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75화 (475/653)

백화점

보험사가 대체 왜 이렇게 높은 건물들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전 세계에서 사람이 생활 가능한 고층 건물들의 1등부터 5등까지의 순위 중 4위까지는 전부 청해의 보험사들이 가지고 있었다.

제일 보험과 로이드 보험, 늘벗 보험, 헬리 보험 등이었다. 마천루의 높이가 보험 회사의 신뢰성이나 능력을 증명하는지는 그 아무도 몰랐다.

다만 이런 건물들이 가장 크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연면적이 넓은 건물은 따로 있었다.

연희건물이라고 불리는 건물은 높이 자체는 보험사 건물들에 밀려 5위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건물의 전체 면적은 다른 건물들보다 더 컸다. 연희건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뚱뚱한 건물이었다.

높이보다는 건물 내 면적이 중요했던 것이다.

건물 주인의 특수성 때문임이 명백했다.

이 연희건물 안에는 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연희백화점이 들어서 있었다.

청해 시민들의 재력과 생활 수준, 그리고 그로 인한 소비욕을 미루어볼 때, 청해에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 들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화점은 정말 획기적인 곳이었다.

물론 백화점 등장 이전에도 고려 내의 상점은 굉장히 많았다. 의류 상점, 갓 상점, 신발 상점, 속옷 상점, 화장품 상점, 시계 상점과 같은 기타 여러 가지 상점들은 종류를 샐 수 없을 정도였다. 아주 구석진 시골의 몇일장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포함하면 실로 모래알처럼 많았다.

백화점은 생활 수준이 몹시 높아 상시적으로 많은 소비욕구를 가진 지역에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상점들을 입점시켜, 모든 물건을 한 장소에서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번거롭게 여러 군데를 다니지 않고 물건들의 장단점을 비교해 가며 소비를 할 수 있으니, 실로 놀라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백화점이 정말로 혁명적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이유는 바로 엄격한 정찰제에 있었다.

이 거대한 제국 내에 위치한 수많은 상점들은 제각기 판매하는 물품의 가격이 달랐다.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 산골짜기 마을의 물건과 도시의 물건을 비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도시에서도 달랐다. 물건을 떼오는 주인의 능력이 좋다면 값이 저렴했다.

그러니 고객들은 언제든지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흥정을 했고 실랑이 끝에 10원 하던 것이 9원, 8원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7원이나 5원 정도로 떨어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것이 심히 피로한 과정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반면 도시 내의 번화가에 위치한 백화점은 완벽한 정찰제를 시행했다. 백화점의 물건이 최고로 저렴하다고 보긴 힘들었다. 어딘가에서는 더욱 싼 값에 물건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완전히 덤탱이를 맞는 일은 없었다. 백화점은 입점한 점포들을 까다롭게 선별했다. 양아치 같은 상점들은 엉덩이를 차 내보냈다.

그러니 시간이 금인 상류층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백화점에서 소비를 하는 것이 정말이지 최고의 여건이었다.

사람을 시켜 물건을 구매하라 하는 경우나 상인을 직접 집에 초대해 물건을 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보낸 사람의 안목이나 방문한 상인이 가진 물건의 다양성에 있어서 매번 불만스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비자에게도 더없는 혁신이었지만 안에 입점한 상점들도 이익이었다.

물건들이 쉽게 비교되니 필연적으로 생산자 간의 경쟁이 심화되겠지만, 오히려 백화점을 찾는 소비자들의 규모 자체가 증가하니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집적의 경제는 다른 측면에서도 볼 수 있었다. 각 생산자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제품의 품질을 높일 것이 분명했다. 또한 이렇게 생산자들이 접촉하며 몰려있게 된 이상 백화점을 통해 새로운 혁신적 생각의 출현과 진보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었다.

연희백화점이 생긴 이후, 백화점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연희백화점도 청해 본점에서 시작하여 창양점, 영서점, 해문점, 태로점, 미원점, 동래미점으로 확장했다.

이윽고 연희백화점 근처에 다른 백화점들도 생겨났다. 연희건물보다야 작았지만 주변의 다른 건물들보단 훨씬 컸다. 연희백화점에 이들 태화백화점, 금성백화점, 신해백화점을 포함해 4대 백화점이라 부르기도 했다. 놀랍게도 이 백화점들 모두 청해에 본점을 두고 있었다.

