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76화 (476/653)

명품

“아씨님, 다 오셨습니다.”

마차 안에는 창문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무방비할 때는 아름다움을 찬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나 호감 가는 얼굴이다. 하지만 마부의 말을 듣고 몽상 속에서 나와 현실에 들어온 여인은 한순간 표독스러운 얼굴을 했다. 외모가 성격을 완전히 대변해주지는 못했다.

“오래 걸렸네? 금방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어?”

“도로 군데군데 공사현장이 좀 많았습니다. 박람회 기간이라 마차들도 많이 있었기도 하구요.”

마부로서는 변명할 만했다. 준비를 늦게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고용주인 그녀였다.

설상가상으로 청해는 한창 공사 중인 곳이 많았다. 시 관계자가 아니라 무슨 공사를 하는진 모르겠지만, 도로를 헤집고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듣기로는 지하에 기차를 깔 계획이라는데, 굉장히 터무니없는 일처럼 들렸다.

박람회에서 충격적인 자동차의 등장 이후, 식견 좋은 몇몇 사람들은 마차의 시대가 머지않아 끝나리라고 예상했다.

그래도 아직까진 마차는 상류층들의 주력 이동수단이었다. 이들이 자전거나 혹은 저 멀리 인력이 싼 지나에서 주로 쓰이는 모양 빠지는 인력거를 타고 다닐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마부가 변명을 한 것은 역효과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당신 경고 두 번째야.”

여인은 마부를 노려보고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심기가 거슬린 듯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손가방이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녀가 떠나가자, 한 박자 늦게 따라가는 시녀가 마부에게 얼굴만 살짝 틀며 말했다.

평상시라면 이런 귀띔도 주지 않았겠지만 하도 많은 마부가 잘려 이제는 시녀들도 좀 제대로 된 마부를 부리고 싶었다. 이번 마부는 얼굴도 괜찮고 성격도 조금 미련해보이는 것 빼곤 괜찮으니 오래 버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 한 번 남았네요. 아씨가 뭐라 하시면 그냥 잘못했다고 해요. 멍청하게 변명하지 말고.”

고용주와 시녀들은 백화점 문을 통과했다. 마부는 그가 끌고 온 마차를 백화점의 주차장으로 인도하며 투덜거렸다.

“끼리끼리라더니. 하 참, 돈만 아니었으면 진작 때려치고 나갔을 텐데.”

아씨라 불린 여인, 박지영은 회전문조차 통과하지 않았다. 서민들이 지나가는 통로에 자신과 같은 고귀한 상류층이 지나가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백화점의 문 앞에 서 있는 보안원들에게 눈짓을 했다. 어서 열지 않고 뭘 하느냐는 의미였다.

백화점 내엔 온갖 종류의 손님이 드나들곤 했다. 정문 정도 열어달라는 정도의 손님은 실로 양반일 것이다.

보안원은 실랑이를 하는 대신 회전문 사이의 잠겨 있던 문을 열고 그녀를 들여보내주었다. 고맙다는 인사 하나 없이 지영이 자박자박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깐깐한 지영도 백화점의 중앙현관을 통과하자 내심 인중을 살짝 쓸어내리며 표정관리를 했다. 하마터면 채신머리없게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흠, 과연 대단하네. 괜히 본점이 아니었어.”

눈치 빠른 시녀들이 다소 풀어진 고용주의 기분에 맞추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진짜 그래요!”

지영은 기분을 맞춰준다면 그나마 다루기 편했다. 집안이 원체 돈이 많아 돈도 넉넉히 주었다.

물론 그 기분을 잘 맞춰주는 것은 참으로 힘든 정신적 노동이었지만 시녀들은 이미 충분히 적응이 된 상태였다.

너무 적응을 했는지 과거 그녀들의 모습과 꽤 많이 멀어진 상태였지만.

일층, 명품관은 많은 매장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화장품과 향수, 신발과 가방을 포함한 의류를 팔았다.

물건 구성 자체는 위층의 상품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만 명품관 물건들의 가격은 다른 곳보다 적어도 한 자리의 단위 수 차이가 났다. 어떤 종류의 물건들은 족히 두 자리는 차이 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에겐 이런 높은 가격이 곧 매력이기도 했다. 물건의 가치가 좋다면 가격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자들이었다.

지영이 그랬다.

1층을 거니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구경을 하는 자들과 구매를 하려는 자들. 직원들은 이 둘을 구분하기 쉬웠다.

전자를 홀대하려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도 자신의 실적이 임금과 직결되었기에 후자를 주시하는 것이 명백했다.

제아무리 고려라도 아직 이런 물건들을 선뜻선뜻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생활 수준에 어울리지 않았다.

지영은 그곳을 오연히 거닐었다.

