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진주 중북부.
테르샤로마에서 북부로 가면 마나하탄(맨해튼)이라는 도시가 나왔다.
마나하탄은 경제적으로는 딱히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도시였다. 어쩌면 세계 최대의 도시, 가장 유명한 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 마나하탄은 남려의 석정마냥 북대동양의 주력 함대가 정박하는 해군기지가 가장 유명했다.
두 번째로는 긴 섬과 해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었다.
반면 그보다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무사차수트라는 도시가 나왔다. 토착 원주민 언어로 많은 언덕들, 혹은 언덕들의 땅이라는 소리였다.
이곳은 마나하탄보다 경제적으로 더 중요했다. 북려, 아니 고려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물고기 양식산업이 시행되고 있었다.
현 고려는 식량 생산에 있어 농업을 주로, 목축을 부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고려인들은 고기와 곡물 이외에도 생선을 굉장히 사랑했다.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륙에 있는 사람들도 유통기한이 긴 자반이나 말린 생선, 염장한 젓갈 등을 다양하게 먹었다.
정부로서도 어업을 장려했다. 다양한 식량 수급처를 찾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농업과 축산기술이 높은 고려도 작황이 좋지 않거나, 혹은 가축에 전염병이 돌아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여러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았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일단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아 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했다. 바다는 만만히 볼 존재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운도 많이 따라주어야 했다. 바다에 능통한 자들은 어장과 물고기 떼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하지만, 그럼에도 만사가 항상 좋을 리가 없었다.
또한 지금은 참여자들의 숫자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전통적인 어업국가들, 즉 항해 기술이 발달한 고려, 유럽,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사람들도 바다에 나가기 쉬워졌다. 소위 말하는 낙후된 지역의 강국들인 무타파와 메리나, 혹은 인도와 누산타라의 등지의 국가들도 소형 증기선 정도는 충분히 구매할 수 있었으니 어업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바다는 공공재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굉장히 자비로워 그물을 드리우는 자들에게 아낌없이 물고기를 나누어 주는 존재.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어업과 조선 기술의 발달은 개별 선박이 채취할 수 있는 수산물의 양을 가파르게 늘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물고기 개체 수에 대한 이야기가 진지하게 나오진 않았다. 그럴만한 시기가 도래하려면 꽤 멀었다.
하지만 이미 선례가 존재했기에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 운명은 불 보듯 뻔했다. 나중에는 오히려 늦을지도 몰랐다.
열강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간 포경산업으로 한때 고래가 정말 멸종할 뻔했던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대외 외교를 중시하는 경당조차도 이 문제를 국제기구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가장 격렬하게 주장했다.
결국 지금은 각국이 포경산업에 일정한 제한을 두게 되어 한숨 돌릴 수 있겠지만 몇몇 얌체 같은 나라들의 어부들은 여전히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는 한때 외교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강화나 노르웨이 같은 국가들이 그랬다.
다행스럽게도 고려인들은 진작부터 그들만의 특이한 기질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될 수 있으면 자동화, 기업화, 상업화를 추구하는 제국 사람들은, 이 불안정한 어업도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두고 싶어 했다.
― 물고기를 가축처럼 기를 순 없을까.
그동안은 기술발전이 미비해 그럴 역량이 되지 않았지만 다방면으로 발전한 지금은 충분한 가능성이 보였다.
* * *
개천 480년이 되자 물고기 양식산업은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다.
무사차수트는 세계 최초의 물고기 부화장과 양어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수는 조금씩 많아져 지금은 상당한 수를 자랑했다.
이곳에서는 북려 토종 얼룩 송어를 주로 생산했다. 그 밖에도 유럽산 송어나 연어, 바닷가재 등의 양식도 꾀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륙의 앙주와 미주리 같은 미시시피가 흐르는 곳에서는 민물고기 중에 가장 생산성이 높은 메기와 붉은가재 양식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고, 이미 미원에서는 물고기 양식 한참 이전부터 조선계들을 중심으로 굴과 해조류의 양식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무사차수트에 기거하는 주민 열에 넷은 거의 이런 양식업이나 수산업에 종사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빨리빨리 합시다. 오늘 내로 작업 다 끝내야 해요!”
“예이!”
