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이 오리라
옥저는 팔기, 정확히 말하자면 오기의 난을 완전히 격퇴했다.
이홍력이 이끄는 오기는 처음 그 위세가 대단히 강성했다. 군사강국이라는 옥저의 정예병이 거의 전부 모였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심지어 한때는 오기가 옥저 서쪽의 거대한 땅을 다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옥저는 본래 국가적으로 비정상적일 만큼 동해안의 작은 부동항들에 의지하는 나라였다. 동쪽을 적으로 돌린 이상, 오기에게 희망은 딱히 없었다.
또한 아무리 위세가 강하다 한들, 그들은 혼자였고 옥저 조정은 그 뒷배에 대외적으로 많은 지원이 있었다.
초반에 큰 위기에 봉착했던 옥저 조정은 힘겹게나마 차근차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와해된 충성파 삼기를 다시 규합해 이름을 바꾸고 고려식 근위여단 편제를 하며 수도를 방어했고, 수도의 위협이 확실히 제거된 이후에는 조금씩 손을 뻗어 약간 늦은 감이 있지만 제대로 된 국민군대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구시대적 팔기의 전통은 국민군대보다는 소수의 정예군대를 고집하는 이유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려는 대전쟁 이후 철 지난 소총과 다혈포, 노획된 유럽의 무기들을 헐값에 공급했다. 도이치어(오스트리아어)와 프랑스어, 베네토어가 적힌 무기가 옥저의 땅에서도 굴러다녔다.
어쨌든 옥저는 이제 보병대를 중심으로 천천히 반역도당들이 점령한 국토를 수복해 나갔다.
반면 반란군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윤진이 은거한 이후 지휘권을 잡게 된 이홍력은 객관적으로 볼 때 굉장한 수준의 전술적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전 발발 이후 이 년에서 삼 년이 되어가는 시기 동안 옥저의 중앙군을 거듭하여 격파했다. 사기는 하늘 끝까지 올랐으며, 모두가 그를 칭송했고 오기는 하나로 뭉치는 듯했다.
하지만 옥저 조정이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반격하자 홍력도 그때부터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병대 중심의 기동대로 보병대를 이길 순 없었다. 옥저 중앙군은 방어선을 지으며 천천히 참호전을 하는 것마냥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방어선 밖의 저 광활한 들판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홍력이 자신 있는 싸움에는 어울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철저하게 네놈이 오라는 식의 전투는 중앙군이 절대로 유리했다. 중앙군은 공장에서 철조망도 가져오기도 했다. 오기의 말은 철조망 지대를 돌파하지 못했다.
또한 오기가 가진 여러 가지 이점 중에는 그들 스스로가 내팽개친 것도 있었다.
내전이 발발한 이후, 민족주의적 옥저인들은 오기를 지지했는데, 일부는 의용군까지 합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기는 이 의용병을 사실상 총알받이로 사용했고, 최소한의 보답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고급 군인들과 의용병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오기는 내전이 초반을 지나고 중반으로 들어서자 현저하게 부족한 보급을 충당하기 위해 반쯤 비적 떼로 탈바꿈했다.
그들은 평시에는 러시아 포로들과 원주민들, 남쪽의 유목민들을 착취했는데, 그것으로 완전히 충당할 수 없었기에 이제는 같은 옥저인 촌락에도 총을 들이대며 강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니 여론은 차츰 악화되었다. 민족주의에 열광했던 자들도 오기의 작태를 보며 서서히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개천 465년에 고려에서 산업박람회가 개최될 때에는 옥저도 반역도당들을 거의 다 격퇴하고, 투항한 반역자 수괴의 아버지인 이윤진을 데리고 돌아왔던 것이다.
이런 격렬한 내전은 옥저 사회에 한동안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을 낳을 것이 분명했다.
