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악의 탄생(4)
진균은 그렇게 ‘올바른’ 역사를 배웠다.
그 덕분에 진균은 국가의 적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중원 내에 있는 유목민과 이민족이 적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없다!’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 과연 장삼이사들의 잘못이겠는가. 오로지 외부의 원인 탓일 것이다.
한족의 중원이 다시 만들어진다면, 중원은 또 한 번 위대해질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강인한 지도자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진사당이 그렇게 말했다. 경사와는 한참 떨어져 있는 감옥에서 소식을 한 박자 늦게 접하고 있지만, 그는 시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류용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의 시대에 우리는 한번 크게 부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군벌 진사당을 몰락시키고 감옥에 집어넣은 당사자가 류용이었다. 하지만 진사당은 그를 치켜올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옛 대적자이니 그를 낮추는 것이 자신을 낮추는 것과 같아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일신의 능력을 기준으로 진사당은 정말로 류용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도덕적 성품과 이상, 그리고 추구한 노력까지.
만약 그가 정권을 잡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중원을 발전시키는 것에 주력했다면, 중원은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또한 패착을 저질렀다. 류용은 너무 인간적이었다. 또한 너무 도덕적이었고 이상주의적이었기에 다소 우유부단했다. 지도자란 이상적인 군주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면에선 철혈의 결단력과 냉엄함을 지녀야 하기도 했다. 류용은 후자에 대해선 다소 부족했다.
“너는 우리의, 선대의 실패를 항상 기억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중국공산당과의 협력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한족을 위한 이념을 가진 놈들이 아니야. 특정 계층을 위하는 놈들이지. 그들은 실제로 한족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엔 관심이 없다. 민중들이 위대해지지 않아야 공산당을 영원토록 지지할 테니까.”
실제론 태평천국의 초기 구호는 어쩌면 약간 공산주의적 기조를 띄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그 기조는 바뀌었고 다소 평범해졌더라도.
진사당은 그 사실을 마냥 부정하지 않았다. 불평등한 세상을 바꿔보자하며 일어난 운동은 어느 정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 논리를 어느 정도는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노동자의 사회 운동은 철저하게 탄압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계층투쟁적 이념은 중화민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주체는 계급이 아니라 민족이어야 했다.
유목민과 이민족을 구분시킨 순수한 한족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 없이 중화를 위해 하나로 똘똘 뭉쳐야 했다. 국가와 사회에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어야 했다.
또한 중국공산당의 이념은 중원에서 기원한 바가 아니었다. 저 멀리 유럽에서 시작되어 기원한 것이고, 그들이 역수입한 외세의 사상이었다. 당연히 반민족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는 분명히 멘셰비키가 장악한 소비에트가 있을 것이고, 또한 북쪽에 있는 유목민이 있을 것이었다.
사실 진사당은 유럽의 역사를 그렇게까지 잘 알고 있진 않았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현시점에 제대로 된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선 일단 제대로 된 대학에 가야 했다. 아니면 그저 저자의 주관이 잔뜩 담긴 책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이 널린 중원에도 많은 책들을 쓴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그 책들의 신빙성은 장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가 생각하기엔 러시아와 소비에트는 결국 몽골의 잔재가 섞인 것이었다.
러시아가 준가르를 멸망시키기도 했지만, 반면 돈 카자크 같은 유목민적 성격을 지닌 군사집단을 부리기도 했다. 카자흐와 같은 이들을 오랫동안 지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결국 러시아도 흰 피부의 몽골놈이 아닌가.
특히나 소비에트 연방을 세운 멘셰비키 급진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놈들이다. 경계해야 했다.
“유목―멘셰비키라 하셨습니까?”
“그래. 어디까지나 외세의 사상이지. 그러니 우리 한족은 그들의 사상을 잘 살펴야 한다.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배척할 것은 배척해야 하는 것이 옳다.”
진사당은 ‘민족적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을 진균에게 심어주었다.
“네 생각을 정립하는 일은, 너에게 맡기마.”
이후 진균은 사람들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토론을 하는 것과, 사람과 언쟁을 벌여 승리하는 법을 배웠다.
진사당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진균을 다그쳤다. 진균도 핏대를 올려가며 스승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누가 보면 노인과 청년이 한바탕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간수들은 이미 익숙해졌는지 조용히 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토론을 할 때마다 흘깃거리며 구경했다. 그들의 토론은 흥미진진했고 재미있었으며, 감정과 생각을 자극했다.
“그래, 너의 모든 말, 모든 단어,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민중의 심리에 영향을 끼친다! 몸짓에 절제된 열정을 쏟아라, 그들에게 강인하고 확고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거라!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다,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란 말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원에는 수많은 기인이사가 있었다.
