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4)
염색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어린아이에겐 더더욱 그랬다.
화학이 발전하며 사람들은 이전과 달리 훨씬 더 다양한 색을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도 있었다. 염색약은 거의 대부분 지독하게 몸에 좋지 않은 화학 약품이었다. 방류하는 오폐수는 자연에게도 썩 좋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주열은 또다시 꿈도 희망도 없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소중한 인연이 있었다.
“안녕?”
주열은 아버지가 일하는 집창촌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끔찍한 시궁창 속에서도 한 떨기 연꽃이 피었다. 주열이 본 그녀는 정말 그랬다.
그녀의 이름도 애련이었다. 성씨는 물어보았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네가 한 삼촌의 아들이지?”
삼촌이라 함은, 기둥서방을 자기들끼리 호칭할 때 쓰는 말이었을 것이다. 주열은 괜스레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아버지는 역겨운 사람이다. 이 누나와 그렇게 엮이는 건 모욕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네.”
“뭐야, 손 다쳤어? 이리 내 봐.”
주열은 그때 손을 잡아주던 그 온기를 잊지 못했다.
애련은 어린 주열보다 족히 일고여덟 살은 더 많았다. 둘의 관계를 육체적, 혹은 정욕적이라고 볼 순 없었다. 이 시기 주열은 겨우 열한두 살의 나이였고, 애련은 다 큰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이 관계는 주열이 처음으로 느꼈던 사람과 사람 간의 따스한 감정의 상호작용이었다.
어머니와 아들, 누나와 동생 같은. 정상적인 가정의 온기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홍진의 염색공장은 분명히 끔찍했지만, 주열은 많은 것을 배우고 곧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이런 분야에서 선천적인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모든 것을 하나도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어떠한 모피와 옷감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것들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파악했다.
그중 색에 대한 감각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주열은 미세한 색상의 차이를 전부 구분하는 최초의 방법을 개발했다.
색의 삼원색이 그러했다. 청록색과 노란색, 자홍색으로 이루어지는 이 색상계는 염색과 후대의 출판물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했다.
이런 걸 알려준 사람은 그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만들어낸 일이었다. 심지어 그의 나이가 열다섯이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밤에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으면 주열은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색이 수많은 옷감과 모피와 어울려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구체적인 한 형상을 띠어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애련은 춤을 추었다.
그녀는 눈처럼 흰 백색의 옷 위 금사와 연청색으로 강조점을 준 순수함을 강조하는 옷을 입기도 했고,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무늬가 수놓아진 아름다운 다홍치마를 입기도 했다. 때로는 남색과 청색, 검은색이 혼합된 단정하고 격식 있는 옷을 입기도 했다.
그래, 그때쯤 주열은 자신이 옷을 만드는 재봉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집창촌 여인들은 화려한 옷을 좋아했다. 아니 비단 그들만 그랬을까, 사람이라면 아름답고 좋은 옷을 입길 원했다. 의복은 때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들의 미모가 돋보일수록 그들의 인생은 편하게 피었다.
주열은 어린 마음에도 자신에게 살갑게 대해주는 누나에게 좋은 옷 한 벌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너무 추레하고 끔찍해 보였다. 우울한 상황을 대변하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면, 누가 보더라도 절망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법했다.
그의 일상은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주열에게도 기회 아닌 기회가 찾아왔다.
염색공장의 사장은 부도덕한 면은 아버지와 맞먹었지만, 아버지처럼 멍청하진 않았다.
그는 이 발칙한 꼬맹이를 일반적인 노동으로 쓰기엔 아깝다고 판단했다. 공장주는 비슷한 처지의 많은 애들을 불법적으로 부려 먹었으니 더더욱 꼬맹이를 보는 눈이 좋았다.
사장은 한대수를 찾아가 술과 마작을 하며 친해진 뒤 설득했다.
“…에이, 패가 안 붙으니 이 원.”
대수는 패배했다.
전 일터가 도박장이었지만 대수의 도박 실력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운도 별로 없었다.
“여기 받으쇼.”
하지만 공장주인은 딴 돈을 받는 대신, 오히려 두둑한 돈을 대수의 앞에 내밀었다.
대수는 눈치를 보며 누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에는 지폐가 두둑했다.
“한가, 자네 아들 좀 빌려주게.”
“뭐, 그놈을 어따 쓰시려구요?”
“작업할 게 있어서.”
“그 아이를 함부로 대할 건 아니겠지요? 그러면 곤란한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라오.”
