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59화 (459/653)

황조의 끝

이르쿠츠크를 함락시킨 옥저군은 북서쪽으로 나아갔다.

사실상 원정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이 광활한 대지에서 예전 유목민처럼 싸울 순 없다.

보급은 과거의 전쟁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했다.

식량 이외에도 포탄과 총탄이 주기적으로 보급이 되어야 하니, 철도가 없는 곳을 진격하는 것은 몹시 힘들었다.

원정군은 바이칼 호수와 근접한 옥저의 가장 서쪽 요새, 즉 설연하강(셀렝가강)과 우데강 사이에 위치한 부평진을 통해 솔빈으로부터 철도보급을 받고 있었다.

부평진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고 설연하강과 바이칼호, 안가라강을 통해 수운 보급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다음 도시로 공격하는 데 헉 소리가 날 정도로 긴 거리가 필요했다.

신의주부터 동래까지의 거리도 이보단 짧을 것이었다.

안가라강은 예니세이의 지류지만 진군로와는 한참 돌아가야 했고 북부 대수림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막막한 보급을 타파하기 위해 옥저군도 머리를 굴렸다.

“적의 보급로를 역이용합시다.”

러시아도 이르쿠츠크, 그리고 이르쿠츠크를 넘어 야쿠츠크까지의 철도 노선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를 활용해 진격로의 보급로를 유지하자는 의견이었다.

이는 기본적이며 정석적인 작전 제시라, 당연히 채택되었다.

허나, 드미트리는 후퇴하는 와중에도 별동대를 통해 그들이 부설한 철도를 자체적으로 파괴했다.

러시아는 강철이 부족해 철도까지 전부 강철로 잇지 못했고, 많은 수가 연철이었다.

이 철도가 엿가락처럼 비비 꼬여 나무에 묶여 있는 모습을 보자 동가융이 뒷목을 잡았다.

“정말 짜증 나는 자로다.”

동가융은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드미트리에 밀려 굴욕을 당했다.

그가 돌격시킨 팔기나 병사들의 손실이 실로 대단했다.

개천 454년 중반이 되어서야 솔빈에서도 문책성 지휘관 교체를 단행했다.

동가융을 불러들이고 총사령관에 이윤진을 임명했다.

지천명의 나이를 지난 이윤진은 여전히 정정했다.

하지만 이번의 원정에는 그의 자식들을 대동했으니 근시일 내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다.

팔기의 특성인지 부모의 길을 자식이 걷는 가문이 많았다.

이윤진은 면밀히 적진을 살폈다.

“방비가 두텁다. 전면전으로 뚫어내긴 힘들어 보이는구나.”

아직 참호전을 겪지 못한 옥저는 그 위력을 오로지 최신의 교범으로만 접했다.

윤진도 경험이 일천했지만 적어도 그는 크라스니야르에 형성된 방어망을 돌파하려다간 자신도 동가융과 비슷한 결말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기동성 높은 기병의 우위를 통해 크라스니야르를 아주 멀리서 포위하고 마찬가지로 철도를 끊었다.

어찌 보면 잔혹한 일이었지만 주변 러시아 촌락들을 파괴한 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전부 크라스니야르로 들여보내도록 지시했다.

그는 겨울이 오기 전 모든 준비를 끝냈다.

러시아인은 추위에 강하다.

하지만 옥저인들도 그만큼 강했다.

서로가 북방에서 수십 수백 년 살아왔는데 추위가 어찌 익숙지 않으랴.

하지만 시베리아의 추위는 익숙하다고 온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익숙했기에 이 겨울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알았다.

준비가 된 자와 아닌 자의 차이는 컸다.

양측 모두 두꺼운 모피옷이나 솜옷을 껴입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롭게 연료를 벌목할 수 있는 옥저와는 다르게, 옥저군의 넓은 포위망으로 인해 벌목으로 연료를 확보하기가 마땅찮은 크라스니야르는 가뜩이나 늘어난 주민들의 숫자에 연료와 식량 모두 허덕이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2세는 동방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군관구에 식량을 비축하기는커녕 불리해지는 서부의 전황을 타개하고자 동쪽에서 자꾸만 자원을 빼냈었다.

