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61화 (461/653)

종전 후의 구상

개천 456년 9월, 바야흐로 전쟁은 끝났다.

소집된 병사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에 환호성을 질렀다.

동맹국이든 조약국이든 격렬하게 싸운 나라들의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봤자 말동무를 할 친구도 별로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들이라도 있어 다시금 문명의 재건이 일어날 것이다.

고려의 병사들도 마침내 본국으로 귀환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베네치아와 프랑스, 크로아티아, 도이치, 네덜란드에다 러시아에까지 넓게 주둔해 있는 고려의 군대가 단시일 내에 복귀하진 못했다.

“베네치아에 있는 여단들이 제일 먼저 빠진다더라. 부러워 죽겠네.”

아미앵 남쪽에 위치한 주프랑스 고려군 진지.

프랑스 전선에서 전설적인 무훈을 세운 전차부대―장다름―의 병사 하나가 기름을 뒤집어쓰고 1호 전차를 수리하다 그렇게 말을 뱉었다.

“다음은 크로아티아에 있는 애들일 거고. 그다음이 우리 쪽이겠지.”

운전수가 전차 위에 누워서 딸기맛 치클을 씹으며 하늘을 바라보다 말을 받았다.

“그래도 우린 1호 전차라 모스크바까진 안 갔잖냐.”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각 부대 중에서 제일 먼저 가는 놈들은 개선식 하러 간다니까 걱정 마라.”

그제서야 기름 범벅이 된 병사가 화색을 띠었다.

“아 그래? 잘됐네.”

기관수는 다시금 1호 전차의 기관에 얼굴을 파묻었다.

― 와아아!

근처의 연병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병사들이 득점을 올렸는지 아련하게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운전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푸 하고 단물이 다 빠진 치클을 뱉었다.

부하들이 뭘 하고 있는지 보러 온 전차장은 완전히 풀어져버린 부대의 분위기에 혀를 차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군 기강은 자신과 같은 부교급 지휘관이 독려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윗줄의 지휘관들이 강조해야 할 사항이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집에 간다.

프랑스 군대는 사실상 일부 치안 병력을 빼곤 완전히 해산된 상태였다. 위협 요소도 별로 없었다.

“야, 오규석이.”

“예?”

고개만 까딱 든 운전수가 전차장을 바라보았다.

“넌 왜 그렇게 기분이 축 처져 있냐. 집에 가는 게 별로 안 좋아?”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전차장은 그의 말에 전혀 수긍한 것 같지 않았다.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면 왜 저러는지 이유를 잘 알기 마련이다.

“뭐 됐고, 너 보러 저기 누구 왔다더라.”

면회라니. 웃기는 일이었다. 고려가 아닌 이곳에는 그를 찾아올 친구도, 가족도, 친척도 없었다.

그러니 찾아올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겠는가.

“저 근신 풀린 겁니까?”

“언제는 제대로 근신한 적 있었냐? 됐어, 가 봐. 대대장님도 허락하셨다.”

규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높은 1호 전차의 차체에서 단번에 뛰어내린 다음 툭툭 털고 전차장에게 경례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너 정말로….”

전차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후, 아니다. 알아서 해.”

주둔지는 철책과 담벼락은 아니지만 임시로 설치된 철조망으로 충분히 단단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너머의 참호엔 이리저리 거치된 기관총이 있었고 자우어를 붙들고 있는 병사들의 눈빛은 삼엄하게 빛났다.

군기가 풀어져도 적진이니만큼 이 정도의 경계는 당연한 일이었다.

철조망과 참호, 기관총이 없는 유일한 부대의 간이 위병소에는 총구를 바닥으로 해놓은 채로 언제든지 사격할 수 있게 경계를 서던 외부파견 헌병들이 있었다.

“호오, 공주를 구하신 용사님이 아니신가.”

보통의 헌병들은 일반병들에겐 다소 서먹한 관계가 틀림없다.

잘못을 할 때나 보는 놈들, 그런 인식이 컸다.

하지만 저놈은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헌병이란 사람이 자신의 대체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같은 전우를 반쯤 작살낸 사람이 자신인데.

“내 면회인은 어디 있소?”

“접견실로 들어가 보쇼. 좋은 시간 보내시고.”

‘뭔 놈의 접견실….’

그의 부대는 아미앵 남쪽 평지에 위치한 수도원을 점령한 뒤 그 건물들을 지휘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수도원 본관은 당연히 지휘부였고, 다른 병사들은 지휘부를 기준으로 군막을 넓게 펼치고 있었다.

