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91화 (491/653)

혁명가들(2)

대전쟁은 유럽 사회를 완전히 바꿨다.

물론 대부분은 좋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었고, 많은 가옥과 재산이 파괴되었으며 문화재와 가치 있는 물건들이 사라졌다.

참여한 각국은 분명히 큰 대가를 치러야 했었다.

하지만 결국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 되기 마련이다.

대전쟁의 피해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자 수습이 되기 시작했다.

개천 5세기 말, 산업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도이치의 성장이 가장 돋보인다지만 중서유럽 대부분의 나라들도 제각기 나름대로 큰 발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후의 10년 10년이, 이전의 한 세기와 같다는 지식인들의 표현도 있었다.

세계 경제는 대호황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고려가 주도하는 세계 경제 발전은 낙수효과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물방울이 아니라 북려 명물 나이아가라 폭포마냥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뿐만일까, 동쪽의 도이치라는 불가리아 왕국도, 아랍 연방, 이라크 등지도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구시대적 봉건주의는 거의 완벽하게 소멸했고, 설령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전보다 확연히 약해졌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시민사회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대혁명의 시초면서도 대전쟁으로 아예 나라가 한 번 뒤집힌 프랑스는 더 이상 귀족과 평민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나라의 귀족들도 힘을 잃고 그저 뒷방에서 시가를 뻑뻑 피워대며 요즘 것들은… 하며 투덜거리기만 바빴다.

또한 전 세계에는 낙관주의가 퍼져 나갔다.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따른 국제기구의 리스보아 지원은 이 기풍을 단적으로 상징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을 터였다.

대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난 나라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공장을 돌리고 있었고, 그렇기에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이 코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1750년대 이후가 되자, 파리 코뮌은 이름만 ‘파리’였다.

전국적으로 파리 코뮌에 가입한 수는 대략 수십만에 달했으며, 어쩌면 수백만이 코뮌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소리도 나돌았다.

유럽 전체, 아니 유럽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전체로 확산되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추세를 고려해보면 그 수는 수천만이 넘을지언정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었다.

메이블리, 모렐리는 비로소 그들의 아름다운 이념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진입했음을 알아차렸다.

“노동 혁명의 성공이 코앞에 있네. 우리는 프랑스를 인민과 대동계만을 위하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야!”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자축했다. 토마스, 톰마소, 아드리안, 껑땅 등 위대한 선대 혁명가들도 이루지 못한 결과물을 그들의 대에서 수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노동 혁명이 폭발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이미 프랑스 사회는 거의 대부분의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세계 최초로 혁명이 성공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두 번 못 하리라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은연중에 한 가지 꺼림직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다.

노동운동은 자본가들과 사회에 대한 분노를 축적하여 그것을 자양분 삼아 자라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둘 모두 어딘가 어정쩡하다고 느꼈다. 한 나라와 한 사람이 문제였다.

“그거 아시오? 이번에 우리 공장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기로 했다더라고.”

“그 탐욕스러운 공장주가?”

“그렇소. 듣기로는 공화국 관리들이 요즘 많이 쏘다니며 단속한다 하더라고.”

“아, 그건 구제금융기금 덕이죠.”

“구제… 뭐?”

꾀죄죄한 작업복을 입은 남들과는 다르게 조금 더 유식해 보이는 다른 사람이 안경을 치켜들며 설명을 시작했다. 재수 없어 보였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프랑스는 전후 많은 배상금을 빚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다른 나라들의 빚은 빨리 갚았지만, 고려의 빚은 상대적으로 저이율이었으니 가장 늦게 갚았습니다.”

“음, 그렇지.”

“그러니 빚을 다 갚을 때까진 구제금융기금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줄곧 요구한 것들 중 하나는 프랑스의 노동문화 개선이었고.”

“그런 것까지 간섭을 하나?”

어느 누군가가 갑자기 불쾌한 듯 말을 했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런 사람을 흘깃 쳐다볼 뿐 동조하진 않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좋은 일이지 않소?”

프랑스의 경제는 빚을 거의 다 갚은 지금도 고려의 영향이 몹시 컸다.

