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87화 (487/653)

위대한 개자식(3)

“재미있는 사건이네요.”

권 사장과 오 과장이 떠난 이후, 연회는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 일을 떠들었다.

방해꾼 두 명의 이야기는 좋은 안줏거리가 될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네 명의 사람은 지금 이 사건을 꽤 유심히 바라보며 관찰하고 있었다.

연회가 절정에 이르는 저녁, 그들은 비슷한 시간을 두고 자리를 비웠다.

정자에 앉아 있던 견 회장도 그들이 떠난다는 소리에 뛰어나와 하나하나와 악수를 하며 배웅했다. 네 명은 모두 그럴 정도로 대단한 위세의 사람들이었다.

“벌써 가시려구요?”

“아, 의사가 요즘 간이 좀 좋지 않다고 했소이다. 이 좋은 분위기에 더 있다간, 술이 절로 넘어갈 것 같아 그러니 너른 양해를 부탁드리오.”

“그럼 들어가십시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오.”

* * *

하지만 제각기 몸이 좋지 않아서, 혹은 술이 불콰하게 취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온 네 사람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차를 타고 이동한 고급객원의 작은 방에서 더 내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들 중 딱히 취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네 명 중 늙었지만 풍채가 좋고 신선처럼 수염이 긴 진주계 고려인 노인이 먼저 혀를 찼다.

“견 회장은 품위가 없군. 회의 가입 후보 명단에서 완전히 제명을 하는 것이 좋겠네.”

려연의 다홍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과장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질문이었지만 노인을 힐난하는 투였다.

“설마 아직도 회에선 견 회장의 가입을 고려하고 있었나요?”

“명성금융과 제일계열이 저렇게 손을 합치면, 우리로서도 무시 못 할 수준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제국 재계 서열 열아홉 번째인 만큼 콤네노스 원로께서도 충분히 그리 생각하실 수 있지요.”

다른 젊은 사내가 노인의 편을 들었다.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부가 아무리 거대하다 하나 정치권력의 앞에선 약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분의 앞에선 찰나의 영광에 불과하지요. 게다가 견 회장의 악명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잖아요.

그놈은 우리 회에 들어올 자격도 없어요. 놈의 운명은 결국 돌솜집에 갇히거나, 혹은 정신이 달아날 때까지 마라차를 마실 것이 분명해요. 물고기 밥이 되는 건 깔끔한 최후죠. 성 회장님, 기억나요? 한때 회장님의 경쟁자였던 그 유종건설도 비슷한 길을 걸었잖아요.”

여인의 말에 중년의 남자가 제지하듯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그는 다소 원망스럽게 여자를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내뱉을 말을 정돈했다.

행여 이 담론이 조금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분께서도 과거보다는 많이 유해지셨습니다. 웬만하면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시고.”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견 회장의 일은 그만 이야기하지. 어차피 저자의 운명은 그분께서 점지하셨을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젊은 사내가 노파심에 물었다.

“오늘 온 국세청 그자, 사도입니까?”

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도는 아닐 거다. 그 특유의 뻔뻔하고 오만한 표정은 없었으니까.”

어쨌든 그들은 화제를 돌렸다.

견 회장의 생일은 때마침 좋은 기회였다. 그들이 별 의심 없이 한자리에 모이긴 참으로 적절했다. 가는 김에 겸사겸사 견 회장이 그들의 ‘작고 사적인 모임’에 어울리는지 관찰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그들 모임은 정원 총 서른세 명에서 더 늘어나지는 않을 모양인 듯싶었다. 서른세 명 중 원탁에 앉은 네 원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주께서는 성심에 큰 결단을 지니고 계셨던 것 같다. 우리 회의 구성원이라고 해서, 그분이 이번에 펼친 그물에 닿지 않은 자들은 없었으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더러움의 무게를 최소화하였기에 그물 사이를 비집고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분께서도 그렇게 빠져나간 물고기는 굳이 다시 잡지 않으셨다. 완전히 남획하여 버린다면, 물에 물고기가 살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다만 잡힌 물고기는 뜨거운 석쇠 위에 올라갈 것이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뒤, 맛있는 한 끼 식사가 될 예정일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진 못하겠지만.