드미트리는 형의 업보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이에 옥저가 맞이했다.

서부전선처럼 긴 참호선은 없었다. 거대한 참호선을 구축하기엔 둘 모두 전선에 비해 보병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땅까지 꽁꽁 얼어 있었다.

마치 예전의 전투처럼, 양측은 새하얀 눈밭 속에서 산개하며 총을 쏘며 격돌했다.

포탄과 다혈포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병사들은 소총을 쏘다 착검하여 서로의 복부에 총검을 찔러넣었다.

허나 이윤진이 통솔하는 팔기는 이러한 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개천 455년,

마침내 크라스니야르가 함락되었다.

상처투성이에 피골이 상접한 드미트리가 직접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이윤진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요새에 입성했다.

“과연 옥저 제일의 명장이시오.”

“전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패자의 신분으로 어찌 불평하겠소. 다만 장군께서 항복한 포로와 러시아 민간인들에겐 일말의 자비를 보여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마땅히 그럴 것입니다.”

이윤진은 믿을만한 자신의 아들들에게 드미트리의 안위를 단단히 당부했다.

하지만 그날 밤, 들리지 말아야 할 총소리가 크라스니야르에서 몇 발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번쩍 눈을 뜬 이윤진이 서둘러 군용 남바위를 뒤집어쓰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윤진이 향한 방향에 일단의 병사들이 몰려 수군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러시아인 하나가 황자를 암살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그에 대한 호위와 감시를 맡으라 지시했던 윤진의 차남, 홍력이 무심하게 말했다.

암살자는 이미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보십시오. 이자가 다혈권총을 빼 들어 드미트리를 격살했습니다. 영락없는 슬라브 놈 아닙니까?”

윤진은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살아남았던 황자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

두 눈이 부릅떠진 것이 적지 않게 놀라고 원통한 모양이다.

“…다른 가족은?”

윤진은 입술을 깨물고 그렇게 말했다.

홍력이 고갯짓을 했다.

드미트리의 시신 근처, 작은 꼬마 남자아이가 죽어 있었다.

“다 나가보거라.”

“사령관…!”

“다 나가보라고 했지 않느냐!”

윤진의 명령에 옥저군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홍휘, 네가 말해 보거라.”

서늘한 윤진의 눈동자가 뒤늦게 도착한 장남에게 닿았다.

아비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장남도 이 계략에 참여친 않았더라도 무언가 알고 있는 기색이 분명했다.

홍휘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동생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형님!”

형의 기색을 읽은 홍력이 간절히 외쳤지만 홍휘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력아. 아버지께 거짓을 고할 순 없잖느냐.”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짐작하시는 것이 맞사옵니다.”

― 쾅

그 말이 있자, 윤진이 번개같이 나아가 홍력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에서 다혈권총을 뽑아 들어 공이를 걸어 겨누었다.

“아버지!”

일련의 행동이 너무 신속해 장남 홍휘가 말리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네놈이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

격분으로 인해 이윤진의 권총 끝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는 러시아의 미래 차르를 죽인 것이야. 한 나라의 수장을 쏴죽인 것이다!”

홍휘가 동생을 대변했다. 모략에 참여치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분노가 동생에게 향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저들은 모를 겁니다. 슬라브 놈들이 서로 싸운 줄 알겠지요.”

“다른 자들이 바본 줄 아느냐? 눈 가리고 아웅 하면 전부이더냐? 우리의 병사들이, 다른 장교들이, 관리들과 주상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리 순진하고 멍청하게 생각했느냐!”

하지만 홍력의 눈동자는 권총의 앞에서도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것은 옥저를 위해 행했습니다!”

그는 바닥의 흰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드미트리의 시신을 가리켰다.

