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루테니아(2)
코자키들이 겉으로만이든 혹은 내면적으로도 완전히 올가에게 승복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차리차는 헤트만 키릴로 라주모프스키의 협조 덕에 개혁의 동력을 얻었다.
물론 정치라는 것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줘야 했다. 올가는 자신의 장녀를 키릴로의 손자와 결혼시키면서 입지를 다졌다.
차리차는 슬하에 세 딸이 있었고 최근 태어난 아이도 딸이었으니 어쩌면 다음 대에도 차리차가 등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아있던 반대파들은 암살 기도 사건의 여파로 운신도 못 한 채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대공의 뒤에 고려의 정보국이 있는 모양이야.”
식견이 좋은 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 차르의 오흐라나도 루스 땅에서 힘겹게 버텨내기만 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강하고 교활한 자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항거하겠는가. 대든 것이 미련한 짓이지.”
그 와중에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그동안 반쯤 와해되어 있던 오흐라나의 조직이 올가에게 접근을 요청했다.
이들은 대전쟁 이후 두 블라디미르 차르가 수즈달 수도원 종탑에서 떨어져 죽은 그때부터 그 세력이 확연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나탈리아는 오흐라나를 부리긴 했지만 중용하지 않았었다.
하물며 적군 천지가 되어버린 현재의 모스크바에 남아있을 수도 없었다. 오흐라나는 공안질서수호국이라는 이름답게 방첩은 물론이고 사회의 반동 세력들을 숙청하는 것을 주로 담당했었다. 한 번쯤 피해자가 되었을 소비에트 연방의 인사들이 이를 좋게 볼 리가 만무했다.
6월 봉기 이전부터 모렐리와 소비에트 간부들은 귀족의 말을 직접적으로 따르진 않지만, 그들과 친밀한 관계인 오흐라나를 먼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적어도 대항할 조직을 가지고 있긴 해야 했다. 그들은 약어로 체카(ЧК)라는 혁명세력의 비밀경찰을 만들어 오흐라나를 담당하도록 했다. 오흐라나는 최중요 목표이자 가장 죽여야 하는 반동분자들로 분류되었다.
체카와 오흐라나는 러시아 혁명 동안 음지에서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정보조직은 지휘가 붕괴하고 정치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체카가 아무리 역사가 짧고 요원 개인의 능력이 미천하다 하나, 계속되는 인적, 물적 지원은 오흐라나의 손해를 강제했다. 체카의 국장 유리 아빌로프도 끈질기고 집요한 인물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시대가 되자, 오흐라나는 거의 궤멸되었다. 거의 칠 할 이상이 죽었고 연락이 두절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대로 가면 다 죽을 것이 분명했다. 살아남은 오흐라나들은 방황하다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충성을 바칠 명분이 있는 대상이 남쪽에 생겨났던 것이다. 그들은 루테니아로 가기로 했다.
온갖 고생을 하여 드디어 드니프로강을 건너는 수많은 난민 행렬에 합세한 그들 무리는 한 평범한 슬라브인 촌로가 그들에게 아는 척을 하자 까무러칠 뻔했다.
“오랜만이군, 나자로프 부서장.”
“체카?”
체카가 루테니아의 국경선까지? 나자로프는 크게 놀라며 품속의 권총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슬라브인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체카로 보이나? 최 아무개라 부르게. 나는 그대들을 무사히 강 건너편에 데리고 가기 위해 왔네.”
“…대외국이군.”
나자로프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에는 미리 준비한 배가 있었다. 그는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문질렀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로 오는지 경로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자로프는 대외국이 이렇게 출현한 것에 대해 놀라진 않았다. 다만, 자신과 자신이 부리는 요원들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슬라브 노인에게 끔찍할 정도로 큰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은 저렇게 태연하게 군중 속으로 스며드는 슬라브 노인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반대로 그는 정확히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 답답할 정도의 격차는 그들이 왜 매번 대외 작전에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나타냈다.
그동안 루테니아 작전을 지원하며 암살 사주를 막는 등 큰 공을 세운 대외국 요원들은 무장해제된 오흐라나까지 올가에게 건넸다.
그들은 한때 적이었지만, 너무 많이 박살이 나 있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대신 체카라는 새로운 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외국은 오흐라나의 처분을 올가의 판단에 맡길 생각이었다.
