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96화 (496/653)

세 명이 오리라(4)

신사혁명이 일어나기 한참 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대지를 달리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라! 이곳만 지나면 된다!”

이홍력은 피곤에 쩌든 얼굴로 저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외쳤다.

내전에서 대패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비참한 처지가 된 홍력은 더 이상 옥저에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정은 그의 목을 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들, 즉 오기의 핵심과 그 가족들만 데리고 도주에 나섰다.

물론 곧바로 선택이 찾아왔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가?

러시아는 가장 가까웠다. 하지만 적국이다. 그들이 러시아에게 한 것을 돌이켜볼 때, 러시아는 그들이 새로 타협한 국경선을 넘으면 곧바로 응징할 것이었다.

물론 러시아는 지금 완전히 혼란스러운 정국이지만, 그 전에 나탈리아 차리차가 죽기 전 옥저에 의해 무너진 두 극동군관구를 규합해 옴스크에 만든 군관구는 여전히 건재했다. 중앙의 혼란에도 군관구의 장교들은 대옥저 전선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당한 것이 하도 많았으니 국민 감정도 최악이었다.

팔기가 멀쩡했으면 오히려 전세가 역전되겠지만, 지금 오기는 반역자로 낙인찍혀 토벌당하는 상태, 서쪽으로 도주하는 것은 언감생심 꿈꿀 수도 없었다.

카자흐의 땅도 불가능했다.

옴스크 밑엔 아크몰린스크에서 이제 이름이 바뀐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가 있었다.

대전쟁 이후 러시아는 카자흐를 독립시켜야 했고 이곳에 있던 대부분의 러시아 병력은 옴스크로 올라간 상태였다.

때문에 그렇게 적대적이진 않겠지만, 민족도 종교도 옥저와는 한참 이질적인 이슬람계 국가가 오기 잔당에게 어떻게 대우해줄지는 누구도 몰랐다. 더군다나 오기가 그동안 주장한 민족주의는 포용이라는 단어와 한참 거리가 멀었다.

옥저 잔당 무리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한 곳밖에 없었다.

남쪽.

그곳엔 지나의 땅이 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몽골의 땅을 먼저 지나야 했다.

하지만 몽골은 과거 오르도스 이북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했던 옥저에 속하게 되었으므로 국제적으로도 옥저령 몽골이라 칭해지고 있었다.

북원이 무너진 지도, 그 이후로도 준가르를 비롯한 유목민 제국이 러시아에 의해 멸망한 지도 한참이 흘렀다.

유목민들이 이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불가능한 시대가 도래했다.

지금 몽골인들은 옥저의 지배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여러 복잡한 과거가 있다지만, 옥저 중앙조정은 지금까지 그들을 딱히 크게 탄압하지 않았고, 대충대충 세금만 내면 알아서 먹고살게 내버려 두었었다. 예맥한 민족주의가 대두된 이후에는 조금 관계가 껄끄러워질 만도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이미 옥저는 내전을 통해 불충한 무리들을 쫓아낸 것이다.

얄궂게도 쫓겨난 홍력 일행 또한 남쪽으로 방향을 튼 이후, 옥저령 몽골을 통과했다.

이곳은 대수림만큼은 아니더라도 불친절한 기후의 초원과 건조사막이 주된 땅이었다.

시골의 옥저인들이 아무리 여전히 반농반목적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더라도, 이곳에 살라고 던져놓으면 힘들어할 것이 분명했다. 실로 문명이 퇴보할 땅이었다.

군대를 전부 잃고 도주하는 지금의 일행에겐 정착하기엔 더더욱 좋지 않았다.

그들은 그 사막을 지나쳤다. 그리고는 마침내 감숙성의 난주(蘭州)에 도착했다.

실로 혹독한 여정이었다. 인원은 떠날 때의 절반 가까이로 줄어들어 있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도 죽어나갔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얼마인가, 홍력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개인의 야심으로 인해 중앙 조정에 반기를 든 역도였지만, 책임감이 없지는 않았다.

“어서오시오. 이 대인!”

다행스럽게 지나인들은 그들을 환대했다.

심지어 서안에 있어야 할 이들의 지도자, 이소청이 난주까지 와 환영할 정도였다. 오기의 잔당들은 영문이 모를 지경이었다.

다만 이곳으로 오리라 결정한 홍력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토록 환대해주시니 실로 고맙습이다. 순왕 전하.”

“하하하! 사해가 동포인데, 어찌 이웃의 곤경을 모른 척할 수 있겠소?”

홍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가진 생각과는 거리가 영 먼 단어였지만, 패잔병들은 염전히 입을 다물었다.

지나 땅은 상당히 넓었던 만큼 민족감정도 제각기 다 달랐다.

