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류용
― 쿠르릉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류용은 곧 있을 국민당 전당대회와 기타 연설문을 작성하기 위해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분란과 분열을 책동하는 자들은 전부…….]
“아니야, 이건… 아니야.”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스러운 일이나, 우리 앞에 당면한 과제를 위해…….]
일필휘지로 작성하다 이윽고 그 종이를 구겨 버리는 것을 반복하던 그는 궐련 하나를 입에 물고 발화갑의 불꽃을 당겼다.
초안은 모두 사라졌고, 여전히 한 글자도 써 내려가지 못했다.
― 후우
머릿속은 복잡했다.
1차 북벌 이후 반쯤 평정되었다고 생각하던 중원은 갑자기 섬서군벌 이소청이 일어나며 다시금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 뒤엔 기윤과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이 시작되어 중화민국은 사실상 둘로 쪼개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 사태가 진행된다면 마치 중원의 옛 전통에 따라 삼국이 서로 대치하는 구도가 생기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지금 상황은 과거와는 많이 달랐다.
조위의 기반을 점한 공산당은 손오의 기반을 점한 국민당보다 약했다. 사천과 섬서, 산서를 장악한 이소청은 촉한보다 강했지만 말할 것도 없이 국공세력 모두보다 약했다.
하지만 저들 둘이 손을 합친다면 국민당 또한 고전할 터.
“기효람, 내 당신을 정말 믿었건만. 같은 뜻을 품고 있는 동지라고 생각했건만…….”
― 탁탁
류용은 연거푸 연기를 빨아대다 궐련의 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문득 이런 날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류용은 자신의 손에 놓인 고풍스러운 발화갑을 보았다.
만듦새가 좋은 것을 보면 당연히 려제였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중원인들은 아직 이런 소소한 기구, 발화갑조차 멋들어지게 만들 기술이 없었다.
만들 수야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재물적으로는 딱히 사치스럽지 않은 류용의 성격상, 이런 고급스런 발화갑은 그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스스로 직접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선물이니 버리기는 뭐했던 터라, 지금까지 그는 연료와 심지를 교체해 가면서 잘 쓰고 있었다.
류용은 문득 과거에 이 발화갑을 선물해 준 사람을 떠올렸다. 시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 * *
흑경을 쓴 거구의 청년 사업가가 려식 정장을 입고 그보다 키가 한참 작은 류용과 악수를 했다. 류용의 경호가 다소 무례해 보이는 그의 복식과 행동을 지적하려다, 류용에게 만류당했다.
“반갑습니다. 정 대인.”
“대총통께서 직접 환대해 주시니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사업가는 그렇게 말했다. 류용은 호감이 섞여 있는 그의 어투를 인지하고는 무언가를 더욱 베풀어주고 싶어졌다.
“사진을 찍을까요? 고려 사람들은 매번 이런 광경을 사진에 담더군요.”
의외로 그 거구의 사업가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려인답지 않았다.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류용의 궁극적 목표는 중원의 정상화였다.
이 땅에 제대로 된 국가가 들어서서 인민을 보호하고, 외세와도 합리적으로, 자주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마침내 세계만방에 당당히 등장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외교적 측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대려외교에 큰 관심이 있었다. 직례는 옥저를 제외하면 근처 국가들과 썩 화목한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진 않았는데, 류용은 이런 문제도 결국에는 고려와의 관계 개선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국제연합은 물론이고 환태평양 경제협력기구에도 들어가는 것이 꿈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는 외국인 사업가들, 특히나 고려인 사업가들을 후대했다. 이들이 중원에 공장을 짓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실제로 고려인 사업가들은 외국에 꽤 많이 나가 있었다. 일단 여러모로 많이 챙겨 주어야 하는 탓에 자국 노동자들의 임금이 너무 비쌌으니 노동력의 가격 하나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웬만큼 이득이었다.
고려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산업은 아예 국외로 나갈 수 없게 제약을 걸어놓았고 중공업에 대해서도 외부 유출을 꺼렸으나, 경공업에 관해선 다소 관대했다. 그런 것까지 전부 다 막으면 도리어 고려의 국내 물가와 민생이 위험했다.
하지만 투자를 위해선, 류용은 넘어야 할 산이 정말 많다고 느꼈다.
일단 군벌처럼 앞과 뒤의 말이 매번 바뀌는 무리와는 달리, 정상적인 국가는 이전에 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지 말아야 했다. 이런 신뢰감들은 중원인들에겐 기본적인 소양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문화적 악폐습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했다. 설령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외국에서 중원을 바라보는 관점은 현실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
외국은 중원을 아직까지도 명나라 시절의 후진국으로 여겼다. 심지어 인육을 즐겨 먹는 미치광이들이라는 농담도 지금껏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국격을 좌지우지했다. 넋 놓고 있다면 중원은 그저 다시금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릴 터다.