공장주는 내심 혀를 찼다. 부성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을 해라, 공장주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봉투를 하나 더 건넸다. 충분히 예상했다.
“더 이상은 과욕이 아니겠나? 아들이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도 아비의 덕목일세.”
“흠, 그렇습죠. 그렇고 말고요.”
한대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짐을 싸 나가라고 말했다.
자식이 부모를 바라보는 정은 애틋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당했음에도, 주열은 울먹이는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수는 밀어내듯 그를 쫓아냈다.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주열은 터덜터덜 걸어갔다. 공장주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그늘에서는 벗어났지만, 어쩌면 더 짙은 그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동시기, 연희는 창천궁에서 동생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으아앙!”
“연희야! 네 동생들 좀 그만 괴롭히거라!”
“전 그저 옷을 입혀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네가 정말 혼나야겠니!”
루이제는 엄한 눈초리로 둘째 딸을 바라봤다. 이제 겨우 입을 뗀 막내 세희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엉엉 울고 있었다.
“언니 미워!”
세희는 투다다 발을 놀리며 도망갔다. 도서관으로 가면 둘째 언니가 절대 따라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세희는 가서 삼국지나 읽고 싶었다.
반면 연희는 동생에게 입힐 제자색 배자를 꼭 손에 쥐고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어뜨렸다. 무언가 영감이 떠오른 듯, 이리저리 손을 보았지만 그때의 나이대 아이가 그러하듯 손재주는 어딘가 어색한 면이 있었다.
공주는 정처 없이 궁궐을 배회하다가 그래도 끝까지 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냈다. 집무실에서 삭막한 얼굴로 서류 더미를 해결하던 해원도 마침내 한숨을 돌릴 핑계를 찾아냈다.
“우리 딸, 왜 문 앞에서 그러고 있느냐.”
“아버지.”
해원은 딸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딸을 가볍게 끌어안고 토닥였다.
“그렇게 끙끙대지 말고 상의국으로 가 보거라. 이 아비가 직접 말해 놓을 테니.”
“그래도 되어요?”
“그래. 내 너가 하고 싶은 것들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단다.”
아이가 값비싼 옷감들을 가지고 놀다 설령 쓸 수 없을 만큼 망쳐버린다 하더라도 해원은 전혀 상관없었다.
상의국은 고려의 관서 중 예복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
이곳에서는 대체로 황제와 종통의 옷을 만들었다.
고려와 창양 내에 있는 최고의 옷 장인들이 이곳에 있었다.
황립 고급의상조합에서도 최고로 명성 높은 재봉사들은 민간에서 자신의 가게를 경영하기도 했지만, 일감이 생기면 상의국에 고용되어 황제의 의복들을 만들었다.
연희는 이곳에 가 고려의 의복과 그 발전사를 배웠다.
그곳에 근무하는 장인들, 궁녀들, 공무원들은 어린 황녀의 궁금증을 충분히 충족시켜 주었다.
연희의 재능도 대단히 충만했다. 그녀는 금세 옷을 만드는 법과 옷감을 다루는 법을 깨달았다.
그녀는 유행에도 민감했다.
궁중의 의복들은 전통의 가치를 존중해야 하는 관혼상제와 같은 날에 입는 예복이 아니라면 그래도 과거보다는 꽤 유연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문화와 문화의 융합이 그 원동력이었다. 종통은 여러모로 국제적 정략결혼이 잦았고, 다른 나라의 좋은 양식들을 많이 차용하기도 했다.
연희는 이런 평복들의 흐름, 즉 유행을 파악했다. 궁중의 유행은 말 그대로 고정되지 않고 물결처럼 흘렀다. 그리고 서서히 그 유행을 자신이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전통적 유행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면, 시대가 바뀌며 이제는 민간의 유행이 궁정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생겨났다. 마냥 부정적이라고만 볼 순 없었다.
남자들의 의복도 군대 제복의 영향을 받아 과거의 치렁치렁한 옷에서 몸에 딱 맞아 활동하기 쉬운 흐름으로 나아갔다면, 여성들의 의복도 이제는 그 남성의 흐름에 맞추어 나갈 때가 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실용복’의 시대가 코앞에 온 것이다.
연희는 자신이 평상시 입을 옷들을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편하지만 아름다운 옷으로.
보통은 재봉사들이 대체로 그 일을 했지만 가끔은 그녀도 바늘과 골무를 끼고 작업대에 앉는 경우도 있었다.
