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악의 탄생(3)
노역소장은 이 일에 딱히 의욕이 없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정부로부터 녹을 받는 처지에 명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마냥 미련한 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 난세에서 그나마 가진 것을 잘 지키자는 보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노역소에서 한 번 더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만의 작은 보신주의도 완벽히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기분 나쁘고 발칙한 놈이지만 그래도 뭔가 있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이 아이에게 특혜를 줄 순 없었다.
체면이 상하지 않는가. 뭔가를 기대한다면, 그만큼 해주어야 하는 법이다. 명령을 하는 것이 더 있어보였다.
소장은 머릿속에 떠오른 한 노인의 인상과 이 꼬맹이를 비교해 보았다.
서로 소름 끼치도록 닮은 기운이 있었다.
아까 이 아이가 주장한 말의 맥락은 지금 같은 경우에도 적용될지 몰랐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갈구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친분을 형성하며 접근하는 것이 위협과 다그침으로 일관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를 발휘할지 모른다.
특히나 이제 죽음과 속세에 초연해진 노인네라면.
소년을 자신의 집무실로 데리고 온 소장은 맞은편의 의자에 진균을 앉혀놓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너에게 한 가지 더 명해야 할 일이 있다.”
“…예.”
아무리 음험한 싹수가 있는 놈이라도 아직은 어렸다. 진균은 소장의 명령에 약간의 실망과 불안감을 내비쳤다. 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노역소는 광산이 개발된 이후에야 만들어졌으니 그리 연혁이 길지 않다. 하지만 공산당과의 전쟁으로 인해 호남성의 기존 수용소들 중 많은 곳이 빨갱이들에 의해 부숴진 바람에 맡은 책임이 본래보다 커졌다. 그 수용소들에서 오래 복역하고 있었던 죄수도 담당하게 되었단 거다.
그리고 그 죄수 중에는 너희 같은 별 볼 일 없는 전쟁 포로도 있지만 특수한 죄인들도 있지. 넌 그중에서 한 노인네를 좀 돌봐야겠다. 나이가 어려 큰 경계를 사지도 않을 테다.”
소장은 음흉한 노인네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대로 된 나이는 몰랐지만, 거의 백 살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나게 늙었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도 노인은 아직도 정정했다. 사특한 술법을 익힌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여전히 늙긴 늙었기에 수발을 들 사람이 필요했다. 소장은 간수 대신 이 아이를 직접 넣어보기로 했다.
“상부에서는 그 인간이 허무하게 죽기를 원하진 않아. 또 그 노인네에게서 바라는 중요한 정보가 하나 있는 모양이야.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친분을 형성하도록 해봐.”
“누구인데 그렇습니까?”
소장은 잠시 망설이더니, 주머니를 열어 대마궐련을 하나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비밀이지만, 네가 이제부터 이 일을 해야 하니 말해주겠다.”
그는 노곤해진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 인간은 예전 군벌의 우두머리였다. 본래 정부에 적대한 군벌은 총살이 옳으나, 저 노인네는 항복을 하는 대가로 본인과 일가의 목숨만은 붙여주었지. 하는 행동은 도적 수괴와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선지자격인 놈들이었으니까.”
신사혁명이 일어나기 전, 명나라 시절에도 먼저 일어난 봉기들이 있었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봉기는 단연코 태평천국일 터. 태평천국의 위세는 천하를 진동케 했으며 무너져가는 명에게 비수를 꽂았다.
끝마무리는 열강들에 의해 진압되며 꺼졌지만, 이 운동이 중원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중화민국의 아버지인 류용도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열망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아냈었던 것이다. 신사혁명은 필연적이며,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을 얻기도 했다.
소장은 죄수의 이름을 읊었다.
아주 예전에는 그 악명이 자자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면, 지금은 거의 잊혀져 듣는 자도, 말하는 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자의 이름은 진사당이라 한다.”
진균의 제안은 채택되었다.
노역소장은 복역자들 중 국민당에 협력하려는 의사가 충만한 자들을 골라 다른 대우를 해주었다. 이들은 대가로 소장과 간수들에게 협력했다. 곧 포로들끼리 분열이 생겨났고, 덕분에 노역소는 곧 잠잠해졌다.
또한 소장은 진균을 중용했다.
그는 진균의 말에 따라 가건물과 동선, 시설들의 구조를 조금씩 개선해 나가니, 일 년이 지난 후에는 노역소의 형태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진균은 힘들고 위험한 광산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많은 자유를 누렸다.
물론 대가도 있었다. 그는 노인네의 수발을 들어야 했다. 친밀감을 얻어 정보를 빼내야 하는 임무도 생겼다.
동왕 진사당은 태평천국의 수괴 관수경의 핵심 측근이었다.
