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95화 (495/653)

세 명이 오리라(3)

뜻을 같이하는 사람에겐 효람(曉嵐) 동지, 일반인에겐 춘범(春帆) 선생이라 알려진 기윤은 하북성의 유명한 문인이었다.

그는 본래 다른 많은 문인처럼 입신양명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공부하던 자였다.

한때는 껍데기만 남은 명 조정을 위해 직례에 출사하려고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기윤은 직례와 조정에 팽배한 지역 차별에 큰 회의감을 느꼈다. 절강, 안휘, 장소성으로 대표되는 현 직례 조정은 그렇지 않은 성의 사람들을 차별했다.

그나마 가까운 하남과 호북, 산동과 강서는 나았지만, 하북 차별은 극심했다.

직례인들은 예전부터 대도, 즉 연경을 싫어했다. 그들이 대원대몽골국의 치하에 있을 때, 중원을 장악한 몽골의 무리들이 도읍으로 삼은 곳이었기에 민심의 이유는 충분했다.

또한 하북군벌은 직례 조정에 반기를 든 최초의 군벌이 되었으며 군벌의 대명사라고 일컬어지고 있기도 했다. 당연히 좋을 리가 만무했다.

기윤은 실망했다. 다 같은 중원의 사람인데 이렇게 차별을 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것은 대국의 정치가 아니었다.

대국의 정치가 서로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중원의 정치는 완전히 그에 반대되어 있었다. 출신에 대한 차별은 물론 지역 차별도 만연했으며, 부정부패는 극심했다.

하지만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한 명의 청년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기윤은 결국 먹고살기 위해 하북군벌에 출사했다. 당시 하북군은 명 최후의 명장이라는 서기효 사후 그의 자손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허수아비 한 명을 내세운 사실상 지방 왕조 수준의 위세를 자랑했다.

관리도 독자적으로 뽑고 있었으니 말을 다 한 셈이다.

그는 그곳에서 한직을 맡았다. 서씨 집안의 서고에 앉아 여러 책들을 관리하고 재편찬하는 일이었다. 당대 서씨의 가주인 서용당은 그럴싸한 위신과 겉모습을 위해 자신의 서고를 확장해 연경에 큰 도서관을 짓고 있었다.

치국의 상징이 도서관을 짓는 일이 된 것은 상당히 웃긴 일이었다. 연서궁이나 새롭게 지은 바그다드 대도서관의 일화에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책을 읽고 토론하는 문화가 자리 잡히지 않는다면 이러한 건축물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퀴퀴한 종이 썩는 냄새만 나는 건축물에 불과한 것이다.

기윤이 본 서용당과 그의 하북군 무리들은 책 한 권 읽지 않은, 그야말로 머리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멍청한 자들이었다. 호부견자라는 말이 실로 어울렸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문인들이 등용되곤 했지만, 그 문인 중에 충언을 할 만큼 알짜배기는 없어 보였다.

차라리 철도를 깔았으면 깔았지 이 무슨 짓인가.

실로 한심한 일이었지만, 기윤은 불만이 없었다.

적어도 먹고살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주 소중한 기회도 생겨났다.

일이 일인지라, 자연스럽게 수많은 책을 읽게 된 그는 세계 학문의 변방에 위치한 중원인으로서는 접하기 힘든 책들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위험한 내용을 담은 금서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펼쳐 보게 된 책은 심지어 제목도 없었다.

연경으로 들어오는 밀수품들을 보관하는 장소에 있었더랬다.

그가 이 책을 펼쳐 든 것도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펼친 그 자리에서 단번에 책을 읽어내렸다. 식사도, 물도 마시지 않았다.

“내 마침내 평생의 스승들을 만났구나!”

제목 없는 책을 몇 번이고 거듭하여 읽어내린 기윤은 그날 밤 목욕재계한 뒤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선대의 혁명가들이 쓴 책에 절을 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지금껏 지구 반대편의 땅에서 혁명을 위해 투신한 사람들의 이념을 좇기로 맹세했던 것이다.

책 속에는 그동안 유럽에 피고 지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말씀이 적혀 있었다.

정여립과 뮌처, 캄파넬라 등의 사람들.

이들의 생각을 통해 기윤은 그동안 자신이 대체 뭘 답답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핵심적인 요소를 비로소 인식했다.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기윤은 감탄하면서, 또한 탄식했다.

눈이 개안함과 동시에, 개안한 눈으로 현 중원을 바라보니 이 실태에 한숨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이 현실을 바꿔야 했다.

그가 정립한 사상은 지금 유럽에서 일어나는 공산주의의 기본 노선과는 약간 달랐다.

