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후의 구상(4)
“흐음… 옥저가?”
배에 들어온 상민은 자신에게 매년 올라오는 정기정세보고서를 팔랑거리며 넘기다 물었다.
“그렇습니다. 상황 폐하께서 직접 행차하시어 단단히 경고를 주셨던 것 같습니다.”
“잘했군. 잘했어.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두고만 있는 것은 멍청하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홍력이라는 자는 내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주변에 수하들로 가득하지만 특출난 자를 보낸다면 충분히 저격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의외로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발칙한 아이지만, 괜찮다. 그럴 필요 없다.”
“하오시면….”
“내버려 두거라. 옥저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그 아이가 날뛰는 것이 오히려 좋다.”
요원은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명령이 납득 가지 않더라도 따르는 것이 철칙이었다.
“팔기가 날뛰면 얼마나 날뛸 수 있단 말이냐. 기병의 시대는 지났다. 옥저가 전차를 굴리기에는 아직 힘들지만 솔빈을 범궐할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놈들이다. 이제부턴 과거보다도 더욱 그럴 것이다.
지운학의 경우에도 볼 수 있듯, 고려도 한바탕 그런 진통을 겪었었다.
그 논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한심한 고향을 봤을 때 완전히 논파당했고, 그 이후엔 북려나 중려의 원주민 출신 정치인들이 정계로 올라오면서 더 이상 함부로 입에 담는 자는 없었다.
이젠 그 고향에서 한 박자 늦게 비슷한 논리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고려는 한심스러운 수준의 조선 모습을 보며 자국이 특별한 것이 선천적 혈통이 아니라 위대한 선조와 개척가들의 이끔 덕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반대로 반도 사람들은 그곳에서 기원한 고려가 특별하니 자신도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예맥한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던 것일 터다.
막진 않았다. 고려―옥저―조선―백제로 이어지는 혈통적 유대감은 그들 국가 간의 갈등을 잠재울 근거가 되기 마련이었다.
일장(一長)이 있으면 일단(一短)이 있기 마련, 상민 또한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와 같은 상황은 조선과 백제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때마침 식민지 문제가 대두된 상황이다. 만약 조선이 예맥한적 논리를 강화한다면, 황제 해청의 논리대로 루손섬의 원주민들은 자결권에 의해 독립하는 것이 맞았다.
바로 접하고 있는 마긴다나오 보호국도 고려가 어떻게 해서든 독립시키려 작정했는데 루손섬이 이에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조선은 예맥한적 논리에 따르면서도, 어딘가 굉장히 어중간한 태도를 취했다.
자치권을 주는 경우에도, 네덜란드―파푸아 관계처럼 조선 왕이 루손 왕을 겸하고, 루손 총독을 임명하거나 혹은 그곳에서 투표를 통해 루손 총리를 임명하는 식으로 가야 했다.
좀 더우면 어떠하랴, 한반도 남쪽도 여름엔 무척 덥다.
일 년에 이모작이 거의 다 되고, 기후와 요건이 충족된다면 어떤 땅에선 삼모작도 가능한 땅은 조선인들에겐 성지와 같았다.
루손에는 여전히 다양한 원주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비율은 천차만별이지만 누구는 힌두교를 믿었고 누구는 이슬람을 믿었고 누구는 불교를 믿기도 했다. 인종도 다양했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다 같은 민족이라면, 조선과 명, 왜가 이전에 그렇게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씨 왕실 자체는 신하들 입단속 하느라 바빴다.
중추원 의원들과 관리들은 주상의 절박한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국익이다.
그것도 모자라 왕은 직접 루손을 방문했고 심지어 그곳의 유력 부족장에게서 후궁을 들였다.
이 후궁이 왕자를 낳으면 만약,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조선과 루손이 분리된다 하더라도 루손의 지배자는 전주 이씨가 될 것이었다.