옥저는 고려의 조언을 받아들여, 내전의 뒷수습을 위해 투항자들에게는 너무 잔혹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이윤진은 이홍력이 일으킨 러시아 황자 암살 사건의 은폐를 시도한 혐의와 반란의 방조자 혐의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간 세운 공이 적지 않았고 이후의 반란에는 관여치 않았으니 무기징역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윤진은 이후 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옥저의 충신으로 남길 원한 그의 최후를 안타깝게 여긴 왕은 윤진과 함께 투항한 맏아들 홍휘의 죄를 감면하여 반쯤 끊긴 가업을 잇게 하였다.
다만 옥저 왕가가 개국공신 솔빈 이씨 안현공파에 준 단서철권은 윤진의 대에서 소멸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팔기의 특혜는 완전히 사라졌다.
반면 이홍력은 아무리 단서철권을 운운하더라도 역적의 수괴인 만큼 목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옥저 조정이 눈에 불을 켜고 잔당을 토벌해도, 옥저 땅에서 홍력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 * *
국제적으로는 지나, 혹은 지나인들의 말로는 여전히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원.
이 땅은 참 신기한 땅이었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도, 내부에서 스스로를 바라볼 때도.
합치면 분열했고, 분열하면 합치려 들었다.
명이 종말을 맞이한 뒤, 중원은 수십여 개의 군벌로 쪼개졌다.
쪼개진 군벌들은 명목적으로는 경사의 지시에 따르긴 했지만, 이미 경사는 중원 전역에 대해 실효적으로 지배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후한 말의 군웅할거와 완전히 비슷했다. 조조와 다름없는 직례 군벌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먼 방계 주씨를 황제랍시고 세웠지만 아무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북, 남양 등의 강력한 군벌들은 제각기 모시는 허수아비적 친왕이 따로 있었다. 그 말고도 중소규모 군벌들도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 의외의 일도 일어났다.
그동안 주씨의 명에게 완전히 반대하며 일어난 반역도당들의 나라, 이씨의 순도 중원의 패권 다툼에 냉큼 합세했다.
심지어 바다 건너의 장씨의 주도 힐끔힐끔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지나의 구성원이었던 나라 중에서는 대리만이 유일하게 경사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셈이었다.
이 패권 다툼에 참가한 세력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하나였다. 혼란을 종식할 세력이 앞으로 중원의 패권을 움켜쥘 것은 자명해 보였다.
물론 이제 중원의 패자가 감히 ‘천명’을 운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중원의 구성원들은 모두 자신이 중원 통일의 주인공이 되길 모두 염원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다툼에 안 그래도 궁핍한 백성들의 삶은 더욱 수렁 속으로 깊게 빠져들어 가고 있었지만, 군벌의 수뇌부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영웅은 원래 난세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며 태어나는 것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일은 있었다. 근래에 고려는 그가 이끄는 국제기구를 통해 아주 강력한 마약단속정책을 밀고 있었다. 특히 최근엔 중원을 좀먹던 해남도 일대의 마약상들도 대대적인 철퇴를 맞았다.
그로 인해 외부에서 지나에 흘러들어 가는 마약의 양은 객관적으로 매우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의 손이 닿지 않은 내륙의 지나 군벌들은 스스로 양귀비를 재배했다.
아주 웃기는 일이었다. 외부에서 들여오는 아편은 그렇게 욕하던 자들이 아편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제각기 앞다투어 한바탕 해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륙 군벌들은 이것들이 통일을 위한 군자금으로 잘 쓸 수 있으니 필요악이라 여겼다.
물론 난세에는 이런 파렴치한 간웅들뿐만 아니라 정말로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혼란한 지나의 상황을 진심으로 타개하여 다시금 이곳에 평화를 가져오길 간절히 열망하는 자도 있었다.
지금 지나인들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세 명이었다.
그 세 명 중 지나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류 선생이었다.
* * *
류용(劉墉)의 일생은 실로 기구했다.
그는 원래 산동에 살던 류통훈(劉統勳)의 아들이었다.