다만 본관과 조금 떨어진 곳엔 수도원이 창고로 이용한 듯한 건물이 있었는데 고려군은 이미 텅 비어있는 이곳을 대충 정리한 뒤 접견실로 썼다.

평상시라면 주변의 군납 상인들이나 영양가 없는 방문객들만이 가끔 오겠지만, 지금은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셨군요. 마드모아젤.”

그는 이미 나무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보고 말을 꺼냈다.

한동안 그를 기다린 모양,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고… 고려어가 서투, 서툴러서… 뭐라고 말하는지….”

규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프랑스 여인이 살짝 몸을 떨었다.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당겨 앉은 그가 아까보다는 온화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에 있는 상처를 살펴보았다.

“좀 괜찮습니까?”

외상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난 괜차나요.”

“이것 좀 쓰세요. 비누로 상처를 소독한 다음에 바르면 됩니다.”

규석은 품에서 아주 작은 철제 통을 꺼냈다. 크기는 엄지손가락만 했지만, 그 효능은 꽤 좋았다.

석유에서 많은 것들을 추출하고 남은 잔여물을 유해성 없게 정제해 만들어진 이 유백색의 유(油)연고는 주정이나 세척으로 어느 정도 소독한 상처가 덧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규석은 혹여 말을 잘 못 알아들을까 싶어 그녀에게 세수를 하는 척, 약을 바르는 척을 해 보였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며 연고 통을 받아든 그녀가 그것을 품속에 넣는 대신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빌어먹을, 그 모습에 가슴이 아파온 규석이 한쪽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 * *

그와 이 여인의 관계는 실로 묘했다.

이곳에 전쟁이 한창이던 작년 초, 고려군은 물밀듯이 저지대와 북부 프랑스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솜강 유역에서는 역사상 단시간 내에 가장 많은 피가 흐른 혈전 중 하나가 일어났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전황은 다소 싱겁게 끝이 났었던 터였다.

적의 주력을 주머니에 넣고 자르는 데 성공한 고려는 이전의 전투와는 달리 비교적 손쉽게 아미앵에 입성했고, 그다음엔 통령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2공화국이 들어선 다음에도 한동안은 이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기에 조약국은 일부 경관 병력을 제외한 프랑스군을 해체했다.

그런 상황이니 고려는 적어도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치안을 도맡아야 했다.

아미앵 근처의 작은 마을, 몽디디에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경전차와는 달리 이제는 딱히 할 것 없었던 1호 전차부대의 병사들도 가동할 때마다 짜증이 잔뜩 나는 전차에서 내려 이러한 곳을 순찰하는 데 동원되었다.

당시 고려는 먼저 파견해 고생했던 병력을 귀환시키고, 나머지는 모스크바에 대한 초여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점령지 치안을 볼 인력은 좀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규석은 지금도 그때의 일을 아주 세밀하게 기억했다.

다섯 명으로 몰려다니는 고려군인들이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를 맥주를 마시며 고성방가를 하고 있었다.

순찰을 보던 자들의 병과가 헌병은 아니었고, 같은 병사로서 근무 없을 때 술 한잔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었기에 순찰대는 별 상관 없이 스쳐 지나갔지만, 규석은 하필이면 그중 일면식이 있던 놈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에 한번 같은 부대에서 대민 물의로 사고 친 놈이었지.’

뭔가 기분이 찝찝했다.

순찰로 경계가 끝나고 복귀하는 과정에서, 규석은 아까 그놈들이 지나가던 방향으로 일부러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 돌아가는 그의 모습에 후임이 투덜거렸지만 복귀하면 자신의 몫으로 배급될 기호품 몇 개를 준다는 말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그들은 규석이 봤던 패거리가 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규석과 후임은 그 민가에서 누군가 끙끙거리며 아파하는 신음 소리와 걸쭉한 고려어 욕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벌어진 모양이다.

대경하여 문을 차고 안으로 들어간 규석은 예상했던 대로 한껏 웅크리며 울고 있는 여인 두 명을 발로 차대는 고려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이녀언들이 괌히 봔항을 해?”

잔뜩 취한 놈들의 입에서 나오는 꼬부라진 말에는 술 냄새가 실려 규석이 서 있는 입구까지 풍겼다.

“미친 새끼들!”

규석은 삼남매 중 둘째다.

누나도 있고 여동생도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완벽하진 않더라도 모범적인 도덕의식이 있었다.

규석은 눈이 완전히 뒤집힌 채 그들을 두드렸다.

일 대 다수니 상대가 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규석이 원체 힘이 좋았고 다섯 명도 모두 불콰하게 주기가 맴도는 자들이라,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후임이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규석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해. 난 여깄을 테니 니가 헌병대 좀 불러와.”