또 조선은 상민이 그렇게 싫어하던 유교적 논리가 강했다. 변질되지 않은 유교는 이민족의 지배에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오랑캐의 교화는 충신예의를 따르는 선비가 가장 발 벗고 나서서 해야 하는 덕목 중 하나, 유럽식의 가혹한 억압과 착취는 지탄을 받았다.
‘물론 변질되지 않은 기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뭐 어찌 되었든 그 유교적 기풍은 적어도 부육지은을 베푼 상국에게 절대, 그야말로 절대로 반할 수 없는 논리를 만들었으니 조선이 옥저보다도 훨씬 더 군신민 전반적으로 상국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백제는 조선의 이런 모습을 완전히 따라 하고 있었다.
다만 거리가 더욱 멀고 복잡했다.
그래도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이 있다면 예맥한 삼국 중에 백제가 가장 그 주장에 힘을 덜 싣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래인과 내지인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래내일체는 필연적으로 부여씨와 백제의 정책 기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맥한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면, 내지인은 엄청나게 반발했을 것이다.
반면 옥저는 지금 둘과는 완전히 달랐다. 옆에 있는 놈은 옛 원수인 몽골 놈이고 러시아 놈들이며 눈을 크게 뜨고 봐도 어딨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 원주민들이다.
고려가 러시아의 동진을 경계해 만든 원주민 국가들은 그저 명목상의 나라, 제대로 굴러가지도 못했다. 백 년, 아니 이백 년이 지나도 제대로 굴러갈지 의문이었다.
그러니 옥저는 태생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과격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허나 뛰어봤자 손바닥 안이지. 오히려 그놈이 날뛸수록 과격한 민족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겠다.’
옥저 왕실이 고려에 붙은 것은 당연했지만 다행스러운 일.
허나 붙지 않아도, 옥저는 고려에 대적할 수 없다.
러시아와는 완전히 달랐다. 러시아는 애초에 뿌리 자체가 유구했으며 독립적이었다. 솔직한 말로 어느 정도의 자긍심을 가질 만했다.
반면 옥저는 뿌리 자체가 상국이 심은 씨앗이었으며, 그 정치와 경제,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수도인 솔빈도 그랬다. 솔빈의 거래소도 그러했다.
모든 것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국가였다. 비유하자면, 원래부터 살던 원주민들이 국가를 만들고 서서히 성장해 온 것이 아니라 맨땅에 국가부터 먼저 만들어놓고 원주민을 집어넣은 것과 다름없었다.
마치 계획도시 같은 개념이었다. 계획국가라고 표현을 해 주는 것이 좋겠지.
못된 놈들, 상민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 씨앗은 따지고 보면 자신이 뿌리지 않았던가.
‘이라크처럼 내가 직접 옥저의 터를 잡고 건설했어야 했나….’
아니다, 옥저는 그 정도로 노고를 투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종교의 중심에 있는 이라크와 옥저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그땐 옥저에게 쓰기엔 시간이 상당히 가치 있지 않았던가.
결론적으로 이 기형적인 옥저는 그저 고려가 해상봉쇄만 하면 말라 죽는 구조였다.
그 자랑스러운 모피 산업, 그것만 따지고 봐도 그랬다.
모피의 가장 큰 수입국은 당연히 고려였다. 그다음이 조선과 강화, 백제일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수요가 별로 없었다. 유럽국가들은 굳이 옥저에서 수입하기보다는 러시아에서 수입했었다.
그러니 해상봉쇄만 한다면 옥저는 그저 조선보다도 썩 좋다고 말할 수 없는 토지를 일구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 토지에 기를 작물도 고려와의 연구를 통해 내한성 있는 작물을 도입한 것이 그들이다.
군사적으로도 뭘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옥저로선 바다를 건널 수 없으니, 필연적으로 건드릴 상대는 조선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상국이 보기에나 그저 어리숙하고 나약한 나라일 뿐, 이 시대 한 손에 꼽는 강국이었다.
