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
점심시간의 끝물이다.
청해의 젊은 신사, 유수원과 안 이아코보스는 사무실에서 나와 밥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여전히 바글바글했지만 이제 점심시간이 마무리되는 덕에 자리는 의외로 찾기 쉬웠다.
그들은 항상 가던 곳으로 갔다. 어차피 점심땐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담쟁이거리는 비싼 땅값과 임대료 덕에 약간 걸어야 먹자골목이 나왔다.
그들은 곰국집으로 향했다.
개성회관이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원래는 성계탕이라 불리는 돼지곰국만 전문적으로 팔던 곳이지만 소곰국도 팔기 시작한 이후 소곰국 또한 돼지곰국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아직 한상차림이 정식으로 여겨지고는 있었지만, 매번 그렇게 반찬거리를 요란히 놔두고 먹을 수 있진 못했다. 특히나 바쁜 사람들은 점심만큼은 한상차림보다는 한 그릇 식사를 선호했다. 물론 더 바쁜 사람은 사무실이나 집무실에 그냥 겹빵이나 피자 등을 배달시켜 먹었지만.
고기나 뼈를 푹 고아서 만든 곰국은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정작 받아서 식사하는 입장에선 굉장히 빨리 나왔다. 이런 측면에선 오히려 겹빵보다도 빨랐다.
곰국은 일분일초가 바쁜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음식임이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뜨끈한 국물과 흰 쌀밥으로 속을 든든히 채우고 싶어 하는 자들에겐 더더욱.
“여기 소고기 곰국 두 개 주세요.”
“어떻게 드릴까? 항상 잡수던 걸로?”
“예.”
“알겠수. 자리에 앉으시구려.”
늙은 할멈은 이윽고 두 그릇의 뚝배기를 가져왔다.
밥은 뚝배기 안에 말아져 있을 것이다. 개성회관은 단골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다. 양은 충분히 넉넉했다.
수원은 음식점에 들어오고 나서야 냄새로 주린 배를 느꼈는지 서둘러 새우 젓갈과 후추를 친 후 흰 국물과 밥을 후루룩 입에 넣었다. 잘게 썬 대파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는 젓가락을 들어 접시 위에 있는 깍두기를 집어 들었다. 어쩌면 한 그릇 식사라는 말도 어폐일지 몰랐다. 고려인들은 고춧가루 양념이 잔뜩 묻은 김치가 없다면 식사를 하지 못했다.
“허어, 이제 살 것 같구만.”
그 앞에서 마주 보며 식사를 시작한 이아코보스도 비슷하게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다만 그는 수원이 먹는 일반적인 경기식 곰국과는 달리 다소 특이하게 먹고 있었다. 진주사람인 그는 고소함을 더 증폭시키기 위해 건락과 땅콩청을 곰국에 넣어 풀었다. 또한 남려인들과 달리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백김치를 먹고 있었다.
“맛있냐?”
“그래. 맛있다.”
“어휴, 진주사람들이란. 대체 왜 건락이랑 땅콩청을 곰국에 넣어 먹는지.”
“하! 가룸을 국에 넣는 것보단 더 낫지.”
“가룸이 아니라 젓갈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냐. 젓갈.”
수원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투덜거리며 신문을 펼쳤다. 두툼한 신문 더미는 한 개가 아니었다. 많은 정보들이 그의 머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소화조차 힘들 것이 분명했다.
[공주 전하, 부마도위 사곡후 저하가 마침내 세계일주에 성공하다.
전하가 일주한 경로를 통해 신원길 제독과의 차이를 알아보자.]
[항공 산업의 전망에 대하여.]
[다니엘 데포의 노씨 표류기, 올해의 책으로 선정]
[옥저 내전 현황 보고]
[반군에서 비적으로, 궁지에 몰린 다섯 깃발.]
[싱가포라와 말레이의 운명]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지나 정권 다툼. 순마저도 참전.]
[혼란한 해남도, 야쿠자들의 성세]
[강화 조정은 책임을 지지 않으며 과실만 취하고 있다― 마약단속국장의 이례적인 입장 표명]
[첫 삽을 뜬 잠베지 둑 공사 현장.]
[실험적 건축 기법이 적용되는 잠베지 둑. 과연 그 안전성과 경제적 효과는?]
