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71화 (471/653)

박람회(2)

이처럼 유수원은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 장기 투자에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반면 이아코보스는 그와 달리 단기적인 위험관리에 능했다. 또한 가끔가다 굉장히 모험적인 선택을 하는 유수원에게 반대 의견을 주곤 했다.

어떤 한 상황에 매몰되면 다른 것들을 상대적으로 고려치 않는 인간의 특성상 반대 의견은 필수적이었다. 만약 이아코보스와 수원의 의견이 합치한다면 이아코보스는 가용한 자금을 늘리기 위해 금전적 투자를 외부에서 물어다 제공하곤 했다.

한 명의 투자자보다는 이렇게 두 명의 궁합 좋은 투자자가 더욱 괜찮았다.

둘의 활약으로 미루어 볼 때 유안 투자은행이 승승장구하여 청해에 이름난 투자은행으로 발돋움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말만 은행이지 독자적 공공기관이라 볼 수 있는 중앙은행을 제외한다면 고려엔 크게 두 가지 은행이 있었다.

상업은행은 흔히 말하는 5대 은행, 즉 메디치 은행, 청해 은행, 누리 은행, 신려 은행 등이 꼽혔다.

이들은 개인이나 기업을 상대로 수신을 하고, 이 예금을 여신, 즉 다른 개인과 기업에게 단기대출로 제공했다.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대출이자와 예금이자 사이의 예대차이가 주 수입원이었다.

이런 상업은행은 고려 재무부와 금융위원회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민생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만큼 은행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라 봐도 무방했다. 예금자보호법과 같은 직관적인 보호 방법도, 지급준비제도 등의 탄생도 따지고 보면 이런 위기를 최대한 막으려는 제도였다.

자연스럽게 상업은행은 안전자산 투자를 통한 수익 추구를 최우선적으로 삼았다.

반면 투자은행은 달랐다.

이들은 굉장히 공격적인 투자를 원하는 투자자들과 상업은행보다는 더욱더 긴 장기자금을 원하는 기업을 서로 이어주었다.

모든 이들이 안전한 방법만 택한다면 과감한 시도를 통한 혁신이라는 것이 나오기 힘들었다. 높은 위험률은 높은 수익으로 되돌아왔다.

대신 투자은행은 일반적인 개인에게서 예금을 받지 않고 주식이나 채권 등의 유가증권을 발행하고 유통했다.

고려는 현재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업무 분리를 시행하고 있었으니 은행은 어느 한쪽을 택해야지 양측의 업무 모두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참여하는 회사 목록이 나왔나?”

“아직은 아니겠지. 근데 이번 달 내에 확정된다더라고.”

“괜찮은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일전 급은 바라지도 않지만.”

수원이 물이 담긴 잔을 들고 입맛을 다셨다. 국은 이미 다 먹고 없었다.

일반전기회사는 그들이 탐내기엔 이미 너무 대단해진 기업이었다. 또한 지분구조가 독특하게 안정되어 있어 절실한 자금을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다.

둘은 갓걸이에 걸어놨던 그들의 갓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원이 계산을 끝내고 지갑을 두루마리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 넣었다. 단추를 여미고 나가니 이미 대부분의 신사들은 자신들의 회사로 돌아가 있었다.

“그나저나 일전 대주주에 대해선 알아봤어?”

고려의 현 상법상 기업의 주식 일정 수량을 가지고 있는 자는 금융위원회에 의해 시장에 공시되었다. 5푼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 대상이었다. 자본시장에서 개별 기업의 5푼 주식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수원이 뜬금없이 일전 대주주를 신경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동일한 인물, 혹은 단체가 유안 투자은행의 지분에 참여하길 원한다는 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이다.

알고 있기론 이 이상한 단체는 상장도 되지 않아 가질 수 없는 기업들, 예를 들면 부익사나 종동사 같은 회사들의 주식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메디치 은행과 청해 은행 같은 최고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들에도 꽤나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네 짐작이 맞는 것 같다. 황실이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이아코보스의 말에 수원이 짧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직 궁금증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내장원 자산이랑 종친회 및 왕부 자산들과는 별개로 운용된다는 건가? 이상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조금 더 위험성 있는 투자를 하고 싶은 게지. 이름을 따로 분리해 체면을 차리고 위험을 분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내장원은 지금 황철은 물론이고 기타 수많은 국가 산업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잖아.”