노인은 한 번 원로들의 얼굴을 살폈다. 행여 불손한 기색이 보이는가 싶어서였다. 다행히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자신처럼 직접 용혈이 혈관에 흐르는 사람도, 흐르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아는 자들’이었다.

여인이 다소곳하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 다소 티격태격하던 것과는 다른 어투였다. 그분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회의 우두머리인 노인에게 보고하여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회에서는 어떠한 정책이 내려와도 그분의 의지에 복종하기로 했어요. 저항은 없을 거예요.”

예상되는 정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법안일 터였다. 망치로 경제를 깨부수는 정도의 효력을 지닐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이미 준비를 끝마쳤다.

체질 개선엔 꽤 많은 돈이 들었지만, 당하고 난 뒤의 수습 비용보다는 훨씬 쌌다.

번뜩이는 칼날은 주기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조금 성격이 다르긴 했다. 그분께서는 지금까지 돌아가는 사태를 방관하고 계셨다.

눈치를 조금 더 본다면 이번 일도 어쩌면 여유롭게 준비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곧 육지에 상륙할 태풍을 바라보며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을 먹으면 안 됐다. 그분은 인간이 항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노인은 그들을 위로했다.

가까이에서 그분을 모시는 사도들과 달리 회원들은 그분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았다. 보상 또한 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은 그의 복심을 충실하게 따랐다. 회원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그분의 ‘허락’임을 알고 있었다.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선 자기 주제를 먼저 깨달아야 했다.

또한 그들은 은연중에 반겼다.

세상이라는 것은 끝없는 혼돈과 같았다. 어떠한 규칙도, 뭣도 없이 휙휙 세상이 바뀌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분의 규칙에 따른다면 그 불확실성이라는 것은 줄어들었다. 기업인들에게 그 혜택은 의외로 컸다.

또한 그분께서는 규칙을 어긴 자를 단죄하셨으니, 회원들은 인지하고 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그 법칙에 따라서 회원들은 거듭하여 강자로 남을 수 있었다.

“회주께서는 분명히 시대가 지날수록 우리의 이런 자정작용을 바라고 계실 게야. 항상 그래왔듯 우리는 우리의 신조대로 살아가면 된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라.”

다른 원로들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단 한 번도 회주가 존재하지 않은 모임, 광명회(Illuminati)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 * *

― 덜컹, 덜컹

시끄럽지만 익숙한 쇠 긁는 소리가 유난히 요란했다.

궤도 위에서 열차 쇠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였다.

평상시라면 별반 특이할 것 없었다.

이제 철도와 열차란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의 물건이라 오히려 이것이 없는 삶을 더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감탄의 낯빛을 하거나, 혹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기차가 무려 청해 땅속 수 미터, 혹은 수십 미터의 아래로 지나다니고 있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정상적인 반응일지도 몰랐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의외로 해청은 평온하게 자신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자네들도 좀 앉지.”

내관은 발을 동동 굴렀다. 옆에 서 있는 믿음직스러운 근위대도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 동굴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옵니까?”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국 공학자들을 믿지 못하면 누굴 믿겠는가?”

청해의 야심 찬 사업 중 하나가 비로소 완공되었을 때, 황제 해청은 이것이야말로 제도의 교통난을 많이 해소할 수 있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해청은 느긋하게 옆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상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장은 조명이 완벽히 설치된 것이 아니라 밝기가 썩 좋지 않은데, 이 작은 불빛으로도 활자를 읽으시는 모양이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성의에 두고 계셨는지요.”

지하로 다닌다는 철도, 즉 지하철의 개념이었다.