[해외로 진출하는 아이작 겹빵. 마침내 터르노보에 지점을 열다. 자애왕의 기자회견]
[젊은 차리차의 건강 이상설. 더없이 혼란해지는 모스크바]
[환태평양 경제협력기구, 옥저와 강화를 제외하고 출범.]
“음.”
수원은 신문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사실 이미 근무 시작 전에 누구보다 빨라 담쟁이거리의 소식통이라고 할 수 있는 광문사의 전보 모음을 통해 주요한 사건들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다만 광문사는 사건만 빠르게 전달해주었지 일반적 신문처럼 상세히 설명을 해 주는 편은 아니었다. 확실한 정보와 세계를 보는 식견을 얻기 위해선 신문을 정독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청해 시민들의 기본적인 자질이라 할 수 있겠다.
청해 시민들은 근래에 약간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었다.
창양, 동래미, 미원, 태로(테르샤로마), 파남 등 소위 말하는 정치적 5경 계획이 구체적으로 발표되었던 것.
고려의 역사와 국력에서 청해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해보면 꽤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청해 시민들은 금방 털어냈다.
5경이고 나발이고 칭호만으로 새롭게 달라지는 것은 많이 없었다. 앞으로는 그에 어울리는 투자가 있겠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아니라도 청해의 미래는 여전히 밝았다.
청해는 정치적으로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는 5경을 압도했다.
심지어 제도 창양마저도 경제면에선 청해를 이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창양은 워낙 거대한 도시였고, 창양을 둘러싼 경기의 인구도 많았으며 땅도 옥토라 인구 자체가 많았다. 하지만 통계청에서는 청해 시민들의 임금이나 재산이 제국 내에서 가장 많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고, 재무부에서도 가장 많은 세금이 거두어진다고 했으며 지방의 재정자립도도 가장 높았다. 정치적 5경과는 별개로 경제의 수도는 이곳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들은 지나간 일에는 관심을 끄고 다른 곳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직 신문엔 안 나왔네.”
“뭐? 박람회?”
“그래.”
“어제저녁에야 결정되었다던데. 그럴 만도 하지.”
지금 담쟁이거리의 청신사(淸新士)들이 이렇게 모일 때마다 떠드는 주제는 따로 있었다.
선비라는 단어는 먼 옛날 왕씨 고려 시대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지금도 집법성에 근무하는 관리들을 판사니 검사니 변호사니 하며 선비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회의 복잡함이 두드러지며 직업 귀천의 시대가 희미해진 시대엔 조종사나 악사, 의사 등의 직업에도 쓰였다.
다만 신조어인 청신사, 혹은 신사라 하면, 당연히 청해의 금융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청렴한 선비(淸士)와는 거리가 상당히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행동거지는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으며 가진 일신의 능력도 상당했기에 이들은 단번에 고려의 새로운 상류층으로 도약했다.
담쟁이거리는 청해에 위치한 구도심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확장된 항구로 이전한 지 오래되어 어선만 드나드는 청해섬의 항구, 즉 과거엔 청해진으로 불렸던 항구부터 청해 통령 관저까지 쭉 이어지는 큰 도로 주변에 있는 벽돌 건물들을 지칭했다.
지어질 때만 해도 최신식의 삼사 층 건물이었던 이 벽돌 건물들은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정통으로 맞으며 이제는 몇 년마다 수리를 해야 하는 낡아빠진 건물이 되었다.
담벼락과 건물에는 말 그대로 담쟁이넝쿨이 벽돌의 색깔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고건물에 붙은 담쟁이넝쿨은 건물을 꽤 고풍스럽게 만들기도 했지만 관리하기엔 짜증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바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이제는 건물의 태생적 한계에 다다랐기도 했고 안전상의 문제로 조금씩 철근강회기법으로 바꾸어 나가며 고층, 혹은 초고층 건물들로 바뀌고 있었으니 이름과는 괴리될 날도 머지않아 보였지만.
낡은 외관과는 달리 이곳은 제국 내에서 몹시 중요한 곳이었다. 어쩌면 전 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가장 중요한 곳일지도 몰랐다.
담쟁이거리에는 세계 최대의 증권거래소이자 어마어마한 돈이 오고 가는 청해 거래소를 중심으로 엄청난 숫자의 은행들, 보험 회사들, 신용평가사들, 언론사 등이 있었다.
신사들은 이곳에서 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금융을 주물럭거렸다.