“규모가 문제라는 거지. 내장원과 종친회 자산들도 엄청나긴 하지만 내 계산으론 둘 모두 일전 대주주가 가진 자산엔 절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재계의 어둑시니.

신사들은 그 정체를 모르지만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체를 황제의 다른 자금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금융위원회의 칼날이 난도질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아니, 이제는 그 칼날도 효과적일지 의문이다. 재무부와 금융위원회의 강력함도 과연 저 괴물을 잘라낼 수 있을까.

“황실은 비밀이 많잖냐. 아니 황실만 그런가? 여기 청해도 시민들이 선출하는 시장이라는 존재가 없고 아직도 통령제를 실시하는 마당에? 난 이 덩치 큰 도시가 어떻게 이렇게 잘 굴러가는지 예전부터 너무 궁금했다. 상서령이나 시중이 관리감독하는 것도 아니었고. 뭐 이제 청해특별시 추진이 제대로 된다면 옛 전통에서 벗어나 시장을 선출하겠지만 말이야.”

수원은 이아코보스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그래도 하는 생각은 비슷했다.

‘황실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아니라면?’

아니야, 아닐 테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았다. 정보총국 같은 곳이 가만히 있는 것도 그랬다. 수원은 진정했다.

그래도 그는 이 대낮의 점심시간에도 문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너무 잘 보이는 ‘큰손’의 자산 규모는 무시무시하게 컸다. 단순히 지금 큰 것을 넘어, 미래에도 훨씬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전통 있는 부잣집 가문들 중에서도 투자에는 영 젬병인 가문들은 많았고 그들은 고지식하게 그들의 자산을 금으로 부여잡고 있거나 혹은 투자 제한이 걸리지 않은 땅 중에 좋은 땅을 사곤 했다.

물론 위험부담이 거의 없는 금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고 부동산도 괜찮은 자산 다각화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주식보다야 이윤을 얻기엔 모자랐다. 더군다나 고려의 땅은 한없이 넓어 직접 임장을 다니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다.

반면 이 손은 무서울 것 없다는 듯 오히려 활발히 투자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의 기업과 회사들, 은행들에 엄청난 금전적 투자를 했고 그들이 가진 자본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지켜보니 이 어둑시니도 실패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성공하는 비율이 기타의 다른 투자은행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성공하는 규모는 실패를 아득히 초월했다. 이들은 지금껏 존재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이들이 투자하는 것에 따라 투자한다면 큰 이윤을 남길 것이라는 소리도 허언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으니까.

수원은 두려웠다. 정말로 올려다보면 계속 커진다는 괴물 어둑시니처럼 그 손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안 이아코보스는 팔등에 돋아난 소름을 쓸어내리는 수원을 흘깃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다음 주 내로 박람회 참여 기업 목록 줄게.”

“어? 어. 그래. 알았다.”

* * *

개천 465년 2월 1일.

제국산업박람회가 막을 열었다.

2월 1일부터 무려 180일간 진행되는 박람회는 광대한 영토에 살아가는 북려의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였지만 아직 그 여파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은 멍하니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 자체가 제국산업박람회인 만큼 그들이 직접 참여치는 못했다. 오로지 구경만 가능했을 뿐.

하지만 고려는 이 박람회의 경험을 토대로, 개천 470년에 대대적인 만국박람회를 파남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나라들은 그 기간 동안 자신들의 저력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다른 나라들은 개천 470년의 파남만국박람회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고려가 찬란한 최신형 발명품들을 자랑할 때 쓰레기더미를 가져와 전시랍시고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이 격차를 당장 따라잡지는 못하겠지만 자국의 자랑스러운 산업들을 한 번 더 점검해야 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고려의 독무대였다.