상민은 여전히 다리를 꼰 채 신문에 시선을 고정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상으로 가는 것이 어렵다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서 가는 것이 맞지 않겠소? 공중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하로 가야 하겠지.”

아주 먼 미래에는 도시 내에서 이동할 때 공중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상민은 그때의 시간대까지 보고 온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약간은 아쉽긴 했다. 예전 삶에서 조금 더 많이 경험하고 왔더라면 조금 더 많은 것들을 계획해보지 않았겠는가.

아주 당연한 이치라고 말하는 상민의 태도에 해청은 고개를 저었다. 일반 사람은 그런 파격적인 생각을 잘 하지 못했다. 땅 밑에 굴을 파 그곳에 철도를 놓는다니, 뭔 미치광이냐는 소리부터 들었을 것이다.

“아, 처음부터 이런 계획을 세우진 않았소. 처음엔 땅을 판 뒤 지하철이 다닐 홍예식 굴을 건설하고 땅을 덮었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관차도 외연기관에서 내연기관, 그리고 지금의 전철로 개선해야 했고.”

물론 이렇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까지 지하철은 굉장히 우여곡절이 많았다.

가장 큰 두 가지 관문이 있었다. 땅 밑에 굴을 파는 것과, 기차의 기관 문제였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며 상하수도 및 여러 가지 구조물들이 땅속에 묻힌 상태였다. 복잡한 인구밀도와 건물을 자랑하는 어떤 곳은 전선과 전신선이 땅 안으로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러니 지표면 얕은 곳에 까는 개착 공법은 손해가 있었다. 더군다나 공사 기간 동안 이 거대한 도시의 시민들의 교통에 현격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 뻔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개착하고 다시 부설하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몇 군데는 개착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다만 청해의 구시가지, 즉 섬과 신시가지인 내륙을 잇는 부분은 바다였던 것이 문제였다.

상민은 그 바다를 통과해 지하철이 왕복하길 바랐다. 시대상으로 보았을 때 무리가 있을 법했지만, 그래도 뭐 대단한 해저터널을 원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강 수준의 해협을 극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강 밑에 동굴을 뚫는 것은 지금 기술 수준으로도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하철이 다닐 만한 길고 견고한 굴을 뚫는 것은 다른 일이긴 했다.

청해지하철 공사본부는 해수면 및 자연스럽게 더 깊고 단단한 지반을 파고들어 가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좀조개 공법은 당시 고려 내에서도 가장 최근에 등장한 공법 중 하나였다.

이름 그대로 배좀벌레조개에서 그 이름을 따온 이 공법은 과거 대항해시대 유구하게 고려를 괴롭혔던 바다 생물체에서 영감을 얻었다.

당시 고려는 배에 방오도료를 바르거나, 혹은 아예 동판을 배 밑에 깔아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대응을 했지만 따개비와 배좀벌레조개 등을 완벽히 막아내진 못했다.

물론 철제 함선의 시대가 들어온 이후에는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뱃사람들은 이런 생물체를 지극히도 싫어했다.

다만 박남언 같은 학자들은 이 물렁물렁하고 징그러운 벌레(정확히 말하면 조개과에 속했다)가 어떤 식으로 단단한 나무를 파고들어 가는지를 연구했고, 공학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어부의 아들이던 그는 대학에서 오랜만에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배좀벌레조개가 배의 나무를 파고들어 가는 과정,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무가 물을 먹어 좁아지는 구멍에서 운신하기 위해 그 파낸 것들을 먹거나 뒤로 보내고 주변에 미끄러운 액체를 바르는 행동을 관찰했다.

그리고는 그에 공학적 영감을 받아 인간도 거대한 배좀벌레조개를 형상화한 기구를 이용해 깊은 굴을 안정적으로 뚫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민은 산에 굴을 파보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이 공법이 일부 구간에서 개착방법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거금을 들여 공법을 발전시켰다.