굳이 명장 이윤신의 시대를 가져올 필요는 없었다. 지금도 조선은 예맥한계 국가에서 가장 인구수가 많았고 자체적인 경제 규모도 상당히 컸으며, 인적 자원과 산업화의 수준도 제일 높았다.
비록 한 줌에 불과하다 해도 어쨌든 ‘고려령’인 개성과 직접 맞닿고 있음이 엄청난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유럽과 비교해봐도 그러했다. 만약 조선이 해상십자군 이후 전성기도 오지 못한 채로 나약해진 카스티야나 아라곤 대신 하루아침에 피레네 이남으로 이동한다면, 프랑스는 건방지게 도이치를 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피레네에 참호를 파내어 조선의 북진을 막는 것만으로 무척 바빴을 것이다.
옥저가 만약 조선을 위협한다면, 아마 조선은 얼씨구나 하며 봉명관에 있는, 루손에 있는, 그리고 기타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모아 그동안 경쟁자라고 바락바락 우겨왔던 자들의 수도를 먹고 신나게 배를 두드릴지 몰랐다.
그러니 상민은 옥저가 근왕파와 팔기로 나뉘어 싸우는 지금 현 상황이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다 판단했다.
지금은 그 세력이 강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보급이 이전처럼 넉넉하지 않은 팔기는 차츰 약해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포악스러운 성격은 더욱 발현되리라. 그들의 영토에 있는 다른 민족들을 억압할 것이고, 심지어는 같은 민족끼리도 그러할 것이다. 아마 옥저인들도 그것을 보며 깨닫는 바가 있겠지.
그렇게 포악해진 이들을 차츰차츰 옥저 정부가 구석으로 몰아가 잡아낸다면 정말로 최선의 방책이다.
해원이 잘해주었다. 집에 돌아가면 선물이라도 하나 해 주는 것이 좋겠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들은 옥저는 ‘따위’로 만들어버릴 자들, 어떻게 대응해야 잘할 수 있는지 이제는 상민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파리 코뮌이라고?”
2공화국이 들어선 지 얼마나 되었다고, 파리 코뮌의 성장세는 대단했다.
프랑스 혁명 직후의 체제로 돌아간 만큼, 새롭게 만들어진 국민의회에는 이미 비슷한 신념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다.
잘라도 잘라도 싹이 계속 트는 놈들.
세 번째였던가, 저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온 순간이.
고려는 대동계의 계파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1계는 이미 바이에른이 사라졌을 때 몰락했다.
2계는 그 성질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기엔 좀 달랐다. 정여립의 공화주의가 공산주의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왕정에서 일어나 개혁을 원하나, 완전히 자본주의와 척을 진 상태는 아니었다.
허나 1계의 무덤에서 피어난 3계, 그리고 3계와 사실상 동일한 프랑스 바이에른파는 여전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과격해졌다.
여의국에서는 마침내 외젠의 죽음 배후에 그들이 있을 것 같다는 추론을 도출해냈다. 물적 증거는 없었지만 정황이 그리 가리키고 있었다.
이를 보면, 이들의 조직력도 이전과는 조금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철저한 신념을 바탕으로 완전히 지하조직화되어 있었다.
상민은 그 노인, 껑땅이 대체 누구인지 의문을 품었다. 자신의 기억을 한참 뒤집어보아도 그런 이름을 가진 혁명가는 없었다.
사실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지금이 사회혁명이 일어날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저 민초, 아무개가 마침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적성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었다. 고려의 수많은 인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홍력이라는 꼬마애보다는 훨씬 위험한 놈이다.’
상민은 홍력이 이홍력이 아니라 아이신기오로 훙리라 해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 아비를 훨씬 더 높게 쳤다.
전술적 능력도 고려에서 아주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나디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껑땅을 암살할까.
하지만 여의국조차도 이 노인을 암살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공화국에서 세력을 잃어버린 후 일평생 쫓기며 살아온 자다. 프랑스 내에 있던 외젠조차도 그를 찾아내지 못했는데 제아무리 여의국이라도 외국 땅에서 그 정도는 하지 못했다.
