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60화 (460/653)

종전

프랑스의 항복과 더불어 러시아도 제풀에 넘어졌다.

조약국은 허무하게 종전 아닌 종전을 맞이했다.

수즈달에서 선대 차르가 현 차르와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아득히 머나먼 중부 시베리아에서는 차르의 유배된 동생 드미트리와 그 일가가 전부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도 퍼졌다.

누구는 전투 중에 죽었다고 말했고, 누구는 암살당했다고 했으며 누구는 포로로 잡혔는데도 간악한 옥저인들이 처형했다고 말했다.

말이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일은 부풀려졌다.

류리크 황조의 비극은 시인들과 작가들, 화가를 비롯한 각종 예술인들에게는 희대의 영감거리로 남을 것이 분명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몹시 불안한 요소가 될 것이었다.

모스크바엔 과장을 좀 보태서 항복 절차를 밟을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귀족들은 각자도생하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고 책임질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귀족 중에서 제국 섭정직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을 꼽으라면 세력이 가장 강력한 러시아 공작, 알렉세이 로마노프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알렉세이는 빠르게 비어버린 크레믈을 장악한 뒤 뒷수습을 하기 위해 조약국에 전령을 보냈다.

류리크 황조의 충신이었던 그 아버지 표트르와는 달리 알렉세이는 다른 야심이 있었다.

‘류리크의 시대가 저물었으니, 로마노프의 시대가 열릴 수도 있겠다.’

차르의 제위.

생각만이라도 가슴이 뛰었다.

알렉세이의 입이 삐쭉거리며 웃음이 튀어나왔다.

선대 차르의 생존 자식은 없다.

가장 가까운 계승서열인 드미트리와 그 가족도 아주 수상하게 죽었다.

계승권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직 남은 류리크계는 꽤 있었다.

사실 류리크 성씨 자체는 상당히 많았으니.

다만 차르나 왕족들이 정식으로 혼인하여 낳은 직계는 근래에 많이 단절되어 있었다.

블라디미르 1세의 왕권 강화 정책의 결과일지도 몰랐다.

‘굳이 직계를 찾아볼 필요가 있겠는가? 사생아들을 입적시키고 제관을 주면 되는 것을.’

블라디미르와 드미트리 말고는 직계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해방제는 부인인 마리아 안나에게서 말고 정부와 혼외관계로 낳은 서녀들이 셋 있었다.

알렉세이는 도박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최초의 여성 차르, 즉 차리차(Царица)를 등극시키기로.

거리가 먼 방계보다는 서녀가 더 혈통적 정당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는 머리를 굴렸다.

서장녀 옐레나는 일리안 아센과 결혼해 불가리아 대공비가 되어 있다. 적국의 군주비니 어림도 없었다.

차녀 엘리샤는 현시점 살아있지 않았다.

그러니 후보는 마지막 한 명뿐이었다.

“나탈리야로 해야 하겠군.”

나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류리크.

막내인 만큼 나이는 이십 대였다. 충분히 젊었다.

그래도 그녀는 기혼자였고, 남편과 딸이 있었다.

남편은 러시아의 귀족. 장자가 아니라서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하겠지만 엄연히 의회의 의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우자란 직책의 가치는 지금 이 순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했다.

그녀의 옆자리는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가질 자리가 아니었다.

알렉세이는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가다듬었다.

그는 껍데기만 남은 상원(보야르 두마)와 젬스키 소보르(의회)를 개최한 뒤 다음 대 차르의 보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대전쟁에서 죽거나 혹은 중앙의 혼란이 두려워 숨은 덕에 귀족들과 정치인들의 빈자리는 많았다.

이 틈을 타 자신이 여론을 주도하고, 차기 차르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면 된다.

그리고 제위를 손아귀에 넣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결혼일 터였다.

* * *

나탈리야의 남편, 그레고리 이바노비치 수보로프는 노브고로드(벨리키노브고로드)의 저택을 떠나기 전에 부인을 다독였다.

“부인, 젬스키 소보르가 개최되었소. 난 모스크바에 가봐야겠습니다.”

“뭔가 불안해요. 가지 않으면 안 돼요?”

