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고백
아이샤, 당신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못했겠지.
잔, 그대에게도.
머릿속을 정리하던 상민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넌 내가 누구라 생각하느냐.”
“태조 해민이시죠.”
“그 정체 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런 것 말이다.”
“보잘것없었던 땅에서 문명과 율법을 만드신 자. 그리하여 제국을 여셨고 세계에서 선지자이자 현신인으로 숭배받으시지요. 비록 원하시지는 않으시지만.”
“그럼 구체적으로 구약에 날 비교해 보거라. 나와 비슷한 사람이 누가 있었더냐.”
안토니아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모세.”
물론 상민은 누구와 비교할 급이 아니었고, 상민 자체의 의미를 가진 사람이다.
지금 세계에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외진 곳처럼 아브라함계 종교가 퍼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도 카이사르나 알렉산더, 모세는 몰라도 고려 태조 해민은 알았다.
안토니아는 그녀가 예전에 가톨릭을 믿고 있었더라도, 그를 모세에 비한다는 것은 조금 실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현 제국교의 입장과 아주 비슷했다.
멀쩡히 살아있으며, 그보다 더한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었으니까. 육신은 헤라클레스 등의 그리스 대영웅에 비하며, 행적은 서사시에 적힌 군주들이 부끄러워 스스로 고개를 돌릴 수준이다.
거대한 바다를 수차례 헤쳐나간 삼별초들은 그의 통솔에 따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명을 신대륙에 탄생시켰다.
그뿐일까. 그 후에도 아련과 이라크 같은 몇 개의 국가가 그의 손에 개화했었다.
모세에 비하는 그녀의 답변을 받아들인 상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안토니아는 설령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더라도, 다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상민이 물었다.
“왜, 네 옆에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느냐?”
“아니요. 전혀.”
안토니아는 그간의 그의 행적을 보고 들어왔기에 빠르게 납득했다.
바다를 떠다니는 이 함선에서 그녀는 비단 뱃멀미에만 적응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상식은 이미 수없이 깨졌으며 지금도 깨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평소에 입에 달고 다니는 말과는 조금 다르잖아요.”
신격화를 싫어하며 하지 말라고 하는 그의 주장과, 지금 그의 인정은 어딘가 굉장히 모순된 점이 있었다. 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조금 이따 설명해주마.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상민은 침대에서 몸만 일으키면 보이는 곳에 위치한 지도를 쳐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시선이 특정한 나라에 닿아있진 않았다.
“안토니아, 난 미래를 볼 수 있다.”
안토니아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확장된 동공에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보면 이 여자가 충분히 경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순 있었다.
상민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모든 것을 보진 못해. 네 어머니와 너에 대한 것은 내 예상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전생에서의 경험으로 나중에 스마트폰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자신의 행동이 동시대에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킬지 예지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것을 다 알지도 못했다. 시시콜콜한 것을 다 본다면 자신은 진작 미쳐버렸을 것이다.
아마 자신이 신경을 쓰고 있는 일일수록, 그런 미래가 얼핏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최근 자각했을 뿐, 예전에도 그랬던 경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먼 과거 자신이 양위를 다짐하게 된 순간도 그랬다.
그의 추종자들이 들었다면 드디어 자각하신 것이라면서 기쁨의 눈물을 쏟으며 그의 앞에서 넙죽 절할 말일 터였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때 황금으로 된 옥좌를 보았다. 영원히 그를 위해 존재할 것이 분명한.
상민은 안토니아가 내려놓은 만년필을 흘깃 쳐다보았다. 안토니아는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채로 그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나탈리야 차리차가 죽는 것을 이미 보았다. 그러니 그녀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어… 어떻게요?”
안토니아는 기적을 행할 수 있단 말을 들은 것마냥 화들짝 놀랐다. 이 시대 폐렴은 불치의 병이었고 걸린다면 빠르든 늦든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상민이 가진 유리병 하나면 차리차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폐렴은 불치병이 아니야. 약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고려는 대전쟁 이후 국책사업으로 의료산업을 지정했다.
