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74화 (474/653)

건축공학

박람회는 사람이 엄청나게 몰린 첫날 이후에도 성황리에 이어졌다.

반년씩이나 기간을 설정한 덕에 다른 이들도 충분히 와서 구경할 수 있었다.

수정궁은 볼거리가 참으로 많았다.

주최 측에서는 놀이패들이나 음악가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했다. 일부 구역에서는 길거리 음악가들도 자신들의 재능을 뽐내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끝이 나기 마련이다. 박람회가 후기의 계획에 맞추어 새롭게 재단장을 하려면 시간이 좀 지나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가 이후 자신들의 집과 일터로 돌아갔다. 이동 거리를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일수록 서둘렀다.

신사들이야 가깝더라도 몹시 바쁜 자들이었으니 재빨리 담쟁이거리로 되돌아가 열심히 자기 업무에 매진할 터였고, 생계가 바쁜 보통의 사람들도 그렇게 오래 직장이나 일터, 가정을 비워둘 수 없었다.

그러나 다소 여유로운 삶을 향유하던 일부 계층의 사람들은 달랐다. 이들도 직업이 있겠지만, 그것에 구속되진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국의 각지에서 온 자들은 이왕 가장 발전된 도시에 온 김에 그냥 빈손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적어도 한 주 혹은 두 주는 더 쉬고 싶었다.

이들은 청해의 중앙에 머물렀다. 예전엔 제포라 불렸던 이곳에는 바다를 향해 바라보는 많은 고급 객원들이 있었다. 건물의 높이도 상당하여 십 층, 십이 층 하는 고층 강회 건물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청해 구도심과 신도심을 분리하는 바다와, 그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도심들을 이어주는 4백여 미터의 거대한 강철 다리인 홍현대교, 그리고 저 멀리 아주 작게나마 보이는 담쟁이거리와 통령관저까지. 인기가 많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홍현대교는 세계 최초의 현수교였다. 당연히 청해의 대표적인 마루지이기도 했다. 마루지란 여행객들이 이정표로 삼을 만한 기념비적인 건물이라는 뜻이었다.

전통적인 고려의 다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목재에서 석재 및 벽돌 소재 등으로 바뀌어 나갔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재료들은 여전히 창강이나 광하, 미시시피 하류와 같이 큰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를 만들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 강들은 폭이 좁게는 몇백 미터, 넓게는 몇 킬로미터에까지 달했다. 두 강의 다리 모두 꽤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강폭이 최대한 좁은 곳을 선택하거나 혹은 하중도를 이용해야만 지을 수 있었다.

파도가 많이 치는 바다 대교 또한 건축하기 힘들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에 고려에선 5세기부터 철근강회와 철제 구조물을 이용한 다리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강회의 발달과 주철과 연철, 강철로 이어지는 제철의 발달은 건축공학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주기 시작했다.

동시에 교량의 구조도 발전했다. 단순한 다리는 제아무리 재료가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구조상으로 한계가 있었다.

날이 갈수록 다리에 가해지는 부담이 많아지니 공학상으로 이를 분산해야 했다.

기존에야 기껏 말과 마차, 사람 몇 명이 건너는 것에 불과한 다리는 이제 육중한 열차까지 지탱해야 했다.

철도교와 일반교의 구분이 있긴 했지만 성장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도 교량에 더해지는 부담은 더해지면 더해졌지 줄어들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중요한 문제도 있었다.

수송 요구량의 폭증으로 강가를 오가는 배가 커지는 상황 그것들의 통행을 위해서 교각과 교각 사이의 폭, 즉 경간을 넓게, 다리의 높이를 높게 할 필요성도 제기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과거의 일이긴 하나 어떤 유럽의 나라에선 다리 위에 상점과 같은 건축물을 올려놓기도 했다. 김홍 제독이 불태운 런던 브릿지처럼 아예 다리 위에 집을 지어놓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굉장히 위험한 짓이었다. 또한 작은 수송선도 통과하기 힘들 정도로 다리 교각이 촘촘해질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런 추태를 부리는 나라는 없었다. 그래도 이런 추가적 구조물 없는 전통적인 다리, 즉 형교(桁橋)의 구조적 특성은 어쩔 수 없었다.