최초의 대규모 산업박람회는 전례 없는 규모로 실행되었다.

엄청난 양의 경관과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투입한 자금도 대단했다. 청해시가 주관이었지만, 상무부와 황실에서도 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입장료를 받는 만큼 심한 적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것보단 위신이 중요했다.

상민은 직접 이 산업박람회의 준비상태를 감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하기도 전에 직접 와서 박람회장 내부의 배열이나 전시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미래인의 감각인지, 혹은 그저 재능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박람회나 전시회는 어려워할 부류의 것들이 아니었다. 예전의 경험도 충분히 많았다.

최적의 동선과 배치를 몇 번이고 검토한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 통령 관저에서 쉬고 있던 황제를 부를 시간이 되었다.

* * *

제국산업박람회는 하나의 기현상처럼 사회에 열띤 반응을 불러왔다.

지적 호기심, 혹은 허영심이 있는 자들은 모두 이곳에 와 신문물을 견학하길 원했다.

고려인들에겐 이 아름다운 현대주의의 자취를 좇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이미 그들은 수많은 사회의 기술공학적 발전으로 인한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열차는 이미 꽤 먼 과거의 일이었으니 그것을 꼽지 않는다면, 관리하기 편한 전등, 전보에 이어서 서서히 민간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전화, 원통에서 판으로 진보하며 훨씬 좋은 음질과 성능을 가지게 된 축음기 같은 것들이 당장 실생활에서의 현대 문명이 어떠한 형체로 다가오는지 명백히 알려주곤 했다.

고려인들은 유행에 굉장히 민감했다. 이 발전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격식이 없거나 혹은 과장 섞어 바보로 인지되기도 했다.

“아니 육 개월이나 열리는데 뭣 하러 첫날부터 봐야 하는겨?”

“글쎄 처음이랑 나중이랑 진열이 바뀐대도. 그럼 자네는 평생 한 번밖에 보지 못하는 것들을 그냥 넘길 거야?”

“에이… 응? 저놈들은 또 뭐야.”

박람회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땡볕에서 한바탕 줄을 서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인파에 투덜거렸다. 대체 뉘시길래 이 줄을 피하고 그냥 들어가시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다.

― 황상 폐하 만세!

이내 사람들은 누군가의 외침에 그 대상이 황제의 마차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갓을 벗어 가슴에 대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황제의 행차를 자주 보긴 힘들었다. 해청은 대체로 창천궁 밖을 잘 떠나지 않았으니, 오히려 홀가분한 상태로 이리저리 제국을 돌아다니는 상황과 황태후 부부의 일행을 더 보았으면 보았을 테다.

그렇기에 황제의 행차가 어색하게 느껴져서인가 싶기도 했으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곧 무엇이 이상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차가 굉장히 이상했다.

“말이 없는 마차라니… 이 무슨?”

황제의 공식적인 행렬에선 네 마리, 혹은 여섯 마리의 준마가 마차를 끌었다. 하지만 지금 황제는 마차를 타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말이 위치할 부분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마부도 없었다.

대신 황제는 괴상한 물건에 타 있었다. 말 없는 마차는 그래도 마부가 있었고 바퀴도 제대로 달려있긴 했다. 그 앞에는 황실의 깃발과 제국기가 같이 펄럭였다.

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귀에 내연기관 특유의 덜덜거리는 소음이 들렸을 것이다. 짐작하긴 힘들었겠지만.

대전쟁에 참여했던 자들, 혹은 그동안 견인기로 농사를 짓던 자들은 아마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그 원리가 이 원리일지도 모른다고.

‘차량’은 위가 뚫려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미리 연습이라도 했는지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보안상으로는 살짝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이 차량은 한 대가 아니었다. 황체의 차 양옆과 앞뒤에는 근위여단이 탄 차들이 보였다.

이들은 황제보다 아주 살짝 뒤로 처진 채로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이 모두는 아마 두루마기 품속에 베레타 한 정씩은 품고 있을 것이다.