인공위성이나 무인기 수준의 첩보 자원이 생기기 전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한번 어설프게 건드리면 다시 웅크릴 것이 분명했다.
허나 이대로 두면 파리 코뮌은 프랑스 코뮌으로 바뀔 것만도 같았다.
그리고 분명히 프랑스 코뮌은 이전의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 수준과는 다를 것이다.
전쟁 전이나 후나 유럽에서 딱히 노동자 처우에 대한 진보가 없는 것을 볼 때, 뮌처의 사회주의나 톰마소의 농민기독교공산주의보다 껑땅이 주장하는 노동자공산주의가 훨씬 더 강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미 두 번 피고 진 땅에서 다시금 피는 것이니 말해 무엇하랴.
‘가만….’
상민은 문득 프랑스와 옥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3계와 2계를 바라보기도 했다.
‘사상의 경연장이라….’
옥저 팔기 반란을 통해 극단적으로 발흥하는 민족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세계에 드러내는 것처럼, 어쩌면 프랑스와 파리 코뮌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사상이 프랑스 안에서 어떤 혼란을 가지고 올지 보여주며, 그 사상의 내부에서도 다시금 수정사항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상민도 부인하지 않았다. 뮌처와 톰마소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쭉, 이러한 사상은 개혁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후대의 배부른 사회에서야 이런저런 견해를 내보일 수 있었지만 지금 세계의 사회 모순은 극에 달해 있었다.
지금 이 시대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인간은 가축과 같았다. 노동자들은 정말이지 농노보다 못했다. 대전쟁의 이후, 인력 자원이 귀해지며 약간은 개선될 여지가 생겼다지만 바로 직전까지는 그랬다.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다.
불합리적 상황과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투쟁이 있기 전까지, 반대가 있기 전까지.
상민은 정반합에서 반의 역할이 아주 필수적이라는 것도 알았다.
알았으니까 근로자들의 처우를 높이고 숙소와 식사를 개선하는 등의 움직임을 벌였고, 사회적 지위 차에 의한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없게 법적 제도를 가다듬었으며, 세계 최초로 누진세적 세제를 도입한 것이 아니겠는가.
헤겔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변증법은 실로 옳았다. 다만 후대의 마르크스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미래엔 공산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그것이 21세기를 본 상민의 신념이었다. 그러한 시대가 아직 도래하지도 않았건만 앞서 존재하는 시대정신이었다. 선지자였다.
상민은 사실 사회운동의 거두들, 즉 토마스 뮌처, 톰마소 캄파넬라나 혹은 지금 껑땅의 사상이 고려를 지금 당장 허황되고 위험한 논리로 선동하여 좀먹지 않는다면 아주 조금은 용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프랑스 내부에서 요란하게 파티를 벌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수정주의자’들의 논리는 어쩌면 그들의 본래의 논리보다 조금 더 맛있고 군침이 돌 결과물이 될지도 모른다.
고려 내에서 필수적으로 생겨날 모순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시작이다.
고려의 적은 더 이상 없다.
있다면, 그것은 정말 내부의 모순일 터다.
대전쟁의 끝, 제국은 비로소 새 시대를 열었다.
허울뿐인 경쟁자는 쓰러졌다. 만국은 고개를 숙였다. 가장 큰 위험 요소인 유럽은 고려의 지원과 영수증 앞에 고개를 숙이거나, 비참한 패배자가 되어 해체되거나 멸망했다.
번국은 옥저를 대하는 고려의 태도 앞에서 조아렸으며, 진노를 피하기 위해 애를 썼다. 천조질서가 모든 것을 용서해주진 않았다. 설령 그것이 그들이 선택했던 길이라도.
식민지들은 고려에 의해 해방되었고, 독립 투표를 앞두고 있었으며 신흥 왕조의 탄생도 목전에 두었다. 그들의 끈은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나라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질서가 개편되었다. 구시대는 끝났다. 모든 나라는 고려의 주도하에 새로운 조약, 선언, 협정, 규약, 협약을 기반으로 한 국제법으로 통제될 것이다.