류용은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서 이런 것들을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류용은 과거 황제들, 그리고 자신을 황제라고 생각했던 군벌의 수장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군주의 권위를 세우며 고고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면, 류용은 몸을 낮추어 밑을 바라보았다. 서민들의 민생을 신경 쓰기 위해 경사의 거리를 직접 거닐고, 가정을 방문해 고충을 들었으며, 어떤 경우엔 나이 지긋한 노인을 업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 하나하나가 그를 중화민국의 아버지(國父)로 불리게 했을 정도였다.
그는 외국인 사업가들을 초빙한 뒤 자신이 직접 기업가와 담화를 나누며 절강이나 복건, 강소성에 투자를 해달라 설득했다.
중원의 국가 원수가 이러한 소소한 말을 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기에 사업가들은 굉장히 당황했지만, 그래도 류용을 몹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해신용평가사나 담쟁이거리에서도 정말로 중원이 바뀔 수 있는지의 여부를 놓고 진지하게 예측이 갈릴 정도였다.
그는 기업가들의 규모를 가리지 않았다. 짬짬이 시간을 내서라도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의 수장들을 만났다.
분명히 이런 노력은 큰 성과를 가져왔다.
그와 만날 수 있던 것도 분명히 ‘성과’였을 것이다.
“대총통께서는 제가 뵌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르군요.”
“하하, 정 대인께선 중원의 다른 지도자들과 마주한 적이 있습니까?”
흑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은 정 대인은 말실수를 자각했는지 머쓱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이 살벌할 정도로 덩치 큰 사내는 류용과 진지한 담화를 이어갔다.
류용은 정말로 항적과 관우, 여포가 환생한 듯한 이 사내의 장대한 기골에 놀랐다. 아마 그들이 다시 태어나도, 이 사내와 비교해본다면 여러모로 다소 부족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류용은 이 사내의 해박하며 수려한 입담에 놀랐고, 그 풍부하고 깊은 지식에 경악했다.
“정 대인은 참으로 호걸이요, 영웅이외다. 고려에는 정녕 그대와 같은 자들이 일개 사업가로 있다는 말이오?”
정 대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업가가 어떠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섭섭합니다.”
류용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아니오. 그대를 욕보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와 같은 동량이 중한 나랏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의아했던 것이오. 내 만약 정 대인의 심기를 해쳤다면 사과드리리다.”
“중화민국 대총통의 사과는 대단한 것인데, 겨우 이런 것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심기도 상하지 않았으니, 그저 이 술 한 잔으로 넘어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둘은 좋은 담화를 이어갔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사업가 정 씨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각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류용은 그의 앞에서 속내를 보였다.
“나에겐 꿈이 있소. 이 나라 사람들이 학정과 마약으로 고통받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는 꿈이, 사해의 동포들이 파남에 위치한 형제애의 원탁에 둘러앉는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는 꿈이, 또한 우리가 과거의 굴레에 벗어나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얻는 꿈이 있소.”
청년 사업가는 류용의 말에 순간 고뇌에 휩싸인 듯했다. 그가 고심하여 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류용은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그대의 몫이 아니라 내 몫이오. 고심할 필요가 없어요.”
“대총통께선 제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습니다.”
류용은 금방 궁금해졌다.
“중원인이오?”
“그렇지요. 그는 지나인이었습니다.”
류용은 기대감을 품었다. 자신과 비슷하다면 말이 통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땅에 그런 사람이 있었소?”
“손덕명이라 하였지요. 저는 그를 중산이라 불렀습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허어, 애도를 표하오.”
청년 사업가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둘은 얼마간 더 대화를 나누다 정 대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접견을 마무리했다.
청년 사업가는 자신의 조그마한 경공업 몇 개가 상해에 들어가는 것으로 회담을 마무리했다. 좋은 성과였지만, 대총통이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느냐는 소리가 절로 나올 법했다. 그럼에도 류용의 표정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더 이상 각하의 귀한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 이만 먼저 물러갈까 합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소. 그대는 경사에 온다면 항상 나를 찾아도 무방하오.”
그 말에 청년 사업가는 호쾌하게 웃더니 이윽고 품속에서 조그마한 선물을 건넸다.
“이것은 제 발화갑입니다. 각하께서 애연가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 비싸지도 않고 제게는 영 쓸모가 없으니 단지 보잘것없는 선물이지만 지금의 만남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류용은 사양하려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품속에 넣었다.
청년 사업가는 등을 돌려 떠나갔다. 류용은 왜인지 모르게 하염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던 것 같았다.
* * *
― 쿠르릉
다시금 천둥이 쳤다.
어제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천둥과 번개도 여전했다.
하지만 대총통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해가 구름에 낀 상태라 날은 어둑어둑했지만 그는 관사에서 기어코 빠져나와 경사총통부로 향했다.
이곳은 명대 경사의 고궁(古宮) 바로 왼쪽에 위치하여 있었는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지만 황제를 참칭하지는 못했던 양계와 양송산의 집무실로 쓰였다,
지금은 중화민국의 시대가 도래하자 총통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근처에는 국민당사도 있었고, 집회 목적으로 쓰이는 너른 광장도 있었다.
