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94화 (494/653)

세 명이 오리라(2)

신기한 노인이다.

류용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평생 자신의 피가 닿지 않은 나라를 위해 이렇게 헌신하는 것은 대관절 어떤 연유인가 궁금했다.

물론 류용도 그와 서황비 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그저 거리에 떠도는 소문 정도라 여겼다.

물론 나라동훈이 형편없이 대우받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동훈은 직례군벌의 이인자로, 절강으로 대표되는 국제무역은 물론이고 사실상 껍데기뿐인 명의 함대를 총괄하는 엄청난 위치에 놓인 사람이다.

당연히 일신의 위세와 번영은 쉬이 이룰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동훈은 온통 악취 나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지금 직례가 군벌들의 대표로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가장 강력한 무력이었다. 그리고 그 무력의 대부분은 나라동훈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양송산은 이를 견제하여 야금야금 동훈의 세력을 강탈해갔지만 그럼에도 그를 완전히 축출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당장 그렇게 한다면 사방에서 직례로 짓쳐들어올 것이 뻔했다. 명의 수도였었고 지금도 중원 최대의 도시인 경사를 얻은 자가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 뻔했으니까.

그러니 명 최후의 충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리라.

하지만 류용이 동훈과 대면했을 때, 그는 실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노인은 자신의 저택 중정 화원에 있었다.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이 영락없는 촌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무인 출신답게 덩치가 컸지만,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선생의 말씀은 실로 이치에 맞소. 허나, 지금 이 상태론 선생의 뜻을 절대 이룰 수 없소이다.”

동훈도 송산과 비슷한 소리를 하려나 보다, 류용은 내심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었을 때, 류용은 그의 수학이 헛되었던 것처럼 크게 놀랐다.

“선생의 뜻을 세우기 위해선 명을 무너뜨려야만 하오.”

노인은 담담히 그렇게 말했다.

류용이 기겁했다.

그는 권력에 어떠한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공부를 좋아했고, 또한 이 땅의 사람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길 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제가 찬탈을 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잘못 보셨습니다.”

동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외다. 선생께선 그렇게 오래 네덜란드에 계셨으면서 바로 옆 나라의 일을 보지 못하셨소?”

“…….”

류용이 마치 한 대 맞은 듯 우두커니 서서 그를 보았다.

동훈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생각과 관념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국제 정세에 나름대로 해박했다. 명나라 관리답지 않았다.

“구시대적 천조질서로는 더 이상 이 나라를 번영케 하기 힘드오. 나는 그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지.”

노인은 담담히 그렇게 말했다.

― 續

이을 속, 그녀는 계속해 나가 달라고 했다.

대체 무엇을?

하지만 노인은 확신했다. 그 뜻이 껍데기만 남은 명에 있지는 않으리라고.

개혁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안으로 드시지요, 선생. 나눌 말이 많소.”

둘은 그 뒤로도 더 내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인은 류용과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통의 야심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보좌할 책사를 얻는 것이 일반적이었겠지만, 노인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류용이 이 일의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구시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류용은 가치관도, 인품도, 언변도 훌륭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사람 일이라 하나, 지금까지 관찰했던 것으론 그는 충분히 동훈의 기준점을 충족하고도 남았다.

학문이 깊다고 하나, 아직 자신의 길과 기타 여러 가지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 류용도 그의 말에 아주 큰 감화를 받았다.

자신이라고 해서 이 현실에 개탄하지 않았겠는가. 다른 모든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또한 마음 한편에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다면, 아마 뜻이 맞는 동지들을 모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류용은 학문적 명성뿐, 실제적인 기반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상태에서 군벌에 대항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부인, 그것도 직례군벌 2인자의 후원은 빈말이 아니었다. 특히나 동훈이 양송산도 경계할 만큼의 군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중양통상대신의 조력이 있다면 거사의 가능성은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

* * *

이후 류용은 열정적으로 혁명의 준비에 매달렸다.

그는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중화동맹회를 구성했다. 반쯤은 지하조직이었지만 동훈이 총독으로 있는 상해에선 운신의 폭이 상당히 넓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지식인들의 동호회 수준을 훨씬 능가하기 시작했다. 중화동맹회는 지나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정치단체라 평가해도 무방했다.

그는 중화동맹회에서 그의 사상을 조금 더 가다듬었다.

