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국공내전
류용의 죽음으로 중원은 큰 충격과 비탄, 공포에 빠졌다.
정치적으로는 분열을 수습하고 중화민국을 개창한 지도자, 학문적으로는 중국인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던 위대한 스승의 사망은 나라의 어버이를 잃은 것과 같았다.
― 중원의 스승이 떠나셨다.
유가의 상례엔 헌화(獻花)의 개념이 없었다. 그러니 아마 외지에서 들어온 문화일 것이다.
그럼에도 류용이 스러진 암살 현장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쌓였다. 경관들도 침통한 표정으로 그 길거리를 지켰다.
걸어 다니는 모두가 어두운 표정이었다. 울음소리도 드문드문 들렸다.
침통한 분위기 속 치러졌던 장례 이후, 국민당은 류용의 시신을 명나라 황실의 성산으로 여겨졌던 자금산에서도 가장 좋은 터를 골라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여담으로 그 근처에는 주동휘의 능이 있었는데, 국민당은 류용의 무덤을 위해 주동휘 무덤의 시설 일부를 허물었을 정도였다. 이미 중원에선 더 이상 명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류용의 무덤은 생전의 호를 따 석암릉이라 불렸다.
많은 이들이 대총통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기꺼이 경사에 왔다.
국민당원들뿐만 아니라, 사방의 이름 날리는 사람은 전부 왔다. 심지어 대총통과 대적했다 타협을 시도한 군벌들, 공산당원들도 와서 참배를 했을 정도였다.
흉수 기윤은 암살을 철저히 숨겼다.
암살자를 직접 추천한 개방의 단두도 죽였고, 암살자도 자결했으니 아는 사람은 기윤과 그 측근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없었다. 아무도 지금의 일이 공산당원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뜻은 다소 다르더라도 위대한 혁명가인 류용을 존경하는 일부 공산당원들도 류용의 능에 참배하길 스스로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밀에 부쳤다고 의심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증은 없으나 심증은 충분했다.
국민당원과 공산당원들은 능의 근처에서 서로 험악한 눈빛을 교환했고 언쟁도 벌였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마침내 그들끼리 주먹이 오고 간 것이었다. 국민당을 따르는 사람들은 집단으로 공산당원들을 폭행했다. 공산당원도 반항했다. 나중에는 군중이 서로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패싸움을 벌였을 정도였다.
이 싸움은 결국 인명사고가 되었다. 무려 백여 명이 죽었고 다친 사람은 그보다 많았다. 싸우지 않으려던 사람도 휩쓸려 억울하게 죽었다.
제아무리 이 시대 지나인의 목숨이 헐값이라 하나, 그들이 이 사태에 분개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소식을 들은 국민당 당수이자 부총통, 황전겸은 분노한 채 책상을 내리쳤다.
“이 음흉하고 비열한 새끼들…! 뻔뻔하게 대총통께 그러한 짓을 저지르고는 그 머리를 꼿꼿하게 들고 경사에 와 참배를 해? 그것도 모자라 주먹다짐을 해서 사람을 죽여?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내 당장…!”
“부총통, 부총통! 먼저 폭행을 가한 쪽은 국민당원이었다 합니다. 진정하시지요.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릅니다!”
“전쟁? 전쟁이 두렵소이까, 내무총장?”
“전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준비된 상태가 아님에도 전쟁을 하는 것이 두려운 법입니다.”
“크으으….”
황전겸은 분노 섞인 침음성을 내뱉었다.
류용의 암살 직후, 충격에 빠진 국민당은 긴급회의를 통해 부총통 황전겸을 중심으로 증린서, 장광형 등의 총장(總長, 상서, 장관에 대응)급 고위 관료들이 보좌하는 체제로 이 위태로운 국정을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류용의 이름은 너무 컸다. 황전겸은 그를 대신할 수 없었다.
당연히 류용이 정쟁에 예민해 주기적으로 2인자를 탄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현시점 중원에는 류용의 이름값에 도달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중원에 있다면 오직 하나, 기윤뿐이다.
그러니 멍청하지 않고서야 지금 이 사태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놈들이 각하를 암살했소. 배후는 그놈들일 수밖에!”
“…그렇겠지요.”