세상에서 제일 진보한 병원과 의무대 편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제국 또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부상병들을 각종 질병에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했다.
다만 이런 환경과 경험이 쌓여 의학과 약학계에 큰 개선을 이루어냈다.
붕대와 감염 소독, 지혈과 기타 여러 가지 처치술의 발전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물론 가장 중요한 항생제 개발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고려는 의약품 개발을 위한 여러 가지 진보가 진작부터 많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기계공학적 측면에서도 도구의 발달이 있었다.
광학 현미경은 예전부터 보편화되었으며 의학용 냉장고와 같은 시설도 연구소에선 충분히 구비할 수 있었다.
생물학적 이론도 이미 충분했다.
세균과 반생물에 대한 개념은 심지어 태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이후엔 담배에 퍼지는 역병을 통해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에 있는 반생물의 존재가 완벽하게 증명되었기도 했다.
약학은 이런 과학의 기틀에서 진보했다.
하지만 이런 영감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발견은 순전히 과학자들의 노력과 운에 기대야 했다.
설파제는 이름만 들어봤고, 페니실린은 정말로 푸른색인지 궁금한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한다고만 알았다. 그 푸른곰팡이가 대체 그 수많은 곰팡이 중 어떤 곰팡이를 의미하는지는 과학자들의 몫이었다.
어쨌든, 힘들었을 뿐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기에 각고의 노력 끝에 개천 490년에 들어서 한승태와 유민창 등에 의해 최초의 항생제가 개발되었다.
둘은 모두 기술선도국 소속이었지만, 공로를 인정받아 한유약품을 창업하며 상민의 손아귀에서 반쯤은 빠져나갔다. 당연히 회사의 지분과 특허, 비밀서약 등에 의해 여전히 절반은 상민에게 묶여 있었다.
성장 가능성은 독보적으로 높았다.
제약회사라는 것이 거의 없는 이 시절에, 항생제를 가진 회사의 잠재가치란 억만금에 달할 것이다. 경쟁자야 필연적으로 등장하겠지만 한유약품이 선도자로서 기술 개발만 꾸준히 한다면 나중에도 존슨앤존슨과 화이자, 노바티스, 로슈 등의 거대 제약회사를 능가하는 초거대 제약회사로 군림할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광명회가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소리도 들렸다.
물론 제대로 항생제가 만들어진 490년은 이미 나탈리야 차리차가 죽고 난 이후의 시점이었다. 임상실험이 모두 끝나 대중에 발표된 시점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고.
그래도 상민은 여러 경우를 대비하여 여의국에 시범적 항생제를 미리 보관하고 있었다.
초창기 항생제가 보관하기 실로 힘들었고 심지어 약효와 부작용에 대한 검증이 덜 되었더라도, 때로는 그런 약도 필요한 절박한 상황이 생겨날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녀를 어떻게 살려볼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류용도 마찬가지였다.”
상민은 그와 직접 대면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의 인품에 탄복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상민은 류용의 암살 시도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상민이 정말 류용의 암살을 막으려 작정했다면, 그는 류용의 동선을 꼬거나 혹은 직접 방어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아무런 행동 없이 단순히 작별의 선물만 주었다.
듣기로는 그 발화갑이 첫 총탄을 막아냈다 들었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물건에 담긴 것일까.
지나가 류용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로 인해 보다 나은 국가로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상민 자신이 ‘본’ 광경처럼 당장 멀쩡해진 지나가 오히려 미래에 더더욱 좋지 않은 쪽으로 암세포가 번져 흑화될 수 있다는 생각.
그 둘이 머릿속에서 계속 충돌했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 그렇지?”
안토니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뿐만 아니었다. 이 여의국에 사는 아이들도 전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정보만 수집하고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답답했겠지. 이 아이들은 나를 너무나 신뢰하여 제기하지 않았을 뿐. 분명히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안토니아는 창백하게 굳은 채로 물었다.
