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84화 (484/653)

극과 극(3)

여정은 힘들었다.

그동안 건설해놓은 보급소들을 거쳐 북방으로 향한 일행은 북쪽으로 갈수록 이 끔찍한 추위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더 추워진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콧김에 낀 수증기는 곧바로 고드름처럼 코끝에 매달렸다. 소변을 볼 때도 어이가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추위는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범위를 아득히 초월했다. 잘 무두질한 털가죽 외투와 그 안에 충실하게 받쳐입은 내의들은 무용지물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렇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옷들을 벗는 순간 죽는 것은 확실했지만.

오죽했으면 걸어가는 순간이 멈춘 순간보다 나았다. 적어도 덜 추웠으니까.

실로 고통스러울 따름이었다.

처음 의기양양하게 출발했던 병우와 대원들은 말수가 갈수록 적어졌다.

개들도 풀이 죽은 모양이다. 빙주개도, 축치개도, 사모예드도 눈이 펑펑 날리는 대지를 신나서 뛰어다니는 놈들이지만 지금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래도 개들은 영리했다. 해빙 가운데에서 천막을 치고 휴식을 취할 때, 개들은 알아서 자신의 굴을 팠다. 사람은 그저 그 위에 보온용 개 이불을 덮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들도 천막을 치고 들어앉았다. 웽웽거리는 북극의 바람 소리가 대단히 위협적이었지만 이미 지쳐버린 사람들은 일단 쉬어야 했다.

병우는 한숨을 내쉬며 천막 안에 주저앉았다. 너무 힘이 들었다.

나머지 대원들도 몸을 녹일 등유 난로만 켠 채 제각기 풀썩 주저앉았다. 짐이 가득 실린 개썰매를 몰던 대원도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오직 한 사내만 웃음빛을 띠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식량 통을 뒤지더니, 사람들에게 할당량대로 건육괴를 돌렸다.

“이런 극지에서는 든든히 먹어두어야 한다오.”

이런 여정은 하루에 대략적으로 칠천 칼로리 정도의 열량을 요구했다. 유난히 힘든 날이라면, 만 칼로리를 섭취해야 했다. 물론 그래도 건육괴가 갑자기 맛있어지진 않았다.

“최 대원은 힘이 안 드시오?”

“하하, 아직 괜찮습니다.”

백야가 일어나는 밖은 어슴푸레하게 밝았다.

번질번질한 기름이 잔뜩 붙어 있는 건육괴를 마지못해 질겅질겅 씹어 삼킨 사람들은 제각기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하거나, 혹은 불침번을 섰다.

오늘은 병우가 불침번을 서는 날이었다. 상민은 자야 할 시간임에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순수한 일반인’과 이렇게 오래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상민은 모험을 많이 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병우도 대답을 해주었다. 왜 안 자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일 생생해 보여서 당장 별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도 혼자 졸음을 참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문의 역사, 위대한 모험가들의 이야기, 병우의 삶, 그리고 가치관과 종교관 등등. 상민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노력 덕에 상민과 대원들은 빨리 친해졌다. 사람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죽음의 고난을 함께 넘을 때 더욱 사이가 돈독해졌다. 여정을 지속하면서 대원들은 서로를 형제처럼 생각하곤 했다.

상민도 자신이 친우라고 여길 만한 이들이 생겨난 것이 기뻤다.

줄곧 너무 고독한 자리에 혼자 오래 있었던 그는, 자신이 벗이라 부를 만한 옛 친구들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가장 옛날의 친구는 오준오표. 모두 죽은 지 사백 년이 넘은 노인네들이다. 생각해보니 무덤에 방문한 지 꽤 오래되었던 것 같았다.

최근의 친구는 아이작이었다. 그 친구도 늙어 죽었다. 죽기 전에 보지도 못했다. 죽은 뒤에야 들러보았을 뿐이다.

자신은 비인간적인 놈이었다. 상민은 문득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자들을 벗이라 불러도, 결국에는 앞서 말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터였다.

