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69화 (469/653)

국제 연합(2)

포석은 잘 깔려 있었다.

고려가 계획한 국제 연합은 국가들을 총 네 분류로 나누었다.

국제 연합 총회에는 소속된 모든 나라가 참석할 수 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총회가 실질적 권력을 지녔다고 보긴 힘들었다. 전 세계에 있는 나라의 개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조막만 한 나라,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고려와 같은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불합리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원칙적으론 맞지만,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니 안전보장이사회는 분명히 존재해야 했다. 그것이 국제 연합의 존재 목적이었다. 강대국들을 역으로 푸대접해 국제 연합에 소속될 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이런 연합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강대국들의 놀음이라고 할지라도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계획안의 안전보장이사회 구성원은 대표이사국과 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대표니 상임이니 하는 명칭은 회사의 직급과는 달랐다. 대표는 지역 대표의 준말이었다.

고려는 대표이사국을 통해 국력이 조금 낙후되어도 지역을 대표하는 강국들의 여론을 청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민과 해청의 계획 속에선 태평양 국가, 즉 오세아니아에선 루밀 키치파닐, 이슬람권에서 아랍 연방, 아프리카에서는 무타파를 생각하고 있었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자원과 인구, 덩치로 인해 누산타라나 이란, 시크나 마라타 등의 나라가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면 이 또한 대표이사국으로 삼을 생각도 있었다.

상임이사국은 비슷했다. 국력을 약간 고려치 않는 대표이사국과는 달리 확연한 강국들로 구성될 것이다. 대표이사국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두 지역, 즉 유럽과 동아시아의 강국들이 속할 것이다. 조선과 도이치, 네덜란드는 확실했고 옥저와 알비온 등의 나라들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아주 먼 나중에, 과거의 일이 온전히 과거의 일로 여겨질 순간이 온다면 대전의 적성국이었던 프랑스, 러시아도 속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해지지 않는 나라들은 이사국들에게 속하기 위해서 버둥거리긴 해야 할 터다.

다만 세 부류와는 달리, 마지막 부류의 국가는 오직 하나였다.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의장국 고려만이 홀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상민의 이전 생에서, 상임이사국들의 거부권은 유엔이 세계에 개입할 영향력을 극도로 축소시키는 것에 일조했었다. 다섯 개 나라의 이권이 합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당시 가장 국토 면적이 큰 나라와 가장 사람 많은 나라는 대국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마음 좁은 소국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주로 하곤 했다.

고려는 아니었다. 고려보다 더 큰 나라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인구가 많은 나라가 나오는 것도 남북려만 골라 운석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제는 불가능했다.

5개국보다 많을 상임이사국에게 거부권을 전부 줄 순 없었다. 다른 나라들도 이를 납득할 것이다. 손에 쥐어 본 권리가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생각할 것이다.

사실 거부권, Veto의 유래를 따지고 봐도 어중이떠중이들이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집정관, 호민관, 독재관이나 아우구스투스―로마 황제―만이 가능했으니, 고려가 행사하는 것이 명분과 이치, 상식에도 맞았다.

물론 지금의 계획은 장기적인 계획이다. 바로 시행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필연적이기도 했다.

“일단 이번에 열릴 미원 회담에서 추가적인 사항을 논의해 보아야 하겠군요.”

현시점 고려는 국제 연합에 앞서 환태평양경제기구를 먼저 만들 구상을 하고 있었다. 북대동양 조약기구가 무력적 측면에서 유럽의 안정을 꾀하는 단체였다면 환태평양경제기구는 말 그대로 같은 경제권을 도입하자는 의견이었다. 어차피 고려는 예맥한계 국가는 물론이고 강화와 주까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었다. 상호방위조약이 옥저의 현 내전 상황에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정말로 그 내전 세력이 옥저 정부를 위협할 때면 고려는 진지하게 개입을 고려할 것이 분명했다.

자유 무역, 경제 관세 철폐.

이 또한 해청이 제기한 5개조 내에 있었다. 고려는 불합리한 관세를 없애 그로 인한 사중손실을 없애자고 제의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었다. 누가 더 행복해지느냐는 조금 미묘한 문제긴 했지만.

환태평양 경제협력기구, 줄여서 환태협은 지금 이 시점엔 고려, 조선, 옥저, 백제, 강화, 유구, 주, 루밀 키치파닐, 네덜란드, 마긴다나오, 에이레, 잉글랜드가 참여할 예정이었다. 유럽국은 식민지 문제를 얼추 해결하고 호주와 파푸아를 나누어 가진 국가들이었고, 누산타라나 브루나이와 같은 국가들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해청이 갑자기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쥐었다.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문제가? 누가 고려의 행보에 문제를 제기하오?”