어느 날 류통훈은 바라던 대로 명 황제 주동휘 치세에 미관말직이나마 작은 벼슬을 얻게 되었는데, 관직을 얻은 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산동을 떠나 무창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는 인품이 좋은 사람이었다. 비록 말단 관리였으나 나라를 진심으로 신경 썼고 나름대로 견문도 넓어 국가 개혁의 욕망도 있었으며, 또한 산동에서부터 이어진 예수회와의 인연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심지어 세례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창은 곧바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지는 주 무대가 되었다.
태평천국군은 금방 무창을 장악했다.
무창에 있던 관군은 형편없었다. 류통훈은 자신도 이 역도들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닌가 절망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역도들은 무지렁이였고 완전히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선 그와 같은 관리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목숨만은 살려두었다.
그래도 이승에 있는 것이 어디냐, 하며 류통훈도 그들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가족 전체가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라 다른 방도도 없었다.
태평천국의 기세는 엄청났다. 하북군을 이끌던 명장 서기효도 조정의 농간이 있었더라지만 결국 무창 앞에서 패퇴하여 돌아가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화무십일홍이라 하여 그토록 큰 기세를 자랑하던 태평천국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창에서의 비극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중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 의해서.
당시 지나에서 벌어진 태평천국 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많은 나라에서 원군 아닌 원군을 보내었다. 그중에서는 그래도 현지의 민심을 신경 쓰는 고려나 옥저 같은 군대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군대들도 있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3개국군은 대표적으로 후자에 속했다.
이들은 태평천국보다도 포악했고 야만스러웠다. 류통훈과 그의 아내는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순간까지도 이들의 눈에 서린 광기의 이유를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이들이 무창에 한 짓거리는 열강의 만행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에 남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했다.
부부가 죽자, 그 끔찍한 현장에서 남은 사람은 오직 한 명, 류용밖에 없었다.
젖먹이에 불과한 그는 당장이라도 죽을 운명이었을 것이다. 시체들이 썩어가는 현장에서 어린 아기가 이틀이라도 더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하늘이 도우심인지, 때마침 갓난아기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에서 그를 집어 든 사람은 수염이 짙고 눈이 푸른 서양인이었다.
무창의 학살을 일으킨 사람들과 겉모습은 같았다.
하지만 그 서양인은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과는 달리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사령관 요한 바이난드 반 구르는 어미의 목에 걸린 예수회 십자가를 챙기고 아이의 주먹에 쥐여주고는 류용을 번쩍 집어 든 다음 말에 올랐다.
“우리는 여기서 빠진다. 스타텐 헤네랄의 질책은 내가 감수할 테니 전군은 파푸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거라.”
이후 네덜란드군은 파푸아에서 부대 편성을 다시 했고, 대부분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덕분에 어린 류용은 반 구르의 손에 이끌려 네덜란드로 갈 수 있었다.
요한 반 구르는 사실상 그의 양아버지 노릇을 했다.
나이가 이미 예순을 훌쩍 넘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여 그 말이 무색하긴 했지만, 요한의 아들인 마르코도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류용을 여러모로 후원해 주었다. 덕분에 그는 지옥도에서 구해진 아이였음에도 편안한 소년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성장하여 대학까지 나왔다. 그가 다닌 레이던 대학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고, 동문도 대단했다. 르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같은 걸출한 철학자들이 이곳에 다녔었다. 네덜란드의 왕귀족들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류용은 네덜란드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인생 자체를 배울 수 있었다. 태어난 땅이 아닌 완전히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타지 생활임에도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의 차별 같은 것은 없었다. 적어도 그는 학문을 해나가면서 필연적으로 배워나가야만 하는 고려어에 굉장히 유창했고, 겉모습도 제국인과 명인을 구분하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했기에 정말이지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고려인을 미워하는 나라라면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네덜란드는 가장 대표적인 친려파 국가 중 하나였다. 예부터 많은 고려인들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고, 용맹공 김홍으로부터 이어진 그들의 국왕도 혈통상 그 피가 섞여 있었다.
