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소비에트 연방(2)
1766년 일어난 6월 봉기는 일부 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지지를 얻었다.
노동자들, 농부들은 당연히 그러했다.
러시아를 지켜야 하는 병사들도 젬스키 소보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귀족들이 심어놓은 러시아 장교들은 대놓고 병사들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아예 적군으로 전향하기까지 했다.
이미 그 정도로 보야르들의 인망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보야르들은 자기 권력 쟁탈을 위해서 나탈리아 사후 차르의 자리를 공석으로 놓았지만, 덕분에 일반 병사들에게 충성심으로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말단 병사들마저도 군사 반란으로 소비에트의 행동에 호응했다.
1768년, 소비에트가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굳어졌다.
처음의 위태로움과 달리 적백내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방적으로 적군이 몰아붙이는 형세가 되었고 끝날 때도 허무하게 끝났다.
대전의 패배와 영토의 축소, 차리차의 죽음, 권좌의 공백은 그만큼 컸다. 적군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러시아인들은 순수한 증오심을 토대로 도망 다니는 귀족들 사냥에 손수 나설 정도였다.
이로써 첫 번째 혁명은 성공했다. 모두가 얼떨떨해하면서도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모렐리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와 그의 부하들은 섣부르게 샴페인 병을 따지 않았다.
이제는 내부 문제가 더 크게 다가왔다.
현 소비에트는 모렐리 파벌이 거의 2할에서 3할, 나머지가 6할에서 7할에 달했다. 다수는 대체로 온건했다.
소비에트에도 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 서민보다 더 잘 사는 기득권 세력이 많았다. 먹고살기 힘들면 교육도 못 받았고 평의회에 불려오지도 못했다. 그건 사실 모렐리와 메이블리도 그러했으니.
이들은 자신들을 먼저 숙청하려는 귀족들에 대항해 봉기를 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같이 행동했지만, 완전히 적군의 편은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개혁에는 동의했지만 부르주아적 혁명도 딱히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 질서와의 타협도 가능했다. 개혁 노선이 최대한 합법적이길 바라기도 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 그 자체가 아닌 제대로 된 러시아인들의 민생이었다. 급진적 개혁은 피를 수반하기 마련이었고, 그런 피는 증오를 낳았다. 사회의 안정에는 썩 좋지 못했다.
이들은 온건당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원래부터 다수를 차지했고, 소비에트가 모스크바를 점령한 이후 일어난 첫 번째 전 러시아 소비에트 회의에서도 다수를 차지했기에 볼셰비키라 불렸다.
반대로 급진주의자들, 즉 모렐리 파벌은 자연스럽게 멘셰비키라 불리게 되었다. 소수당이라는 뜻이었다.
이름처럼 소수당은 처음엔 굉장히 불리했다. 모렐리도 이를 잘 알았다. 유일하게 유리한 점은 볼셰비키가 세 명의 지도자 아래에서 약간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볼셰비키의 세 지도자, 빅토르 이반코프, 안드레이 즐로빈, 미하일 트레챠코프는 제각기 추구하는 목적성이 조금 달랐다.
반면 멘셰비키는 모렐리를 중심으로 완전히 규합되어 있었다. 모렐리는 파리 코뮌에서 메이블리가 선사한 교훈을 잊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필연적으로 배신당하느니, 먼저 공격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1768년 11월의 내전은 같은 적군끼리의 충돌로 이어졌다.
원래부터 여러 책 속에서 음침하고 음험한 악의 도시로 묘사되곤 했지만, 이 시기의 모스크바는 정말로 끔찍하게 짙은 안개(혹은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껴 있었다.
이 안개 속에서 어제까지 아군이었던 사람들이 서로 고함을 지르며 총을 겨누고 쏘았다. 도시에서 총소리와 대포 소리가 요란했다.
6월 봉기와 적백내전에도 모스크바는 멀쩡했었는데, 11월 내전에서는 결국 끔찍하고 참담한 전흔을 남겼다. 11월 내전 이후 비교적 멀쩡한 것은 크레믈과 성 바실리 대성당에 불과했고 나머지 건물들은 어디 한 군데는 그을려 있거나 무너졌다. 수많은 건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정말로 사람 사는 곳이 아닌 느낌이었다.
― 반동들이다. 모조리 끌고 가!
― 전 볼셰비키가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비명과 악다구니 속에서 모렐리는 볼셰비키를 잔인하게 숙청했다. 무고한 피해자들이 많이 생겼지만, 열 명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볼셰비키를 숙청할 수 있다면 아홉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죽이는 것에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만큼 그는 내부에 있는 혁명의 적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도 나름대로 열심히 저항해 보았지만, 지휘관의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멘셰비키 최고 사령관 수보로프를 대체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자는 볼셰비키 군대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과격한 숙청으로 볼셰비키는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이전과 달리 지하로 숨지도 못했다.