해청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외국이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만… 내부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본부의 위치 문제입니다.”

“본부…?”

아무래도 밖에 나가 있던 상민보다는 해청이 내부 문제를 더 잘 알았다. 해청은 조심스럽게 문제를 꺼냈다.

“아무래도 현 제국의 상황을 볼 때, 제국의 경제와 정치체계가 남려에 편중되어 있다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테르샤로마에 북대동양 조약기구 본부를 둔 것처럼 이번에도 미원에 환태협 본부를 두면 되지 않겠소?”

“미원은 그것으로 되겠지만 그럼 국제 연합 본부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그것도 양보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당연히 고려 내에 위치해야 했다.

북대동양 조약기구와 환태평양 경제협력기구의 본부는 사실 어디에 위치해도 상관없었다.

지난 삶에서의 나토도 본부는 벨기에 브뤼셀에 있었다. 하지만 유엔 본부는 뉴욕에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이제 고려 국민들이 이런 ‘국제관공서’가 정확히 자신의 지역에 위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려의 주들은 적어도 국제 연합 본부만큼은 자신들의 지역에 지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정계에서 다소 소외받고 있는 중려의 의원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이해가 갔다.

그런데 일반적인 지역 이기주의 현상은 아닌 듯했다. 특정 지역과 연관된 문제 같았다.

“한번 맞춰보지. 운하 문제랑 또 연관이 있겠구려?”

“예.”

전쟁이 끝나고 비로소 고려는 다시금 자국 땅을 개발할 기회를 얻었다.

전쟁특수가 고려의 산업을 엄청나게 발전시킨 것은 맞았다. 다만 그것들은 오직 전쟁에 관한 분야에 한정되었지, 전체적 후생에 관해 묻는다면 미묘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과도한 유동성과 확장정책으로 인해 제국연방 중앙은행과 재무부로서는 물가 상승을 먼저 잡아야 하겠지만, 경기란 것이 단번에 긴축을 하면 급격한 불황이 올 수 있었다. 착륙하려던 비행기가 부드럽게 바닥을 스치고 다시금 이륙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느 정도의 토목 공사는 필요했다.

아프리카의 토목 공사도 몇 개가 계획되어 있긴 했지만, 전 국가적 규모로 볼 땐 그리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다.

고려는 지금 두 가지 운하를 만들 계획이었다.

현시점, 산업의 중심지인 오대호와 대동양을 잇는 운하는 나이아가라 운하였다. 말 그대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우회하는 짧은 운하였다. 다만 구조의 한계로 짧고 좁아 효율이 좋지 못했다. 고려는 그 옆에 호데노쇼니 운하를 새롭게 건설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말이 나온 운하도 있었다. 니카라오 운하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무역선들은 아직도 그 운하를 오가고 있었지만, 고려의 군함들은 이제 니카라오를 통과하는 ‘니카라오급’에 비하면 너무 커졌다. 최근 개발에 들어간 최신 순양함도 위험했고 이미 만들어진 불공급과 불굴급 전함들은 통과가 불가능했다. 이 군함들은 오히려 남쪽의 울부짖는 바다를 거쳐야 했다.

철제 군함들의 세상이 온 이상 웬만한 악천후가 군함을 쓰러뜨릴 수야 없겠지만 빙빙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여전했다.

그래서 고려는 니카라오를 대체할 운하 후보를 선정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니카라오 운하를 확장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을 했지만, 지리적 한계상 니카라오 운하는 확장이 꽤 힘들었다. 강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것부터, 호수의 물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까지. 또한 그 호수 가운데 화산이 있었던 터라 한번 후아이나푸티나에 데어 본 고려는 작은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온 운하 후보지는 총 두 군데였다. 한 곳은 파주였다. 니카라오 운하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경쟁 후보로 꼽힌 곳, 당연히 이번 사업에 대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이번엔 다른 곳에 관심을 보였다.

테우얀테펙 지협에.

투투테펙주와 마야주의 자연적 경계이기도 한 이곳은 예전 마야와 아즈텍이 중려의 운명을 놓고 격돌한 곳이기도 했다. 마야 카롬테, ‘맞서 지킨 자’는 이곳에서 당시 아즈텍의 틀라토아니, 우이칠리우이틀을 쓰러뜨렸다.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을 만큼 이곳은 꽤 넓은 평야였다.