결과는 놀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거의 수면 20미터 이상의 깊이에서 땅을 파는데도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더군다나 공사비가 조금 들긴 했지만 지표면에 끼치는 영향이 적으니 다른 곳에서도 써 봄 직했다.

하지만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하나가 대두된다고, 좀조개 공법을 통해 깊고 단단한 지반에 견고한 굴을 만들었지만 새롭게 떠오른 문제가 있었다.

개착식은 방법은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땅을 파내고 새로 덮는 과정에서 환기 시설 같은 것을 잘 구비할 수 있었다. 반면 좀조개 공법은 환기 시설이 약간 제한되었고, 필연적으로 지하철 통로 내부의 공기 질이 좋지 않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기차는 두 가지 연료를 소비하며 달리고 있었다. 전통적인 증기기관과, 비교적 신식인 경유 기관차가 있었다.

증기기관은 말할 것도 없이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존재였다. 뻥 뚫린 하늘과 광활한 대지에서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낭만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는 승객들을 말 그대로 석탄에 훈제시킬 운명이 뻔했다. 상민은 증기기관차를 도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경유기관차는 그나마 좀 괜찮았다. 석유는 석탄에 비해 연기가 적었고, 연비도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을 피워 추진하는 원리였기에 일산화탄소와 화재의 위험성은 잔존했다. 상민은 경유를 발전하여 전기 동력으로 바꾸는 경유 전기식 기관차를 생각해보려다 그냥 그만두었다. 다른 데는 몰라도 지하철은 아니었다.

그러니 오직 전철이 남았다. 전기로 움직이는 전기 철도는 다른 데에서 전기를 끌어와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통로 내부에서는 안전했다.

그저 동굴 특유의 갑갑한 공기만 환기 시설로 처리하면 되었다.

그러니 원래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지하철과 전철이라는 단어가 결국 똑같은 것을 의미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최초의 지하철, 청해 1호선은 세계 최초의 지하철임과 동시에 세계 최초의 전철이 되었다.

해청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손바닥을 비볐다. 어서 빨리 제도에서도 이런 것들을 누리고 싶었다.

문득 선조께서는 너무 청해를 편애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 말을 차마 뱉을 순 없었다.

“창양엔 언제쯤 깔아주실 겁니까?”

“흐음… 모르겠소.”

해청은 왜 이 선조가 잔뜩 심술을 부리고 있는지 잘 알았다.

이번 연도 제국전은 창양이 이겼다. 청해와 창양 축구단은 결승에서 맞붙었다. 결승전이 백청전, 혹은 창청전이 된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청해 축구단은 그들이 입은 푸른 축구복이 붉게 물들 정도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5대 1, 심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상민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차가 뚫리면, 축구를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니 구단의 재정도 좋아질지도 모른다.

경기장을 직행하는 역은 물론이고, 경기장도 확장공사 해줄 것이다.

선수단 숙소와 훈련시설도 훨씬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정도까지 해주는데 내후년부터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감독의 모가지를 아주 콱 그냥….’

상민은 갑자기 화가 나서 보던 신문을 구겼다.

해청은 살짝 놀랐다. 그리고는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보시던 대목이 오해의 소지를 낳을 법도 했다.

[반독점법, 금산분리법. 희대의 악법인가, 천고에 길이 빛날 선법인가.]

“음?”

평소라면 다소 직설적이었던 해원과 달리 예의 바른 척하면서 놀릴 거 다 놀리는 해청이 웬일로 조용히 있자 상민은 도리어 궁금해 그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마다. 가진 몇 가지 회사를 쪼개놔야 하겠지만, 실제적인 피해는 별로 없다.”

애초에 상민이 저 두 법의 입안자였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상민이 가진 몇 개의 핵심 사업은 군사적 기밀성을 유지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할 반독점법 등의 규제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물론 그의 소중한 일전은 너무 덩치가 커진 탓에 가진 것을 조금 내려놓긴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민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른 회사가 등장하면, 상민 개인은 그 회사의 주식도 적당히 가질 생각이었다. 그의 바다 같은 포트폴리오가 개입하지 않는 곳은 없었다.