선택지는 많았다. 이곳에 위치한 매장들은 모두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상점이었고 모두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칠색의 설탕 가득 뿌려진 마카론 중 어떤 것을 먼저 집을지 고민하고 있는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첫 번째로 가봐야 할 곳은 있었다.

사람의 취향은 제각각이라 아무리 명품이라도 정답은 없었다. 다만 최상류층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언급되는 상표는 있었다. 이는 검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영이 노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저기부터 가자.”

고갯짓을 하는 지영의 모습에 시녀 두 명이 또 탁월하신 선택이라며 조잘거렸다.

매장에는 옅은 가죽의 냄새, 그리고 향수의 냄새가 났다.

후각에 뒤이어 시각이 즐거워졌다. 들어가자마자 가방과 신발, 모자와 장신구 등이 보였다.

매대에 전시된 것들은 전부 장인들이 직접 심혈을 기울여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

명품점들은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양산품들을 판매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먼 옛날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가내수공업에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와의 차이점이라면 원단과 가죽을 만드는 기술이 이미 현격하게 발전한 상태에서 원가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의 상품을 추구했다.

그저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자들은 이미 현대의 공장에 물건의 양과 질 모두에서 밀려 사라졌다.

이제는 오로지 명장의 반열에 든 소수의 재봉사들이 자신의 명성을 위해 재봉틀을 돌렸다. 그 자존심이 만듦새에 있어서 단 하나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같은 원단, 같은 가죽을 쓰더라도 당연히 값비쌀 이유가 있었다.

물론 명품들은 원자재마저도 가장 최고의 것들을 썼다.

지영은 매대를 천천히 훑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오직 하나였다. 손가방을 사러 왔다. 명품점에서는 옷도 바로 팔지 않았고 예전처럼 사람의 체형을 측정한 뒤에 맞춤복으로 팔았다.

반면 손가방은 맞춤복처럼 주문제작을 할 필요까진 없었기에 이렇게 구매하는 것이 편했다.

단단한 철제 틀과 어두운색의 가죽으로 된 서류 가방이 이제 서서히 고려의 남자들의 옷맵시 요소가 되고 있었다면 손가방은 진작부터 여성 옷맵시의 필수적 요소 중 하나였다.

주머니와 전낭 등의 물건이 사회 발달에 따라 더 복잡하고 견고한 지갑이나 손가방으로 바뀌는 과정은 정석적이었다.

여인들은 필요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를 나가더라도 대체로 지갑이나 동전 정도만 들고 다니는 남성에 비해 지니고 다닐 것이 많았다. 그녀들은 손가방에 자신들의 물건을 넣고 들거나 매고 다녔다. 이런 가방에서도 경제력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다. 상류층들은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작은 손가방들에 귀중품과 필수품들만 넣고 다른 것들은 시녀들에게 맡겼다.

반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전부 들고 다녔기에 어깨에 멜 만큼 중형의 가방을 선호했다.

지영에겐 손가방이 많았지만, 아직 부족했다. 그녀는 한 달에 두 번 이상 한 가방을 들고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최소한 서른 개 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쓰다 보면 완전히 닳거나 찢어진 것도 아닌데 그냥 싫증 나서 버리는 것도 많았다.

그녀의 옷방은 장롱이 적어도 열 개는 들어 있었고 가방과 지갑, 높신 등의 보관대도 많았다.

제품들의 질은 만족스러웠다.

사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조금 더 빨리 오면 좋았으련만. 매장이 연 지 시간이 지나 몇 군데의 매대가 비어 있는 것이 약간 아쉬울 정도였다.

명품점에 있는 물건의 수량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하나하나가 다 수제니 당연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소비자들은 마음에 드는 것들을 구입하려면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여기.”

지영은 손을 들었다.

매장 안엔 사람들도 꽤 있어 직원들이 제각기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어디선가 직원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손님?”

“저 세 번째 진열대에 있는 게 이번에 청해 맵시경연에 나온 것 맞지?”

평소 이러한 명품들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구매하고 있었던 지영은 이 분야에 대해선 꽤 해박했다.

“그렇습니다. 손님.”

“흠, 저거까지 포함해서 이 면에 있는 거 전부 다 줘.”

“알겠습니다.”

직원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물건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그냥 구매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특급 손님이다.

오늘 하루 매장은 운이 좋았다. 아까도 비슷한 분이 왔다 가셨다 한다.

그는 저 부유해보이는 손님이 말한 것들을 매대에서 빼 포장하기 위해 들고 갔다.

하지만 다른 고객을 한창 응대하던 담당자가 그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다소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직원은 담당자에게 구두 진열대로 간 손님을 보고 말했다.

“저분께서 전부 주문하신 겁니다.”

“그건 봐서 아는데, 넌 아까 못 들었어? 저 세 번째 진열대 물건들은 먼저 오신 분이 먼저 예약을 하셨잖아.”

“그…그러셨습니까?”