관수경의 측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강한 네 명을 사왕이라 불렀는데, 진사당은 그중 가장 젊은 자였다. 가장 높은 연배였던 북왕 오흠광의 나이와 비교하면 절반 정도였다.
하지만 진사당은 관수경의 무리 중 가장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온갖 계책과 음모로 태평천국의 기세를 크게 드높였다. 그가 없었다면 태평천국은 금방 시들어 꺼질 불이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제대로 역사를 배우지 못한 진균은 이 노인네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로, 늙은이의 수발을 들러 갔다.
노인은 수용소 내, 특별하게 설계된 독방에 있었다.
본래 독방이라 함은 두 부류가 있었다. 체벌의 목적으로 만든 독방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미쳐버리게 할 정도로 무미건조하고 어둑어둑한 곳에 지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노인이 감금된 곳은 특별한 독방이었다. 그래도 항복한 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대접을 하는지 굉장히 넓었다.
푹신한 침상도 있었으며, 식탁 겸 책상으로 쓸 법한 의자도 있었으며 심지어 책장에는 장서도 몇 권 배치되어 있었다.
책을 읽고 있던 노인은 흘깃 소년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후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진균은 눈치를 보며 미리 명령받은 대로 방을 쓸고 닦았다.
노인과 소년의 기묘한 동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 *
몇 달이 지났다.
노인은 여전히 언짢았다.
살아온 세월과 배운 것들이 얼마나 있는데, 그가 이 소년을 일부러 들여보낸 소장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이제서야? 너무 늦었군.’
이미 진사당은 의욕도 뭣도 없었다.
자신이 만약 태평천국의 유산을 걸고 거래할 의지가 있었다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관수경의 의지. 그리고 동지들의 의지.
노인은 태평천국이 가진 신념을 잃고 있지 않았다. 아흔이 넘는 나이가 될 때까지도 여전히.
물론 기존 그의 사상은 옛날과는 많이 바뀌었다.
태평천국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와 오흠광이 지방에 군벌로 할거할 때까지만 해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난 신사혁명과 공산봉기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당으로서도 눈을 크게 뜰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이념은 격변했고 수정되었다. 그는 더 이상 관수경이 말한 상제교적 교리에 마냥 집착하지 않았다.
예전에야 그러한 종교의 힘과 권위를 빌리지 않았다면 무지렁이들이 태평천국 운동에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이제 무언가를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하자 종교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이젠 이념이 전부였다.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내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사당은 회한이 섞인 눈으로 문득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같이 있는 시간이 충분히 길어졌기에 이름과 고향, 왜 끌려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놈들의 생각이 그렇게까지 깊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실로 자신의 정곡을 찌른 셈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어림없었다. 자신은 동지들의 마지막 유산을 이런 알량한 수작질에 잃지 않을 것이었다. 그 기연은 정말 적합한 후인에게…….
“어르신, 송구하지만 저도 책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청소를 끝마친 소년이 어느덧 사당이 앉아 있는 탁상에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리 한 적이 없었는데 왜 오늘 그렇게 행동하는지 몰랐다.
소년의 시선은 책이 꽂혀 있는 책장에 있었다.
사당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균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그곳에 다가갔다.
“무엇을 찾고자 하느냐?”
책의 제목을 물어보는 질문일 터였다.
하지만 노인이야 그 책들을 수십 차례 봐 와 내용까지 전부 다 외웠다지만 소년은 아직 제목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러니 진균에게는 그 물음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현실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합니다.”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슨 현실?”
“같은 한족이 왜 이렇게 싸워야 하는 현실 말입니다. 대체 왜 중원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진사당은 문득 책을 내려놓았다.
그에게는 그 질문이 대수로운 질문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탐구하던 질문이었다. 자신에게는 스승이 없었지만, 기나긴 세월 끝에 명민한 머리로 그는 해답을 찾았다.
그러니 진사당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드려왔던 회한과 체념이 사라지고 대신 묘한 기대감이 서렸다.
진사당이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이 꼬마 아이의 말이 진실되었는지 아닌지 정도를 구분 못 하겠는가.
사람은 두 종류가 있었다.
현실에 순응하는 자와 현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탐구하고 그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
후자의 사람은 그 수가 적었다. 그렇기에 이들을 영웅호걸이라 불렀다.
진사당은 천천히 그를 살폈다. 저 소년이 영웅인가?
‘상관이 없는데 뭘 어쩌겠느냐, 진가야. 네놈은 이제 별다른 방도가 없다. 잊혀지거나, 혹은 한 번 더 시도하는 수밖에는.’
설령 이것이 저놈들의 개수작이라 한들, 어쩌면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모든 사람은 후인을 남기고 싶어 했다.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이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받은 후인은 어쩌면 그보다도 더 중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한 책은 여기 없다.”