“오히려 제 생각엔 차리차께서 저들을 중용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요? 나야 좋지만, 그대들이 그렇게 말하니 의외로군요.”
“가장 큰 우선 사항은 루테니아의 안정입니다. 저들이 건국 초의 어수선함을 노려 첩자들을 보낼 수 있으니, 경험 많은 이들이 필요하실 겁니다.”
“여러모로 고마워요.”
올가는 한동안 두 가지 일에 매달렸다.
가장 큰 사업은 유상매입 유상분배로 이루어질 대규모 토지개혁이었지만, 또 다른 일도 있었다.
토지개혁은 시간이 걸렸다. 이 땅들을 제대로 측정하기 위해 외국의 측량사들을 불러 모아야 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온 유민들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녀는 고려의 계획에 맞추어 몇 가지 사업을 벌였다.
차리차는 소비에트의 위협에 대비해 방어시설을 증축하길 원했다.
루테니아는 군사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형태의 국토를 가지고 있었다.
수도 키이우는 북쪽과 동쪽에서 곧바로 쳐들어오기 쉬운 구조였다.
그래도 동쪽에는 드니프로 강이라는 지리적 장애물을 끼고 있었다. 적의 포격을 막을 순 없겠지만, 이를 넘기 위해선 넓은 곳은 1~2킬로미터에 달하는 강을 도하해야 했다.
반면 북쪽의 국경은 몹시 허술했다.
드니프로의 지류인 프리피야트강은 본류보다 훨씬 얄팍했고 따라서 도하하기 쉬웠다.
루테니아는 이곳에 강의 이름을 따서 프리피야트 요새선, 혹은 축선 당시 건설시작점이었던 작은 마을의 이름을 따서 체르노빌 요새선이라 불리는 요새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내구성 좋은 강회를 주재료로 만든 체르노빌 요새선은 강가의 구릉지대에 형성되었다.
가장 얇은 보루의 두께가 2m에 달하는 요새선은 내부와 지하에 탄약고와 식량창고, 지휘소와 막사가 다 들어 있어 적의 포격에 큰 방호력을 가지면서도 위에 설치된 철탑 기관총좌나 포대에서 적을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적이 이곳을 무력화하기 위해선 과할 정도의 포탄을 사용하거나 총안구를 노려야 했는데 둘 모두 크게 힘들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대전쟁 시기 군대 수준으로 이곳을 돌파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고려가 처음 선보인 강철 괴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위험할 것이었다. 전차의 개발은 일정 규모의 육군을 가진 국가들에게 전부 최순위 과제 중 하나였다. 많은 이들이 고려에 손을 벌렸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나마 한 번 당해본 프랑스와 기술력 좋은 도이치가 전차의 개발을 시작하며 후발주자가 되었고 경쟁이라는 것이 아주 조금은 성립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방어선은 루테니아가 처음부터 만든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가 제일 먼저 시작했다.
폴란드는 현시점 루테니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크게 소비에트 연방을 경계하는 나라였다. 이미 한 번 데인 적이 있었으니, 그들의 편집증에는 이유가 있었다.
폴란드는 민스크 방면의 방어선에 ‘철의 장성’을 쌓아 그들을 방어하길 원했고, 건축기술에 일가견이 있던 도이치가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루테니아도 그 사업에 동참하여 프리피야트 요새선을 그곳과 합치길 원했다. 폴란드도 요새선 통합에 환영했다.
요새선 건설은 루테니아에게 러시아의 위협 일부를 해소하면서도 국내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다. 이런 단순한 노동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치안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유민들에게 노동과 일자리를 대가로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올가는 자신의 말대로 웬만해서는 키이우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쟁이 나도 그럴 것이다. 그녀와 같은 이방인 왕은 이런 권위가 절실히 필요했다. 성공한다면, 그녀는 자애왕이 받았던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 또한 키이우의 지리적 위험성을 많이 들었기에 유사시에 정부가 기능할 수 있는 부수도를 남쪽에 하나 더 만들기로 작정했다.
자포리자가 그 후보로 꼽혔지만, 그곳도 딱히 대단히 좋은 곳은 아니었고 코자키들의 영향력이 강해 기각되었다. 그녀는 항구를 개발할 겸 남쪽에 미콜라이프라는 항구 도시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1억여 원의 금전적 지원은 요새선 축성과 미비한 철도, 항구를 만드는 곳에 알뜰살뜰하게 쓰였다.