사람들은 하루 종일 육지의 냉동고에서 꽝꽝 얼린 송어를 꺼내 냉동함에 집어넣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자, 냉동함은 부리나케 바다로 떠났다. 저 함은 이제 언 생선을 가득 싣고 곳곳의 항구를 돌며 납품을 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된 작업이었지만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번 납품으로 손에 쥔 목돈은 그 뿌듯함을 두 배로 늘려주었다.
기계제빙의 기술은 상당히 발전했다.
이전의 증기 냉동고는 대부분 박물관에 들어가 버렸고, 이제는 훨씬 진보된 냉동기와 제빙기가 보급되고 있었다.
심지어 배 위에도 탑재 가능할 수준이었다.
가장 먼저 발명된 냉동함은 제국군 복지에 극히 신경 쓰는 선제의 유지를 받든 해청이 해군에게 보급한 냉동함이었다.
다른 것 하나 실리지 않고 오직 식사에 쓰일 재료와 과일, 얼음보숭이 등의 부식거리를 포함해 먹을 것만 실어나르는 냉동함들은 무려 열한 척이 생산되어 지금은 각지에 있는 해군이나 해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중요한 함선이 되었다.
고려령이지만 너무 외딴곳이라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땅에서도 신선한 음식과 얼음보숭이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황상 폐하 만세였다.
냉동함의 등장은 당연히 어업에도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기존까지의 어업은 너무 빨리 썩어버리는 원재료의 특성상 소금이 없으면 유지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빨리 손질하고 냉동만 하면 알아서 신선함을 유지한 채로 수송해주니 더할 나위 없었다.
* * *
한 부부도 땀을 훔치며 보람찬 하루의 노동을 마무리했다. 서른 살 정도의 부부는 젊은 나이임에도 이미 이 일에 충분히 익숙해 보였다. 아내가 슬라브인 특유의 다소 이국적인 모습을 자랑하고 있더라도, 둘 모두 이곳에서 이미 십 년 넘게 살아왔으니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부부는 노동자들과 할멈들에게 수당을 골고루 나누어 주고 텅 빈 창고를 정리한 뒤 저택으로 떠났다.
이번 납품으로 꽤 큰 돈을 벌었다.
부부의 양식장은 주변에 비해 조금 규모가 작았지만 꼼꼼한 그들의 성격 덕분인지 매번 상등품을 기록하여 인기는 좋았다.
둘은 오랜만에 정육점에 들러 고기를 많이 산 뒤 저택으로 귀환했다.
― 덜컥
저택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안에 있던 세 명의 딸아이들이 부모의 귀환을 반기며 우르르 뛰쳐나왔다.
“엄마, 아빠!”
둘은 딸들을 토닥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양식장의 일은 참 많았기에 아이들을 보기 위해선 보모를 불러야만 했었다.
보모가 인자한 얼굴로 계단에서 내려왔다.
“어유, 고생 많으셨겠네. 얼른 쉬어요.”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물론 아직 쉬지는 못했다. 보모를 보내고 아내는 식사를 준비했다. 남편은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오늘은 지긋지긋한 생선이 아니라 밖에서 구워 먹는 고기 요리를 좀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아내가 그들을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말 그대로 두 명의 불청객이었다. 저녁 시간 즈음에 찾아오는 것은 일반적으로 예의가 아니었지만, 손님 대접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마음 쓰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꺼림칙한 자라면 그것이 불청객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리고 부군.”
그녀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에 속지 않았다. 이들의 정체는 그녀도 대충은 알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정보총국의 손아귀에서 자랐으니 당연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 돌이켜보면 대체로 흐릿했지만, 그녀가 누군가의 등에 업혀 고생을 하며 그 광대한 시베리아를 넘어 탈출한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날이 늦었는데요.”
“그동안 굉장히 바빠 보이셔서 차마 방문드리기 힘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늘까지 납품이었으니까요.”
그녀는 혀를 차더니 이윽고 경계를 다소 누그러뜨리고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안 했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뒷마당에 있을 남편을 불렀다.
“여보, 손님이 왔어요!”
뒷마당에서 덩치 큰 괴한이 아내의 고함에 도끼를 들고 오자, 요원들도 살짝 놀랐다.
저 두꺼운 팔뚝과 허벅지는 아마 용체가 아닌 인간의 몸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대치일지도 모른다.
요원들은 지금 대외국의 껍질을 쓰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여의국 사람들이었다. 잘 알았다.