이 백화점 거리는 ‘숙녀의 거리’, 혹은 ‘아름다움의 거리’라 불렸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상류층들은 다음 날 정오에 객원을 나왔다. 객실 청소를 위해 비켜준 것이 아니었다. 고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제각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아내와 딸들의 여정에 동행했다.

부름차를 타고 도착하면 으리으리한 건물이 보였다. 정중하게 부름차의 문을 열어주는 사내들의 안내를 받으며 수정궁에 도입한 새로운 문과 같은 회전문을 통과하면 눈부시도록 환한 조명에 휩싸인 실내를 볼 수 있었다.

백화점의 내부는 화려한 대리석과 광택가공을 한 화강암 등의 자재로 꾸며져 있었다.

규모에선 수많은 전시관을 가진 수정궁이 압도했지만 내부의 화려함만 보면 박람회장인 수정궁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은 전통적인 ‘사치스러움’에 집중한 곳이었기에 오히려 미래적 기술을 과시하는 것이 중점인 수정궁보다 더욱 화려했다. 번쩍거리는 바닥은 더러운 신발을 신고 들어가기도 죄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연희백화점은 지하로는 2층까지, 지상으로는 일 층부터 십 층까지의 높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층수마다 취급하는 품목은 달랐다.

창고 및 공사 현장, 그리고 식료품관이 위치한 지하층을 제외하곤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2층은 화장품과 향수, 3~4층은 여성 의류, 5층은 남성 의류, 6층은 축구나 정구 용품 등의 운동 물품과 그 의류, 7층은 아동 의류와 물품, 8층은 가구와 생활 도구, 9층은 식당과 일반 고객을 위한 휴게실이 있었으며 10층은 중요 고객을 위한 화려한 휴게실, 그리고 백화점 관리자들의 사무실이 위치해 있었다.

연희백화점은 경제학자 및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받아 이렇게 층수 구성을 꾸렸는데, 재화들의 수요 가격탄력성을 측정하여 탄력성이 높을수록 가장 아래층에 배정했다. 접근성이 좋으면 수요량의 변화를 최대한 막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반면 상대적으로 고층에 위치한 매장들은 이왕 백화점까지 온 이상 대체로 살 수밖에 없는 수요량 변화가 둔감한 재화들이 들어가 있었다.

이런 구조는 연희백화점이 한번 정립한 이후 다른 백화점에서도 비슷하게 따랐고 백화점의 정석적 운영이라 평가받게 되었다.

* * *

연희백화점의 십 층엔 자신만의 왕국의 옥좌에 앉아 있는 여왕이 있었다.

정말로 ‘백화점의 여왕’ 혹은 ‘유행과 아름다움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이 여인은 자신의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독특한 일이었다. 아무리 상류층이라 하더라도 고려 내에선 군주의 명칭을 쓰긴 힘들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황제나 천자라는 말을 쓰진 못했다.

그에 비해 왕과 여왕이라는 표현은 꽤 대중적으로 쓰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익숙하진 않았을 것이다. 첫 우승 이후 수년간 군림하여 아직까지도 그 위명이 깨지지 않고 있는 ‘정구의 여왕’ 송경아조차도 그 명칭에 항상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 왕국의 주인에겐 어색한 일이 아니다.

위대한 쌍용지손이자 현 황제의 여동생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고려의 문화는 여러모로 바뀌었다. 먼 옛날에는 휘 대신 호나 자가 주로 불렸다. 태조의 자인 강휘와 호인 세원은 역사책에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으니 모르는 자가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관습은 사라졌다. 한자 및 지나 문화권과 접촉이 뜸해지고 반대로 유럽과 접촉이 빈번해지니 이제는 이름을 경외시하는 문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예외라면 금상과 선제에 한하는 정도였다. 이들은 아직도, 아마 앞으로도 묘호를 부를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계나 곧 방계가 될 종통은 여지없었다. 심지어 황자들도 태자에 책봉되기 전까진 휘로 불렸다.

그럼에도 공주의 휘를 딴 연희백화점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 대중들에게 엄청난 신뢰성을 자랑했다. 자연스럽게 연희가 느끼는 책임감도 무시무시했다.

“회장님, 말씀하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요.”

해연희는 서류 작성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백화점의 상황을 둘러보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황실의 기풍에 따라 아랫사람을 굉장히 후하게 대우하는 그녀였지만, 능력이 없거나 태만한 자에겐 그 후함이 적용되지 않았다.

삭풍이 몰아치지 않기 위해선 임직원들이 일 처리를 잘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어서 나가자 수행이 다섯 명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일구는 사업의 규모를 볼 때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다. 게다가 두 명은 임원이 아닌 경호원이었다.