“나도 러시아의 귀족이잖소. 러시아의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도래해 신민들이 고통받는 꼴을 볼 수는 없어요.”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아내 앞에선 애써 태연한 척했던 그레고리도 집을 나서 열차에 탄 뒤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칸에서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알렉세이는 그 유명한 ‘로마노프가 정원의 독살극’을 벌여 해방제 충성파는 물론이고 자신의 아버지까지 죽인 잔혹한 인물이었다.

러시아의 음흉함이 실체화된다면 딱 알렉세이가 그 모습에 가장 근접할 것이다.

수보로프 가문은 그 연회에 참석지 않아 화를 비껴갔지만 그의 악명은 충분히 기억했다.

새로운 차르의 시대가 열리며 비어버린 귀족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레고리와 그의 형인 바실리 수보로프가 중용되었다.

반사이익을 봤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차르와는 적당한 거리를 두길 원했다.

일선에서 허망한 전쟁을 하는 대신, 형 바실리는 한적한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했고 자신은 크레믈에 남아 의원이 되었다.

현 차르는 날이 갈수록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명한 일이었다. 만약 조약국이 협상을 해도 그의 가문을 박살 낼 일은 생길 것 같지가 않았다.

‘이번 승계 문제만 제대로 마무리 지으면 러시아에 평화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우리 가문에도 평화가 찾아올 거고.’

그러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모스크바는 악의 구덩이다. 그곳에 들어간 이후부터 그는 알렉세이의 동태와 의중을 면밀히 살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탄 열차가 거세게 흔들렸다.

― 쾅

그가 탄 열차는 강 위에 지어진 다리 중간을 지나다 정상적인 경로에서 이탈해 탈선했다.

이상스럽게 구부러진 궤도의 방향은 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머리에 충격을 받고 기절했다.

차가운 물이 사방에서 쏟아지는데도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다른 객실에서 몇몇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레고리를 포함한 다섯 량의 기차에 탄 승객은 달조차 뜨지 않는 어두운 밤에 차디찬 볼가강의 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 * *

서기 1731년, 개천 456년, 1월.

그레고리는 모스크바에 오지 못했다.

그동안 알렉세이가 주도하는 젬스키 소보르는 마침내 차기 차르에 대한 결론을 내었다.

“그럼 모두 동의하시는 걸로 알겠소.”

망치를 몇 번 두드린 알렉세이가 일어났다.

그리고는 엄숙하게 말했다.

“주님, 여제를 보우하소서(Боже, Цари́цу храни)!”

“여제를 보우하소서!”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떨떠름하게 복창했다.

즉위식은 빠르게 거행되었다.

차르의 자리를 비워둘 순 없었다는 명목이었다.

사실상의 전시 상황과, 국가 예산이 박살 나버린 상황 덕에 즉위식은 무척이나 초라했다.

그럼에도 나탈리야 블라디미로브나는 마침내 전 러시아의 황제에 등극함으로써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여제가 되었다.

이후 알렉세이는 미망인이 된 차리차와 결혼할 계략을 꾸몄다.

그는 어차피 별 사랑도 하지 않았던 도이치 귀족 출신 배우자와의 이혼을 준비했다.

도이치는 적국이니 나름대로의 명분도 있었다.

정교회는 이혼을 허락지 않으니, 이혼이라는 이름 대신 ‘혼인 무효’가 될 것이었다.

신념과 정의에 따르는 대신 선대 블라디미르 2세의 발바닥을 열심히 핥으며 다른 정교회와 완전히 척을 졌던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이번에도 권력의 향방에 민감하게 반했다.

이제는 로마노프 공작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어렵지 않게 혼인을 무효화한 뒤 곧바로 나탈리야에게 청혼했다.

청혼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다.

나탈리야 블라디미로브나는 자신이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녀가 어떻게 정계에 끈이 많을 수 있었겠는가.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그토록 현명하던 이복오빠들이 이런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교계의 소소한 인연들을 제외한다면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사실 그녀의 성정도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알렉세이는 정계에 거의 끈이 없는 여제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나탈리야가 혼인을 완강히 거부한다면, 그녀를 죽인 뒤 그녀의 갓난아기인 딸이라도 차리차에 올린 뒤 섭정을 할 생각까지도 있었다.

결국 나탈리야는 기쁨이 아닌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그들의 사랑은 전혀 정신적 교감을 얻지 못할 것이었다.