몇몇 재봉사들은 지엄한 종통이 이런 천한 일을 하면 안 된다 간언을 했지만 공주는 오히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예법을 뒤져도 옛 황후와 공주가 바느질을 한 경우는 충분히 많이 볼 수 있었고, 설령 아니라고 하더라도 직업 귀천을 입에 담는 것은 좋지 못했다.
연희의 모습은 사교계에서 꽤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그녀가 눈치를 볼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장 큰 후원자인 해원은 딸의 옷차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소 보수적인 기독교인인 루이제는 애매한 표정으로 딸의 행동을 바라봤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황제와 황후가 별말이 없으니, 연희의 시도는 꽤 과감한 단계까지 나아갔다.
연희가 여인들에게 가장 많은 찬탄을 받은 것은 바로 속옷의 개편이었다.
당시 전통적 속옷은 굉장히 복잡했다. 다리속곳이니 속속곳이니 단속곳이니 너른바지니 대슘치마니 무지기라는 것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고려의 전통복이기도 했고, 조선에서 흘러들어온 문화이기도 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아무리 봐도 너무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했다.
온화한 지방에서도 더웠으니, 무더운 지방에서는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이 모든 이유는 결국 치마와 같은 하의의 미적 기준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은 풍성한 치마, 혹은 드레스였다.
거리가 그렇게 떨어져 있는데도 동아시아와 유럽은 모두 공통적으로 부풀어 오른 듯 화려한 여인의 치마를 극상의 미로 쳤다.
연희는 이 흐름에 반하는 흐름을 최초로 제시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전통예복은 그럴 수 있더라도 실용복에서도 그렇게 입고 다니면 굉장히 불편했다.
부풀어 오른 치마를 위해 안에 입는 대슘치마는 사라졌다. 다른 여러 속곳들도 속옷과 속바지라는 두 가지 분류로 통폐합되었다. 속옷의 개선과 함께 바닥을 쓸 정도로 길던 치마도 조금씩 짧아졌다.
바닥에서 발목까지, 발목에서 종아리까지 조금씩 치마의 길이는 짧아졌다.
풍성함의 미 대신 간결함과 기능미, 각선미의 제시가 시작되었다.
반대로 연희가 새롭게 만든 것도 있었다.
고려의 전통적 윗속옷 가슴가리개는 그동안 큰 발전이 없어 여전히 말 그대로 그저 면이나 비단으로 가슴을 가리는 정도의 기능밖에 수행하지 못했다.
동시에 배자와 저고리 같은 상의는 계속 도련선이 위로 올라가 짧아지고 있었고 소매의 배래와 소맷부리 또한 살과 거의 밀착하는 형태를 띠었다.
옷 안의 체형이 예전보다 더 강조되는 분위기 속, 유럽과 교류한 고려에도 코르셋(스테이)이 들어왔다.
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록한 허리는 옛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와 지나, 반도의 문명을 포함하여 전 지구적으로 굉장히 보편적인 여성적 미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코르셋은 정말 굉장히 입기 힘들고, 입은 후에도 착용자에게 큰 고통을 선사하는 옷이었다. 자기 스스로 입지도 못해 하녀가 꽉 조여주어야 했고, 금속으로 된 지지대의 강한 압박에 숨을 잘 쉬지도 못했으며 갈비뼈가 부러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인종 해찬은 이전부터 이 모습이 썩 보기 좋지 않았던지 궁중에서 이와 같은 폐습이 담긴 옷을 입지 말라는 명을 내렸었으니 황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유행하고 있었다. 고통과 아름다움을 교환하려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연희는 존경하는 할아버지의 생각은 공감했지만 효과는 썩 미미하다고 생각했다. 대안이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그녀는 미적 체형 보정과 실용적 기능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가슴띠를 개발했다.
사람을 반 죽여놓는 단단한 금속 지지대 대신 고무로 된 띠를 넣어 체형을 교정해주는 옷은 편하면서도 미적으로도 적당히 타협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받는 조그마한 녹봉으로 당시 친하게 지내던 상의국의 재봉사들과 협력해 속옷 회사를 차렸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열다섯의 나이였다.
* * *
이렇게 각자 다른 길로 나아가던 둘의 접점이 생긴 시기는 서로가 막 성년의 나이에 진입했을 때였다.
주열은 그동안 염색공장 사장의 밑에서 한 가지 일에 매달렸다.