그래도 상민은 현재를 즐겼다.

말 그대로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참으로 시원하구나. 바람도, 풍경도 절경이다.’

― 아아아아!

그는 문득 팔을 벌리고 고함을 질렀다. 축 처져 걸어가던 대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이상했지만 그의 고함 덕에,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무언가 신비한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정이 이렇게 순탄할 리가 없었다.

극지방은 위험했다. 추위는 그 위험 중 하나에 불과했다. 북극과 남극이 단순히 엄청 추운 곳이 전부였다면, 아마 이전의 탐험가들도 정복에 성공했을 것이다.

해빙, 빙하, 설산 등 눈 쌓인 곳에서의 가장 큰 위협은 땅 밑에 있었다.

빙하균열은 가장 무서운 위협이었다. 눈 덮인 빙하균열은 겉보기에는 일반적인 해빙 표면과 별다를 것이 없어 인지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이미 인지했다면 상황은 늦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어, 어!”

맨 앞에서 설피를 신고 눈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가던 병우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갑자기 땅 밑으로 사라졌다.

순간 대원들도 모두 자신들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순식간에 긴장하며 몸을 단단히 지탱했다. 다행히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았다.

비록 빙하균열이 몹시 위험하긴 하나, 대원들도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었다. 눈 밑의 위험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대원들은 모두 밧줄로 서로의 몸을 결속하고 있었다.

“버텨!”

그들은 안정적으로 무게를 지탱한 것이 확인되자, 설피를 벗고는 다리를 단단히 지탱한 뒤 밧줄을 서서히 끌어당겼다.

힘은 별로 들지 않았다. 대원들은 흘깃 마지막에 서 있는 대원을 바라보았다. 거구의 사내는 사건이 일어날 때부터 바닥에 다리를 고정한 뒤 못 박은 것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가 조금씩 힘을 줄 때마다, 밧줄은 위쪽으로 올라왔다.

개썰매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겠다. 대원들은 한시름 놓았다.

“대장, 괜찮소?”

“괜찮다!”

말과는 달리 병우는 완전히 질겁해 있었다.

눈 바로 밑에 있었던 깊은 푸른 균열은 사람 한 명쯤 끝까지 부딪히지 않고 떨어뜨리기엔 충분할 정도로 꽤 넓었다. 덕분에 다리나 다른 신체 부위가 부딪혀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사실이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깊이는 아득히 깊었다. 많은 빙하균열을 본 그였지만, 이처럼 심연 속에서 쩍 입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괴물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두터운 눈이불에 감쪽같이 숨겨진 것이 정말 불가사의할 노릇이다.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눈도끼를 이용해서 그 스스로도 올라오려고 노력했다.

악몽은 그때 찾아왔다.

병우와 다른 대원의 몸을 이어주던 밧줄이 심상치 않았다.

너무 오래 써서 그러하진 않을 것이다.

밧줄은 기본적인 물품이었고 일정 시기가 지나면 매번 새로운 것으로 교체했다.

다만 밧줄 재질의 한계가 있었다. 여전히 식물성 섬유로 되어 있었으니 내마모성과 내한성 등이 제한되어 있었다. 극지환경에서는 그 한계가 더더욱 체감되는 편이었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는 더더욱.

― 뚜두둑

소름 끼쳤다.

밧줄이 끊어지는 작은 소리는 윙윙거리는 바람에도 병우의 귓가에 천둥소리마냥 잘 들렸다.

병우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눈도끼를 균열의 벽에 찍었다. 조금의 체중이라도 분산하려는 의지였다.

그리고 그때, 밧줄이 끊어졌다.

‘헉!’

병우는 심장이 떨어지는 충격에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그는 눈도끼를 잡은 손에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실으며 체중을 지탱했다. 하지만 그가 찍은 빙벽의 지지력이 약했는지, 그는 쭈욱 미끄러져야만 했다. 깊이 박아 빠지지 않은 것이 용했다.