“대체 어떤 미래를 보셨길래…….”
* * *
그는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엿보았지만, 그곳엔 오로지 폐허뿐이었다.
철근강회로 지은 거대한 도시들은 옛 위명을 모두 잃고 그저 휑했다.
버려진 자동차들과 이름 모를 붉은 잡초들이 도시에 자라고 있었다. 청해, 영서, 동래미, 미원, 태로 전부.
사람들은 방사능 오염 때문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온갖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던 제국의 수도도 기능을 정지했다.
정부는 쿠스코에 위치한 황제의 여름 별장 겸 방공호로 도피했다.
고려의 황제는 쌍용지손이지만, 서열에서 한참 밖에 있던 사람이었다. 당시 창천궁에 사는 종통은 전부 증발했다. 아름다운 궁전도 뼈대만 남은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정부는 존속했다. 그들은 천천히 문명을 수습했다. 재건된 신고려는 다시금 이 땅에 있는 신민들을 위해 봉사할 것이었다.
하지만 고려가 입은 상흔은 깊었다.
물론 도발한 적은 상흔을 넘어 아예 먼지가 될 정도로 강력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우한과 모스크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의 짙은 방사능 농도를 자랑하는 곳이 되었다. 지하철로 대피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고려는 수십 미터를 파고드는 신기전으로 내부에까지 공격을 퍼부었다. 생존자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도시들도 그러했다. 농촌들도 그랬다. 전 국토는 용의 진노를 받았다.
하지만 제국 또한 신음했다.
정당한 복수를 마친 허무함 이후, 사람들은 왜 전쟁을 벌였느냐며 이제는 정부와 황실에 비난을 퍼부었다.
거대한 제국은 뒤틀리고 갈라졌다. 쪼개지고 분열할 때까지.
제국과 연방이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하는 것은 일정 기간에 불과했다.
상호확증파괴적 무기가 인류에게 보편화될수록, 몇몇 국가들은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그러했다. 중화민국은 류용의 통치 이후에 번성했지만, 끝내 적화의 물결을 막지 못했다.
이들은 국제연합의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치광이 전략’. 국제정치의 전문가들은 이 전략을 그렇게 불렀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이념은 훨씬 더 광신적으로 믿었다. 그들이 믿는 이념의 성전을 위해선 그들은 미치광이처럼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이런 미치광이 전략에는 하나의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핵무기.
GDP나 국력과 상관없이 그저 한 방 적에게 먹여 넣기만 하면 평등해지는 이 걸출한 무기, 이것은 어느 순간부터 너무 쉽게 상용화가 되었다.
고려는 최선을 다해 핵확산 방지조약을 체결하며 사방을 옥죄었지만, 비밀리에 개발하는 것을 완전히 막진 못했다.
그때쯤이면 열강의 선두에 위치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핵기술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는 대륙간탄도신기전에 대한 요격체계와 초정밀 조기경보기 등을 개발하며 일단 안도의 한숨을 흘렸지만, 비대칭전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었다면 그것은 비대칭전력이라고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원자력 잠수함에서 투발되는 핵무기가 있었다. 수십 척 중 한 척이라도 제국의 근해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면, 요격이 불가능한 거리에서 핵을 쏠 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소멸당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전 인류의 존속을 방해했다.
‘평등한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이 무언가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일까.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보다, 남의 삶을 끌어내리는 것이 훨씬 쉽고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인류는 역사의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방사능 반감기를 언제까지 기다릴까.
그동안 인류는 좌절할 것이다.
성공으로 끝난 미치광이 전략은 언제든지 인류 역사에서 다시 등장할 것이었다. 그러니 세계의 평화는 냉소적 관점에서 허황된 말이라고 비판받을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선 비관론이 낙관론을 대체할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이념의 위험성에 대한 교훈을 보다 빨리 얻어야 했다.
너무 늦지 않게.