새로운 염료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언뜻 보면 굉장히 정상적이고 건전한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대상이 지금껏 황실의 독점적 소유로 인지되어 왔던 제자색(청자색, 로열 퍼플)에 대한 모방이라면 꽤 불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라와 이끼 등에서 채취한 기존의 값비싼 염료와 달리, 이들은 화학물질의 합성을 통해 제자색의 생산을 꿈꿨다.
개발할 수만 있다면 수요는 충분할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도 아름다운 보라색의 염료를 쓰길 원할 테니까.
이 일은 사실 주열과 사장의 능력 밖에 있던 일이었다.
화학을 제대로 전공한 사람이 몇 년을 매달려도 발견할까 말까인데 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발견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미 대량생산이 가능한 염료에 대한 단서는 꽤 있었다. 불과 몇 년 전, 연서궁 소속 약학자인 해인환은 키닌의 대량생산에 대해 연구하다 삼중결합 탄화수소와 서로 다른 네 가지 방향족 화합물의 혼합물을 만들어냈다.
용액의 선명한 보라색은 원래의 의도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나타냈지만, 약재 대신 염료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환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는 천생 약학자였기에 이 실험은 수백 수천 가지 실험 중 실패한 실험에 불과했다. 그리고 설령 그가 이 용액의 진가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를 상업적으로 판매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시 제자색은 황실 독점이었고 그는 성씨에서 미루어 볼 수 있듯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았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염료상인들에게는 천금과 같았다.
특히 불법적인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주열의 사장은 그 염료를 대량으로 만들어 팔아 재끼길 원했다.
“으하하! 되었다, 되었어!”
명색이 염색공장 사장이니만큼 염료를 만들 수 있는 단서만 있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다. 그가 세월을 허투루 지낸 것은 아니었다.
사장은 마침내 용액의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의 아래에 있던 주열은 그 염료를 바탕으로 하여 최상의 발색을 내는 조합을 찾아냈다.
곧 선명한 제자색의 원단이 사방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시중에 이런 원단이 나돌아다니고 있어 가져왔습니다.”
“정말로요?”
상의국에 있던 연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염색의 품질이 굉장히 좋은 제자색 원단이었다. 한두 푼 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원단이 상당히 많이 돌아다닌단다.
그녀는 곧바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처음 해원은 굉장히 불쾌해했다.
이것은 고작 염료 따위가 아니었다. 보라색은 로마의 상징이며 또한 천자와 자미성의 상징이다.
황제로서는 어쩌면 이 상황을 황실의 권위가 침해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연희는 아버지의 의견에 반대했다.
“비록 금색과 적색, 자색의 삼색이 황실을 상징하지만, 그 색깔 자체를 어찌 황실이 독점할 수 있겠어요? 아버지께서는 빛과 자외선도 규제하실 건가요?”
딸아이의 말에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긴 해원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이며 큰 결정을 내렸다.
지금껏 유지하던 염료에 대한 독점을 포기했던 것이다. 물론 전통을 좋아하는 황실에서는 계속 소라와 이끼에서 보라색 천연염료를 추출해 염색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일반 사람들은 자유롭게 염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황실이 그들의 불필요한 권위를 이렇게 하나씩 내려놓게 되는 상징적인 일화였다.
황실의 결단은 주열의 사장에게는 호재가 아닌 악재로 다가왔다.
다른 회사들이 그냥 바보 멍청이라 지금까지 그런 일들을 안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기업가들은 황실을 존숭했고, 어쩌면 두려워했다.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렇게 음지의 일이 양지로 나오게 되니 사장은 더 이상 독점적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굉장히 많은 업체들이 염료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니 가격은 그야말로 폭락했다.
한때는 귀했지만 지금은 아주 흔한 염료가 된 코치닐계 붉은색과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된 셈이었다.
“젠장!”
더 이상 염료로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사장은 분통을 터트렸다. 사장은 최근 가지고 있던 염색공장뿐만 아니라 방직공장과 봉제공장까지 모두 구매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이윤을 누릴 수 있는 규모의 사업을 구축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되니 빌린 돈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사장은 추가적인 자금을 구하러 다니는지 한참 동안 공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때 주열에게도 비극이 찾아왔다.
주열은 오랜만에 옛날 집으로 가 애련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곳을 떠나고 없었다. 주열은 가지고 온 옷 한 벌을 봉안탑 제단 앞에 놓았다.
― 너는 퍽 드레가 있어 보여.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작가의 말]
주열이 정립한 색의 삼원색 : CMYK
맵시 : 패션
유행 : 트랜드
스테이 : 코르셋
작중 등장한 염료 : 모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