그러니 류용은 그저 반쯤은 네덜란드인으로, 반쯤은 고려인으로 살아가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네덜란드에서 마음이 맞는 상대와 가정을 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제적인 조국을 잊지 않았다. 그가 손에 쥐고 다니는 예수회 십자가는 여전히 불에 그을려 있었다.
결국 그는 지나의 땅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나이 서른세 살이 되었을 때였다.
류용은 금방 명성을 얻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외국어를 자유롭게 하고, 또한 여러 가지 시류에 밝았다.
또한 서른이 될 때까지 유럽 제일의 대학 중 하나에서 많은 학문을 배운 그의 식견은 측량할 수 없는 호수와도 같았다.
소문은 널리 퍼지고 퍼져, 류용의 별호에서 따온 석암(石庵) 선생에게 배움을 청하고자 구름처럼 많은 명사들이 그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류용은 네덜란드인 아내와 다소 이질적인 모습을 한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상해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 모습은 상해를 다스리는 사람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직례군벌의 2대 수장이자 껍질만 남은 명의 내각총리대신 양송산은 그의 신하인 중양통상대신이자 상해 총독인 나라동훈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그를 초빙했다. 어쩌면 태사의 자리도 줄 수 있어 보였다. 나약한 중앙의 권위를 명성 높은 선비를 통해 충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양계의 뒤를 이어 명의 제일인자 자리에 오른 양송산은 그 능력이 아버지에도 미치지 못했다.
양계는 탐욕스럽고 교활했으나 적어도 기회를 보는 능력은 출중했으며, 한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라동훈과도 협력할 정도로 사고가 유연했다. 그러나 그 자식은 두 장점조차 가지지 않았으며, 단점은 더욱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류용은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는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몰랐다.
“내각총리대신께서는 세 가지를 하셔야 합니다. 첫째로는 애민정신에 입각하여 정치를 공명정대하게 하셔야 합니다. 매관매직을 금하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올바른 선비를 등용하여 관직에 임명하고, 편중된 권력을 분할하여 삼권분립적 원칙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견제케 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인민을 안락하게 해야 합니다. 뒤에서 자행되는 아편과 무기 매매를 완전히 금지하십시오.
또한 지주에게 과하게 집중된 토지를 일반 백성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고려의 선진적 측량 방식을 도입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국가의 기초를 강고히 해야 합니다. 선진적 대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실용적인 기술과 학문을 장려해야 합니다. 사람의 노동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공장을 지어 돌려야 합니다. 철도를 깔고 전신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만약 내각총리대신께서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성공하신다면 분명 일신으로 명신의 반열에 오르실 것이고, 두 가지를 성공하신다면 개인을 넘어 중원의 통일을 이루어 내실 수 있을 것이며, 세 가지 모두 성공하신다면 중원이 또 한 번 천하의 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가납하여 주십시오.”
양송산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기보다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나중에는 대놓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대는 양이들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이론은 정말 잘 알고 있구려. 하지만 현실성이 없소. 이 사람이라고 저걸 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이오? 나라에 돈이 없는데 뭘 어찌하란 소리요.”
관직과 무기, 마약을 거래하지 않으면 돈이 모이지 않는다.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송산은 빈정거렸다.
“중양통상대신이 늙으니 사람 보는 눈마저 사라진 모양이구려. 하하.”
하지만 류용은 충분히 알았다. 이미 직례군벌의 부정부패는 최악이었다. 그 뒷주머니로 돌아가는 돈을 모으고 모은다면 개혁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 아니 중원의 잠재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제국에 뒤이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영토의 크기를 고려해 볼 때, 여전히 인구밀도는 제국보다 높을 것이 분명했다.
류용은 자포자기한 채로 상해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그를 불렀다.
명 최후의 충신이라 일컬어지는 사람. 역설적이게도 옥저인이다.
류용은 알 수 없는 운명을 느끼며 중양통상대신에게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