부관이 달려와 마차에서 내리는 대총통에게 우산을 씌웠다. 류용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광경을 바라보다 부관과 다른 측근들에게 말을 했다.
“이래서야 광장에서 연설이 가능하겠는가? 날짜를 좀 미룰까?”
하지만 측근 중 하나가 귀엣말을 했다. 민심과 기타 여론에 대한 당무를 맡은 이였다.
“하지만 각하, 다음 주가 전당대회입니다. 그 전에 경사 시민들의 지지를 각하께 결집시키고 호응을 얻기 위해선 지금이 적기입니다.”
“후우. 그럼 우천 시에도 기능할 수 있는 건물이 몇 개가 있는가? 사람을 최대한 수용할 수 있는 곳 말이야.”
“옛 명대에 건축된 가극극장이 있습니다. 그곳을 이용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류용이 연설을 강행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부관은 무언가 심란한 얼굴을 했다.
“할 말이 있는가?”
부관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각하, 그곳은 불길한 곳입니다. 명대 서황비가 암살당한 곳이 바로 그곳이지 않습니까?”
류용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난 또 뭐라고. 괜찮네. 명대의 허물에 씌어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야. 단지 경호에 충실하고 신변을 철저하게 가려 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각하께선 중화민국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설령 각하께 화가 들이닥친다면…….”
“어허, 그런 말 하지 말게. 만약 내가 스러져도, 내 뜻을 품은 다른 이가 등장할 걸세. 이 나라 이 땅의 사람들을 과소평가하지 말게나.”
류용은 그리 말하며 극장에 갔다. 경사 시민들의 대표자들도 그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극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경호들은 눈이 빠져라 사람들을 감시했다.
사람들과 친밀함을 강조하는 대총통은 역대 수많은 봉건적 군주들과 완벽히 대조되며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이끌어 내었지만 호위의 측면에서는 몹시 좋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부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극장 연설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사방에는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류용은 지지자들을 만나 악수까지 했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비가 그쳤습니다! 해도 떴습니다!”
류용은 문득 미소 지었다.
“좋은 계시로구나.”
그는 극장 밖으로 나와 총통부로 돌아가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광장에는 뒤늦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모여 있더랬다. 류용은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과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자동차는 구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수장답게 견고하고 괜찮은 재질로 만든 총통의 마차는 개폐식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경비들은 불안해했지만 류용의 주문에 따라 지붕을 접었고, 류용은 마차 위에 반쯤 서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공산당의 분열책동에도, 중화민국은 건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날카로운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 탕
류용은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통증은 심하지 않았다. 류용은 멍하니 가슴팍에 놓아둔 발화갑을 바라보았다.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었지만 총탄은 이를 통과하지 못했다.
왜일까, 보통의 총탄이라면 능히 이를 관통한 뒤 살점을 파고들었어야 했건만.
비가 와서 화약이라도 젖었을까.
하지만 그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탕, 탕, 탕 세 발의 소리가 더 울려 퍼졌다. 류용은 세 번째 탄에 이마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넘어졌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호위들이 뒤늦게 고함을 질렀다. 암살을 획책한 사내는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사람들을 흘깃 바라보고는 곧바로 다혈권총을 자신의 턱 밑에 두고 당겼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기에 공산주의에 대한 열망은 사내의 머릿속을 완벽히 지배한 상태였다.
* * *
침대는 딱딱한 선상용 의자보다는 안락했다.
대화를 오래 해도 충분히 편안할 만큼.
둘은 그저 대화를 하며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올가 언니와 류용 대총통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 있게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왜 이 책에 담겨야 하는 거예요?”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안토니아가 질문했다.
“넌 좋은 청자구나.”
상민은 문득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안토니아는 그녀의 어머니가 시킨 교육의 영향인지, 아니면 평소 성품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말에 참 잘 집중했다. 사람도 말을 편하게 할 수 있게 유도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대화 도중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을 들이대는 사람이 있었다.
좋은 청자란 단연코 전자의 부류였다. 그녀는 자신이 질문이 있더라도 모든 설명이 끝날 때쯤 물어보았다. 질문의 경우에도 딱히 논점을 흐트러뜨리진 않았다. 몇 번 맹한 질문을 했지만, 그것은 귀여울 뿐 바보스럽거나 혹은 불쾌하지 않았다. 도리어 가끔은 정곡을 찌를 때도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최근 자각한 그의 비밀을 입 밖으로 말했다.
“이 일은 기록하지 말거라. 도리어 역효과만 생길 테니.”
“분명히 당신께선 처음 이 책을 저술할 때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기록하라 하셨어요. 나중에 이런 말까지도 할 게 뻔하다면서.”
“좀, 부탁이다. 안토니아. 응?”
안토니아는 상민의 표정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웃어 보이고는 만년필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