개선해야 할 문제였다.

창양은 수도였지만 그 위에도 대도시들이 있었다. 이런 도시들은 열차 노선이 충실하게 깔렸음에도 수운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가뜩이나 창양은 이런 도시들에게 강하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제한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제도만큼이나 확실한 1차 하수처리장과 오폐물침전기, 바다까지 이어지는 하수관 같은 것들이 요구되었고 폐수를 많이 만드는 공장 허가도 잘 안났다. 그런 공장들은 저 남쪽의 사람 드문 황무지 바닷가에 가는 편이 좋았다.

이런 마당에 교량의 교각까지 빽빽하게 지어 수운 통행을 방해한다면 제도 북쪽에서 창강을 공유하고 있는 도시민들은 굉장히 섭섭할 것이 분명했다. 창강은 남려 모두의 젖줄이었다.

형교를 대체할 방법은 꾸준히 나왔다.

가장 처음 등장한 것은 홍예교(아치교)였다. 홍예 구조물을 두어 교량의 하중을 버티게 하자는 것이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했지만 공학적으로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전통적인 방법은 교량 밑부분, 즉 교각과 교각 사이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선박의 충돌 가능성이 빈번했다. 항상 홍예의 가장자리를 피해 교각과 교각의 정 가운데로만 통과해야 하는데, 배를 모는 선장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을 터였다.

이에 홍예 구조물을 다리 위에 올리자는 의견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지금도 고려에 현역으로 쓰이는 기법이었다. 다른 강에선 충분히 괜찮으니 앞으로도 쓰일지 몰랐다. 더군더나 홍예 구조물은 잘 꾸미면 미적으로 굉장히 아름답기도 했다.

하지만 홍예 다리는 여전한 한계가 있었다.

일단 굉장히 건축비가 비쌌다. 그리고 형교보다야 넓었지만 여전히 경간이 넓다고 보긴 힘들었다. 경간을 길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다리 위에 설치할 홍예 구조물도 길고 크게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기술적으로 힘들었을뿐만아니라 안그래도 비싼 교량의 가격이 하늘로 솟구칠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지어진 교하대교 같은 다리는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국토부가 눈물을 머금고 많은 자금을 동원해 가능한 기술력 내에서 큰 홍예를 이용해 억지로 만든 다리였기도 했다.

이에 공학자들은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홍예교의 본질적인 단점을 보완한 다리라기엔 애매했지만 지붕틀교가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교량 위에 철제로 된 삼각형 구조물들을 이어 만든 교량이었다. 지붕틀 자체의 한계로 경간문제는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고 상판의 폭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굉장한 장점이 있었다. 홍예교와 비교하자면 공사비가 상당히 쌌다. 제철소에서 양질의 강철을 뽑아내는 고려는 더더욱.

이에 고려 내의 대부분의 철도교들은 지붕틀교를 채택했다. 겉모습도 꽤 현대적이었다. 열차가 지나가면 큰 소음을 내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지붕틀교도 앞으로 쭉 쓰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걸작’이라고 칭할 수 있는 다리는 따로 있었다.

마침내 현수교가 등장하며 경간과 다리 높이에 대한 홍예교와 지붕틀교의 문제점을 완벽히 해결했다.

대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개천 449년에 지어지기 시작해 대전이 끝난 457년에 완공된 홍현대교는 기존 바로 옆에 있던 교량에 비해 실로 압도적인 경간, 아니 지간을 자랑했다. 교각은 오로지 주탑 하나였다.

거대한 순양함이나 전함까지는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꽤나 큰 수송선이 교각 하단을 오갈 수 있을 정도였다. 청해가 바다임을 생각해보면 아주 강력한 장점이었다.

현수교는 당대 건축공학의 정수였다.