담당자는 청년을 노려봤다. 그 손님들은 굉장히 독특하셨기에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것 같지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는 그때 마침 화장실에 갔었다. 어제 먹은 고등어 자반이 잘못되었는지 오늘 아침부터 배가 부글거렸다. 지금은 가라앉긴 했지만 얄궂은 노릇이었다.

“그러면 진열대에서 미리 빼놨어야지. 연주는 어디 갔어?”

“오늘 병가입니다.”

“그건 되게 잘 아네.”

관리자가 한숨을 흘리며 저번 주에 위층 매장에서 이곳으로 배속된 신입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이 제품은 방금 다른 고객이 포장해 두라고 말해둔 것 중 하나였다. 돈도 제대로 받았으니 사실상 구매하신 것이다. 선물용으로 포장해달라는 요구에 비단 보자기에 싸서 드려야 했지만 그동안 시계점을 구경하시겠다는 말에 준비해놓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었다.

그런데 신입이 아직 진열대에서 빼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분명한 실수였다.

담당자가 눈을 질끈 감고 콧등을 만지작거리다 이윽고 살가운 표정을 지으며 지영에게 다가갔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이 제품은 이미 팔린 제품입니다.”

당연히 실수를 밝히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이런 매장에 오시는 분들은 의외로 마음이 관대했다. 이를 풍족한 삶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여유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사회적 시선에 꽤 민감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담당자가 경험한 바로는 대체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 말인즉,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였다. 세상은 넓고 별별 특이한 사람도 참 많았다.

“그러면 저게 왜 진열대에 올라와 있는데.”

기본적으로 명품은 수제였다. 사실상의 한정판으로 봐야 했다. 팔리면 언제 살 수 있을지 몰랐다. 특히나 이미 예약되었다는 저 물건들은 이번에 박람회 기간 동안 청해에 서 열린 맵시경연에서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들이 분명했다.

지영의 짜증이 갈 곳은 명백했다.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어쩌면 멍청하고 우둔한 마부가 늦게 도착한 것이 주된 이유일 테다.

하지만 지금 그 인간은 없었고, 화풀이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건방진 년놈들.

이유가 뭐가 되었든 지영의 기분이 나빠졌다. 이들은 그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지영이 쏘아붙였다.

“진열대 위에 올라와 있는 건 판매하려고 둔 거 아니야? 사람 속이려고 올려놨어?”

담당자가 연신 허리를 굽혔다. 실제로 굉장히 죄송했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혹시 다른 제품을 보여드리면….”

“뭐라고? 싫어. 여기선 이게 그나마 제일 마음에 드는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이 내 취향을 알아?”

지랄났다.

직원뿐만 아니라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도, 그리고 심지어 지영의 등 뒤에 있는 시녀들의 머리에도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지영은 화가 잔뜩 나 있어보였다. 뭔 소리를 해도 그녀의 마음에 들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이 년, 잘 걸렸다 그리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녀들도 한두 번 겪었겠는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뒤 베개를 적시며 울먹이는 나날이 얼마였는지 샐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은 꽤 관록이 쌓인 만큼 어쩌면 지금 상황은 지영이 어제 요란하게 언니와 말다툼을 한 여파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성격이 비슷한 둘은 대판 싸웠었다.

타인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은 지영과 같은 자들에겐 특권과 같았다. 특히나 이런 ‘상점’에서는 계약서에 명시된 것마냥 명확한 갑과 을이 존재했다. 저들은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표독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 위에 갑자기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 이 모습은 오히려 더욱 소름 끼쳤다.

지영은 매장 바깥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녀는 미련하게 풀리지 않는 화만 내지 않았다. 사람을 곤경에 빠트려 발버둥 치는 행동을 보며 기분을 풀었다.

“말로만 죄송하다 하지 말고 정말 죄송하고 용서를 받고 싶으면 너가 가서 그 주문을 취소하고 와. 지금 내가 들었던 말, 먼저 산 사람한테 똑같이 해주고 오라고. 그러면 내가 봐줄게. 어때?”

담당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려어엔 또라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어원은 꽤 많은 고려어가 그러하듯 태조 시절 처음으로 등장했다. 외형은 멀쩡해 보이는데, 사회적이나 도덕적으로 크게 잘못된 행동을 하는 자들을 일컬었다.

이 손님이 그와 같았다.

된통 걸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저 말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먼저 사신 손님은 뭐가 되겠는가.

담당자는 그녀 자신의 모욕은 참을 수 있었으나, 다른 손님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특히나 자신이 이곳에 일하는 이상에야 더더욱.

고상함과 품위. 그녀가 일하는 곳의 표어였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대신에 제가 다른 방법을….”

본사에 연락이라도 한 뒤에 새로 주문을 넣으면 원하시는 상품을 자택에 배송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머리를 굴려 최선의 해결책을 궁구해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지영이 노기를 터트렸다.

“뭐라고! 네까짓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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