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자식
담배 연기가 중후한 집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환기가 되는 양보다 피우는 양이 더 많은 모양이었다.
턱이 두툼한 중년인은 의자에 앉아 책상에 다리를 꼬아 올린 채로 신문을 넘겼다.
[배병우 탐험대, 마침내 남극에도 세계 최초로 깃발을 꽂다!]
[남극 탐사대원 다섯 명의 이야기, 사실 다섯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이었다?]
[배병우 탐사대장의 자서전, 『그분께서 함께한 여정』, 초판 이례적인 속도로 완판.]
[신앙의 올바른 고백서, 제국교도와 쿠쿨칸 교도들을 위한 책.]
신문의 1면은 온통 난리였다. 남극 탐험대 다섯 명의 단체 사진에 눌린 활자들은 그 밑에 있는 광고 칸까지 절반 이상 침범했다. 그 정도로 새로운 대륙을 정복하는 여정은 모두를 들뜨게 했다.
물론 그에겐 별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배병우 탐험대의 인원은 원래 탐험 직전 다친 사람을 제외하여 넷이어야 했는데 막상 북극을 탐험할 땐 다섯 명으로 되었었다. 곧이어서 남극 여정을 갔을 땐 다친 사람이 복귀해 총 여섯 명이었고, 귀환해 기자회견을 해보니 그땐 처음 구성한 다섯 명만 있었더랬다.
이런 해괴망측한 소리는 딱히 들을 가치도 없어 보였다. 그분께서 우리와 같이 거니셨다니, 이 뭔 종교쟁이가 하는 헛소리가 틀림없지 않은가.
그런 극한 환경에 가면 머리가 돌아버리는 모양이다.
2면은 좀 읽을 만했다.
[고려 외무부, 남극을 공식적으로 제국의 영토에 편입하다.]
[국제 사회에서 다른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
[고려와 노르웨이 외 6개국이 참가하는 북극 조약의 의의.]
[남극의 꼬리반도에 지어지는 민상기지. 이름의 기원은 불분명.]
[남극의 자원과 식생에 대하여.]
[단독 보도! 커여운 뒤뚱새 사진, 본지 후면 참조.]
“제목에 뭔 오타를 냈는지, 참.”
남극 영토 편입 이야기는 조금 들을 만했다. 남자는 이 땅에서 나올 자원이 얼마나 있을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애초에 너무 추운 땅이니, 거주지를 제대로 유지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꼬리반도 끝에 있는 민상기지는 사람이 살지만 그것을 거주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었다. 그곳은 극지기후와 동물생태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머무를 장소가 될 것이었다.
자원이 뭐가 나오든 간에 노동자들을 고용해 유지하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나올 것 같았다. 얼어 죽으면 보상금도 얼마인가. 사업적 생각은 조금 더 신중하게 판단해야 했다.
“흠, 그래도 다른 건 재미 볼 만한 게 있겠구만.”
그는 예리한 눈으로 몇 가지를 살폈다. 야외옷이라 하는 것들은 굉장히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합성섬유 시장도 그랬다.
그가 한창 집중하며 문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똑똑똑
“회장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는 갓을 챙겨 쓴 뒤 자리에서 오연히 일어났다. 아무리 바빠도 연회의 주인으로서 직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오늘은 그의 생일,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물들이 방문할 예정이었다.
저녁 연회였는데, 아직 해는 짱짱했다. 그러나 시간은 금방 흐른다. 준비상태를 점검해야 했다.
그의 저택은 무척 넓었다. 일단 어마어마한 크기의 부지에 지어져 있었고, 손님 방들이나 고려식 정원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다.
창문 밖으로 연못이 보이는 큰 정원에 차려진 탁자와 의자들이 보였다.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오늘은 술과 음식으로 가득한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신사들이 명성 금융의 수장, 견충비의 생일에 모였다.
고려 내에서도 자본을 가친 축이라면 어쩌면 열 손가락에 꼽힐지도 모르는 그는 금융왕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다른 투자은행들도 명성의 위명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냉혹하고 효율적인 인물이었다. 이윤을 얻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저평가된, 혹은 고의적으로 저평가를 시킨 회사를 사들여 적정한 가격에 올려놓고 팔거나, 혹은 한 분야의 시장에 뛰어들어 그 시장을 온전히 장악하는 기업을 만들어 이윤을 독점하기도 했다. 좋게 말해서 행동주의 투자자지만, 기업 사냥꾼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불렸다.
충비는 입구 근처에서 가면을 뒤집어쓴 것과 같은 미소를 머금고 한 명씩 한 명씩 손님을 환대했다.
사람들도 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돈은 권력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물질주의 사회였다.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성장해 일가를 이룬 그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다만 그도 고개를 숙여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시오. 견 회장. 생신을 축하드리오.”
“어서 오십시오, 사돈.”