“그럼 오 상병님도 얄짤없이 끌려갑니다.”

“…뭘 어쩌겠어. 그냥 불러와.”

후임은 결국 헌병대를 불러왔다.

여섯 명은 얄짤없이 영창에 들어갔다.

당시 조약국에는 이와 비슷한 사건사고가 적지 않게 일어났다.

고려도 마찬가지.

군기가 완전히 흐트러지지 않게 통제해도 사고를 칠 놈은 사고를 치기 마련이다.

지휘부로서는 고려의 병사 모두가 대단히 도덕적이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사람이 몇 명 모이면 그중에 항상 별 이상한 놈이 껴 있기 마련이다.

군대와 같은 환경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규석이 연루된 사건은 폭행과 강간미수에 대한 건, 중요하게 다루었으면 다루었지 그냥 허투루 넘어갈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일에 치이고 있던 군의 법무관은 융통성은 있었는지 폭력을 과도하게 썼지만 그래도 순찰조로서 제 할 일을 다한 규석을 근신 정도로 그치는 벌을 내렸다.

그 다섯 명은 다시금 상부로 올라가 군사재판에 회부할 예정이랬다.

아까 위병소에서 그를 용사라 불렀던 헌병이 알려준 소문에 따르면, 아마 주범은 총살당할 가능성이 크다 했다.

못된 놈이고 주먹이 오고 갔다 하더라도 같은 고려군으로서 전우가 총살당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린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규석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하는 건 다른 부분에 있었다.

‘내가 이제 다시 이 프랑스 땅을 밟을 일이 있을까.’

첫 만남 때부터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출석할 동안 규석과 이 여인, 안느는 말로 형언치 못하는 내밀한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지금도.

하지만 그는 돌아가야 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고향인 사곡에서 집안일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러니 이 여인과도 다신 만나지 못한다.

만나면 뭐 어쩔 수는 있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곳은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어라 싸웠던 나라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인연이 꽃필까. 허튼소리였다.

하지만 규석은 아직도 이 농촌 소녀의 팔과 다리에 든 멍이, 입술이 부르튼 것이 너무 신경이 쓰였다.

필연적인 이별을 짐작했는지 안느도 애써 웃어 보였다.

“Je t'aime, Mon Coréen.”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반쯤은 울음소리였다.

규석은 그제서야 참지 못하고 같이 일어났다.

그가 안느를 꼭 끌어안았다.

“다시 올 겁니다. 전역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아미앵에 있어요. 여기로 찾으러 올 테니.”

도이치에는 이미 전후 도이치에 정착해 살겠다는 생각을 가진 병사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다른 고려인들의 입장에서 살기 좋은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반쯤은 미친 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아미앵에 프랑크푸르트마냥 고려마을을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규석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마음먹었다.

* * *

친정을 하면서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해원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다.

전례 없는 규모의 전쟁 덕에 전쟁 피로도도 이미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심리적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이상 군사작전을 지속하는 건 무리였다.

전쟁이 끝난 마당엔 더더욱.

“그래도, 러시아의 뒤처리가 아무래도 찝찝하단 말일세.”

암스테르담 궁전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해원이 문득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렇게 말했다.

비어버린 잔을 채우기 위해 다가온 궁인을 아예 물린 빌럼이 친구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네가 저 덩치 큰 몽골 놈들을 아주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보이는 건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해체한 땅덩어리와 독립시킨 봉신국들을 생각해보면, 고려는 이제 더 이상 러시아가 그 방정맞은 입에서 고려의 대적자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잔뜩 훈계한 것과 같았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진정한 제국과 덩치만 큰 제국의 차이를 이제 명확히 깨달았고, 해방제 시절부터 생겨난 고려와의 경쟁 구도 따위는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렇게 한번 개념이 무너진 이상, 어찌 러시아가 국내 정치를 수습해 다시금 일어선다고 하더라도 이전과 같은 위상을 가지지 못할 것은 자명해 보였다.

그땐 과거보다 주변의 나라들이 더더욱 많아졌을 것이고.

“걱정되는 것은 오히려 러시아가 일어설 수 있는가의 문제네.”

다만 스스로 잔에 포도주를 따른 해원은 그렇게 말했다.

반면 빌럼은 해원의 말에 다소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왜? 저치들이 무너지면 그제서야 이 유럽에 안정과 평화가 자리 잡을 텐데? 루스 놈들은 그네들이 몽골에게 얻은 타타르의 멍에를 두려워하며 헐뜯지만, 정작 자신들은 항상 동유럽에 루스의 멍에를 씌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않았는가.”