그들의 통화는 사실상 원과 환, 전으로 통용될 것이다. 국제적 언어는 고려어가 쓰일 것이며, 문화 또한 그렇다.
표준이라는 말은 제국표준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량형도, 시간도 개념도 모두 그러하다. 서기는 그들의 국내에서만 쓰일 것이고 비로소 제국의 제국력이 전 세계의 공식 연도가 될 것이다.
불만은 일어나지 못한다. 용납하지 않았다. 제국은 도덕과 법의 수호자다. 제국이 추구하는 인본과 도덕에 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았다. 올바르지 않은 자들을 단죄할 권리는 제국뿐이었다.
단연컨대 지금부터가 제국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 터다.
그러니 상민은 그 시간을 ‘도금의 시대’라기보다는 ‘황금의 시대’라 불리게 만들어야 했다.
* * *
대고려연방제국 정보총국
[우리는 어둠 속에서 나아가되, 끝은 빛을 지향한다.]
개천 4XX년 정세보고서
발신 : 분석국 국제정세분석1조 김호준
수신 : 대내국 국장 이운상
공람 : ―――― ―――― ―――― (접근 권한 제한)
― 요청하신 사항을 보내드립니다.
최신 지도와 간략한 설명이 참조되어 있습니다. 기타 서류들은 기밀 문제로 분석국 내부에 있으니 찾아오시면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유럽은 튈르리 조약과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 전후 처리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알자스를 도이치에게 양도했습니다.
나바르 공국은 완전히 프랑스에게서 벗어나, 원래의 보르본(부르봉) 왕조가 유지될 예정입니다. 태초부터 부르봉 왕가의 혈통적 권리였던 만큼 프랑스 2공화국도 나바르 대공의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함으로써 이를 인정했습니다.
러시아는 리보니아를 해방시켰습니다. 리보니아의 자리에는 크게 세 갈래로 분류할 수 있는 민족들이 각기 나라를 세웠습니다. 도이치 국왕과 스웨덴 국왕이 이를 감독했습니다.
아우구스트 2세의 죽음으로 폴란드와 도이치의 봉신관계는 해제되었습니다. 셰임은 이제 그들의 왕을 새롭게 선출해야 할 것입니다.
도이치와 오스트리아는 정식으로 동군연합이 되었습니다. 도이치 국왕과 오스트리아 여대공 간의 후사는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러시아는 몰다비아 대공국과 불가리아―왈라키아 왕국을 완전히 해방했으며, 또한 크림 그리스 분리주의자의 요구도 수용했습니다. 이메레티는 바그라티온 가문의 내전으로 같은 왕조의 사카르트벨로가 들어섰습니다.
참칭자, 오스트리아 제국은 해체되었습니다.
라코치 가문의 라코치 페렌츠가 헝가리의 왕조를 열었고, 헤르체고비치의 보스니아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다만 민족주의가 발흥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의 상황은 혼란하여 누가 왕위에 오를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크로아티아는 단절되었다 여겨진 트르피미로비치의 후계 주장자들이 도처에서 나오고 있으며 그중엔 루카 스베토슬라비치가 가장 유력합니다. 모든 후보자의 혈통의 타당성은 입증할 수 없습니다.
세르비아는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후손 두 명이 다투고 있습니다. 둘 모두 혈통적 근거는 있습니다.
알바니아는 비교적 원만하게 카스트리오리 왕조가 들어설 예정입니다.
베네치아는 멸망했습니다. 도시는 엄중한 경고에 따라 사라졌습니다.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영유권 문제는 협의한 바에 따라 자연적 경계선이 불확실하고 불가능할 경우엔 위도와 경도 경계선으로 나누었습니다.