“저자를 보셨잖습니까! 드미트리 황자는 인품이 좋아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유의 재능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유배 온 장교들은 물론이고 그 감시인들과 병사들이 죽을 때까지 그를 따른 것처럼요. 게다가 이번에 보셨듯 문뿐만 아니라 무에도 두루 뛰어납니다. 실로 천하에 한 번 내릴 영걸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기에 죽여야지요. 저자가 러시아의 차르가 되면, 옥저에게 좋은 일입니까?”

“…….”

“서북방의 위협은 여전할 겁니다. 원주민들은 여전히 고통받을 겁니다. 우리의 확장은 저지될 것입니다. 왜 이를 모른 척하십니까?”

윤진은 장탄식했다.

“력아, 력아. 그것을 어찌 네가 판단하느냐. 가뜩이나 솔빈이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번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상국도 우릴 지켜볼 것이다.”

“아무리 상국이라도 이걸 어찌 알겠습니까?”

“하, 너는 모른다. 천하를 군림하는 제국이 얼마나 많은 눈을, 얼마나 많은 곳에 뿌려두었는지. 그들이 설계하는 대계가 얼마나 냉정하고 잔혹한지.”

고려가 덕으로만 번국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걸 윤진은 잘 알았다.

그도 명에서 꽤 오래 있었고 많은 것들을 보았다.

이번 전쟁을 통해 세상 모든 구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 싶어 하는 상국은 이제 마침내 거대한 탁자 위에 있는 바둑판을 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 너머에 러시아가 앉아있었다 생각했었지.

허나 그것이 허깨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기사(棋士)들 간에는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의 실력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기사였고 하나는 어린애였다.

백돌을 잡은 고려가 오히려 상대에게 “몇 점 더 미리 깔고 두시게.”라 권해도 그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윤진은 적어도 옥저가 그 흑돌을 집어 들지는 않길 바랐다.

군부와 조정의 갈등을 넘어, 옥저인으로서 그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

문득 인기척이 들렸다.

자그맣게 눈을 밟는 소리, 하지만 침묵 속에서 눈으로만 하늘의 별자리를 더듬어가며 고뇌에 빠진 윤진의 감각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누구냐!”

그가 병사들을 물린 이유가 있었다.

이 대화는 밖으로 나가면 안 되었다.

그렇다면 제아무리 원리원칙에 철저한 윤진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윤진이라도 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일고여덟 살로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가 있었다.

명확한 슬라브인이다.

이목구비가 귀여웠다.

눈과 머리카락은 드미트리를 닮았다.

“넌 누구니.”

갈라진 목소리, 더듬거리는 러시아어로 윤진이 물었다.

“올가, 올가 드미트리예브나 류리크.”

소녀는 멍하니 땅에 쓰러져 있는 아빠와 동생을 바라보다 이윽고 홍력과 홍휘, 윤진을 바라보았다.

홍력이 소리쳤다.

“저 계집아이도 죽여야 합니다. 유럽의 일부 관습엔 여자도 제위에 오를 수 있잖습니까! 저 아이만 처리한다면 드미트리계는 완전히 끊깁니다!”

현 차르는 후계가 없었다.

일남 일녀가 있었지만 모두 유년기에 급사했다.

하지만 윤진은 아들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완전히 무시했다.

홍력이 더 크게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권총이라도 있었으면 직접 뽑을 기세였다.

“아니면 차라리 취하십시오. 아버지께서 못 하신다면 형님이라도, 저라도…! 아니면 주상께라도 저 계집을 바치십시오. 화근을 남겨두어선 아니 됩니다!”

조혼이 아직 남아있는 시대였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었다. 윤진은 참담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현 시간부로 드미트리 황자에 대한 호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이홍력 부령의 모든 직위와 권한을 해제한다. 홍휘 네가 처리하거라.”

윤진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무감각하게 끌면 끄는 대로 소녀는 밖으로 나왔다.

윤진은 자신이 정말로 믿는 심복에게 명령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피난민 촌락을 찾아 이 아이를 맡아줄 보모를 구해 보거라. 대가로 식량과 돈을 주어도 된다. 다만 이 아이가 절대, 절대로 신변이 노출돼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팔기 하나가 소녀를 데리고 사라졌다.