고저 차도 크지 않았다. 해발고도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이는 이곳을 충분히 파낸다면, 운하가 갑문 없이도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갑문은 상당히 답답한 구조물이다. 고저 차가 있는 곳에 운하를 만들기 위해선 필수적이긴 했지만, 갑문 없는 수에즈는 지금 당장은 니카라오와 폭이 그렇게 차이 나지 않는데도 훨씬 더 많은 물동량을 소화했다. 갑문을 닫고 물을 채우고 다시 갑문을 여는, 그런 아주 번거롭고 지루한 행동들이 생략되니 당연한 소리였다.

비록 파나마가 훨씬 더 길이가 짧았지만, 산을 깎는 것과 평야를 파내는 것은 공사 난이도가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공사비용 자체는 어쩌면 그리 차이 없을지도 몰랐다. 이후의 결과물은 압도적으로 테우얀테펙 운하가 좋으니 정부가 뭘 선택할지는 예상이 갔다.

과거에 이러한 생각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상황이 달랐다. 중려 합병 전까지 이곳은 니카라오와는 달리 엄연히 타국의 영토였다. 지금은 연방의 영토였으니 이제라도 개발하는 것이 옳았다.

이런 상황이니 파주 사람들이 격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곳 출신 의원들은 지금 단식농성을 하니 삭발을 하니 하고 있었다.

상민은 성질을 냈다.

“파주 놈들은 매번 너무나 이기적으로 구는구나.”

오래 살다 보면 기억나는 것들이 있었다.

니카라오는 선주 사람들, 즉 아즈텍 후예들이 참회하며 오랜 기간 힘들게 파낸 곳이었고 그러니 그들은 용서를 받을 자격도 있었으며 운하로 파생되는 과실을 먹을 자격도 있었다.

하지만 파주 사람들은 맨 처음 중려에 운하를 파겠다고 공표했을 때만 해도 자기네가 노역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혹은 노역할 아즈텍인들이 몰려올지 모른다고 격하게 거부했던 자들이다. 이들이 이제 와서 다시금 파달라고 하는 게 웃겼다. 이제는 견인기도, 발달된 공사기구들도 있으니 과거의 노동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고 노동자들로 인한 지역경제 활성화 같은 것도 노려볼 만하니 군침을 뚝뚝 흘리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지역 차별적 말씀은….”

“미안하다.”

상민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업보도 있었다. 파남은 유배지로 쓰이기도 했고 이주금지령까지 내려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황상의 의도는 국제 연합 본부를 파주에 짓자 그런 것이오?”

“그렇습니다. 운하를 파지 않겠지만 파남은 두 대양이 가장 좁게 마주하는 곳이면서도 남북중려 중 가장 가운데에 위치하기도 합니다. 국제 연합 본부가 들어설 상징성은 충분할 겁니다.”

상민은 의도를 알아들었다. 파주에 국제 연합 본부를 짓는 건 모양새가 굉장히 좋았다. 지역균형발전에도 이바지할 것이 분명했다.

제도는 끝까지 창양으로 남아있겠지만 테르샤로마, 동래미, 미원, 파남을 더해 정치적 5경으로 만드는 것은 모습이 아주 예뻤다.

하지만 상민은 잊고 있었던 것을 끄집어 놓았다.

“근데 그와 같은 일이 선행되려면 그곳이 적어도 국제외교의 수도가 될 정도로 생활 여건이 좋은 동네여야 하지 않겠소?”

적어도 모기와 끔찍한 더위는 극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었다.

해청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몸이 안 좋은 그도 몇 번 중려를 가본 적이 있었다. 일 년 내내 후덥지근하고 여름에는 끔찍할 정도로 무더운 열대 날씨는 도저히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고도가 높으면 그나마 살 법했지만 파남은 운하를 운운할 정도로 고도가 그리 높지도 않았다. 상민은 피식 웃었다. 괜히 그가 그곳을 유배지로 썼겠는가.

게다가 모기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다.

학질은 고려의 특산품인 키닌으로 막을 수 있는 질병이다. 다만 황열은 아직 극복되지 않았다.

해청은 물기 어린 눈으로 선조를 바라보았다. 황제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일화가 있었다. 불멸의 용께서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떠올리시는 분이었다. 그분 앞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도 언젠가 풀리기 마련이었다. 정치제도이건 과학기술이건.

그리고 상민은 조금 시간이 흐르더라도 언젠가는 도깨비방망이를 휘둘러 그 기대에 부응했다.

[작가의 말]

비유하자면

나이아가라 운하 : 원역사의 하이드로 운하

호데노쇼니 운하 : 원역사의 웰렌드 운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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