프랑스말이 유난히 유창한 앙주계 고려인들은 전후 프랑스 경제를 상당히 장악한 상태였다. 사실 지금 객관적인 지표를 따지고 본다면 고려의 일개 주인 앙주가 프랑스의 국력을 능가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럼에도 제국의 주 하나가 나라 하나에 이렇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 고려인들은 구제금융기금을 통해 어차피 전범국이었던 나라의 경제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체질 개선을 해 놓았다.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이 잇따른 것은 덤이었다.

고려로서도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 인권을 챙겨줄 필요가 아주 많았다.

당연히 표면적으론 인권적인 문제를 들먹였다. 그럴듯한 대의명분이라 매력적이기도 했다. 다른 나라들도 고려의 행동에 저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투덜거릴지언정 순순히 따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고려는 항상 매를 든 엄한 선생님이었고, 철부지 학생들은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기 싫다면 올바른 행동을 해야 했다.

경제적인 동기도 충분했다.

고려는 자국 내의 노동자 비용과 외국의 노동자 비용의 불균형을 신경 쓰고 있었다. 해외로의 공장 유출이 가속화되면 썩 좋지 못했다.

그러므로 불평등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외국의 값싼 노동력을 조금 더 비싸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노동자권익을 챙겨줄수록 노동력의 비용은 증가하기 마련이었고, 고려의 공장이 외부로 빠져나갈 요인은 줄어들었다.

그러니 노동운동은 어딘가 맥이 빠진 채로 진행되었다. 격렬한 투쟁으로 얻어내는 것과 위에서 툭 던져주는 물건을 받는 것은 같은 물건이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완전히 그 의미가 달랐다.

2공화국의 프랑스 정부는 파리 코뮌이 선동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조금씩 수용했다.

심지어 요구하지도 않은 것들을 선제적으로 베풀기까지 했다. 안 하면 나라 안팎으로 두들겨 맞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 이런 여론의 앞에는 공화당 당수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볼테르가 있었다.

그 결과 더 이상 프랑스에서는 이전처럼 수면용 밧줄 하나에 매달려 자는 사람들을 보기 힘들었다.

굶주리다 죽는 노동자들도 별로 없었다.

최소한의 여건은 보장되었다. 아무리 악덕한 회사라도 이층 침대가 빼곡하게 놓인 좁아터진 막사 정도는 제공했으며, 식사 시간엔 맛대가리 없는 순무와 호밀빵이라도 주어지긴 했다. 이것조차 조금씩 개선되었다.

그러니 파리 코뮌의 사람들은 완전히 악에 받쳐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2공화국은 타협 가능하다는 개념이 박히기 시작했다.

* * *

“이래선 안 돼, 이래서야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코뮌의 핵심 수뇌부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모렐리는 그렇게 외쳤다.

타고난 혁명가이자 비타협론자인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의 이 어중간한 위기가 오히려 지금까지 숱한 위기를 헤쳐 나왔던 대동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고 느꼈다.

“대중들의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저들은 고려 정도 수준의 노동자 대우를 원하면 그저 만족할 뿐이야. 배고픈 인간이 되기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길 원한다고! 그래, 저 고려 놈들이 문제다. 고려 자체가 이 모든 봉건주의와 권위주의,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곳에 있음에도 저들은 저 나라를 동경한단 말이다!”

반면 메이블리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대중들에겐 실제로 자신들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중요하지 않겠나.”

“가브리엘!”

모렐리는 그 말에 격하게 화를 냈다.

메이블리는 모렐리와 같은 실천형 운동가였다. 둘은 노동자들의 결속을 위해 조합주의―생디칼리슴(Syndicalisme)―를 창시하며 직접운동, 즉 총파업과 총투쟁 등의 반자본가 운동을 벌인 동지였다. 껑땅이 가장 신뢰하던 두 명의 제자였기도 했다.

