수 없었다. 대도시의 필연적인 숙명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교하에는 황실토지가 크게 있어 그곳에 터를 잡고 이전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점유할 수 있었다. 토지도 강도 넓으니, 큰 활주로가 필요한 공군부와 물이 필요한 해군부의 실습에도 좋았다.

물론 더 큰 영토는 더 넓은 연병장이라, 아침마다 그곳을 구보해야 하는 생도들은 끔찍한 넓이에 몸서리쳤다.

고려에는 세 사관학교가 있었다. 지역마다 이름이 달랐다.

남려 교하에 있는 전통있는 제국사관학교와 북려 앙주에 있는 연방사관학교(자제감), 그리고 중려 파남에 위치한 국제사관학교가 있었다.

셋 모두 졸업하면 군문에 투신할 수 있었고 차별은 없었다.

육해공의 군종에 따라 이 세 사관학교를 다시금 나누자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긴 했지만, 이들은 딱히 분리되지 않았다.

제병협동의 원활함을 위해서였기도 했다. 어느 군종이 더 낫다느니 하는 것들은 지금도 있는 마당인데, 서로 나누어 놓으면 참으로 볼만할 것이다.

사실 숭무감과 자제감간의 유서 깊은 경쟁의식, 그리고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생긴 국제사관학교의 열등감 같은 문제도 존재했다. 출신 기수끼리의 단합과 끌어주기 같은 것이 없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기후와 환경차이 극복을 명목으로 매년마다 교환학생식으로 일부씩 서로의 교장에 보내니 그 갈등은 많이 줄어들었다.

군대 주변의 술집만 봐도 서로 조롱을 하다 주먹을 휘두르는 일은 이제 별로 없었다.

햇빛가리개를 조금 들어올리고 그 틈을 통해 밖을 바라보던 참장이 관용 차 한 대가 교정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다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

사십대 중반의 장교 한 명이 경례를 붙였다. 계급장은 정령이었지만, 곧 바뀔 것이었다. 참장(진)이라 해야 할까. 서로 알고지낸 선후배 관계였기에 잘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셨는가.”

주인은 커피를 두 잔 내왔다. 손님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래, 후배님. 참장 진급을 축하하네.”

이선은 공손히 커피를 받았다. 축하에 대한 답도 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거의 곧바로 진급하는구만. 참 재능이 있단 말이야.”

“선배님께서도 그러셨잖습니까?”

“이젠 아니겠지. 후배님께서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테니까.”

“그만두신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소문이 다 퍼진 게로군?”

이선이 주변을 둘러본 뒤 상체를 가까이 하며 물었다.

“설마 그 빌어먹을 일이 좋지 않게 끝났습니까?”

이선의 말에 주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그건 아닐세. 그 일은 좋게 해결이 되었어.”

주인은 피식 웃었다.

“군부가 좀 경색되었긴 했지만, 그래도 자정작용은 있네. 방산비리같은걸 제보하는 건 후환을 두려워할 만큼 큰 일은 아니야.”

“그럼 왜 그만두시는 겁니까?”

주인은 좀 갈등하다 속내를 털어놓았다.

“최근 정계 입문 권유가 있었어. 내 친우들이 말해주길 이번 일에 대해 정치권에서 날 좋게 본 모양이야. 그래서 교당에 입문하기로 했네.”

이선은 안도하면서도 크게 놀랐다.

“그렇습니까? 이거 오히려 축하를 드려야 하겠군요, 선배님.”

“하하, 나중에 술 한잔 같이 하지. 자네도 내 친구들을 만나보면 좋을 걸세. 좀 고집불통에 또라이 같은 인물인데, 국민들은 그걸 또 좋게 보더라고.”

존 애덤스와 사무엘 애덤스라는 사촌지간의 정치인은 이선도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생도대장에 대한 인수인계 문서는 여기 다 보관해놨어. 물어볼 거 있으면 유선으로 물어보고.”

“알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워싱턴 선배님.”

조지 워싱턴은 이선의 경례를 받아주는 대신 악수를 청했다.

“그래요, 나중에 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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