* * *
“분명히 이전의 대전쟁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구시대 혹은 식민시대와의 전쟁이었지,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드는 이념과 싸우는 전쟁이 아니었단다. 신념을 가진 과격분자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해. 허나 그런 교훈이 없다면 우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상민은 일어섰다.
“그리하여 나는 둘의 죽음을 방관했다.”
“어떻게… 어떻게…….”
너무나 섬뜩하고 비극적인 광경이다. 상민의 묘사는 건조하고 차가웠지만, 안토니아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책을 보는 것마냥 생생하게 묘사가 되었다. 전 세계가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은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모두가 모두를 증오하는 그런 시대. 절대 도래해서는 안 되었다. 인류가 그런 삶을 살아가면 안 되었다.
안토니아는 울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그녀의 눈물샘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상민의 팔과 허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정말로 당신이 본 대로 그렇게 될까요? 다… 당신이 보고 결정을 내렸으니 지금은 괜찮겠죠?”
“모르겠구나.”
상민은 씁쓸한 미소를 띠고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 훌쩍
안토니아가 진정된 것 같자. 상민은 계속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 명이 등장했으니…….”
상민은 어딘가 공허하고 슬픈 눈으로 지도를 통해 지나의 땅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절대악이 탄생할 것이다.”
이야기를 하나 더 해줄까.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조금은 보았다.
특별하지도 않은, 보잘것없는 농촌의 작은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여 어떤 길을 가고 어떤 생각을 가진 채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국민당과 공산당, 군벌이 싸우는 혼란한 시기에 그 응어리 섞인 증오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그리고, 그런 행보가 어디까지 갈 것이며 어떤 교훈으로 돌아올지.
“내일부터 천천히 말해주마… 듣기가 싫으냐?”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건.”
“고맙다.”
상민은 불쑥 말했다.
“오늘 밤은 내 곁에 있어 다오. 자리가 넉넉하여 불편하진 않을 거다.”
“네…….”
그녀와 자신 모두 악몽을 꿀 것 같았다.
그는 잠을 자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육신과 무관하게 정신은 수면을 원했다. 그럼에도 머리를 이렇게 혹사한 날은 항상 악몽을 꾸곤 했다.
상민은 장막 속에서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아 그래. 아까 물었던 것에 대한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데.”
안토니아는 그녀가 뭘 물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상민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내가 왜 내 이런 권능을 인정하면서도 숨기는지 궁금하다는 의미였지? 입에 달고 다니는 말과 다르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더냐?”
“네. 맞아요.”
“그래. 그런 물음이 나올 법도 해.
그런데 말이다, 만약 내가 본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존재에게 그저 농락당하는 것이라면 어떠하겠느냐?”
그는 제국과 인류 문명의 건설자이자 수호자였다. 그런 만큼 그 속삭임과 계시에 홀려 건전한 사태 파악을 할 수 없다면 반대로 문명의 파괴자로 돌변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내가 야훼의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명을 받는 것이라면 어쩌겠느냐. 그 이름이 아니더라도 선한 존재가 아니라 악한 존재의 계시를 받는다면 어쩌겠느냐.
상민은 그런 물음을 덤덤히 해 보았다.
안토니아는 갑자기 창백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러웠다.
“세… 세안과 양치질을 하고 올게요.”
대단한 재주로구나.
어미에 이어 딸까지 겁먹여 달아나게 하다니, 실로 악독한 자의 부름을 받는 것이 틀림없다.
상민은 자조 섞인 얼굴로 그렇게 푸념했다.
혼자 남은 그는 누워서 천창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는 목소리의 의도가 궁금했다.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처럼 잃을 것이 많고, 그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더욱.
하지만 애초부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다면?
상민은 한참을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흐르는 물에 연거푸 세수한 안토니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겁은 났지만 다른 감정이 더 컸다.
“그래요.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내 사명…….”
어떠한 이유로든 자신이 저 존재의 옆에 있어야 했다. 안토니아는 비로소 그녀의 숙명을 자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