* * *
한편 곤여의 반대편.
소련 설립을 축하하는 축전을 보냈던 기윤은 불이 다 꺼진 자신의 방에서 우두커니 앉아 고심하고 있었다.
그의 손엔 소련 당 위원장 모렐리의 답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외세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같은 뜻을 품고 있는 동지기도 했다.
중원의 많은 혁명가와 운동가들은 소련의 설립에 큰 희망을 얻은 상태였다. 희망뿐만 아니라 야망도.
그리고 기윤처럼 걱정거리도 얻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모렐리의 축전 답장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읽어본 상태였다.
‘정말로 그렇다. 이제 이 갈등은 표면적으로도 봉합될 수 있는 수준이 한참 넘은 상태가 되었다. 모렐리 동지는 이것을 예측했던 것일까. 아니면 파리에서 경험하여 그렇게 말한 것일까.’
계미년에서 갑신년까지 일어난 전쟁으로 중화민국은 중원의 패권에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그 이후, 갑자기 서쪽에서 섬서와 산서, 사천을 기반으로 하는 이소청의 군벌이 크게 일어나 그동안 한 번도 얻지 못했던 낙양을 손에 넣으면서 중원 패권에 대한 도전을 천명하여 기세가 흔들리긴 했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이어서 광동과 광서를 다스리는 남양통상대신 손승택의 도발을 토벌하며 우위를 되찾았다.
기윤이 보기엔 이소청 또한 중화민국의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옛 순나라의 땅에서 일어난 군대들은 굉장히 정예해 초반에는 크게 밀렸지만, 중화민국의 군대도 이제 경험이 충분히 쌓인 상태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렇게 된다면, 중화민국은 분명히 중원일통을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기윤은 사람을 불렀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가 재빨리 튀어나왔다.
“하명하십시오. 당수 동지.”
“개방(丐幇)의 단두 동지를 불러라. 일 하나 해야 하겠다.”
그의 눈이 서슬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자고로 혁명가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의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해주리라.
“부르셨습니까, 기 대인.”
이윽고 명을 받은 거지들이 그의 앞에 왔다.
개방이라 하면 거지들의 단체를 의미했다.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확실히 단정하기 어렵지만, 송과 원 시절에도 존재했다.
중원의 혼란기 때마다 이런 단체들은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명 말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지금의 세태는 민초들의 삶은 몰라도 개방을 흥성하게 했을 것이다.
현재 개방은 각 성에 널리 퍼져있었다.
개방은 우두머리인 단두(團頭)의 지휘하에 독자적인 재판과 행정을 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거지들인 만큼 그 규모가 일정 이상으로 크긴 어렵고, 또한 더러우며 해괴망측하여 관에서는 웬만하면 이들과 잘 엮이지 않으려 했다.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은 굉장히 무서운 법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공산당원들에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본래 공산당이라 하면 이런 잃을 것 없는, 가진 것 없는 자들에게 아편처럼 스며들기 마련이었다. 이미 공산당은 개방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상태였다.
또 기윤은 이런 하층민들을 굉장히 잘 이용하는 정치가였다. 소소한 곳에 써먹고 꼬리를 자르기도 좋았다.
“쓸만한 놈 하나를 구해 주시오.”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기윤은 곧이곧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너무나 컸기에, 밝힌다면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었다. 단두를 완전히 신뢰하기엔 아직 근거가 부족했다. 그래도 그는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반동을 처단해야 하겠소. 총을 잘 다룰 줄 아는 놈으로 주시오. 아, 물론 열혈 공산당원으로 내 지시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할 것이며 또한 입이 무거워야 할 게요.”
단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보름이 지나고, 건장한 청년이 왔을 때 기윤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첫 명령을 내렸다.
“너는 지금 두 명을 죽여라. 한 놈은 너를 이곳에 오게끔 한 단두다.”
“알겠습니다.”
청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두를 죽이고 그 증거를 가져왔다. 기윤은 비로소 그를 신뢰하며 두 번째 암살 대상이자 그의 진정한 목표를 알려주었다.
“너는 지금 이대로 경사로 올라가 석암을 암살하라.”
청년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