알렉세이는 핀란드 출신의 예프로시니야라는 정부를 두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흠뻑 빠져 있는 상태니 나탈리야와의 결혼 생활도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탈리야가 그를 두려움과 증오의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미루어볼 때, 알렉세이는 차리차가 어느 정도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직감했다.

상관없었다. 혼인은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 사랑은 부가적인 요소였다.

* * *

이 모든 것이 개천 455년 말과 456년 초의 겨울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약국은 그동안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대전쟁에 지치고 더 이상 싸움을 하기 싫어했다.

고려조차도 그랬다.

환경이 아무리 다른 나라들보다 나았어도 전쟁은 끔찍하고 참혹했다.

참호전은 더더욱.

고려군 내에서도 신체적 부상은 물론이고 극심한 정신적 후유증을 호소하는 장병들이 많았다.

이에 손규호 사령관은 455년 성탄절 직전에 시중의 명을 받아 전부는 아니지만 맨 처음 전선에 투입한 병력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켰다.

그 수는 오십만이 넘었다.

시중은 성탄절에 가족들을 볼 수 있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호언을 지키지 못했다면, 정말 창양의 사람들에게 계란을 맞았을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 속에서 러시아가 제풀에 넘어지니, 일단은 관망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조약국들은 러시아가 빠르게 현실에 순응하고 제대로 배를 까뒤집길 원했다.

하지만 새롭게 정권을 획득한 알렉세이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데도 달랑 사절 하나만 보내놓고는 김칫국, 아니 보르시부터 실컷 마시고 있었다.

“답도 없는 놈들이군.”

손규호가 분통을 터트릴 정도로 러시아는 패배한 주제에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항복 협상은 결렬되었다.

게다가 조약국의 입장에서 알렉세이는 죽은 차르의 심복, 또한 블라디미르 2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적어도 알렉세이가 정권을 잡게 내버려 두면 안 됐다.

조약국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추스르고 겨울에 뒤이어 오는 봄의 라스푸티차 시기를 피하며 초여름 공세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러시아 귀족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선에는 군대가 거의 없다. 전부 다 도망가거나 와해된 상태였다.

그나마 알렉세이가 지휘하던 군대가 있었지만 이들조차도 서부전선 대신 모스크바를 장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러시아는 푹푹 그 두꺼운 살집에서 피를 흘려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알렉세이의 폭거에 보다 못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지방에서는 진작 민중봉기와 난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귀족들의 반란 규모는 훨씬 컸다.

‘3월 반란’은 내전이라는 명칭이 가장 적절했다.

자신의 동생이 어처구니없게 사고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실리 수보로프부터 애초에 로마노프가의 비극 이후 블라디미르 2세와 알렉세이 일파에 증오를 가지고 있었던 톨스토이 가문들 같은 중소 가문들이 하나로 뭉치자 그 세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전은 정말 여름까지 지속되었다.

덕분에 조약국은 리가와 민스크에서 모스크바로 빠르게 진군할 수 있었다.

손규호는 최대한 2호 전차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 뒤 경전차를 선두로 모스크바로 직행했다.

러시아 반군들이 그들을 호위했다.

마침내 전차를 앞세운 강철의 파도가 러시아에도 도착하자 알렉세이의 짧은 천하는 막을 내렸다.

어느 순간부터 어긋난 상황에 좌절해 술을 진탕 마신 채 예프로시니아의 품에 안겨 있던 알렉세이는 곧바로 조약국 병사들에 의해 체포당했다.

그런 뒤, 크레믈 앞의 넓은 광장, 즉 시장 광장(Veliky Torg)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참수당했다.

알렉세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과 관계된 자들이 줄줄이 끌려 나와 광장에서 참수당했으니, 이것이 조약국의 전범 재판인지, 아니면 정권을 쥐게 된 반군의 숙청인지는 솔직히 조금 애매했다.

광장은 붉게 물들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광장을 붉은 광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현 세태를 보아할 때, 한 번만 붉게 물들진 않을 것이었다.

* * *

“폐하에 대한 입장은 이해합니다. 폐하의 권위는 지켜질 것입니다.”

조약국은 나탈리야를 인정했다.

사실 처음엔 조약국도 나탈리야의 언니인 옐레나 아사니나, 즉 결혼 전의 이름은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류리크에게 동생에게 양위받아 러시아 차르에 오르는 것이 어떠냐 권유했다.