“그 무너진 틈바구니에서 더한 괴물이 나타날 수 있지.”

사실 빌럼의 반응이 지극히 정상이고 해원의 우려는 노파심 같았다.

물론 해원도 처음에는 빌럼과 같이 이와 같은 상황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고 걱정도 별로 하지 않았으나, 아들과 선조의 말을 듣다 보면 뭔가 알게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시민들의 권리가 강해지며 입헌군주정이 자리 잡고, 반대로 귀족들의 권한은 약해지고 있더라도 아직 유럽은 귀족적 기풍이 매우 강했다.

그 체제가 단번에 바뀔 수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이 잘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프랑스의 혁명에 한번 거세게 충격을 받은 뒤에는 그들의 고정관념에도 한바탕 균열이 가해졌겠지만, 외젠의 장기집권은 프랑스 대혁명의 본질을 다소 훼손시켰다.

결국 또 다른 군주정에 불과했다는 에이레 학자 조지 버클리의 평가가 아니었어도.

샤를 루이 통령의 치세에 공화국에 대한 이런 인식이 얼마나 개선될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는 갈 길이 멀었다.

그러니 러시아에 대한 그의 근심은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사람은… 이제는 러시아까지 지원해주지 못해 안달인가?”

아마 정말 외부엔 그렇게 보일지도 몰랐다.

고려의 정계에서조차 러시아에 대한 지원은 몹시 꺼렸다.

프랑스야 누벨 오를레앙 시절의 인연도 있었고, 프랑스의 위협 자체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기에 관대한 처우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지만, 러시아는 애초에 고려의 대적자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건방진 놈들이다.

고려의 국민들도 러시아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원했다.

황제 해청도 이들을 설득하긴 어려워 보였다.

그러면 그들 스스로 잘 해내야 한다.

해원은 의심을 품었다.

“나탈리야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차리차는 본성 자체는 선한 인물이다.

모스크바의 협상장에 있었던 사람은 대부분 동의했다.

하지만 정치는 개인의 선악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능하지만 착한 자와 유능하지만 다소 악한 자를 꼽으라 한다면, 국가적 지도자는 대개 뒤의 경우가 맞았다.

해원은 셀림브리아에서 만난 블라디미르 1세를 떠올렸다.

‘안타까운 일이야….’

블라디미르와의 관계는 쉽게 규정하진 못했다.

빌럼처럼 절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사이는 험악했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 작자와 일가가 그렇게 죽었다는 걸 들었을 때 해원은 밥맛이 조금 떨어졌을 정도였다.

‘외가에도 한번 들를 때가 왔군.’

빌럼이 화제를 돌렸다.

“아까 하던 말로 돌아가지. 유대인 문제는 어떻게 하겠다고?”

해원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에게 땅을 줄 예정이다.”

“땅을? 어디를?”

빌럼이 긴장했다.

유대인 문제는 묘했다.

기독교인인 빌럼은 필연적으로 유대인을 썩 좋아하진 않았다.

게다가 이번 전쟁으로 인해 급진주의 시온주의자들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도 굉장히 우려스러웠다.

그럼에도 고려는 베네치아에게 잔인하게 박해받은 대표적인 민족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북아프리카에는 이미 베네치아인 이전의 원주민들로 정부를 세운다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러니 다른 곳을 줄 셈이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그 부근에 대해 가지는 애틋한 감정은 알고 있다.

하지만 고려는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의 터전을 뺏어 남에게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신 고려는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 전에는 역사적으로 아무도 관계하지 않았던 땅을 주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일 부르봉과 모리셔스, 이 땅들을 시온이라 부르게 될 걸세.”

빌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동맹국에게서 압수한 식민지다. 역사적으로 원주민이라는 존재가 없었던 곳이니 영토분쟁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가장 가까운 메리나가 신경 쓸 법도 했지만 메리나와 모리셔스 간의 거리는 객관적으로 꽤 멀었다.

“그들이 순순히 수용되겠나?”

“수용? 아니, 무슨 수용인가. 그냥 준다는 거지. 가서 살든 말든 자유일세.”

그저 거기를 시온이든 신이스라엘이든 신가나안이든 대충 붙여 놓으면 유대인들에게 땅 없는 민족이라는 말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들은 그곳을 고향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어 세상에 환멸을 느낀 유대인들은 알아서 거기에서 둥지를 트고 잘 살 것이다.

고려도 그 정도 작은 섬의 사정쯤이야 어느 정도는 봐줄 수 있었다.

[작가의 말]

석유연고 : 바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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