암살자는 곧바로 자결해 죽었고, 조정은 그의 시신이나 유품 속에서 어떠한 단서를 발견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비밀을 완벽하게 숨길 순 없었다. 다른 증거는 있었다. 부검을 담당한 의원은 흉수의 신체적 특징을 통해 그를 거지라 특정했다. 흉수가 묵던 객잔의 주인 또한 흉수의 억양이 화북 색깔이 조금 났었다고 증언을 했다.
몇 가지를 종합해보면, 당연히 껄끄러운 결론이 도출되었다.
“증 총장. 전쟁은 일어날 거요. 내가 일으키지 않아도, 저 쓰레기 같은 기효람과 그 무리들이 언제라도 일으킬 수 있소. 그대도 소비에트의 일을 보고 들어서 알지 않소? 그러니 당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오.”
증린서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부총통.”
* * *
통합을 그토록 부르짖던 류용의 유지와는 반대로, 두 세력은 이제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나아갔다.
대립이 심해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화민국이라는 하나의 껍데기 안에 있었다. 오월동주였고, 동상이몽이었다.
껍데기는 류용이라는 인물 덕에 겨우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류용이 죽자, 껍데기는 놀랄 만한 속도로 깨져나갔다.
기윤은 류용을 끝내 살해했지만, 자신의 소행임이 알려지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공산당원 중 일부도 실망할 수 있었다.
혁명의 시대에 도덕적인 대의명분은 실로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 기윤은 오히려 과감하고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제일 먼저 기윤은 공산당원 중 일부(주로 류용을 존경하는)를 경사에 참배하러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들이 가지 않겠다 했으면 도리어 기윤이 보냈을 것이다. 조금의 계략을 발휘하면 공산당 내 계파에서 류용과 국민당에 동정적인 자들을 손대지 않고 코 풀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기윤은 심어놓은 사람을 통해 싸움을 부추겼다. 군중들은 석암릉 앞에서 무리 지어 패싸움을 벌였다. 일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커져 버려 사람이 죽고 다쳤다.
싸움에 휩쓸려 죽은 인물 중에는 기윤과는 살짝 다른 길을 걸어가려 하던 공산당 고위 관료도 두 명 껴 있었다.
그리고 기윤은 이 사태에 대한 책임과 정중한 사과를 국민당으로부터 받길 원했다.
싸늘한 모습으로 돌아온 고위 관료들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린 기윤은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씌우려 드는 이 억울한 누명을 완전히 철회하지 않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천명했다.
“류용은 존경받는 중화의 스승이요, 선생이었소. 비록 서로 가진 뜻이 다르다 하나, 나와 석암은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등을 맞대 저 탐욕스럽고 잔학한 군벌들과 싸웠소이다.
허나 보시오. 지금 국민당의 당수이자 중화민국의 부총통의 자리에 있는 황가는, 일신의 능력과는 대조적으로 탐욕스럽고 사특한 부르주아지요. 그대들도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충분히 알고 있지 않소?
그러한 명망을 지닌 자가 마침내 그 욕심의 과하여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르고, 애도를 위해 참배하러 간 동지들에게 화를 입히고 또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려 하니 이 어찌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겠소이까?”
중국공산당의 이런 선전은 나름대로 효과적이었다.
황전겸은 능력이 출중했지만 청렴하진 않았다.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본 류용은 전겸을 중용하긴 내심 꺼려했었지만, 반대로 그가 중화민국 자본가 계급의 대표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중화민국의 형성에 있어 그런 자본가 계급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지나는 산업화가 덜 된 나라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소수의 자본가들이 굉장히 중요했다.
류용은 어쩔 수 없이 전겸을 부총통의 자리에 올렸다. 현 중화민국에서 부총통은 대총통이 살아만 있다면 그렇게 권한이 많지 않았다. 어쩌면 실권은 총장들에게도 밀릴지 몰랐다.
하지만 사태가 이리되니, 부총통은 대총통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명분을 가진 자였다. 황전겸이 이런 상황을 놓칠 만큼 바보 머저리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자연스럽게 대총통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전겸은 당연히 공산당에게 사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국민당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그는 공산당이 제시한 그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지의 틀 안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류용의 암살범이라는 말도 안 되는 누명도 씌워질지 모른다. 그는 이미 호랑이의 등에 오른 상태였다.
황전겸은 사과 대신 기존에 광동과 광서를 기반으로 삼았던 남양통상대신 손승택을 토벌한 뒤 그곳의 치안을 다스리던 국민군을 불러올렸다. 또한 국민당이 장악한 영토를 기반으로 징집령을 내리기도 했다. 누가 봐도 전쟁을 준비하는 태도였다.