노인의 대답에 소년은 눈에 띄게 실망했다.
하지만 사당은 그 모습을 보고 오히려 끌끌거리며 웃었다.
그는 수염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이미 흰 눈이 잔뜩 내린 자신의 머리를 톡 톡 두드렸다.
“하지만 여기에는 있지.”
* * *
태평천국의 수괴 중 가장 똑똑하며 많은 학문을 배운 진사당의 학식은 현 중원의 유명한 식자들과 비교해서 그렇게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수감된 이후 꽤 긴 세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고 학문을 정리했기에 몇 가지 분야에선 훨씬 더 냉철하고 현실적인 관점을 견지하기도 했다.
진균은 그 모습에 탄복했다.
소년은 스승을 원했다.
그가 가진 야심은 꽤 컸다. 많은 사람들을 아래에 두고 싶었다. 지식은 아직 일천하였지만, 그도 주원장의 일화를 알고 있었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지 않았다. 특히나 이제 명이라는 봉건황조가 사라진 지금에는 더더욱.
자신도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기 위해선 일단은 무엇이든 알아야 했다. 능력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세상은 아는 자를 좋아했고 멍청한 자를 싫어했다.
진균이 바라본 바로는 진사당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소장의 명령이 자신으로서는 둘도 없는 기연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균은 마음을 먹었다.
그는 노인과 어느 정도의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되는 어느 날, 그가 가진 자율권과 특혜를 이용하여 몸을 제대로 씻고 의관을 정갈히 하여 진사당의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는 엎드려 정식으로 배움을 청했다.
진사당은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마침내 승낙했다.
“네가 누구의 명을 받고 내 방에 왔는지 난 상관하지 않겠다. 허나 나에게서 배운 것은 네가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거나 정말로 좋은 기회가 오기 전까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날 위해서가 아니야. 이 늙어빠진 몸뚱이가 몇 년을 더 산다고 그러겠느냐. 이건 내 뜻을 이어받을 너와 중원을 위한 일이다.”
“그렇다면 제 청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스승님.”
사당과 진균은 그렇게 사제지간의 맹세를 했다.
하지만 진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진사당의 학문은 난세를 살아갔던 사람치고도 훨씬 음험하고 뒤틀려 있었다.
본신의 성정이 어떠하였던 간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계도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진사당이 정립한 학문은 바른 성정을 지닌 이도 그 눈에 원망과 증오를 깃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진균에게는 더더욱.
진사당이 추구하는 바는 사도(邪道)였고, 패도(悖道)였다. 태평천국의 원 방향이 그러했듯.
사당도 그간 소년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소년은 풍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옛 주군, 관수경을 닮기도 했고, 자신을 닮기도 했다.
사심을 대의로 포장하고, 패도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많은 이들이 구름처럼 따를지도 몰랐다.
진사당이 생각하기엔, 다른 삼왕이 가졌던 군재와 용력은 이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와 주군이 가졌던 능력은 앞으로 훨씬 더 중요할 것이었다.
이제는 대중을 다루는 이가, 모든 것을 움켜쥘 것이다.
자신은 류용도, 기윤도, 그 어떠한 이도 감히 비할 수 없는 후인을 만들어낼 것이었다.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내 가르침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역사를 배워야 한다. 너는 이 중원의 역사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그렇게 강의는 시작되었다. 소년은 조금씩 조금씩 진사당의 말에 빠져들었다.
“시황제 영정 이후 위대한 통일 중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진과 한을 지나 진, 수와 당, 송과 명을 지나 지금이 되었다. 너는 껍질만 남은 명의 마지막에 태어난 사람이라 옛 중화가 어떠했는지 잘 모를 것이다.”
물론 진사당도 그러했다. 태평천국도 엄연히 명말에 일어난 운동이었다.
“한의 시절, 중원은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한(漢)족이라 부른다. 어떠한 나라도 비할 바가 아니었지. 저 서방의 대진국(大秦國, 로마)도 견줄 수 없었다. 세상의 중심은 장안이었으며, 중원의 옆에 있는 모든 나라도 꿇어 엎드렸다. 하물며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예맥한족의 고씨 고려마저도 그러했다. 당의 시절에는 마침내 중원이 저 고씨 고려를 무너뜨리기도 했지.”
진균은 놀라며 물었다.
“정말로…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까?”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진사당은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뇌까렸다. 중원이 정말로 글자 그대로 세상의 가운데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허나 송에 들어서면, 그 위세는 조금씩 나약해졌다. 유목민들이 세운 요와 금이 발흥했으며, 그 후에는 지금 모든 일의 원흉인 원이 들어섰다. 한족의 위세는 땅에 처박혔고, 유목민들이 세상을 다스렸다. 우리는 그때에도 노예가 되었다.”