개념 자체야 예전부터 있었다. 심지어 티베트나 부탄 같은 산골짜기에서의 구름다리도 이 원리를 따라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작은 목재 다리와는 달리 오랜 기간 동안 엄청난 무게의 교량을 지탱할 현대의 다리는 차원이 달랐다.

구조적으로 훨씬 어렵고 복잡했다.

다리를 건설할 지점에 강삭으로 된 줄닻(실제 닻이 아닌 건축용어)을 땅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그 씨줄(가로줄)을 현수교의 주탑 위에 올린 다음 교량의 무게를 지탱하는 날줄(세로줄)과 이어 현수(懸垂)한 다리였다.

여담으로 이 줄은 강삭이라는 말 그대로 강철로 된 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정한 굵기의 철사를 여러 개 모아 한 개의 줄로 꼬아버렸다.

처음 이 개념을 접한 공학자들은 탄성을 질렀다. 홍현대교의 처음 계획은 사슬로 만든 현수교였는데 이런 강삭은 사슬보다 인장강도가 훨씬 더 높았기에 건축의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설계도도 뜯어고칠 수 있었다.

훈수를 둔 상민은 약간 당황했다. 그냥 단순한 상식에 불과했었기에 지나가듯 훈수를 둔 것에 불과했다. 그는 심지어 그때 이라크에 있었다.

와이어 로프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박히지 않은 것은 미처 몰랐다. 어떤 면에선 아무리 시대 발전이 빨라지더라도 진보가 느린 분야가 분명히 있었다.

홍현대교는 무사히 완성되었다. 아직 안전장구류나 기타 여러 가지가 부족한 이 시대에선 아무리 안전에 신경 쓰더라도 거대한 토목공사에선 희생자가 나왔다. 하지만 홍현대교는 경미한 잠수병에 걸린 몇 명을 제외하고는 무사히 공사가 끝났다.

명칭대로 다리는 전부 붉게 칠해져 있었다. 홍현대교는 바다에 설치되었기에 해풍이나 해수의 영향을 정면으로 받았다. 당연히 강삭을 포함한 모든 자재에 도료가 충실하게 발라져야 했다. 붉은 도료는 일단 가장 흔했고, 푸르고 회색빛의 바다에서 선명하고 인상적으로 보였기에 채택되었다.

전망이 좋은 객원의 식당에서 푸짐한 한 상 정찬을 즐기고 차 한 잔을 마시며 바라보는 홍현대교의 모습은 아마 단적으로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갑자기 인상을 썼다. 경관이 다 좋은데 딱 한 곳은 그렇지 않았다.

신도심에 이상한 건축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보기 흉했다.

아타나토스 계열의 가장 최고급 객원 ‘사계’의 식당에서도 불평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대체 저런 흉측한 건물은 왜 짓는 거랍니까?”

“저것도 현대주의의 상징이라네요. 강철로만 구조물을 만들면 가장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대요.”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전통적인 고려적 아름다움과 저 앙상한 뼈대만 드러나 있는 건축물은 많이 달랐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었다.

어찌 보면 불교의 탑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그저 하늘 위로 너무나 강렬하게 올라가고 싶어 하는 피라미드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전통적인 벽 대신 그저 강철로 된 철골 구조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흉측함의 대부분은 그 앙상함이 차지했다.

청해시에서는 박람회를 기념하여 철의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지으면서 공모전을 열었던 적이 있었다.

이에 남호철교, 당산철교 등의 건축가이자 홍현대교에도 참여했으며 철제 교량 구조에 대해선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는 안승철의 계획이 채택되었다.

그는 박람회를 기념하여 이 시점에서 단번에 가장 높은 건물을 지어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동안 고려는 최초의 마천루라 불리는 몇 개의 보험사 고층 건물들이 존재했지만 그 높이는 아직 그리 높지 않았다. 기준을 완화해 사람이 오갈 순 없지만 단순히 가장 높은 건물을 꼽아보자면 여전히 145미터인 청해 성공회 대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제일 높았다.