황제 부부는 무사히 먼저 수정궁으로 진입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사실에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열심히 만세를 부르고 이후에는 황제가 탄 물건을 궁금해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해청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있었다. 그는 도착했다는 신하들의 말에도 내리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그의 ‘애마’를 만지작거렸다.

검게 칠한 금속판부터 앞에 달린 보석으로 된 두 마리 용 모양의 장식물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 기분이 좋으십니까?”

심지어 황후조차도 질투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여인을 대하는 태도 정도가 아닌가.

“하하하, 좋다마다요.”

태조께서는 재위한 황제들에게 자주 선물을 주곤 했다. 해청은 그의 탁월한 두뇌로 이 선물들이 반쯤은 순수한 선물이고 반쯤은 앞으로의 정국을 잘 같이해나가자는 뇌물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예전의 황제들이 그러했듯 해청도 선물에 숨겨저 있는 속뜻이 뭔지는 별 상관치 않기로 했다. 그러기엔 상민의 선물들은 황제들의 어심을 너무나도 제대로 자극했다.

선조께선 분명히 남자 후손들을 다루는 방법을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었다.

최초로 생산된 수제 자동차.

박람회장에 있는 것들도 이것보다는 나중에 생산되었다고 한다.

이 기물에 가슴 뛰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다. 해청은 그가 첫걸음을 할 곳을 이미 정해두고 있었다.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쌍룡자동차라 했었던가.

해청은 자동차에서 내린 뒤 서둘러 걸음을 걸었다. 근위대가 그의 안전을 걱정할 정도였다.

수정궁은 대단히 아름다웠고 화려했다.

정말 말 그대로 수정으로 된 궁궐처럼 보였다. 사방의 벽에는 유리가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듣기론 일반전기회사의 건물들도 이렇게 지었다 한다. 하지만 박람회장은 그것들과도 차원이 달랐다. 아예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은 노골적으로 제국의 산업력과 공학, 건축기술 등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골적이었음에도 관람자들은 불평불만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그랬다. 그 격차가 너무 대단하면 동경할 뿐 차마 질투하지 못했다.

상민이 준비한 사람들이 수정궁 앞에 도열해 있다가 황제의 행차에 허리를 굽히며 길을 비켰다. 해청은 상민을 찾았으나, 아마 안쪽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신기한 문이로구나. 이게 뭔가?”

“회전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허나 황상께서는 여기 활짝 열린 문이 있으니….”

“짐은 회전문을 통해 들어가고 싶구나.”

해청은 별것은 아닐지라도 기존의 상식을 깬 새롭고 신선한 발명품이 신기한 듯 회전문을 밀고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품위가 살짝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호기심이 든다면 곧바로 그를 해소하고 싶은 욕망이 훨씬 컸다.

‘이것도 그분께서 만드신 것이겠지.’

그리고 해청은 회전문에서 빠져나오자 탄성을 내질렀다. 피부로 확연히 느껴지는 서늘함이 있었다.

“하, 설마?”

밖은 분명한 여름이다.

그늘에 서 있지 않으면 땀이 나왔다. 더군다나 수정궁은 아름답긴 했지만, 건축상의 한계로 빛이 그대로 통과되면서 바람도 오가지 않는 탓에 복사열로 더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해청은 바람 하나에 문명을 느꼈다.

분명 선조께서는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파남만국박람회나 국제연합의 본부에 대한 답이라 하면서.

자신도 이 서늘함이 반가울 지경인데, 남려 북부나 중려에 사는 신민들은 얼마나 이 현상을 좋아하겠는가.

겪어보면 눈물이 날지도 몰랐다.

중려인들도 이제는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 추위라는 것의 가치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해청은 2층의 난간, 화려한 무리등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상민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관계자만 들어올 수 있었으니 주변의 시선은 괜찮았다.

“어떠시오?”

“설마 수정궁에 증기 냉동고를 연결하신 겁니까?”

“음…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일전에서는 공기조화기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목적은 항온항습을 유지하기 위함이라오.”

공기조화기….

해청은 앞으로 열대나 아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구할 구세주의 이름을 거듭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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