진균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진사당이 말한 것 중에는 사실인 것도, 아닌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진사당은 굳이 진균에게 수와 당이 본래는 선비족에서 기원한 왕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그리고 진사당이 생각하기엔, 한화된 유목민은 충분히 한족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명이 일어났지. 지금은 섬으로 쫓겨난 주와의 천명대전 이후 중원 패권을 쥔 명은 원을 무너뜨렸다.”
“스승께서는 명을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도다.”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한평생 명 조정과 싸워온 자의 말로선 참 의외였다.
“모든 나라는 흥할 때의 아름다움과 질 때의 추함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법이지. 나는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명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잔재 속에서 새로운 꽃이 피길 원할 뿐이었다.”
반면 진사당이 원망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나의 분노는 오직 한 곳을 향한다. 그렇기에 너의 분노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유목민들. 이민족들…!”
진사당이 일어났다. 아흔 살의 노인은 새파란 귀광이 눈동자에 서려 있었다. 귀신이라도, 악령이라도 쓰인 듯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모든 한족의 적은 그들이었다! 우리는 몇 번이고, 실로 몇 번이고 강해질 수 있었다. 세계의 중심을 계속 유지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유목민들이 발흥하여 밑으로 내려와 정주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을 반복했다. 우리는 증기기관을 만들어 산업혁명을 선도할 수도, 또한 큰 배를 만들어 저 멀리 북려대륙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정녕 모든 천하와 모든 바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단 말이다!”
진균은 몸을 떨었다. 다 죽어가는 노인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말의 단어 하나하나가 피부를 날카롭게 찔러왔다.
“저 고려도 처음에는 고작 패잔병에 불과했다. 몽골이 바다로 쫓아낸 것들이지. 저들은 위대한 여정이라고 불리는 시기 동안 바다를 흘러 흘러 나아가 마침내 남려에 뿌리를 내렸다. 초창기에는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정도가 전부였지. 제아무리 려태조 해민이 고금제일의 군주라 하나 고려는 그 후에도 언제든지 몰락할 수 있었다. 창업은 쉬우나 수성은 그보다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유목민이 없었기에 그곳에서 그대로 성장했으며 그리하여 거대한 문명을 만들었다. 그래 그 차이다. 그 차이일 뿐이야. 다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가 흔들릴 때마다 상제의 이상한 보살핌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그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진사당은 진균을 보고 말했다.
“넌 다른 차이가 있다 생각하느냐?”
“…모르겠습니다.”
“저들도 찌르면 피가 나는 놈들이다. 같은 붉은 색의 피가 흐르는 놈들이지. 우리의 차이는 미미하다. 비슷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고, 비슷한 역사를 공유했으며, 비슷한 혈통을 공유했다. 중원인과 예맥한인은 비록 혈통적으로 구분되어진다만, 서로 이주한 경우와 통혼한 경우가 몹시 많다. 그러니 둘을 구분하는 것은 오로지 의식과 신념이로다.”
― 털썩
노인이 지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쉬고 싶다는 노인의 기색을 읽은 진균이 급히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방금 전의 이야기는 더 깊게 듣고 싶었다.
“한족의 적, 유목민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주십시오.”
진균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역사의 적은 유목민이며, 우리 사회의 적은 이족들이다. 유목민은 우리의 황금기를 매번 빼앗았고, 이족들은 우리가 불행할 때 우리를 등쳐먹었다. 양이들과 동이들은 우리가 무너진 뒤에 다가왔다. 명이 제대로 섰다면 그들이 감히 고개를 들 수 있었겠느냐?
또한 그 전의 황조들이 황금기를 열었다면, 오히려 우리가 고려처럼 구라파에 대포와 전열함을 끌고 가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우리의 앞에서 배를 가르고 우리의 뒤에서 등을 찌른 유목민과 이민족들에게 현실에 대한 증오와 원망을 마땅히 돌리고, 마침내 그들을 중화의 세상에서 격리하여 구분한다면 한족의 정기는 바로 설 것이다. 그리한다면 우리 한족은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리라.”
진사당의 말에 진균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소년은 이 누추한 골방에서 세상의 진리를 얻었다.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외부에 있었다.
농도 짙은 증오의 원망이 진균의 눈동자에 서렸다.
진사당은 그 순간 갑자기 이 소년이 정말 자신의 아들처럼 느껴졌다. 피를 이은 아들은 젊을 적에 죽었고 딸만 있었던 그는 직계가 끊어져 있었다.
하지만 어떠하랴, 그는 자신이 증오로써 낳은 아들을 어루만졌다.
“너는 중원을 구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