사방에는 벌벌 떨면서 멘셰비키에게 이들의 행방을 일러바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공포는 때때로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세 명의 볼셰비키 지도자들 중 트레챠코프를 제외한 두 명은 처형당했고, 트레챠코프 또한 망명길에 나서야 했다.
1770년 2월 4일이 되어서야 모렐리는 비로소 그의 목적을 달성했다. 소수파는 더 이상 소수파가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오직 유일한 파벌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는 어느덧 혁명의 상징이 되어버린 붉은 광장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는 외쳤다.
사방에 멘셰비키의 상징인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그 안에는 그들을 상징하는 노란색의 낫과 망치가 교차되어 있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동안 대동계가 대체 몇 번을 실패하고 스러졌던가.
마침내 때가 도래했다. 그들은 나라 하나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것도 일반적인 작은 나라가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사력 부문에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열강 중 하나였다. 불가리아가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사실이긴 했었다.
‘바이에른의 선지자들이여, 앞서 걸었던 혁명가들이여, 내 친애하는 스승이여, 지금 이 광경을 보고 계십니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제 억압받고 박해받는 모든 이들이 통치할 것이외다!”
모렐리와 그의 제자들은 유능했다. 그들은 러시아인들이 원하고 있는 개혁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이 사회는 지금 지지부진한 탁상공론 대신 과격한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만큼 러시아의 경제와 사회는 완전히 썩어 있었다.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모든 사유재산의 박탈과 국가 귀속은 듣기에 아주 매력적이었다.
정치적으로도 모렐리는 전제군주, 차르주의를 완전히 배격했다. 봉건적 질서는 모두 구태와 허물로 낙인찍혔다.
그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고려 제국 또한 봉건적 악의 제국이었다.
모든 이들이 평등하지 않았으니까. 그놈의 쌍룡지손인지 나발인지 하는 놈들은 오로지 자기 핏줄만 믿고 다른 사람들의 위에 군림하지 않는가.
모렐리는 고려인들이 제일 먼저 한발 앞서서 노동자 권익과 공공부조, 사회보장제도 그리고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증오했다.
그들이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다면, 혁명은 오히려 그 축적된 불평등과 가혹한 환경 속에서 더 빨리,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을 것이다.
어쩌면 고려 제국 내에서도 큰 불길이 휘몰아쳤을 것이다.
거짓된 제국은 무너지고, 위대한 ‘고려인민사회주의련방공화국’이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사회공화국은 다른 나라의 노동자의 권리에도 눈을 피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세계혁명은 곧바로 달성되는 셈이었다.
그것까지 바라진 않더라도 프랑스와 도이치에서의 혁명이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프랑스와 도이치의 뒤에도 고려가 있었다. 빌어먹을 도이치 왕은 고려에 유학을 갔다 온 탓에 호엔촐레른 군주 특유의 막장 행동을 자제하고 타협적으로 굴었다.
프랑스는 심지어 의도적으로 전쟁 배상금을 감면받았다. 모렐리는 자신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에 있었기에 너무 잘 알았다. 전쟁배상금이 도리어 크고 가혹했으면 프랑스에 혁명의 열정, 즉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배신자 메이블리마저도 자신을 따랐겠지.
그는 본능적으로 저 덩치 큰 괴물이야말로 그의 평생의 숙적임을 인지했다.
“저놈들도 우리를 경계하는 거지. 응?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우리의 턱밑에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 루테니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 쾅
모렐리는 크게 분노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쓰레기 같은 협잡꾼들, 돼지 같은 지주, 부르주아지들, 머저리 같은 황족들!”
러시아는 몇 차례나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중앙아시아와 발트해 부근의 국가들을 독립시켜야 했다.
면적상으론 가장 큰 치명타는 옥저에게 받았다. 동시베리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놈들도 내전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것은 바로 흑해 부근의 흑토지대에 생긴 루테니아였다. 발트해 국가야 사실 러시아가 예전에 선공을 했던 나라들이었고 독립하는 것은 뭐 어쩔 수 없었다. 시베리아는 광대한 영역이지만, 그곳에 있는 자원을 제대로 개발하기엔 아직 힘들었고 또한 관리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유지비용이 더 클지도 몰랐다.
루테니아가 점유한 곳은 완전히 달랐다. 이 흑토지대(초르노젬)는 수확 철만 되면 황금빛 바다로 바뀌는 비옥한 옥토였다. 러시아가 대전쟁을 위해 가장 많은 군량을 확보한 지역도 당연히 이곳이었다. 초르노젬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러시아는 당장 곡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곳이 딱히 없었다.