이제 곧 한 가족이 될 제일의 박씨 사람들도 왔다. 그중에는 제일보험을 이끄는 박 회장과, 자동차 산업에 새롭게 진출한 박 회장의 아들, 충비의 며느리가 될 딸도 있었다.
제일계열은 명성 금융과 상호 보완적 관계였다. 충비가 일으킨 명성은 무척 빠르게 돈을 벌었지만, 그만큼 전통과 영향력이 없었다. 반면 오래된 보험 회사로부터 성장하여 전통 있는 제일계열은 작금의 여러 사업 실패로 재정이 건전하지 않은 상태라 현금 등의 유동성 있는 재화가 필요했다.
둘이 서로 결합한다면 충분히 상승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명성투자은행은 제일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금융적인 방면에서 공격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제일계열은 그들의 정재계 끈을 이용해 금융위원회의 눈을 가릴 수도 있었다.
그들 말고도 무시할 수 없는 손님들은 많았다. 정치의 최고 권력자들인 중서성 의원이니, 고위 관료니, 3성 장군이니 하는 자들이 연회장에 속속들이 입장했다. 마침내 충비는 대부분의 손님맞이를 끝낸 뒤 주인의 자리로 돌아가 인사말을 했다.
“아무쪼록 이 사람의 생일에 방문하신 내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댁네 무궁한 번영을 기원합니다. 자, 오늘 이 순간, 그간 고려를 지탱해온 여러분들의 노고를 잠시나마 내려놓으시고, 작게나마 차린 음식과 술들로 조금의 즐거움이라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위하여!”
“위하여!”
사람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서로 오가며 담화를 나누었다. 사교의 자리는 격이 맞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 무척 좋았다. 좌식 기반의 고려의 전통 연회가 반쯤은 입식으로 바뀐 것도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 자리에 앉으면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물론 주인이 그러진 않았다. 충비는 정자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술을 들었다. 주위에는 장인을 비롯한 그와 아주 친한 몇몇만이 있었다.
이렇게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정도의 사이긴 했다.
“하, 요즘 사업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래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에잉,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힘을 더 실어주어야 국가가 부강해지는 법인데.”
충비는 묵묵히 술잔을 들었다. 저 멀리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와 함께 향이 깊은 소주가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환경상 술이 달아야 하는데, 오히려 씁쓸했다.
불만의 목소리는 커져갔다. 오죽했으면 한 사람이 소리를 낮추라고 할 정도였다. 아무리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대부분 충비와 친했더라도,
“당최 왜 단결금지법은 통과가 안 되는 겁니까? 그 불량한 노동자들이 매번 지랄하는 것을 가만히 봐야 합니까?”
“돼지 같은 놈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 우리가 해준 것이 얼만데! 그놈들의 주장은 위험합니다.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고, 황실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 조합주의도, 사회주의도, 대동공산주의도 전부 다 그 프랑스에서 수입된 멍청한 생각이 아닙니까?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이에요.”
어떤 사람은 선을 넘기도 했다.
“옛날 같았으면… 말 안 들으면 콱 그냥…!”
“이보쇼! 말조심하오. 눈치 없게시리.”
“아니, 내 틀린 말 했소? 옛날이 사업하기 훨씬 더 좋은 시절인 것은 맞는 사실인데? 분명히 상황께서 잘못 판단….”
“이 사람이 진짜!”
사내는 충비의 얼굴을 흘깃 살펴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 충비는 그제서야 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죽고 싶으시면, 혼자 죽으시오. 엄한 사람들 끌고 가지 말고.”
“…….”
하지만 입 밖으로 한 말과 달리 충비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수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이 되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어떠한 곳에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추진한다면, 마땅히 그 땅의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대충 관아에 고하고 밀어버렸겠지만, 시대가 복잡해지고 신민이 국민이 되어가며 권리가 신장됨에 따라 더 이상 그렇게 일 처리를 할 수 없었다. 해당 땅 소유주는 감정평가사가 공시한 공시지가의 몇 할에 해당하는 마땅한 배상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대우도 올라갔다. 고려 사회엔 많은 조합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청해 고급의상조합도 있었고 농업협동조합도 있었다. 후자는 하나의 거대한 경제단체로 분류되기도 했다.
공장에서도 새로운 분류의 조합이 나타났다.
노동조합이 탄생했다. 기업가와 비교하면 다소 나약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은 조직적으로 뭉쳐 대응하길 원했다.
여러모로 골치가 아픈 상황이다. 고려는 굉장히 노동자 대우가 좋은 나라였지만, 노동자들은 만족하는 법을 몰랐다. 항상 더 나은 것을 요구했다.
저치의 말대로 예전엔 해결 가능한 방법이 많았다. 기업가들은 은밀한 경로로 여러 뒷세계의 조직들에게 후원을 했다. 이 깡패들은 야밤에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을 흠씬 두들겨 패는 식으로 일 처리를 하곤 했다.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 분명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홍진 사건은 아주 큰 사건이었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난 지도 십 년이 훨씬 더 넘었지만, 고려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고려를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라 봐야 했다.