마침내 개천 497년(CE 1772) 임진년, 기윤은 이 위태로운 시기에 중원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며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북로군 출신의 병사들이 그의 뜻에 호응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칭했다. 수도는 연경에 두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전 중원의 적화.
공산당은 파렴치한 반동, 국민당을 공식적으로 적으로 규정했다. 소비에트가 지지를 보냈다. 전 세계의 혁명가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두 번째 혁명도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국의 공산군은 소련과 비슷하게 붉은 군대, 즉 홍군이라 불렸다.
국민당은 크게 격노하여 대응했다. 누가 봐도 현 상황은 국민당에게 더 유리했다. 그들은 훨씬 더 많은 땅을, 더 비옥하고 부유한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면, 공산군은 마땅히 패배할 것이었다.
중국의 국민군은 청천백일기의 색에 따와 청군이라 불렸다.
바야흐로 국공내전, 혹은 청홍대전이라 불리는 내전이 발발했다.
* * *
임진년에 시작된 국공내전은 몇 년 동안 격렬하게 이어졌다.
남과 북으로 나뉜 전장의 형세는 마치 명과 북원, 그리고 남송과 몽골의 싸움을 연상케 했다.
다만 이번엔 몽골족과 한족의 싸움이 아닌 한족과 한족의 싸움이라는 점이 달랐다. 서로 피를 나눈 자들이 싸웠다. 중원의 방언은 심하게 다르다지만, 말이 통하는 자들은 여전히 많았다.
전세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남로군 출신의 청군에 훨씬 유리했다. 계미년 북벌 이후 군벌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그들은 굉장히 많은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홍군의 전신 임정 북로군도 군대였긴 하지만 전투 경험보다는 후방의 사보타주에 주력했으니 그 궤가 약간 달랐다.
공산당도 넋 놓고 밀리진 않았다. 그들은 중원 각지의 공산당 세력에 후방교란작전을 지시했다. 이곳저곳에 알게 모르게 파고들어 있던 이들은 청군의 행동을 최대한 묶었다. 청군은 군수공장에 대한 공격을 방어해야 했고, 그 노동자들의 파업을 막아야 했다. 심지어 빨갱이 길잡이 때문에 산과 들, 마을, 대도시에서 매복한 홍군들에게 뒤통수를 맞으며 패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태는 끊임없이 공산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본래 지나의 이웃이란 대개 중원의 혼란을 흥미롭게 여기며 강냉이를 먹는 것을 관례로 여겼다. 이들은 명이 무너지고 군벌이 들어서며 중화민국이 태어날 때도 별 반응이 없었다. 무엇이 더욱 이득인지 주판알을 튕기긴 했지.
하지만 이 이웃 국가들은 공산당이라는 말에 어마 뜨거라 하며 그제서야 부랴부랴 중화민국에게 인도적 지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특히 봉명관을 두고 지나의 세력과 맞닿아 있는 조선과 옥저는 공산당의 봉기에 상당히 놀랐다. 공산주의자들과 왕정은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들이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를 한다지만 공산주의자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몰락과 소비에트 연방의 설립을 본 이상, 비슷한 정치 세력이 하북에 생긴다면 그들은 밤잠을 설칠 것이 당연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호흡기로 번져나가는 질환만큼이나 대단히 감염력이 높았다.
조선의 수상 채제공이 경사에 와 직접 황전겸과 대면했고, 국민당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다. 백제도, 옥저도 제각기 지원 의사를 밝혔다. 무기를 팔지는 않았지만 피복류나 식량 같은 품목을 지원했다.
장담컨대, 지나가 이렇게 주변국들에게 지원을 받은 것은 아마 역사상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러 국가의 인도적 지원으로 약간의 시간을 번 청군은 공산당 근거지인 연경까지 급히 휘몰아치려던 기존의 전략을 수정했다. 그들은 먼저 차근차근 주변 상황을 정리하며 사보타주를 일삼는 빨갱이 무리에 대한 초공(剿共)작전을 실시했다. 효과는 좋았다.
그렇게 후방을 안정시킨 청군은 개천 499년(CE 1774) 2차 북벌이라고 명명된 작전에서 연이은 우세를 점했다.
2차 북벌 도중 정식으로 2대 중화민국 대총통의 자리에 오른 황전겸은 국민당을 이끌 재목이 맞다는 찬사를 들었으며 중원의 구세주로 떠올랐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