천만다행으로 빙벽은 심히 울퉁불퉁했다. 조금 내려가니 작게나마 발을 디딜 곳이 있었다. 병우는 그곳에 절박하게 발을 디뎠다.

대원들이 당혹한 얼굴로 균열 위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젠장!”

“이봐, 밧줄 새것 좀 가져와!”

위에선 난리가 났다.

조금 미끄러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미끄러진 높이는 적어도 오륙 미터는 되어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라, 고개를 내려 밑을 바라보면 아득히 깊은 푸른 심연이 있었다.

저 밑바닥은 수백 미터, 아니 수천 미터는 될 것처럼 보였다. 그 끝에는 얼어죽을 만큼 차가운 북극해의 물이 있을 터. 그곳에 빠지면 병우의 인생도 끝일 터였다.

대원들은 밧줄을 내렸다. 몸을 고정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병우는 지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끼 두 개 중 하나라도 손을 떼면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발디딤대도 눈이 뭉친 얼음인데, 몸무게를 지탱할 리가. 그는 몇 번이고 시도를 해 보았지만 자신의 생각에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병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균열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선이었다. 이 선이 자신의 종착역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위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뭘 하느냐는 고함도 들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서로 싸우면 좋지 않은데.

병우는 자신의 안위보다도 대원들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이내 병우는 크게 놀랐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새로 들어온 대원이 두 자루의 눈도끼를 들고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허리춤에 밧줄이 묶여 있긴 했지만, 대체 뭘 믿고 털가죽 옷까지 벗어 던지고 저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미쳤소?”

“별로 안 춥구려.”

추운 것도 추운 것인데, 이렇게 깊이 빠진 자를 구하려고 스스로 내려오는 것을 자청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다. 그 밧줄이 성한 것은 어떻게 보장한단 말인가.

하지만 덩치 큰 사내는 망설임 없었다. 그는 훌쩍 몸을 던지고는 곧바로 빙벽에 눈도끼를 찍었다. 자신보다도 육중한 거구였다. 빙벽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치 열대우림의 표범마냥, 그는 빙벽의 지지력을 잃기 전에, 위쪽으로 몸을 날려 눈도끼를 찍어 눌렀다.

병우도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나무를 발톱으로 찍으며 오르는 맹수들을. 덩치와 무게는 민첩성으로 극복이 가능했다. 사내는 모든 신체의 근육을 전부 이용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도 몸이 전혀 굳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 툭 툭

불가해한 자로다.

어느새 그 사람은 자신에게 와 있었다. 그는 위에서 보낸 밧줄을 끊어진 밧줄과 교체하여 매달았다.

그가 고함을 치자, 대원들이 병우를 끌어 올렸다.

병우가 구출되자 상민은 이제 다른 기행을 선보였다.

그는 지금 의지한 빙벽에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맞은편의 빙벽을 지지대로 이용했다가 다시금 몸을 박차는 것을 반복했다. 꽤 긴 너비였지만, 웅크린 몸이 날개처럼 펴지자 쉽게 맞은편에 닿았다. 유연함과 탄력이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다. 어떤 인간이 저렇게 올라온단 말인가. 일반적 산악 절벽이면 행여 모르겠다. 하지만 이 추위에 옷도 반팔을 입고 얼음벽에 저러고 있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 병우는 밧줄에 매달려 올라가는 와중에도 지금 이 순간이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병우보다도 표면에 먼저 올라 온 상민은 시원하게 웃었다. 후끈후끈 달아오른 몸에서는 뿌연 안개가 일어났다. 상민은 땀을 조금 닦은 뒤 다시 털가죽 옷을 입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멍청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정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전과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 새로운 대원을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상민은 손바닥을 치며 그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얼마 안 남았소. 빨리, 조심하면서 갑시다! 선두는 내가 맡겠소. 괜찮소? 대장?”

“그… 그리하시오. 최 대원.”