온갖 패악질을 부린 양이에 대한 증오는 비슷했지만, 특히 예맥한계들, 즉 동이에 대한 감정은 천차만별이었다. 조선, 옥저, 백제 삼국은 점잔 떠는 고려의 외교 정책에 따라 함부로 폭주하기 어려운 자들이었다.

절강이나 복건과 같은 곳에선 양이를 제일 싫어했고, 광동과 같은 곳은 양이와 강화를 싫어했다. 하북과 같은 곳에선 국경지역의 마찰 때문에 양동이를 모두 싫어했다.

딱히 별생각 안 하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우호적인 곳도 많았다. 백제는 산동과 전통적으로 친했고, 옥저는 직례와 친했다. 조선은 중원을 다 싫어했지만, 그래도 옛 순나라와는 꽤 잘 지냈다.

내륙에 있던 순나라의 무리들은 예맥한계와 친했다.

이들은 중원의 통일을 저지하려는 모종의 세력―아마도 조선과 옥저―에 의해 노골적으로 후원을 받았으니,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적대행각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광경은 홍력이 예측한 바였다.

물론 그날 늦은 밤, 융숭히 대접받은 홍력의 무리들 중 하나가 그의 거처로 찾아와 조심스럽게 물음을 제기했다.

“장군, 이들이 만약 옥저의 조정에 우리들의 행방을 알리면 어떡합니까?”

홍력은 연이은 패배와 도주로 자신의 지도력이 최측근에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기에 걱정부터 앞세운 부하에게 사나운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화를 다스리고 천천히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진 않을 것이다. 놈의 뜻이 지나 일통에 있는 한 더더욱.”

자신들은 이용가치가 충분했다.

홍력이 이끄는 오기의 수뇌부들은 병력을 잃고 소수만 달아난 자들이다. 그들이 이곳에서 뭘 할 수는 없었다.

이들을 정벌하고 기반을 세운다?

수가 압도적인 지나인들이 그것을 두고 볼 리가 만무했다. 제아무리 개개인이 뛰어난 군인이라 하더라도 수가 결국 수백에 불과하면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또한 챙겨야 할 가족들도 있는 마당에.

홍력은 가슴을 피고 중얼거렸다. 이번엔 그의 선택이 틀린 것 같지가 않았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이 이소청의 후대로 차오르는 듯했다.

“안심하거라, 우리를 잡으러 올 사람은 없다.”

실제로 군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왕의 칭호를 쓰고 있는 순왕이자 섬서군벌인 이소청은 홍력이 예상한 대로 그들을 계속 대접하면서, 옥저에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는 선진 군사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장교집단이 자신이 중원일통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가져다주리라 생각했다.

중원에도 좋은 장수는 많았다.

하지만 이소청이 보기엔, 다들 어중이떠중이었다.

일신의 능력은 모르겠지만,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세계의 군사기술은 미친 듯이 앞서 달리고 있는데 지금 중원만 녹슨 화기들은 물론이고 철 지난 냉병기들을 아직도 쓰고 있는 마당이다. 인구수가 많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군사를 만든 자들이 적었다.

이 지나 땅에서 딱 둘만 예외였다.

서기효가 기른 정예 하북군과, 나라동훈이라는 명신이 만들어낸 직례군.

이소청이 생각기엔, 순나라와 섬서군벌이 그 정도 수준까지 오르기 위해선 자신의 휘하에서 서기효만한 인재가 나오길 기대하는 것보다, 그만한 인재를 초빙하는 것이 맞았다. 끈 떨어진 외국군은 아주 좋은 상대였다.

하지만 세상은 아름답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곧 그들 사이에도 문제가 생겼다.

“뭐라고?”

“옥저 놈들이 취한 채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기껏 그렇게 후대해 주었더니, 이런 식으로 갚아?”

오기 패잔병들은 시켜달라는 군사 훈련은 안하고, 술을 축내며 저자거리에서 아녀자를 희롱하고 있었다. 실로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었다.

이소청은 적당히 타일러 그들을 숙소로 돌려보낸 다음 이를 뿌득 갈았다. 그가 보기엔 저 이홍력이라는 놈이 만악의 근원이었다. 저 자는 한때 대단한 능력을 지녀 옥저 중앙군을 번번히 패퇴시켰지만, 이제는 자신의 전성기가 지난 것도 모른 채, 과거의 향수에 매달려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멍청이 같았다.

속되게 말하면 주제파악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놈이 저렇게 건방지게 구니, 그 아랫것들도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내가 이 장교집단을 전부 통제하기 위해선, 이홍력을 죽여야만 한다.”

이소청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중요한 할말이 있다고 홍력을 그의 무리에게서 따로 불러낸 뒤 살해했다.