그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본신의 재능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에 있어선 이들은 타고난 위업을 달성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희대의 명언을 만들어낸 진승과 오광, 맨땅에서 처음으로 반국가적 종교 궐기인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
규모만큼은 중화 역사상, 아니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민간봉기, 즉 태평천국을 일으킨 관수경과 자신, 진사당까지.
모두 민중을 손에 쥐고 다루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리고 진사당은 습진균이 그들에 필적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야 말 것이었다. 자신할 만한 본신의 능력도 있었고, 관수경을 직접 옆에서 가장 가까이 지켜본 당사자이기도 했다.
“시선은 정면을 고정하거라! 눈은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 팔과 팔꿈치, 손목과 손을 풍부하게 사용하라! 모든 이들이 너의 행동을 주목하고, 나아가 너의 말을 주목하게 하거라!”
열정뿐일까, 젊은 청년은 아직 가지기 힘든 관록이라는 미덕도 심어주었다.
“완급 조절이 핵심이다. 잠잠해지다 끓어오르며, 끓어오르다가 잠잠해지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항상 고조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도리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럴 때 가극이라도 보여주면 좋겠지만.
진사당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풀려난다면, 꼭 가극 극장의 배우들에게 가 가르침을 청하라. 그들의 일을 천한 것으로 여길 필요는 전혀 없다. 그들이야말로 대중을 다루며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셈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 * *
스승 진사당은 오래 살지 못했다.
1년하고 9개월이 지난 1777년, 노인은 세상을 떠났다.
습진균이 열여덟이 되었을 때였고, 임진년에 시작된 국공내전이 벌써 5년이 되어가는 해였다.
그럼에도 진균은 그 명석한 머리로 진사당의 지식과 생각을 대부분 흡수했다. 두 기재는 붓과 종이조차 필요하지 않았고 단순히 대담을 나누는 것만으로 지식을 교류했다.
― 태평천국의 유산은…….
마침내 노인은 자신의 죽음을 짐작했는지, 마지막 제자에게 유언과 유산을 모두 남겼다.
유산이라고 해 봤자, 사실은 태평천국이 성세를 자랑할 때 민간과 관을 약탈하며 노략질을 한 전리품들을 묻어놓은 것일 터다. 그래도 그 귀중품들의 가격은 굉장히 비쌀 것이 분명했다.
재물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보다, 어디에 쓰는지가 더 중요하다, 진사당은 그렇게 말하며 진균이 그 재물을 현명하게 사용하기를 바랬다. 진균도 그것의 위치를 철저히 외웠다.
진균은 그 유산을 소장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정부는 항상 돈이 부족했다. 이런 자금이라도 회수하길 원했다. 그러니 군벌 수괴를 살려뒀을 것이다. 상부로부터 어떻게든 그 유산의 행방을 알아내라는 명을 받은 노역소장도 진균을 다그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했지만 진균은 노인이 끝내 알려주지 않고 죽었다며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소장으로선 진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소장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그는 어느 날 밤 복면을 쓴 간수들로 하여금 진균을 구타하고 물로 고문하며 사실을 불게 하라고 명을 했지만, 고문을 받는 진균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저 낄낄거리며 광인처럼 웃어댈 뿐이었다.
열여덟의 청년은 그간의 교육 덕에 이미 신념이 눈동자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더 이상 육신의 고통은 그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하하하, 더 해보거라, 어디 더 해보래도!”
한족의 위대한 미래를 위해선 진균은 어떠한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다.
죽는다면 순교자가 될 것이오, 살아난다면 지도자가 될 것이다. 무엇이 두려우냐.
“나는 너희를 위해 존재하는 자다. 그렇기에 이런 것은 충분히 인내할 수 있다. 그래, 오거라. 와서 나를 다시금 물에 집어넣거라!”
간수들은 기가 질려 오히려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진균은 그 모습에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욕을 하는 것보다, 이런 말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무엇이 너희들로 하여금 같은 민족에게 이렇게 행동하도록 하느냐! 응? 너희는 같은 한족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며, 노역을 시킨다. 이것이 정녕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자들의 행동이냐?”
사실, 진균조차도 노역소의 ‘개선’을 위해 죄수들 사이의 분열을 꾀했지만, 그것은 이미 상관없는 지난 일이었다.
“나는 백마를 탄 초인이며, 모든 과업을 이룰 자다. 나는 내 숙명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에 모든 한족을 해방시킬 것이다!”
청년의 외침에 간수들이 오히려 기가 질렸다. 이놈은 미쳤다. 정말로 미치광이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어딘가 찝찝해지고 살짝은 겁에 질리기까지 한 간수들은 고문을 대충 끝내고 소장에게 보고했다.