윤진은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한숨을 흘렸다.

그의 곁으로 다른 병사 하나가 무심히 지나갔다.

* * *

455년 초겨울의 비보는 오랫동안 서쪽으로 퍼져 나가지 못했다.

러시아 본국은 동부의 사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프랑스에 2공화국이 들어선 뒤, 조약국은 마지막 남은 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조약국 중 어느 누구도 종전을 선언하지 않았건만, 러시아는 이미 전쟁이 끝난 상태였다.

1730년이 되자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그동안의 핍박을 묵묵히 감내하던 멍청한 이반들이 견디다 못해 마침내 나무 쟁기를 들고 일어났다.

먹을 것이 없다. 굶어 뒤지느니 싸우다 죽자.

수많은 병사들을 전쟁터에 보내 죽인 차르였지만, 이반들의 수는 아직도 많았다.

이반들은 강하지 않았다.

피가 강처럼 흐르게 한다면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막아낼 러시아 병사들도 수가 많지 않았다.

단번에 중세의 시대로 돌아간 것마냥, 시대는 끔찍하게 혼란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사람들이 횃불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차르를 보필해야 할 고위 귀족들은 침묵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크레믈에 등청하지 않았다. 와서 차르를 안심시키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

차르의 옆에서 그를 헛된 말로 안심시키는 무리들은 한 줌 쓰잘데기없는 술지게미만도 못했다.

해체되는 제국과 가라앉은 공화국, 암살당한 통령의 모습을 본 귀족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차르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제서야 탕아는 현실을 마주했던 것 같았다.

차르의 시야를 가렸던 찬란한 모습은 단순한 환상이었고, 냉엄하고 차가운 현실만이 소름 끼치는 한기가 맴도는 대리석 바닥과 같이 그의 피부에 맞닿았다.

“수즈달로… 수즈달로 가자…!”

탕아는 정처 없이 아비의 품을 향해 달려갔다.

공포가 그를 잠식했다.

부르가스 축선 사령관 미하일 마튜슈킨이 자신의 입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 때 느꼈던 그 감정, 그 절망이 이제 철혈의 사내라 자부했던 차르에게까지 번져나가고 있었다.

천연두도, 학질도, 흑사병도 이제는 미지의 공포라 여길 수 없는 시대.

오히려 그 미지의 공포를 몰아낸 존재가 차르의 앞에 숨 막히게 다가왔으니.

그 그림자로부터 숨기 위해 탕아는 기차를 타고, 마차를 타고 계속 달렸다.

그리고 탕아는 수즈달 수도원의 탑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미치광이처럼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아들아, 아들아, 정말로 오랜만이구나. 네 목숨을 구걸하려 왔느냐?”

통풍과 기타 여러 가지 질병이 그를 좀먹고 있었다.

하지만 해방제는 자신이 아들의 최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을 때까지 살아있길 간절히 원했기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

머리가 다 풀어 헤쳐진 채 악귀처럼 비웃는 그를 향해 블라디미르 2세가 다가왔다.

엎어지고 발을 헛디뎌 마치 짐승처럼 네 발로 탑에 오른 아들은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이 거울 속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자는 울고 웃었다. 부둥켜안다가 뺨을 때렸다. 아비가 아들을 주먹으로 때렸다. 발로 찼다.

그러나 아비는 다시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 입가의 피를 닦아주었다. 꼭 끌어안아 주었다.

요란스러운 해후, 아마 부자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희석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용서하지는 않았다.

“가자, 이놈아. 어서 가자꾸나.”

드미트리 그놈이 다시 이곳으로 와 제대로 된 정치를 하기 위해선, 장애물들은 전부 사라져 주어야 한다.

그놈이라면 잘할 수 있으리라, 늙은 해방제가 확신이 아닌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뇌까렸다.

해방제는 아들을 꼭 끌어안은 뒤 종탑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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