허망한 최후였다. 홍력은 믿기지가 않는 듯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이리저리 팔을 허공에 휘두르다 쓰러졌다.

이소청은 이후 당시 오기의 이인자였던 노호로 상보를 꼬드겼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다른 무리는 안전할 것이고, 또한 지금까지와 같이 후대받으며 이 순땅에서 지낼 수 있으리라고.

안 그래도 망가진 홍력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가지기도 했고, 나름대로 야심이 있었던 노호로 상보는 이에 동의했다.

그는 오기를 수습해 이소청에게 충성을 바쳤다. 어찌 자랑스러운 예맥한인이 지나인에게 충성을 하느냐는 물음을 가진 이들은 전부 죽었다. 다른 이들은 이제 다시 쫓기는 생활이나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노호로 상보는 한족식 성씨인 낭(郞)씨로 이름을 바꾸어 낭상보가 되었고, 이소청의 심복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고된 탈출 여정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상보의 아들, 낭화신(郞和珅) 또한 순나라의 근대적 사관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잘 자리잡힌 이후엔 소소한 괴담도 생겨났다.

신사혁명이 진행되어가는 와중의 일이었다.

“무덤이 파해쳐지고, 목이 사라져?”

이홍력을 묻어놓은 장소가 파해쳐지고 그 시신이 손상되었던 것이다. 대중에겐 아예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기에 소청은 소름이 끼쳤다.

“그렇습니다.”

“끙, 범인은?”

“송구하오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소청은 어이가 없었는지 화도 내지 않았다. 그는 경계심을 풀었다. 누가 알고 이랬겠는가. 그냥 어떤 미치광이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다시 묻어라. 인간의 머리 유골에 도착증을 가진 놈의 짓일지도 모른다. 썩 중요한 무덤도 아니니 이 일은 비밀에 부치고.”

* * *

1차 북벌의 대승 이후,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상당한 영역을 손에 넣었다.

하북군벌과 산동군벌은 무너졌다. 산동은 임정 남로군이, 하북은 임정 북로군이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하북군벌들의 핵심 수뇌부들은 본보기로 처형당할 예정이었다. 사람들은 피를 원했다. 지방정권의 꼭대기에 앉아 아랫것들을 착취하던 놈들은 알맞은 희생양들이었다.

― 죽여라, 죽여라!

― 죽이시오!

군중들의 고함소리가 요란한 처형장.

가운데 놓인 나무토막들에 끌려가던 하북군벌의 수장 서용당과 그 무리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있던 기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악다구니를 썼다.

“이, 이놈들, 우리 덕분에 너희 같은 쓸모없는 문인들이 먹고살았는데… 그 은혜를 이리 갚는다고! 천하의 몹쓸 놈들!”

기윤은 서용당의 말에 씁쓸한 얼굴을 했다.

다만 그의 부하들은 기윤에게 막말을 퍼붓는 놈들의 턱을 이빨이 부러질 정도로 세게 가격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봉건주의 지주 쓰레기 새끼들, 그 입 다물어라!”

신사혁명 이후, 임시정부도 국제 표준에 따랐다.

세계에서는 이제 극형을 거의 금지하고 있었다. 총살이나 교수형이 완전히 정착되었으며 심지어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문화 유물인 단두대도 2공화국 땐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중화민국 또한 명과 그 이전의 왕조부터 내려오던 잔혹한 극형들을 없애고 간단한 총살형으로 대체했다. 특별한 시설이 필요치 않고 어디서나 그냥 총 한 방으로 끝내기에 수습하기도 편한 방식이었다.

물론 혼란스러운 중원의 현 상황 덕에 처형은 자체는 전혀 줄지 않았다.

관중은 아쉬운 소리를 했다.

전통적으로 사람 죽는 것을 쉽게 여겼고 볼거리와 향유할 대중문화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중원에서는 처형식이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젠 총 몇 발만 쏘고 끝나는 처형식이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세상 사는 재미가 없었다.

― 타타탕

그래도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군벌 수뇌부들이 툭 하고 쓰러지자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질렀다.

멀리서 이 상황을 보고 받은 류용도 그 모습에 혀를 찼다.

그가 사로잡은 왕상문은 감옥에 있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앞으로 딱히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생각도 없었다.

그 또한 줄곧 당해오며 살아온 대중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류용은 대총통으로서 중원의 조금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통합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

이렇게 강경한 처분을 내린다면 앞으로 다른 곳들을 점령하는데 큰 저항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린아이조차도 남은 군벌들이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을 예상할 것이었다.

그 와중에 류용의 측근들이란 놈들도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기효람의 성정을 경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타고난 선동가요, 또한 말싸움꾼입니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와 그의 당여가 우리 국민당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하지만 류용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지금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분열을 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런 그조차 미래에 대해 약간의 불길함을 느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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