계급혁명,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탈민족주의. 이들이 만들어낸 생각과 운동들은 현대 대동3계의 근간이자 공산사회주의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동료는 지금 혁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타협주의에 물들어 완전히 타락한 것처럼 보였다. 메이블리는 어느 순간부터 정당과의 연대가 없는 생디컬리즘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부르주아의 조력은 부르주아 계층의 내부 모순성으로 인해 영원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그래, 너는 항상 네 주장에 모순이 있었지. 너는 법복귀족의 자손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고.’

지휘부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메이블리는 껑땅이 아끼는 제자였지만, 모렐리의 말마따나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그도 여러 저서를 쓰며 법 앞의 평등을 넘어 소유와 필요의 평등까지 주장하는 전형적인 공산사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다시 다른 내전이나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엔 회의감을 느꼈다.

그는 꽤 명망 있는 인사라 여러 친구를 두었는데, 장 자크 루소라는 친구는 그중에서 가장 유명했다. 장 자크 루소는 어린 나이에 소년병으로 대전쟁에 참가한 작가였으며 그 경험으로 쓴 책인 ‘깊은 땅속에서’는 참호전의 고통과 악몽을 생생하게 적어낸 책이기도 했다.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메이블리는 과격한 혁명론자이기도 했지만, 반전주의자이기도 했다.

‘우리 조국에서도 이젠 유럽 최초로 보통선거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노동자계급의 직접 행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비정치전략을 고수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현실성 있는 입장인가.’

노동자 연대를 통한 국가 전체의 총파업은 실현 불가능해 보였다.

자신이 반전주의자라 끝까지 최후의 수단은 실행하기 꺼렸던 것도 있었고, 살랑살랑 당근을 흔드는 공화국의 행보도 그 생각에 무게를 주었다.

반면 모렐리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도 참전자였지만 혁명에는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더 많은 피가 흐를수록 성공 확률은 높아진다고까지 생각하기까지 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더 많은 피가 필요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피도 필요했다.

그동안 모렐리는 혁명전파를 위해 국제적인 조직 수립에 나섰었다.

그의 대에서 대동계 3계는 세계사회주의의 기틀을 잡았고, 다른 나라의 노동자조직과 연계하기 시작했다. 파리는 코뮌의 최초 발상지이자 혁명의 수도라는 위명이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파리조차도 한계가 있어 보였다.

모렐리는 지금 이 파리의 상황이 어딘가 모르게 ‘실험실’ 같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풀어두고 그들의 행동과 이념이 어디까지 가는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그들이 실수하면 미래를 위한 코뮌의 모든 노력 자체가 전부 멍청한 행동이었다고 매도당할지도 모른다.

결국 파리 코뮌의 성장동력은 프랑수아마리가 통령에 오르면서 거의 끝났다.

다행스러운 점은 모렐리의 대에 3계는 이미 국제조직화에 성공했다는 점일 터다. 파리 코뮌의 성장동력이 끝났더라도 다른 곳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렐리 파벌은 공화국 정부에 의해 탄압당하며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모렐리는 차라리 이를 다행으로 여겼다.

지금 이곳은 고려의 영향이 너무 컸다. 다른 나라에서 시작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러시아로 향했다.

사실 중간에 프랑스보다 산업력이 더 강하고 노동자 계층이 더 많은 도이치에 몰래 한번 들러 상황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도이치에서는 혁명이 성공하기 어려워 보였다. 원래 도이치란 나라 자체가 조금 보수적이기도 했을뿐더러, 대독일 통일을 이루어 민족적 자부심을 한껏 고양시킨 대왕 프리드리히 2세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공공부조를 실시하며 서민과 노동자 계층에 대한 유화정책을 실시하니 현 도이치인들은 혁명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또한 도이치인들은 혁명이고 나발이고 프랑스인들의 말이라면 절대로 듣지 않을 놈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들은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러시아로 넘어갔다.

봉건주의와 그 모순, 악폐습이 잔존하면서도 어느 정도 최소한의 산업력이 뒷받침되는 땅.

또한 영토가 광대해 운신의 폭이 넓으며 농산물을 자급할 수 있는 곳.

정치가 지극히 혼란하며 지도자가 부재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태. 또한 소비에트로 대표되는 허울뿐인 평의회도.