어차피 상민도 길잡이의 보직이다.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그들은 사고가 일어난 균열을 빙 돌아 지나쳤다. 다음에 이어진 여정에서는 한 번도 균열을 발견하지 못했다. 선두의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 돌아가자고 한 경우가 몇 번 있었긴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보급소에서 보급을 받고는 마침내 인류가 도달한 역대 최북단 지역인 북위 88도 6분을 넘어서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여정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길이는 훨씬 짧았다.

이제부터 한 발짝 움직일 때부터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생존율도 떨어졌다. 사람들은 지극히 지쳤고, 개들도 죽어갔다.

탐험대는 죽은 개를 도축해 먹었다.

심지어 직접 개를 기른 병우도, 병우의 다른 개들도 그 고기를 먹었다. 식량은 있었으나, 돌아가는 여정까지 고려하면 넉넉하다고 볼 순 없었다. 어떤 사고가 생길지도 모르는 가혹한 환경에서는 이런 소소한 열량조차 챙기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모두가 별말을 하지 않고 고기를 섭취했다. 극지방에 사는 개들에게 동족 포식은 익숙한 것이었다.

정점포식자인 인간은 동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종족을 잡아먹을 권리를 지녔다. 고려의 식문화에서도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요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동물은 비위생적인 몇몇을 제외하곤 별로 없었다.

극기란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진실된 극기였다. 일반적인 사회의 불합리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몰려드는 죽음의 고통을 인내하는 사람들은 숭고했다.

순번상 다시금 대열의 후미로 배치된 상민은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경탄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숭고함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왜지요, 그대들이 이렇게 강한 이유가?

어느 날 상민은 그렇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병우는 의아해했다. 같은 여정을 하는 중인데도 그대들이라는 표현은 굉장히 이질감이 있었다.

상민은 추위에 떨지도, 여정에 지치지도 않았다. 얼음으로 사람을 빚은 것마냥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게다가 지금도 그날의 그 사건을 떠올리면….

그래도 병우는 상민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며 답했더랬다. 왜 자신들이 버틸 수 있는지.

―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잖소.

상민은 감탄했다.

이번 삶에선 병우가 말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전생에선 참 유명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명언이었을 것이다. 유명한 대중음악 가수가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했다. 그냥 일반적인 명언을 인터넷에 치면 항상 등장하는 단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게감은 달랐다. 명언을 읊조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다만 처한 상황이 그 말의 진실함을 증명했다.

이와 같은 이치는 비단 인간에만 적용되는 일일까.

상민은 병우의 말에 최근 그의 머리에 박힌 화두를 끄집어냈다. 이 이치는 국가와 사회에도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닐까.

옳은 생각일까, 위험한 생각일까.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러다 중독되겠구만, 상민은 한숨을 쉬었다.

왜 자신은 죽을 만큼 힘든 곳에 있어야 집중이 잘 되고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것일까.

* * *

그리고 마침내 468년 7월 11일, 그들은 북극점에 도달했다.

북극점이라고 대단한 것이 표시되진 않았다. 그냥 휑한 해빙 위의 한 지점에 불과했다.

다행이었다. 노르웨이 깃발이라도 꽂혀 있었으면, 크게 실망했을 것이 분명했다.

상민과 병우는 몇 번에 걸쳐 위도를 확인했다.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대원들도 서로를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적힌 병우의 일지에는 그의 가감 없는 감정이 여실히 적혀 있었다. 그동안 그의 어깨를 짓눌렀던 수많은 중압감들이 마침내 해방되었다. 죽은 영혼들도 안식에 들 수 있으리라.

상민에게도 특별한 순간이었다. 인류는 마침내 지구의 가장 극한 지역을 정복했다. 한 군데 더 남긴 했지만, 이제 그것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탐험대는 귀환을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갈 여정길에 오르자, 그들은 북극점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노르웨이의 사람들을 만났다.

“배 대장님이 이끄는 탐험대가 먼저… 도달했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에게데 형제는 배병우와 악수를 하며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감탄, 슬픔, 질투, 절망, 낙담, 분노. 뭐라고 형언해야 할까.

“축하드립니다. 저희는….”