산업혁명의 후발주자로 철도나 공장과 같은 기본 시설은 상당히 많이 깔린 유럽에 비해 명은 아직 산업화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명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때는 그래도 세계 2위의 강대국이라 불린 나라와 단 한 번도 열강이라 대우받은 적이 없던 나라의 격차는 말로 설명을 다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기윤은 혁명의 주체가 지금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예전의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의 예시처럼 농부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이에른에서는 실패했지만 명에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바이에른의 인구는 수백만에 불과하나, 이곳의 인구는 수천만, 수억이다.

또한 농자지대본의 유구한 전통은 모든 지나인의 가슴 속에 뿌리내린 사상이니, 호응하지 않는 자들이 없을 것이다.

* * *

경사에서 신사혁명이 일어난 시기, 기윤은 정치적으론 이미 류용보다 먼저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중원을 떠나 공부한 적이 없었기에 지식으로는 류용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서책으로 얻게 된 지혜와 통찰력은 그에 견줄 만했다.

또한 류용이 상해에서 만든 중화동맹회를 통해 서서히 대중 정치가로서의 재능을 각성하고 있다면, 기윤은 그런 면에서는 류용보다도 한 수 위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 중 열의 여덟은 그에게 감화되어 기꺼이 중원대동계에 헌신했다. 중원대동계는 지하조직이었지만 이미 구성원이 수십만에 이르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그의 세력은 양지로 나오지 못했다. 군벌들은 위험한 사상을 가진 기윤을 싫어했고 심지어 죽이려 들기까지 했다.

군권을 잡을 계기가 없다면 이런 혁명은 일어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때 떡하니 남쪽에서 신사혁명이 성공하자, 기윤은 너무 놀랍고 기뻐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도 류용의 주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소한 노선 차이’는 있지만 류용은 봉건주의적 군벌들의 앞잡이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대중운동 혁명가였다.

그것도 사이비나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확고하고 올바른 이념으로 중무장한.

조금의 생각 차이는 지금 이 순간에는 상관없었다. 둘 모두 이 땅과 이 땅의 신민들을 위하는 마음은 같았으니까.

기윤은 류용과 미래를 논의하고 싶었다.

하북에서 춘범 선생이 간다는 말을 하자, 류용도 환영한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경사에 도착한 기윤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중원의 도읍을 둘러보았다.

‘중화동맹회가 벌써 장악했구나.’

전대미문의 사태에 온갖 시끌벅적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직례군벌은 결국 해체되었다.

지금은 중화동맹회, 아니 이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라 불릴 단체가 직례를 통제하고 있었다.

“혁명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정말 대단히 훌륭합니다, 선생!”

“다 동지들의 헌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이미 충분하게 축적되어 있었으니까요.”

기윤이 류용의 겸양을 받아쳤다.

“그렇다 하더라도 열망이 실제로 혁명으로 변하기는 무척 힘든 법이지요. 저는 그것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류용은 아련한 얼굴로 동쪽을 바라보았다. 저쪽엔 상해가 있을 것이었다.

“…지금은 떨어진 위대한 별 덕분입니다.”

“중양통상대신을 말씀하신 겁니까?”

기윤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도 조금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국인인 데다 대표적인 명의 봉건주의적 대신이었던 자를 굳이 높이고 싶지 않았다.

남쪽 사람들은 모르나 북쪽 사람들은 예전 조명전쟁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조선인들과 옥저인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류용이 입을 다물고는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어쨌든 당금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 두 명이 만나게 되었으니, 둘은 긴긴 시간 동안 토의했다.

중화동맹회와 중원대동계는 서로 자신들의 차이를 인지했다.

온건 공화주의적 혁명 노선을 따르는 류용은 중화민국이 프랑스에 뒤이어 두 번째 공화국이 되길 원했다.

비록 중간에 외젠이 그 본질을 흐리긴 했지만, 프랑스 혁명 자체는 굉장히 긍정적인 것이었다.

지금 그들이 다시금 열강으로 자리매김한 모습을 볼 때, 류용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민주주의적 혁명노선만이 중화민국만이 명을 제대로 바꿀 수 있는 정치노선이라고.

반면 기윤은 프랑스 코뮌처럼 중원에 공산사회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원의 악폐습은 너무 많았다. 토지를 전부 몰수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인민평등이야말로 그의 무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과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양쪽 모두 타협할 여지가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넘을 장애물이 산더미라는 것을 알았다.

임시정부가 직례를 장악하는 것엔 성공했지만, 그 밖의 다른 땅들은 여전히 군벌 사회였다.

심지어 중원대동계는 세력조차 없었다.

그러니 둘은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 제각기 참칭하여 다시금 그들만의 봉건 왕조를 꿈꾸는 다른 군벌 세력에 비해 그들은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만약 임시정부가 북벌에 성공하여 하북을 장악할 수 있다면, 신사혁명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혁명의 동력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우리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하북군에도 우리의 동지들이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일이 쉬워지겠군요.”