그러면서도 이전부터 비왕당파 구제동맹 같은 혁명 동료들이 존재하는 곳.

이후로도 서유럽 출신의 혁명가들이 러시아로 향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할 만했다.

모렐리의 이후를 책임지며 러시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실뱅 마레샬, 그라쿠스 바뵈프 등처럼.

하지만 지금 모렐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 더 필요했다. 이제 주변에 열정적인 운동가들은 차고 넘쳤다. 이들은 험한 가시밭길도 넘나들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이론과 선동에 빠삭한 사회운동가들도 가지지 못한 재능이 있었다.

전쟁, 전투, 전술에 대한 재능.

이러한 재능은 사회 투쟁의 최종 국면과도 직결되어 있었다.

기존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선 전투, 즉 내전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들은 전부 처형당할 것이고 몇 명이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간다 하더라도 혁명은 또다시 한 세기는 더 미루어질 것이 뻔했다.

모렐리는 어쩌면 메이블리가 이러한 것에 한계를 느껴 타협파로 돌아서지 않았나 문득 생각한 적도 있었다.

* * *

“정말 이자가 그렇게 회유할 만한가?”

“그렇습니다.”

“…귀족 출신인데도? 그 가문은 러시아에서 꽤나 유명했다고 들었네. 예전에는 젬스키 소보르의 구성원이라고도 했잖는가.”

“이었지요. 지금 그 가문은 완전히 몰락해 가진 재산도 거의 없습니다. 기껏 저택이 전부라 들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다니. 참 웃기는군. 귀족은 망해도 몇 대는 간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이 현재 날이 갈수록 잔혹해지고 있는 러시아의 정쟁을 상징하지요. 이 가문은 죽은 차리차의 편을 들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프랑스에서 추방된 모렐리는 북해와 발트해를 지나 러시아 항구 이조라(잉그리아)에 도착한 뒤 근처의 도시인 노브고로드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현지 노동운동가의 추천을 받아 한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의 바퀴가 고장 나 한동안 걸어야 해 조금 짜증이 났다. 추방당할 때 경관에게 두들겨 맞은 골반이 아파왔다.

삼고초려의 일화는 모렐리도 책으로 봐서 알았다. 옛 지나의 땅에서 일어난 삼국시대의 일화에서 촉한의 유비는 명재상 제갈량을 등용하기 위해 세 번 누택을 찾아가는 수고로움을 감내했다 한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회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이 사람이 대단한가?

실전에서 아직 단 한 번도 증명되지 않은 자였으니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다.

“계십니까?”

현지 노동운동가가 저택의 앞에서 고함을 질렀다.

관리를 하지 않아 나무와 덩굴이 우거진 저택은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곧이어 저택의 안에서 한 사내가 나왔다. 나이는 젊어 보였다. 관리하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한 것을 빼면.

문득 모렐리는 한창 걷느라 지저분해진 옷을 가다듬었다. 쓰고 있던 모자도 반듯하게 고쳤다.

그는 청년의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알 수 있었다. 저 눈, 자신과 같았다.

전 동료 메이블리도 과거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원통함, 분노, 체념, 모든 감정이 다 담긴 눈동자는 분명히 좋은 혁명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청년의 재능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현지 조력자를 얻을 수는 있겠구나, 모렐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말씀을 나누러 왔습니다.”

“뭔 잡상인이… 꺼지시오. 돈 없소.”

수보로프 가문의 젊은 청년, 알렉산드르는 쾅 하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모렐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거듭해서 그 저택을 찾아갔다. 이 키 작은 청년에서 무슨 모습을 봤던 것일까. 껑땅의 모습이라도 본 것인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알렉산드르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대체 누구길래 다 망해가는 자신의 집 앞에서 이 지랄을 하는지 그도 한번 인맥을 동원해 알아보기도 했다. 아무리 지금 사는 꼬락서니가 시궁창 같아도, 귀족으로서 가진 인맥이 있긴 했다. 그는 결국 모렐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세 번째 방문에서야 그는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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