이들의 입장은 고려의 외교적 입장과도 달랐다. 이들은 정치와는 달리 완전히 실리적인 입장에서 이윤이 되느냐, 아니냐만을 따졌다. 그 외의 잣대는 필요가 없었다.
신사들의 힘은 실로 막강했다.
그들이 다루는 삼신기는 검, 방울, 거울 같은 천부인은 아니지만 실로 신화 속의 물건들만큼 강했다. 선물(先物), 권리(權利), 교환(交換)이라는 전가의 보도는 정말 나라 하나를 쇠락하게 하거나 부흥하게 할 수 있었다. 함무라비나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의 그리스에서도 거래되었던 이 유구한 금융파생상품들은 금융의 시대가 오면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빛을 발했다.
다만 이 예리한 칼들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잘 쓰이면 위험 회피와 수익 추구라는 측면에서 이 칼로 좋은 식재료를 다듬어 아름다운 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반면 잘못 쓰인다면 그 칼이 주인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고려 정부는 자국의 영향력과 금융 이익을 위해 이들을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 가지로 이들의 활동을 장려하는 한편, 이들의 행동을 감독하기 위해 시중 산하에 금융위원회를 설립했다. 금융위원회는 연방거래위원회와 더불어 신사들의 행동을 견제했다.
대체로 견제하고 견제받는 사이였지만, 정부와 신사들의 관심이나 이익이 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정말이지 대단히 강력한 효과를 내곤 했다. 고려 정부에서는 이들의 선 넘는 행동을 몇 번 저지시켰던 적이 있었지만, 가끔은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주는 행동을 묵인하기도 했다.
일례로 대전쟁 이후 근래에 세계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옥저 내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옥저 내전이 본격화되기도 전부터 소문을 수집했던 담쟁이거리의 회사들은 솔빈 거래소에서 많은 옥저 회사의 선물과 권리를 거래했다. 당시 대체로 황소장이었던 옥저의 시장은 말 그대로 집채만 한 불곰이 위에서 머리를 내리치자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담쟁이거리의 신사들은 그 짧은 기간 동안 솔빈 거래소에 돌고 있는 자금 중 팔 할 이상을 빼 버려 세계 삼 위의 거래소 규모를 순식간에 10위 밖으로 밀어내버리며 옥저의 경제를 말 그대로 파탄 내었던 적이 있었다.
옥저 왕은 당시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자국의 경제가 순식간에 흔들리는 광경을 목도하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고려의 힘은 유형적 무력에만 있지 않았다. 이런 무형의 힘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간편하고 강했다.
신사들은 그때 당시의 영웅담을 회고할 때마다 과장 섞인 무용담과 부유함을 자랑하고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대부분은 이 사건이 재무부나 금융위원회의 묵인하에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하진 않았다.
반대로 지금은 다시금 솔빈에 자금이 돌기 시작하니 옥저 내전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물론 신사들이 가끔 그 책임 없는 행동으로 인해 흉악하고 난폭한 두억시니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로 묘사된다지만, 이들은 분명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격적 파생상품 거래를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은 오래 하지는 못할 사도(私道)였고 정도(正道)는 따로 있었다. 기업의 가치에 대한 투자는 분명 후자였다.
그러니 이들이 이제 개천 465년 청해에서 열리는 제국산업박람회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신생 투자은행의 주인인 수원과 이아코보스의 경우엔 더더욱.
모험을 하겠답시고 기존 직장인 명성투자은행에서 뛰쳐나온 그들은 서로의 성씨를 붙여 만든 유안 투자은행을 만들었다.
이들은 그들이 가진 천부적 재능으로 회사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솔빈 털어먹기에 한 발 걸친 적이 있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명성은행에 있었기에 실적에 비례한 돈을 완전히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때의 자금으로 회사를 세웠으니 나름대로 괜찮은 결과였다.
이후 유수원과 안 이아코보스는 프랑스 국채사건으로 한 번에 금융가의 천재들로 도약했다.
전후 프랑스는 막대한 빚, 즉 전쟁배상금을 갚아나가야 하는 지경에 놓였었다. 고려가 여러모로 상당히 편의를 봐준 것은 확실했다. 이는 프랑스와 세계 전부가 알았다. 알비온과 도이치 같은 국가는 전범국에게 저렇게 관대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었으니.