세계적으로 따지고 보면 잉글랜드의 링컨셔주에 위치한 링컨 대성당의 첨탑이 가장 높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링컨 대성당 첨탑은 예전에 무너진 후로 복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도이치의 슈트랄준트에 있는 성 마리아 대성당이 한동안 1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기록이 깨졌다.

전후 오스트리아와 동군연합으로 도이치 민족의 통일을 달성한 프리드리히는 개신교계 도이치인들과 가톨릭계 오스트리아인들의 통합을 위해 뮌헨 성모 대성당을 거대하게 지었다. 첨탑을 포함한 성당의 높이는 165미터에 달했다.

이는 청해 대성당보다 더 높았으니 약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마천루들이 높이 올라가는 추세로 볼 때 언젠간 따라잡을 순 있었다.

근래는 아니었다. 사람이 안에서 제대로 생활할 수 있는 고층 마천루가 당장 대성당의 첨탑을 갱신하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사람들이 그동안 이인자로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고려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크고 높은 것을 좋아하긴 했으니 안승철의 계획은 상당히 많은 이들이 동의했다.

계획도 현실성이 없진 않았다. 철제만으로 탑을 만들면 기존의 방법보다 건설 시간이 비약적으로 감소했다. 강회를 타설한 뒤 양생할 조건과 시간을 엄격하게 맞출 필요도 없었다. 그냥 철근을 뚝딱뚝딱 조립하면 되었다.

취영탑(鷲靈塔)은 박람회 개최 2년 전인 개천 463년부터 바다로부터 다소 떨어진 청해의 서쪽 언덕에 지어졌다.

취영이라는 명칭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파한 석가의 일화에서 따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안승철은 불교도였다.

큰 반대는 없었다. 일단 뜻 자체가 ‘독수리의 혼령’이니 고층 건물에 꽤 어울렸던 것도 있었다. 또한 이름의 어원을 제외한다면 이 탑 자체가 절대 종교적 목적으론 쓰이지 않을 것이 명백했다. 탑에는 단지 승강기를 이용해 올라가 청해시를 구경하는 전망대가 있었다.

언덕에 지은 이유는 고저를 이용하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다. 남려 동해안은 언덕이나 산을 찾아볼 수 없는 창강 대평원과는 달리 위도가 낮아질수록 언덕이 많아지는데, 청해도 서쪽으로 가면 언덕이 많았다. 이런 언덕을 이용하니 안 그래도 높은 건물이 더욱 위용이 넘칠 것이다.

또한 철탑에겐 치명적인 해풍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청해시의 범위는 어느덧 이곳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과거 이곳은 제포라고도 불리지 않는 한적한 시골에 불과했지만, 청해가 갈수록 커지며 대도시화가 되자 주거지역이 서서히 옆으로 확장되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더 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취영탑은 465년 2월에 박람회가 개최되고 5월이 지나갈 무렵 완공되었다.

세계의 높은 건물 기록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취영탑은 그동안 1위를 기록하던 뮌헨 성모 대성당의 높이를 아득히 추월했다.

계획된 높이는 333미터, 무려 두 배에 달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 기간은 2년 하고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강철 건축 자재에 부식 방지를 위해 아연 도금을 하지 않았다면 더욱 빨랐을지도 몰랐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시의 건물이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미적지근해했다. 시대 관념상 미적 기준을 충족하지 않았다. 일반인들 입장에선 보다 보면 예쁜 것 같기는 했지만, 소위 말하는 예술가들은 취영탑을 헐뜯으면서 자신들의 미적 감각의 우수함을 자랑하기도 했다. 완전히 그릇된 말은 아니었다. 말라비틀어진 것이 거리의 경관과 조화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시대가 지나며 거리의 경관과 조화가 가능해질 때 재평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청해에서 쉬고 있는 상류층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물은 다른 건물이었다.

[작가의 말]

형교 : 거더교

홍예교 : 아치교

지붕틀교: 트러스교

마루지 :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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