‘역시 제왕지손이군. 영친왕계라던가.’
“운수가 영 좋지 않더라니….”
“하하, 죄송합니다.”
“…어디 앉아 있으쇼. 괜히 거든답시고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말고. 여긴 우리 집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 대헌도 이 시간에 찾아온 요원들을 썩 좋지 않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의사를 존중했기에 별소리 않고 두 사람이 더 앉을 자리를 마련하러 떠났다.
“얘들아, 밥 먹을 시간이다!”
아버지의 소리에 위층에 있던 딸들이 우다다 내려왔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장녀가 손님 중 하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나머지 두 딸은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영석이 삼촌!”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요원은 과장스럽게 감격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우다다 달려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공주를 쓰다듬었다.
“영석이 삼촌은 왜 맨날 이상한 소리 해? 내가 왜 공주야?”
요원은 흘깃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요원은 꿋꿋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 * *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났다.
배가 부른 아이들은 몰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을 비비더니 이내 부인의 지시에 모두 올라가 잠자리에 들었다.
― 타닥 타닥
풀벌레 소리와 함께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아내가 없는 틈을 타, 대헌이 의자에 앉아 있는 손님들에게 입을 열었다.
눈치는 있는지 방문하며 좋은 술을 몇 병 사 들고 왔던 덕에 대헌의 손에도 향긋한 소주가 들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헌의 표정이 풀리진 않았다.
“무슨 일이오.”
요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대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그녀의 핏줄을 잘 아오. 우리는 교제하고 결혼할 동안 서로 오직 진실만을 말하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부디 말씀해 주시구려.”
영석이라 불린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 목적도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두 번 설명하는 것이 딱히 귀찮은 것도 아니었다.
“상부에서는 전하께서 러시아로 귀환하길 원하십니다.”
“…빈 제위에 오르라?”
“예.”
남편에겐 실로 최악의 소리였다.
“차리차가 죽은 뒤에 류리크의 후사는 완전히 끊겼습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비자 러시아의 사람들은 지금 고통받고 있습니다. 섭정 귀족 의회는 제 잇속만 챙길 뿐이고 소비에트라 불리는 평의회도 전 비왕당파 구제동맹과 프랑스 출신의 과격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가라? 내 아내보고 가서 죽으라는 소리요?”
대헌의 목소리가 실로 날카로워졌다.
“…….”
요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유구무언이었다. 대헌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필부라 국가의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오. 하지만 이렇게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굳이 혼란스러운 땅에 보내야만 하겠소?”
“부군.”
이미 대헌도 그들의 방문부터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부부가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신문에서도 오랫동안 국제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지금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핏줄과 그 책임감을 들먹이지는 마시오. 나도 먼 방계이긴 하나 이 나라의 국성을 가지고 있소. 작금의 고려에 널리고 널린 것이 해씨더라도 엄연히 보첩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오.”
요원들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아내는 말이오, 예전의 그 끔찍한 기억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일부러 바닷가에 정착했었소. 그런 그녀보고 다시 내륙에 들어가라니, 이 얼마나 잔혹한 일이오?
지금 당신들의 제의를 들으면 나는 오직 한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소.
나와 내 아내, 내 딸아이들이 모두 저 과격한 멍청이들에 의해 이름 모를 창고의 지하실에서 총살당하는 그런 미래 말이지. 내 걱정이 틀렸다 말할 수 있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는 말이오.”
대헌의 물음에,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요원들의 표정도 조금은 씁쓸하게 변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단단했지만, 그럼에도 공감 능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이 가족을 사지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맞았기에.
행복한 가정을 꾸린 사람을 굳이 다시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은 컸다.
물론 선례도 있긴 했다. 따지고 보면 불가리아의 자애왕도 그런 처지였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그곳에 갈 당시엔 홑몸이었으니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었다.
반면 상부는 이 가족이 다시금 러시아로 귀환해 황실을 재건하길 원했다.
이는 몹시 위험했다. 어쩌면 갓 독립한 불가리아보다도 더더욱 위험할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위험할 땅이었다.
하지만 대헌은 말을 마치고 무심결에 뒷문을 바라보다, 그 현관문의 계단에 주저앉아 있는 아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올가….”
대헌의 아내, 올가 드미트리예브나 류리크의 눈동자는 심적 갈등으로 한창 떨리고 있었다.