류용이 제시한 중화혁명의 3원칙은 송성산에게 제시한 것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조금 더 구체적이 되었는데, 전제군주정 대신 민본적 공화주의적 노선이 구체적으로 천명되었고 반제국주의와 함께 토지 분배에 대한 논리와 산업과 교육에 대한 논리도 보강되었다.

성숙해지는 그의 사상 덕에, 그가 밖에 나와 말을 할 때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군중이었다. 대부분은 상해나 절강인이었지만, 저 멀리 하남이나 섬서에서 그를 보기 위해 상해까지 온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을 다 한 셈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소!”

모인 사람들 앞으로 류용이 나아갔다.

그의 말이 시작되니, 모인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느냐,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느냐 그렇게 물었소이다.

왜 이민족들이 우리의 강역과 신민을 침탈하고 문물과 예절을 모욕하고 있는지.”

모두가 그의 대답을 궁금해했다.

“그래서 말했지요. 당신이 잘못한 것이라고!”

청중들은 수런거렸다.

“충청(忠淸, 고염무) 선생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천하흥망은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이니, 나에게도, 그대들 한 명 한 명에게도 작금의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실로 옳은 말씀을 하신 셈입니다.”

그의 말은 거북할 만했다. 모인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저 일관된 피해자였다. 이게 다 너희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이곳에 자리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실망하여 떠나기 전, 류용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죄인은 바로 이 나라고 이 나라의 위정자요. 어리석은 자들이 국가를 줄곧 잘못 통치하였기에 백성이 굶주리고 일어서지 못했던 것이오.”

“…….”

류용은 그 말을 마치고 연단에서 아예 내려갔다. 그는 사람들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수런거렸다.

“보시오. 나는 외국에서 공부를 많이 했소. 오래 했소. 그랬기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소.”

목소리는 여전히 컸다. 류용에게 손을 잡힌 청년이 얼떨결에 물었다.

“무엇입니까?”

“그대와 내가 다른 것은 오직 기회, 그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비록 나는 인지조차 하지 못할 나이에 부모를 모두 황망히 잃고 화란으로 떠났으나, 두 분의 희생 덕에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소. 그렇기에 내가 다시 이 자리에 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오.”

그는 손을 뻗었다.

“태평양 동쪽의 나라를 보시오. 고려 제국을 보시오. 그대들은 저 나라가 우리와 크게 다른 것이 있다고 느끼오?”

크게 다르다.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는가. 지나인들은 언감생심 꿈꾸지 않았다. 그들도 세상을 살아오며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특히 상해인들은 더더욱.

제국인들. 똑똑하고 근면한 자들, 도덕적인 자들, 신뢰할만한 자들.

하지만 류용은 알았다.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고려인들은 외형이 다양했다. 그중에는 원주민계도, 유럽계도 있었지만 예맥한계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입만 다물고 있다면 예맥한계와 지나인을 구별하지 못했다.

차이는 오로지 후천적인 요인이 대부분일 것이다. 교육과 문화, 경제의 힘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는 확신했다. 중원의 사람들도 교육을 받고, 조금 더 계몽된다면 미래에 충분히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고. 중원의 사람들도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물론 고려와 나란히 할 수는 없겠지만, 덕국이나 조선을 제치고 그 바로 밑에 위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조선이 그러고 있지 않은가.

중원과 반도의 관계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삼별초 대원정 이후의 역사야 논외로 하더라도, 그 전의 반도는 중원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오로지 변방에 속했다.

또한 그는 네덜란드에 있을 때, 소위 말하는 선진국 중 하나가 전화를 딛고 수습하는 과정을 보았다.

프랑스, 지나인들에게는 불란서나 법국으로 알려진 자들.

과거가 있는 류용은 프랑스를 싫어했다. 1공화국과 2공화국이 다른 것을 알지만 그로선 절대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금 모으기 운동, 그 의기는 칭찬할 만했다. 본받을 만했다.

그러니 그는 중원의 사람들도 역량이 있다 확신했다. 아편과 학정으로 신음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하나는 보잘것없소. 마치 밟으면 죽는 작은 벌레와 같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법이라오. 또한 지금 이 시대는 제아무리 역발산기개세라도 영웅 한 명이 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소.

하지만 뭉치면 다르오. 인민의 의지가 가진 역량은 무궁하고 무한하오. 산을 들어 올리고 바위를 쪼갤 것이며 바다를 가를 것이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오!”

그는 보았다. 문명의 힘을.

강과 바다를 막는 거대한 둑, 대륙을 관통하는 거대운하, 하늘을 찌를듯한 마천루, 바다를 떠다니는 거함들.