류용은 고마움에 기윤의 손을 잡았다.

“임시정부는 곧 입헌의회를 만들 예정입니다. 저는 선생께서도 그곳에 참여하시길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알겠습니다.”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곧 입헌의회를 만들 예정이었다.

구성원들은 제각각이었지만, 중화동맹회는 곧 이름을 바꾸어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할 예정이었다. 류용은 기윤에게도 입헌의회의 자리를 제시했다.

물론 류용은 이를 대가로 정국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다질 생각이었다.

공화국 체제를 채택한 중화민국의 지도자 이름은 대총통으로 정해진 상황. 임시대총통은 현재 류용이었고, 앞으로 1대 대총통도 그가 될 터였다.

기윤도 찬성했다. 지금 그의 세력은 명백히 도움을 구하는 처지였다.

또한 그가 이끄는 중원대동계도 새롭게 개편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윤은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공산(共産)이라는 단어를 유럽의 공산주의, 즉 코뮤니즘(communism)에 대응하여 처음으로 만들어내었다. 단어의 기원은 조금 달랐지만, 의미는 비슷했다.

‘중국공산당이라, 좋아. 참으로 마음을 울리는구나.’

* * *

임시정부는 북벌을 준비했다.

류용은 경사를 통한 중앙집권적 통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화민국의 3억 인민을 대변한다!”

임시정부에게 있어, 옛 명은 중화민국의 온전한 영토였다. 군벌들은 그곳에 눌러앉아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간적들에 불과했다. 전부 토벌해야 했다.

가장 먼저 토벌대상으로 지정된 자는 자연스럽게 하북군이 되었다.

군벌들은 상황을 면밀히 주시했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원래라면 가장 큰 세력 두 곳이 싸우는 마당이니, 지금 이 상황을 이용했을 것이다. 군벌들은 임시정부를 더 꺼려했지만, 하북군이 패권을 잡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기 전에 강한 쪽을 치면, 균형은 다시 맞춰질 수 있었다. 새로운 균형은 이전보다 다른 군벌들에게 더 유리한 환경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껏 군벌들의 팽팽한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직례는 더 이상 군벌이 아니었고 임시정부로 바뀐 상황이다. 이들이 대중들을 선동하고 노골적으로 반군벌정책을 천명하자 군벌들은 이전까지와는 달리 큰 위협을 느꼈다.

먼저 움직인 것은 하북군이었다. 그들도 노골적으로 반군웅이념을 들고나온 임시정부를 마땅찮게 보다가 이왕 싸울 거 선공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

개천 488년(CE 1763년), 계미년 3월에 일어난 전쟁은 하북군벌이 임정의 영역이었던 서주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일어났다.

임정으로서는 급습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기에 당황했다. 하북과 임정의 경계선에는 산동의 세력이 있었다.

산동군벌 왕상문은 지금껏 중립을 지켜오며 이리저리 교활한 태도를 보여 이번에도 하북의 편을 들어주기보단 그저 중립을 지킬 것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대놓고 하북군이 제남을 비롯한 그들의 영역을 통과해 이동하는 것을 허락했다.

임정은 세 가지 측면에서 불리했다.

첫째는 당연히 기습이었다.

둘째는 직례군부의 이양 단계에서 벌어진 일련의 갈등이 완벽하게 봉합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비록 나라동훈은 자신의 후계자로 류용을 낙점한 뒤 최대한 지원을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육성한 사람들의 충성은 아직도 나라동훈에게 있었다. 죽은 이후에도 그의 빈자리는 상당히 크게 느껴졌다.

또한 직례군의 절반은 양송산의 병력이었다. 이들은 송산의 죽음 이후 마땅한 구심점을 찾지 못해 지금은 투항하긴 했지만,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 뜬금없이 혁명을 운운하며 이리저리 활개 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그들로서도 조금은 더 시간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반대로 두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기도 했다.

대중들의 민심은 완벽히 중화민국과 석암 선생에게 있었다.

군벌들의 패악질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투가 중화민국 임정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도, 임정군은 오히려 병력이 늘어났다. 사방에서 의용병이 몰려들었다.

또한 중원대동계의 약속도 있었다. 그들은 내부에서 호응할 계획이었다.

한창 전쟁이 벌어진 계미년이 지나고 갑신년이 찾아오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동안 두들겨 맞기 바빴던 임정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기윤이 이끄는 임정 북로군이 정식으로 거병했다. 자연스럽게 류용의 임정군은 임정 남로군이 되었다.

내부에서의 중상이라는 종양이 곪아 터지자, 하북군은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토록 강력했던 군벌은 민심을 살피지 못한 죄로 빠르게 침몰하기 시작했다.

북벌의 대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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