고려는 홍진 사건 이후 범죄와의 총력전을 택했다.
그러다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대전을 치렀는데, 그 와중에도 경관의 규모는 전혀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늘리면 늘렸을 것이다.
그들은 범죄 조직을 일망타진하면서 이들을 군부대로 강제 징집해버리기도 했다. 참호전 선봉에 섰던 228연대와 같은 경우가 그런 깡패들로 이루어진 연대였다.
이 기조는 대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예전 고려는 꽤 안일했었다. 범죄 조직을 하나 뿌리 뽑으면 그 자리에 다른 잡초가 들어설 것이니 대충 곁가지를 쳐 내면서 ‘관리’를 하는 것이 맞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홍진 사건 이후, 고려의 방침은 완전히 선회했다. 주기적으로 독한 약을 치고 뿌리를 왕창 뽑아버려, 범죄 조직이 중앙권력의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며 오줌을 지릴 정도로 공포를 각인해 놓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경관 한 명이 죽으면, 범죄 조직원 열 명의 피로 갚아주어야 했다.
실제로 고려는 사건을 수사하던 중수국 요원이 성세 높은 와야킬의 폭력조직에 의해 강회가 부어져 바다에 빠져 죽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전쟁에나 쓰일법한 2호 전차를 동원해 조직의 근거지를 박살 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기업가들은 뒷세계와 거래하는 것을 지극히 꺼렸다. 빠르게 손절할 수 있는 기민함을 갖췄기에 망정이지, 조금의 끈이라도 발견되었다면 그들도 중수국이나 보안국에 흠씬 두들겨 맞을 것이 분명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니 꽤 많은 수의 회사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국 땅에서 사업을 하면 아주 많은 장점이 있었음에도, 인건비라는 문제 때문에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주나라와 콩고, 무타파 같은 곳은 인권도 적당했고 환경도 적당했다. 더 값싼 자들을 찾는다면 다른 아프리카의 나라나 혹은 인도, 동남아, 지나 본토에 가면 되었다.
이는 국가적으로도 분명히 손해가 되었다.
제일의 박 회장은 주변을 살펴보다 화제를 돌렸다. 계속 이 이야기를 하다간 언성이 높아져 주변에 잘 들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가까이에 있는 몇몇은 그들을 흘깃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황상을 운운한 이후부터 그랬다.
“자, 좋은 날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진 맙시다.”
“…박 회장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 자, 모두 한 잔 더 드시지요.”
그래도 주제는 여전히 경제와 일에 대한 것들이다. 이 위치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몹시 유능했으며, 일 중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휴식과 일의 경계선을 구분 짓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래, 우리 이번 세금은 어떻게 되는 게요.”
“잘 처리될 겁니다.”
“…믿어도 되겠소?”
충비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금융회사와 일반 회사의 야합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 가지 특출난 것이 있었다. 조세포탈(租稅逋脫), 흔히 탈세라 하는 것이었다.
고려는 객관적으로 기업에 대한 세금이 그렇게 크진 않았다. 이마저도 늘리면 외국 유출이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와 동시에 고려는 소득과 재산에 대해 이 시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누진세를 적용하는 국가였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에게 많은 세금을 매기는 것은 고려에선 상당히 상식적인 일이었지만, 다른 나라들은 아직도 그렇지 않았다. 지금에야 명민한 프리드리히 대왕이 다스린다는 도이치 등지에서도 서서히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긴 했지만, 고려만큼이나 제대로 하진 못했다.
문제는 정부가 아무리 대단해도 납세자의 소득을 완벽히 알기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개인적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기업의 측면에서도 그랬다. 더군다나 돈을 빌려주는 금융회사와 돈을 받는 일반회사가 야합하면, 그 범위는 무궁무진하게 확장될 수 있었다.
홍진 사건 이후 연방중앙수사국은 더 강해졌고 보안국이라는 더더욱 무서운 존재가 새로 생겨났지만, 고려에는 전통적으로 무시무시한 존재가 더 있었다.
첫째는 정보총국 산하 마약단속국으로 마약이 결부된 문제에서는 그 어떤 조직보다도 흉신악살과 같았다.
둘째는 재무부 산하의 국세청이었다. 의외의 소리 같았지만, 제국국세청은 심지어 휘하의 수사조직도 가지고 있었다. 고려는 거대한 나라였고, 과거 어떤 경우에는 마을이나 지역 단위로 중앙에 조세를 납부하는 것을 거절하는 경우가 있었다. 국세청 관리와 소속 부대들은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자들을 지옥 끝까지 따라가 돈을 받아내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국세청이 강하다 한들,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게 법치주의 국가가 아니던가. 충비는 유능했고 절대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충비의 장담에 다시금 연회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태평성대 만세, 제국 만세! 돈은 행복과 여유로움을 주었다. 그대가 행복하지 않다면, 가진 돈이 적은 건 아닌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
하지만 그때, 누군가 충비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