문명이라 함은, 인민의 의지가 표상화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소리요! 나에게도, 이 청년에게도 책임이 있소! 동지들 하나하나가 세상을 바꿀 웅대한 힘이 있는데, 그것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동지들, 동지들! 나는 이곳에서 그대들에게 목놓아 주장하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전민(全民)이 함께 이 세상을 바꾸어야 하오! 장강 상류의 물결이 거칠게 흐르듯 빠르고 과감하게 몰아쳐, 탁류를 청류로 바꾸어 나가야 하오!”

지나인들은 주먹을 쥐었다. 어떤 사람들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동지들, 모두 시대의 사명에 부응하시오. 조국과 민족의 역사를 바꾸는 순간에 동참하시오! 어느 한 사람의 명(明)이 아니라, 모든 인민의 나라를 위해, 나와 그대들, 우리의 자식들을 위해!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위해!”

열기가 퍼져나갔다. 마치 건조한 초원에 불이 붙는 것마냥, 빠르게 모두의 머리를 태웠다. 그 속에 있는 모든 불만과 응어리진 한을 태웠다. 그리고 그 속에 오로지 류용의 뜻이 새겨졌다.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박수 치고 눈물을 흘렸다. 서로 얼싸안았다.

이곳에 와 류용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뜻을 나눈 동지가 되었다. 형제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열기는 지금까지 중원에 있었던 모든 혁명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저 무뢰배와 선동가들에 의해 일어난 태평천국과 같은 천박한 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들의 뜻은 고귀하고 올바르다. 그렇기에 죽음을 불사할 만한 열의가 있었다.

그렇기에, 1761년 신사(辛巳)년에 일어난 이 혁명은 반드시 성공하리라.

류용은 한자 한 글자가 적힌 종이를 꽉 쥐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 * *

“이게 무슨!”

양송산은 격노했다. 그는 곧바로 조치를 취했다.

그도 바보는 아니기에 줄곧 나라동훈과 류용의 모습을 감시하고 있었다. 도리어 이런 면에서는 그의 직감이 좋았다. 둘의 조합은 어딘가 상당히 불안했다.

그리고 송산은 어느 순간부터 둘을 완전히 정적으로 규정했다. 그들의 회동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다. 또한 류용은 상해에서 도무지 묵과하기 힘들 정도의 불량한 행동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나라동훈을 경사로 소환해 꾸짖었다. 총독이 관리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는 물음이었지만, 숙청할 명분을 쌓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이미 경사에는 그의 사람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었다.

“제가 한잔 올리지요, 총리.”

하지만 노인은 초연한 얼굴로 그의 질책을 받아넘기고는 오히려 술을 올렸다. 명성 높은 고려산 소포주라 했다.

이 뻔뻔한 영감쟁이. 뇌물이 먹힐 것 같으냐? 그 술이 네 마지막 술이 될 것이다.

송산은 이를 으득 갈았다.

하지만 송산은 술을 넘긴 뒤 화끈해지는 고통에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뭐… 뭣이?”

송산의 잔은 깨끗했다. 그러니 술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자신의 술을 따라주는 노인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먼저 술을 들이켜는 노인의 모습을 본 뒤에야 자신도 마셨다.

‘분명히 확인을….’

“크흑!”

그 생각과 동시에 동훈이 신음을 흘리며 허물어졌다.

이놈, 자기가 먼저 마신 것이로구나. 송산은 웃을 힘도 없어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를 많이 먹은 데다가, 먼저 마시기까지 했으니 독의 효과는 이미 몸에 돌고 있었을 것이다.

“무… 무슨 생각으로, 대체 왜…!”

동훈은 의자에서 쓰러진 채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네놈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직례군벌의 두 수장이 나란히 죽은 경사.

수많은 혼란함이 퍼지는 가운데, 곳곳에는 청천백일(青天白日)기가 휘날렸다.

경사뿐일까, 혁명의 본고장인 상해와 절강에서도, 광주에서도, 그리고 직례와는 조금 떨어진 다른 군벌들의 거점에서도 청천백일기가 휘날렸다. 화들짝 놀라 금방 치우긴 했지만.

하북군벌의 거점, 연경에도 그 소식이 퍼졌다.

“난 석암 선생을 봬야 하겠다. 배편을 알아보거라.”

또 다른 비밀조직이자, 중원대동계의 거두, 기윤(紀昀)도 서둘러 옷을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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