하지만 그래도 빚은 빚이고, 그 규모는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미 황폐해진 프랑스 경제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프랑스 정부는 당연히 국채를 발행해 당장의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채는 정말 매력이 없었다. 왕정과 외젠독재정 시기 두 차례나 거대하게 신용을 말아먹은 프랑스 정부는 제아무리 정상적인 2공화국이 들어섰다 하더라도 과거의 과오를 완전히 접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에른파, 즉 파리 코뮌이라 새롭게 불리는 세력의 재창궐이 선명해지자 더더욱 전망이 불투명했다. 사람들은 제2공화국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보았고, 고려 외무부에서도 그랬다. 사람들은 어쩌면 프랑스가 두 차례나 나라를 박살 낸 계기인 채무불이행까진 당연히 아니더라도 채무지불유예를 고려의 재무부에 부탁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유수원은 어찌어찌 조선계라는 연줄을 통해 외무상서인 이익과 창양에서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었고 그때 이익의 생각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유수원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는 전쟁을 치른 국가에 넘어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직접 눈으로 본 다음 투자를 결정하고 싶었다. 그는 프랑스 여인과 결혼한 규석이라는 사람과 함께 프랑스를 둘러보고 프랑스 공화국의 정치인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확신했다.
저평가된 프랑스 채권이 실은 좋은 물건이라고.
유수원은 프랑스 여행에서 느낀 교훈 몇 가지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샤를 루이 세콩다는 외젠 이후 들어선 2공화국의 수장이자 평원파의 당수였다.
정권을 잡은 평원파는 사태가 진정되자 보수당과 공화당의 둘로 쪼개졌다. 이들은 주 이념은 공유했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자연스럽게 샤를 루이 세콩다는 보수당의 당수가 되었다.
반면 신당 공화당의 당수는 당시 젊고 혁신적인 정치인인 프랑수아마리 아루에가 되었다.
프랑수아마리 아루에는 본명보다는 그의 필명인 볼테르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유수원이 만난 볼테르는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식과 지혜는 달랐다. 유수원은 볼테르가 자신이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 구적인 도이치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는 파리 코뮌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2공화국의 핵심 인원들이 듣기엔 나라를 한 번 더 말아먹자는 말과 동일했다.
하지만 유수원은 볼테르가 주창하는 관용, 즉 똘레랑스의 이념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이치가 오직 하나인 것은 아니다. 제도로 가는 길이 여럿이듯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많다. 이념은 오로지 수단일 뿐이니 수단에 사로잡혀 목적을 망각하면 아니 된다.
그러니 남의 생각을 위험하다 섣부르게 재단하지 말고 토론하여 논해 서로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볼테르는 분명히 경직될 수밖에 없는 전후 프랑스의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을 인물이 틀림없다. 그러니 프랑스가 만약 다시금 위대해진다면, 분명히 볼테르가 주장한 똘레랑스의 정신 덕분일 테다.’
실제로 볼테르는 도이치 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먼저 다가가 친분을 다졌다. 대체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도이치 왕도 이 프랑스인에게 상당한 호감을 표시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비슷한 정신적 교감이 있었던 것 같았다.
유수원은 똘레랑스의 문화를 받아들인 프랑스가 언젠가 다시금 과거의 열강 순위에 오를 수 있다 평가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국난을 해결하는 것도 필요했다.
유수원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를 높게 치긴 했지만, 현 통령 샤를 루이 세콩다도 굉장히 특출난 정치인이었다.
샤를 루이는 프랑스인의 국채를 갚기 위해 프랑스인들의 민족성과 자존심을 자극했다. 나라가 빚더미에 올라 있으니, 국민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하며 국민들의 행동을 촉발했다.
그의 말에 프랑스는 그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엄청난 일을 이루었다.
‘금 모으기 운동’, 혹은 ‘배상금 상환 운동’은 성공리에 끝나 프랑스가 대전쟁에서 진 빚 중 2할 이상을 일시에 배상할 정도였다. 노동자들, 농민들, 성직자들, 참전군인들, 아낙네들, 심지어 거지와 창녀들도 자금을 보탰다.
샤를 루이는 이 자금을 거의 온전히 고려에 갚으며 이를 틈타 자신들이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세계에 널리 알렸다.
그러니 유수원이 자신과 회사의 운명을 걸고 무척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매입한 프랑스 국채는 날이 갈수록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작가의 말]
선물 : 선물
권리 : 옵션
교환 : 스왑
광문은 블룸버그라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여행 잘 갔다 왔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