소장은 아무 성과를 얻지도 못하고 진균을 다시금 감옥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진균은 더 이상 특혜를 받지 않았지만, 감옥 속으로 돌아와 눈을 번쩍였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오, 낭 형.”
“하, 많이 바뀌었구만?”
“그렇소. 세월이 우리를 많이 바꾸었지.”
진균은 더 이상 화신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 화신도 의외로 이를 잘 받아들였다.
진균이 예전에 노역소에 대한 약간의 권한을 쥐었을 때, 그를 조금 챙겨주었던 것도 있었다.
또 화신도 몇 년간의 수용 생활 덕분인지, 본래 성격이 그러했는지 몰라도 굉장히 사람의 기색과 의중을 잘 살피고 권력의 향방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는 진균에게 상전 대우를 바라지 않았다.
둘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같은 순나라 출신에 항장과 항병 출신이니 움직임에 제약이 있었다.
“탈출을 시도할까?”
“아니야. 곧 있으면 노역소에서 풀려나는 사람이 많아질 거야.”
“대체 왜 그렇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전황이 크게 바뀌었다더라.”
“남양이 떨어졌다는 소리까지 들었소.”
사실 순나라와 국민당은 국―공 전선만큼이나 크게 싸우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순이 과욕을 부려 신양을 점령했고 이에 국민당이 크게 노해 역으로 그 병력을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그 후에는 두 세력 사이에서도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순은 신양포위전 이후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지금까지 남양에서 버티고 있던 것만으로도 대단히 잘한 셈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행운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근데 그 다음 소식은 들었나?”
“아니요. 말해주시오.”
화신이 주변을 살펴보다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 다음에는 다시 공산당 놈들이 순의 뒤통수를 때렸지. 국민당이 순의 영역을 먹게 내버려두느니, 자신들이 점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낙양과 서안이 공산당 손에 떨어졌어.”
진균은 크게 놀랐다. 두 도시는 유서 깊은 고도(古都)였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 가치도 대단히 중요했다. 국민당과 순이 싸울 동안, 뒤통수를 때려 두 도시와 그 인근을 먹은 공산당은 큰 이익을 봤을 것이다.
“정말로 박쥐같은 놈들이구려. 빨갱이들은.”
“그렇지. 뭐 그건 둘째치고, 순은 이제 사천 지방과 천수, 난주 정도가 전부다. 조정도 전부 다 성도로 천도했다더라.”
“그러면 이제 남양등지의 순나라 포로들은 풀려나겠소?”
“그렇지. 네가 만든 체계에 따라 순종적인 놈들 위주로 풀려날 것이다.”
진균은 피식 웃었다. 노역소의 사람들은 진균을 다소 싫어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진균은 다시 그들을 만난다면, 그들이 자신을 칭송할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 * *
화신의 말대로 노역소에서는 곧 사람들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사람을 천년만년 가두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작금의 중원 상황이 혼탁해도 그랬다.
국민당이 승기를 잡으면서 오히려 노역소에 수용해야 하는 인원이 많아졌으니, 기존에 기간을 채운 자들은 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노역소 출신의 소년병들은 주로 풀려나 고향으로 향하거나, 혹은 봉급이라도 챙기기 위해 기존의 적이었던 국민당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혹독한 처우를 받아 국민당에 큰 원한이 생긴 이들은 하북으로 넘어가 공산군이 된 경우도 있을 터였다.
의외로 화신과 진균 둘 모두 풀려났다.
진균은 현 소장의 아래에서는 풀려나기 힘들 것이라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스승을 만나게 해준 은인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서 유산이라는 대가를 원하는 도적이자 원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이 돕는지 때마침 기존 소장이 영전을 하여 호남을 떠나 남양으로 가게 되었단다. 진사당에게 비밀은 못 알아냈지만, 노역소를 더욱 효율적으로 바꾼 공로가 인정되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새로 온 노역소장은 이미 죽은 노인네의 유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태평천국의 유산이라니, 그냥 호사가들이 떠드는 소문에 불과할 것이었다. 설령 그런 비밀이 있다고 해도 수년, 수십 년 동안 철저히 지킨 비밀인데, 한낱 소년병 포로 하나가 알아올 리가 있겠는가.
정부도 진사당이 죽은 이후에는 사실관계를 더 알아보고 재촉할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자유를 되찾은 진균은 푸르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지는 내전으로 인한 시신으로 뒤덮여 있는데, 하늘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어디로 가시오?”
화신은 한참 고민하더니 역으로 질문했다.
“어떻게든 성도로 갈 생각이다. 너는?”
“경사로 갈 거요.”
“거기는 왜?”
“한족을 구원하기 위해.”
“…….”
“같이 가시겠소?”
성도가 있는 방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화신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