갈등한다는 것 자체가, 요원의 제의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였다. 대헌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 계단 옆에 나란히 주저앉더니 어깨를 감쌌다.
올가는 대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엔 한이 맺혀 있었다. 그를 인지한 대헌이 고개를 떨구었다.
올가가 이들에게 구명지은을 지고 있다는 것은 그도 알았다. 여기 와서 정착한 것도, 사업의 밑천을 가지게 된 것도, 그와 만나서 결혼한 것도 사실은 다 이들의 보이지 않는 조력이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한참 동안 남편을 바라보던 올가가 그들에게 물었다.
“내 신분은요? 누가 한낱 어부를 황족이라 생각하겠어요?”
“그것은 걱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도이치와 불가리아가 보증할 겁니다.”
도이치에 있는 마리아 안나와 불가리아 태후 옐레나는 모두 한참 예전에 올가를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이긴 했지만.
그리고 설령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두 나라와 두 인물의 사정상 그녀의 핏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려가 슬라브 여인 아무나를 가지고 무슨 꿍꿍이를 부린다 해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고려도 그런 저급한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올가의 핏줄은 확실했다.
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증이 해결된 이상, 자세한 사항을 더 듣고 싶었다.
아까 엿들은 내용 말고 다른 내용도 있을지 몰랐다.
보통 요원들은 한 가지 제안만 들고 오지 않았다.
“내가 모스크바에 돌아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요?”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금방 대답했다.
올가가 제위에 오르기 전에 러시아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혹은 오른다 해도 금방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도 컸다.
그러니 상부에서는 다른 전략도 세우고 있었다.
“아국이 관리하는 크림 공국을 중심으로 그 위 자포르자 카자크의 땅, 그리고 키예프까지를 포함한 영토를 모스크바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계획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모스크바의 지배를 썩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었다. 만약 모스크바에서 공산혁명 같은 난리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나라를 하나 만들 여지는 충분했다.
특히나 류리크의 혈통은 모든 루스의 땅에서 신성하게 취급받았다.
키이우(키예프) 루스는 모스크바 루스보다도 더욱 유서 깊은 곳이었으니, 명분도 있었다.
올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러시아가 통제 불가능하게 된다면 아예 반으로 쪼개놓겠다는 계획이군요.”
“…그렇습니다.”
차기 러시아의 군주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속내를 밝히는 꼴이지만, 요원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남러시아, 신러시아, 루테니아, 키이우 루스 혹은 우크라이나.
이 나라의 국호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할은 차선이라도 좋은 수였다.
러시아가 설령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프랑스마냥 공화국이 되고, 공화국에서 더 나아가 이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국가와도 완전히 다른 괴상한 국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고려는 멀뚱히 그것을 바라보기보다는 한발 앞서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길 원했다. 이미 한 번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올가의 존재는 사용하기에 아주 훌륭한 패였다.
물론 고려가 뜬금없이 빈 러시아의 제위에 그들이 꿍쳐놓은 사람을 올리는 사실 자체가 러시아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임이 분명했지만, 상황이 그쯤 되면 더 이상 러시아의 여론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모아 기도하듯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손을 씻었지만 여전히 희미한 생선 비린내가 풍겼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중에 그 어떤 사람이 이런 삶에 만족하겠는가.
또한 선대의 의무도 있었다.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원통하게 눈을 감은 그녀의 아빠와 동생의 모습은 어린 나이에 보았음에도 충분히 선명했다.
사실 올가는 내심 지금의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주저하는 것은 가족 때문이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남편과 아이들이 희생되는 것은 용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대헌이 말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 그가 요원들에게 한 말과는 그 어조가 완전히 달랐다.
“원하는 대로 해. 아이들이야 이곳에 공부하라고 남겨두어도 되니까. 난 당신을 따라갈 거고.”
대헌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밤마다 뒤척이던 그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까닭을.
그녀의 고민이 가족 때문이라면, 자신은 양보할 수 있었다.
올가는 남편의 손을 쥐고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절대 크레믈에 가지는 않을 거예요.”
완곡한 찬성이다. 요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두 번째 안으로….”
하지만 올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 전에.”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 폈다. 북부 시베리아의 한기가 그녀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 앞에 이홍력의 목을 가져와요. 그런 다음에 제의를 수락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