알제리는 카스티야계의 지배가 길었고 프랑스와 아라곤 출신의 이민자가 많습니다. 무슬림들은 예전부터 마라케시로 많이 이동했기에 사막 내륙의 지역을 제외하면 종교적 우위는 기독교가 크지만 이슬람도 적은 숫자는 아닙니다. 지금도 카스티야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습니다.
베네치아령 튀니스는 이제 튀니스로 국호를 변경했습니다. 이곳은 민족의 용광로라 민족 갈등 요소는 있습니다만 상업적 전통이 굉장히 강해 긍정적 요소는 존재합니다. 페니키아계 셈족과 베르베르인들이 대다수이며, 일부는 이탈리아인들과 베네토인들이 있습니다. 종교의 우위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으며, 이슬람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리비아는 반대로 인구의 구 할 이상이 무슬림으로 추정되며, 이들의 민족 구성도 대체로 셈족과 베르베르인으로 동질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이집트는 독립되었고 왕가가 교체될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튀르키예는 알리 파샤의 집권이 순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쟁에서 공훈을 세웠으나, 민족주의자들의 발호를 막지 못했습니다.
시리아가 튀르크인들의 지배에 반발해 일어났고, 안티오키아와 레바논의 기독교 인들도 반발했습니다. 그리스가 안티오키아와 레바논의 배후에 있고 시리아는 아랍 에미르 연방과 이라크의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외국 요원으로 짐작되는 박성민의 행보로 인해 이라크의 지원하에 쿠르드족이 쿠르디스탄을, 아르메니아인이 아르메니아를, 아제르인이 아제르바이잔을 세웠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알리 파샤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며, 빈번한 암살 시도에 마주하고 있습니다.
아랍 에미르 연방과 이라크에 대한 설명은 보다 자세한 사항들이 국제계획 321―(나)호 문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비취인가 특에 해당됨)
러시아는 또한 카자흐를 해방시켰습니다. 카자흐의 밑에 있는 몇몇 칸국이 그 틈을 타 세력을 크게 늘렸습니다. 다만 몇 개의 칸국은 이웃의 혼란과 더불어 민족 구성이 크게 달라진 모양입니다.
아국의 방침에 따라, 이들 국가는 왕조의 이름을 국명으로 하지 않고 새로운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즉 이란은 잔드 왕조가 완전히 집권하였으며, 파슈툰족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 파슈툰 지도자는 아프가니스탄의 건국을 천명하였으며 이란과의 기나긴 갈등에 협상의 태도를 보이겠다고 아국에 주장했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던 무굴은 나디르 샤의 원정 이후 완전히 세력을 잃었습니다. 이후 시크교도들의 시크 제국에 카슈미르와 펀자브, 델리를 내주었고 서쪽으로 쫓겨나가 같은 이슬람계 국가인 아프간과 발루치스탄에 의존해 서진을 막아내고 있는 입장입니다.
비자야나가르의 후원을 받던 마하라슈트라 토후 연맹이 따로 독립하여 마라타 왕국을 세웠고, 인도를 삼분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라타와 비자야나가르의 관계는 나쁘지 않고, 종교도 힌두교로 동질적입니다.
불교 국가인 스리랑카와 이슬람 세력인 몰디브 토후국도 따로 독립하였습니다. 이들은 7함대와 더불어 아국의 독립보장을 받길 원합니다.
마긴다나오는 아국의 관할하에 가장 처음으로 무사히 투표를 마쳤습니다. 총리는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누산타라는 해방되었으나 넓은 섬의 한계로 느슨한 토후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카르타에서 의회가 열릴 예정이지만, 혼란을 틈타 급성장한 토착해적들의 방해가 큽니다. 이에 4함대의 인력 보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최근 군무부에 접수되었습니다.
조선령 루손과 백제령 보르네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국제계획 385―(라)를 참고 부탁드립니다.(비취인가 2급에 해당됨)
옥저에 대한 내용은 직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수신 확인했습니다. 4국에 공람합니다.
― 확인, 공람기록 삭제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