옐레나는 그녀의 업적으로 미루어볼 때 확실한 반러시아파였으며 더없이 신뢰할 수 있는 친려군주가 될 수 있었다.

옐레나도 솔깃했던 것처럼 보였다.

권력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녀가 차리차에 오른다면, 과거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은 확실히 없앨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작 일리안 아센이 정말 핏대를 올려 가며 반대했다.

그는 그러한 권유 직후부터 어떤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꿈에서 그녀의 가슴팍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옷자락도 머리도, 머리카락도 모두 붉게 물들었다.

일리안은 피범벅이 된 아내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다 잠에서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러니 일리안은 평소의 온화한 성정과는 정반대로 부인에게 그러한 권유를 하는 자들을 면전에서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그녀에게 울며 만류했다.

“여보, 죽어도 안 되오. 러시아의 제관엔 마가 꼈소. 저것을 쓰는 자는 결국 다 비참하게 죽을 것이오!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말아요.”

“…알겠어요. 여보.”

결국 옐레나는 차르의 자리를 고사했다.

다만 옐레나는 불가리아가 그동안 러시아에 대항할 때 같이 싸웠던 러시아 출신 반차르 장교들을 보내주었다.

남쪽으로 갔던 다른 구제동맹의 장교들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약국은 뭘 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왕조교체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류리크는 러시아의 전부였다.

나탈리야가 혈통적 하자를 조금 가지고 있고, 성별적으로도 첫 여제였지만 성정 자체는 조약국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들에겐 오히려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탈리야는 이 끔찍한 크레믈에서 숨조차 쉬기 힘들어했다.

정말로 그녀는 극도의 정신적 압박 속 건강이 좋지 않은지 폐렴인지 천식인지 모를 병에 걸려 쌕쌕대고 있기까지 했다.

“모든 걸 다 던지고 시골로 내려가 살게 해줘요. 난 차리차 같은 게 아니에요!”

하지만 조약국은 이 차리차가 뭐라도 빨리 항복 문서에 서명한 뒤에 전쟁을 제대로 끝내길 원했다.

“러시아의 백성들이 아직도 요란합니다. 그들을 달래야 시골에 가실 수 있으시겠죠.”

나탈리야는 가슴을 움켜쥐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숫제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러시아는 브레스트와 민스크를 포함한 영토를 폴란드에게 할양한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와 리보니아를 해방한다.

러시아는 불가리아, 몰도바, 왈라키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러시아는 이메레티에 대한 종속국적 지위를 상실한다.

러시아는 옥저가 점유하고 있는 시베리아의 영토를 옥저에게 할양한다.

러시아는 카자흐의 땅을 해방한다.

….]

엄청나게 가혹한 조약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배상금은 오히려 프랑스보다는 적었다.

배상금을 요구할 전쟁 지분만을 따지고 본다면 불가리아가 제일 컸고 오스만과 폴란드가 그 뒤를 이었는데, 앞의 두 나라는 엄밀히 따지면 조약국이 아니었고 외교적 입김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곳까지 진군해온 조약국은 제각기 이 러시아가 채무를 얼마나 상환할지 아주 회의적인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박살 난 경제는 러시아의 전통이다. 과연 미래에는 좀 바뀔 수 있을 것인지 그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돈을 받을 것 같지가 않다면 영토를 잘게 쪼개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니 영토적인 측면으로 볼 때 러시아는 정말 어마어마한 땅을 잃었다.

그 규모는 거의 나라 몇 개, 몇십 개가 들어갈 정도였다.

그곳들 중에는 그렇게 가치가 높지 않은 지역도 있었지만 더없이 중요한 지역도 있었다.

― 치욕스럽고 치욕스럽구나.

이 모든 것이 나탈리야의 잘못이라 하면 그녀에겐 너무 가혹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 조약에는 그녀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이 불쌍한 여제의 앞날이 과연 평온할지는 그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나탈리야는 그래도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최선을 다해 러시아의 상황을 수습했다.

박살 난 경제를 수습하고, 불타오르고 있는 농촌의 불만을 꺼트리기 위해, 나탈리야는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평의회를 설립했다. 노동자들, 농민들, 참전 병사들이 그 회의에 참석할 것이었다.

그 평의회의 이름은 소비에트(Совет)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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