노르웨이 탐사대도 전초기지에서 출발한 뒤 굉장히 신속한 속도로 북진한 것으로 보였다. 스발바르는 빙주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노르드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 장비, 즉 스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장비는 고려인들도 눈여겨보았다. 설피를 신고 걷는 것보다 저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은 큰 단점도 가지고 있었기에 보급에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북려 전통 보존식량인 건육괴를 가지고 간 고려인들과는 달리 이들은 상식적인 측면에서 통조림과 병조림을 가져갔는데, 지독한 추위에 전부 다 얼어 터졌다.

몇 가지 음식들은 얼어 터진다고 못 먹을 것은 아니었지만, 열량을 온전히 섭취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난한 나라들답게 지원이 비교적 모자란 모양이다. 고려는 탐사후원자금만 해도 엄청났다. 보급소마다 등유는 넉넉하게 비치되어 있었고, 지금도 몸을 덥힐 연료는 많았다. 하지만 가난한 스칸디나비아의 사람들은 등유를 많이 가지고 갈 여력도 없어 보였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고려인들은 노르웨이인들에게 자신들의 보급소를 이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두 번째라도 극지방을 밟아야 만족할 것이 분명했다.

배병우의 탐험대는 무사히 귀환했다. 나녹엔 수많은 기자들이 깔려 있었다. 성공할지 못 할지는 기자들도 몰랐지만, 설령 성공한다면 특종 중 특종이었기에 꽤 많은 수의 기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여기까지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배병우는 그들 앞에 나아가 인사를 했다. 이들은 주요한 후원을 물어다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모험담과 더불어 대원 하나하나를 언론에 소개시키기도 했다. 자신이 독점적인 공을 전부 다 받는 것은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한 명 빼고는.

“어? 어디 갔지?”

“최 대원은 빠졌습니다. 저희들이 설득하려고 했지만 기어코 회견은 안 하겠다고 해서….”

웬만해선 데려올 텐데 그는 억지로 끌려올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싫다면 안 하는 사람이다. 함께 지내본 대원들은 그 사실을 다 알았다.

병우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유는 몰랐다. 마치 그를 감싸던 은총이 거두어진 것만 같았다. 마치 모시던 신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았다.

그는 애써 무너지려는 다리를 수습하고는 기자회견을 끝마쳤다. 그를 도와준 대원들의 능력에 대한 찬사, 경쟁자였던 노르웨이의 탐사대에 대한 칭찬, 인간 승리에 대한 예찬까지.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그들이 나녹의 전초기지 숙소에 들어갔을 때, 그제서야 병우와 대원들은 천막 안에서 과일을 까먹고 있는 상민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남극이지요?”

병우는 천연덕스러운 대원의 말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헛웃음이 배어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대원들도 어처구니없다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죽을 고생을 하고 왔더니, 다음 묫자리를 알아보겠다는 태도도 아니고 저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이윽고 그들도 의욕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상민은 흐뭇하게 웃었다.

상민은 북극보다도 남극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북극은 북극 조약으로 대충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어차피 대륙도 아닌 물 위에 떠 있는 얼음덩어리에 불과하니 그럴 명분도 있었다.

하지만 남극은 다르다. 엄연한 대륙이며, 땅이었다. 상민은 고려가 그 땅마저 집어삼키길 원했다. 능력도 책임도 없는 다른 나라들에게 내버려 둔다면 무책임한 일이었다. 창양은 세계의 유명한 대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남극과 가까운 곳이었으니 지배의 당위성도 충분했다.

재빨리 깃발을 꽂기 위해선 상민 자신이 병우를 도와주는 것이 좋았다.

혹은 그는 계속 나다니거나 그저 시원한 남극 바람도 좀 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병우는 남극대륙 여정에 앞서, 한 권의 빈 책을 샀다.

이미 계속 기록하고 있는 그의 일기 겸 여행일지와는 달랐다. 그는 그곳에 다른 이야기를 적고 싶었다. 제목은 아직 적지 않았다. 여정이 끝나면 적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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