연희는 해씨 종특인지는 몰라도 허례허식을 싫어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황궁에서 귀하게 자란 탓에 남들이 좋아하는 어설픈 예식은 그녀에겐 도리어 짜증만 일으켰다.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영업 중이었으니 이곳의 주인으로서 그녀는 고객들의 내왕을 최대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매장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연희의 뒤를 세 명의 본부장이 졸래졸래 따랐다. 근위여단 출신 경호원의 몸집도 장난이 아니다 보니 아무리 그녀가 상류층 사이에 녹아들려고 해도 그 풍경이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더군다나 백화점 내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본부장들은 물론이고 연희의 얼굴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최고 등급의 경계태세가 떨어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희는 자동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이 계단은 말 그대로 자동으로 움직였다. 백화점의 가장 큰 난관은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위층으로 올리느냐는 문제였다.

전통적인 계단은 십 층 이상의 건물에선 쓸 수 없었다. 마음 놓고 소비를 하러 온 자에게 고된 운동을 시킨다면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승강기는 좋았다. 연희백화점에도 모두 여섯 개의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탑승 인원에 한계가 있었다. 또한 밀폐된 승강기는 다른 상품들을 구경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탑승만 하면 스스로 움직여 사람이 저절로 오르내릴 수 있게 되는 자동계단의 등장은 이 모든 우려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엄중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연희는 문득 참을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회사와 임직원들이 자랑스러웠다. 이곳은 현대의 상징과 같았다. 백화점에서 거래할 수 없는 물건은 없었다. 박람회에 있는 물건들 중 몇 개도 이곳에 들어서게 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 스스로 해낸 것이다. 황실의 지원은 별로 없었다. 지울 수 없는 후광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금전적인 지원은 그저 자신이 독립하게 되면서 얻은 약간의 자금이 전부였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과 혈관에 흐르는 신성성을 증명했다.

이곳은 어쩌면 정말로 용의 재보가 모아져 있는 둥지와도 같았다.

백화점의 각 층은 물건들로 꽉 차 있었다. 그 종류의 수는 정말 백 가지가 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가장 많은 재화의 공급과 수요를 자랑하는 것은 아무래도 의복이었다.

산업혁명은 생산량의 폭발을 일으켰다. 잉여물산들은 사회 전반에 걸쳐 무척 많아졌다. 의복은 목화 산업과 모직물 산업, 그리고 기타 다른 의류 소재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가장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고려인들은 가지고 있는 의복이 많았다. 부유함과는 거리가 있는 서민들도 장롱 안에 옷을 몇 벌씩이나 가지고 있었다.

경조사 등 극도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장소에 입을 옷 한두 벌, 손님을 맞이하는 간단한 정도의 예의 있는 옷 두어 벌, 일반적인 생활복 네다섯 벌, 작업복 두어 벌 정도는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남자에겐 옷만큼이나 중요한 갓도 다양하게 있었다. 기본적인 고려식 가죽 피립이 있었으며 위도가 높아 추운 지역에서는 남바위 등의 털모자도 있었다. 더운 지역에서는 통풍이 용이한 조선식 반투명한 흑립이나 격식 없는 자리에선 밀짚모자나 패랭이도 즐겨 썼다.

여인들도 갓과 비슷한 모자를 썼다. 다만 남자들과는 좀 달랐다. 남자들의 갓이 흑색에 챙이 비교적 짧아지는 형태로 수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여인들은 일반적인 천연 양모색에서 산뜻한 색의 단색과 여러 독창적인 형태로 발산하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햇빛을 완전히 가리기 위해 챙이 넓고 하늘하늘한 모자였지만 모양은 다소 달랐다.

그렇기에 백화점 3층과 4층은 항상 수많은 여인들로 붐볐다. 가족과 동행한 남자들도 따로 떨어져 5층에 가니 위층까지도 분수효과에 따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아졌다.

연희는 가구 층에서 아동 층을 거쳐 운동복 층까지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그 아래층으로 갈수록 지적사항이 늘어났다. 백화점의 가장 주력 상품은 의류였다. 의류 중에서도 여성복이었다.

본부장들은 사람들이 상황을 모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수첩에 빠르게 연희의 말을 필기했고, 연희의 눈이 닿는 매장의 직원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미 검사에 통과해 옆에서 남 일 구경하듯 보는 위층 직원들은 이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연희는 맨 밑에 도달했다.

1층, 명품관.

백화점의 얼굴,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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