사라토프나 사마라 부근의 볼가강 유역도 초르노젬으로 분류되어 무척 비옥했지만 아직 드네프르강 유역에 비하진 못했다. 이곳이 당장 드네프르를 대체할 농업지역으로 변모하기엔 시간과 자본이 필요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루테니아의 수도 키이우, 즉 키예프는 루스의 근본이기도 했다.
모렐리가 만들어낸 소비에트 연방은 어떤 특정 민족에 의한 지배를 천명하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진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근간 자체는 러시아에 있었기에 적법한 러시아, 루테니아를 주장한 나라가 밑에 있는 것은 굉장히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크림과 자포로자에 있는 소수민족을 책동한 것도 소비에트의 근간을 흔드는 시도가 될지도 모른다.
모렐리는 한참 동안 지도를 노려보았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 * *
러시아 혁명은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소비에트 연방은 혁명의 성공으로 말 그대로 모든 공산주의 조직단체의 우두머리적 권위를 얻었다.
사방에서 축전이 날아왔다. 유럽의 공산단체뿐만 아니라 지나의 대동계를 이끌고 있는 기윤, 그리고 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의 공산단체에서도 축전과 응원이 날아들었다.
모렐리는 손수 하나하나 답장했다. 이런 세력과의 연계는 필수적이었다.
[존경하는 춘범 선생, 이 사람 또한 신사 혁명에 대한 축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향후 진로에 대해 긴히 논의할 것이 있습니다.
혁명의 적은 외부에도 있지만, 내부에도 있습니다. 국민당이 아니라 공산당이 중화민국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부르주아지들이란 본래….]
가장 중요한 동지라고 생각하던 지나의 공산당 말고도 심지어 이제 막 외국과 제대로 수교하기 시작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도 축전을 보냈다.
소비에트로서는 존재조차 몰랐던 자들이었다.
세계는 확연히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제는 제아무리 깡촌의 나라더라도 문명의 이기와 완전히 동떨어진 나라는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문명이 있다면 공산당은 언제든지 파고들 수 있었다. 부조리와 불합리한 봉건 질서는 세상 도처에 깔려 있었다.
이렇게나 동지들이 많다니, 모렐리와 멘셰비키들은 축전을 받고 전율했다. 눈물도 흘렸다. 직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대적을 직시하며 내심 큰 압박감을 느꼈던 모렐리는 이 열화와 같은 성원에 다시금 자신감을 되찾았다.
국제공산당의 세계혁명주의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소비에트는 인류의 희망이 되리라.
이 모습을 보던 다른 나라들은 한탄했다.
러시아는 대전쟁 이후엔 완전히 국제적 기피 국가로 취급된 상태였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러시아의 백군을 도와줄 이유는 그 무엇도 없었다. 조약국은 모스크바에서 전범재판을 했었지만, 그래도 러시아인들에 대한 감정은 지극히 나빴다. 저들을 뭐 하러 도와주느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차라리 그때 도와주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정도였다.
경기가 이렇게 좋은데도 각 나라엔 공산주의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마당이었다. 경제가 나빠지면 더 극성일 것이다.
타수의 회원국들은 고려의 권고를 받아 노동자 대우를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관행이 존재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잘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탐욕스러웠으며 법에는 여전히 허점이 있었다. 공산주의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나마 도이치, 에이레나 네덜란드 같은 부유한 몇 개국과 아예 한바탕 먼저 드잡이질을 하며 똘레랑스와 데탕트(Détente)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프랑스는 좀 사정이 나았지만, 카스티야나 아라곤, 잉글랜드 같은 어딘가 어중간한 국가들은 여전히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래도 도이치와 불가리아는 재빨리 루테니아의 독립보장을 선언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타수의 다른 나라들도 그런 움직임을 보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신생 완충국이 얼마나 잘 국가로서 기능할지의 여부였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마늘맛스낵입니다!
엊그제 500화, 연재 2주기를 맞아 많은 분들께 축하를 받았습니다.
한 분 한 분께 답변해드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모두 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
이 작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다 독자님들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계속 쓸 수 있었던 것도 제가 처한 현실이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눈치채셨겠지만,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는 이미 최종장에 들어섰습니다.
언제 끝날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그리 멀진 않았다는 것이겠죠. 그동안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전부 보여드리는 것이 제 의무이고 작품에 대한 유종의 미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남은 분량도 좀 있고, 제가 계획하고 있는 외전 또한 꽤 길 것 같으니 당장의 작별인사는 아닙니다.
다음 화에 독립된 루테니아(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상황과 관련해서 지도를 첨부하겠습니다.
또한 중국의 상황과 미래를 다루는 지도도 제작 중이며 세계 각국의 간략한 인구와 경제규모―아마 GDP―에 대한 자료들도 머지않아 등장할 예정입니다.
근래 국제적으로 사는 것이 좀 힘들어진 순간이 온 것 같네요. 독자분들 모두 잘 이겨내시고, 또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마늘맛스낵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