또 경제가 다양해지며 이제 여러 가지 투자신탁이니 투자기금이니 하는 것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할 것이다. 방법이야 많았다.

“빈자가 부자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일이다.”

해청은 평정심을 잃고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장원 자금도 열강 바로 밑 국가의 경제 규모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천문학적인데, 자신보고 빈자라니.

하지만 드디어 황제에게 한 방 먹여 축구의 복수를 했다는 의기양양한 선조의 표정을 보고 해청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상민의 구상대로였다.

시기는 조금 차이가 나긴 했다.

그의 생각보다 관리들이 너무 일을 열심히 했거나, 혹은 일부 기업가들의 패악질이 너무 빨리 커진 덕에 조금 빠른 듯하긴 했지만.

“겪어보지 않은 일은, 사람들이 체감하기 힘들지. 그러니 적당히 내홍을 겪은 뒤에 입안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상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남극 여행을 갔다 온 뒤로 그 생각은 더 견고해지기 시작했다.

고려는 온실 속 화초가 되어선 안 됐다. 모든 것을 선제적으로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말이 떠돌지 않았던가.

무균실에만 있는 아이는 적당히 더러운 흙바닥에서 뒹굴고 놀던 아이보다 연약할 것이라고.

하물며 애도 아닌 이상에야 더더욱.

상민은 병우의 말을 곱씹었다. 그 인간은 하지 말랬는데 기어코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뒤집어 남극기지에 박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상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민이 더 깊어졌다.

― 끼이이익

때마침 지하철이 정차했다.

“종점입니다.”

열차장이 서둘러 나와 땀을 훔쳤다. 날이 덥다기보단, 처음으로 황제를 모시고 운행을 한 영광의 자리에 있다 보니 절로 긴장된 것이 틀림없었다.

― 짝짝짝

해청은 사적인 대화를 멈추고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는 열차장은 물론이고 종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하철 공사 관계자들, 기술자와 인부들 몇 명과 인사를 나누고는 함께 기자들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상민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황제와 상민은 역 입구로 올라가는 곳에서 만났다.

굉장히 깊은 굴이었다. 그들은 느릿느릿한 자동계단 위에서 한참이나 있었다.

“난 그놈들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해청은 설명을 더 하지 않아도 선조의 심기를 거스른 자들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애초에 선조께서는 이번 사건과 연루된 자들을 딱히 신경 쓰시진 않으실 것이다. 어차피 심판받을 운명일 테니까. 그럼 나머지는 하나였다.

이 고려의 경제 배후에 있는 자들. 광명회였다.

“이름도 그래, 광명회는 무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해청은 솔직히 이름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광명회, 라틴어로는 일루미나티. 빛을 본 자―계몽된 자―들이라는 표현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지 않던가.

하지만 정작 상민은 치가 떨렸다.

원역사의 일루미나티는 한때 바이에른 지역에서 잘나갈 때가 있었다고 들었지만, 그 뒤 교회에 두들겨 맞은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이후에는 그저 허무맹랑한 음모론의 단골 소재가 돼버린 정도였다. 파충류형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소리를 믿는 사람은 일부의 과대망상증 환자 빼고는 없었다.

‘젠장.’

그런데 지금 보라, 정말로 실체화된 것이 아닌가. 상민은 정말 랩틸리언 대신 용인 어쩌구 하는 새로운 음모론이 후대의 세상에 길이길이 전해져 내려갈까 너무나 무섭고 끔찍했다.

[작가의 말]

좀조개 공법은 현재 쓰이는 실드터널공법, 즉 TBM의 초창기 버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최초의 특허 자체는 1818년에 나왔지만, 한참 뒤인 1870년 런던 지하철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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